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4)화 (44/136)

#44

이번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유원이 다시 제 손에 들어오는 순간…. 태범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떠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를 악문 태범은 피곤한 눈으로 태블릿을 쥐었다. 다시 처음부터 CCTV 영상을 재생해 유원의 흔적을 쫓아 눈을 굴렸다. 가장 최근에 찍힌 영상으로 넘어간 순간, 태범의 눈에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VIP 병동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도 꿈틀거리는 이불 더미를 수레에 태운 채 말이다.

“……하, 이 시발 새끼가.”

태범의 눈이 불같이 번쩍였다. 급히 겉옷을 챙겨 입은 그는 서재를 빠져나와 거실에 대기하고 있는 준석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차 대기시켜.”

유원을 향해 가는 태범의 얼굴에는 묘한 환희와 함께 검은 분노가 양립하고 있었다.

***

탕! 하고 핸드폰이 쓰레기통에 부딪히는 순간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

“아…! 나 핸드폰 필요한데!”

너무 흥분해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고개를 숙여 쓰레기통을 살펴보자 핸드폰 주위에 더러운 건 없었다. 하지만 막상 맨손으로 핸드폰을 꺼내자니 조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뭐 쓸 만한 거 없나?’ 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바닥을 뒹굴고 있는 나뭇잎이 몇 개 보였다.

“아무도 안 보겠지…?”

개구리가 우산으로 쓸 법한 큼지막한 나뭇잎을 집었다.

“앗싸! 왕건이!”

마치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스며들었다. 나뭇잎을 잡고 쓰레기통 입구에 옷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손을 길게 뻗었다. 간신히 핸드폰이 잡혔다.

“읏… 차.”

역시 차유원. 팔다리가 참 길단 말이야. 핸드폰을 주우면서도 새삼 비율 쩌는 차유원의 몸매가 자랑스러웠다. 어찌 됐든 간에 핸드폰을 다시 주워들어 이리저리 더러운 이물질이 묻지 않았나하고 살폈다. 딱히 더러운 건 없었지만 그래도 모를 찝찝함에 핸드폰 모서리만 살짝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권태범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권태범이 신분증을 가져가 버려서 수중에 있는 거라곤 아마도 위치추적이 가능할 이 핸드폰이랑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피 같은 현금 50만 원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왕 도망가는 거 제대로 도망가주겠어. 혼자서 음흉하게 웃고 있는데 저기 멀리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는 하얀색 비닐봉지가 보였다.

헐, 나 운이 왜 이렇게 좋아?

나이스를 외치며 쪼르르 달려가 비닐봉지를 주워들었다. 비닐봉지 손잡이를 손목에 낀 채 핸드폰 전원을 켜자 수십 통의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그 바람에 조금 놀랐지만, 서둘러 방해 금지 모드를 설정하며 곧장 오기 시작한 전화를 무시했다.

“밤새도록 전화를 하든가 문자를 하든가 알아서 하세요. 나는 이제 안 볼 거니까~”

흥하고 콧바람을 뿜어내며 핸드폰을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지금 막 핸드폰 전원을 켰으니 지금쯤 내 위치가 탄로 났을 것이다. 권태범이 들이닥치기 전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공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철과 연결된 기다란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지하철 역사로 진입하니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와 함께 때마침 인천공항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국악 소리에 맞춰 역 안으로 진입하는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순간,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새끼손가락에 끼워둔 비닐봉지를 의자 밑으로 쑥 밀어 넣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나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쉿. 이거 비밀이야.”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아이는 나를 따라 쉿 하고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무 귀엽다…. 우리 백호도 태어나면 저렇게 귀엽겠지? 푸흐, 하고 웃음을 흘리다가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열차에서 내렸다.

[스크린 도어가 닫힙니다.]

잘 가. 최대한 잡히지 말고 멀리멀리 가줘.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열차를 향해 손 흔든 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

지금쯤 열심히 인천공항을 향해 가고 있을 핸드폰을 떠올리며 안내 화면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문뜩 차유원의 일기장에서 자주 봤던 곳이 떠올랐다.

“강릉 좋지….”

긴 도망을 위해서라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잠깐 머리를 식히러 가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이번 역은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강릉의 푸른 바다를 떠올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를 뚫고 KTX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빠른 강릉행 열차를 예매하고 근처 공중전화로 가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우리 강아지냐?

“네, 유원이에요. 할머니 잘 지내세요?”

-할미는 잘 지내지. 우리 강아지, 공부는 잘하고 있고?

아, 맞아. 나 공부한다고 하고 서울에 남은 거였지? 할머니의 말에 양심이 콕콕 찔렸다. 게다가 임신…까지 했는데. 이걸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하나….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할머니가 나를 재차 불렀다.

-유원아?

“아, 네! 공부라면 열심히 하고 있죠…. 하하.”

최근 들어 아예 손을 놓아버린 문제집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인생 공부는 화, 확실하게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했다간 할머니가 당장 서울로 올라와 내 등짝을 때릴지도 몰랐다.

“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요, 그래서 공중전화로 전화 드렸어요.”

-아이고, 전에 쓰던 것도 잃어버린 지 얼마 안 됐으면서 칠칠맞게.

“앞으로 조심할게요. 근데요, 할머니… 저 태범 씨랑 할머니 집에 내려가기로 했던 거 말이에요. 이번 주에는 못 갈 거 같아요.”

-권 서, 아니 그 자식이 바쁘대냐?

“네? 그건 아니고 음…. 아, 이번 주에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요. 그 모의고사라고….”

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꼭 한국대에 들어갈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아니, 좀 여러 번 봐주세요….

-그랴,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데 어쩔 수 없지.

할머니께서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목소리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일부러 과장된 톤으로 할머니께 말했다.

“할머니! 제가 이번 달 안으로 꼭 내려갈게요! 막 여러 밤 자고 갈게요! 그런데 음… 혹시 태범 씨한테서 연락 오면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세요?”

-너네 싸웠냐?

“아…뇨?”

우리 할머니 눈치도 참 빠르셔.

아니라는 내 말에도 이미 결론을 내리셨는지 할머니는 혀를 차며 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싸우냐고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우찌 됐건, 유원아.

“네, 할머니.”

-항상 밥 잘 챙겨 먹고, 돈 필요하면 할미가 준 통장에서 돈 빼다 쓰고. 알았제?

“네, 너무 걱정 마세요….”

할머니는 시골로 내려가시기 전에 내게 통장 하나를 주셨다. 그 돈이면 앞으로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을 만큼 생각보다 꽤 많았다. 하지만 그 돈은 차유원의 할머니가 차유원을 위해 한 땀 한 땀 모은 것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힘들게 모았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 돈은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그랴, 할미 쑥 뜯으러 가야 해서, 이만 끊는다.

“네, 또 전화 드릴게요.”

전화기를 내려놓고 강릉행 열차가 들어올 플랫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를 유혹했다.

꼬르륵-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동안 잠잠했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그뿐이 아니다. 침까지 고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냄새는….”

와플이었다. 마침 한쪽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자 아직 2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빠, 빨리 먹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오랜만에 느껴지는 허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

난생처음 초조함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태범은 준석을 다그쳤다.

“속도 올려.”

태범의 말에 안 그래도 묘기에 가까운 속도로 운전을 하던 준석의 얼굴엔 식은땀이 맺혔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이준의 자취방 앞에 멈춰선 준석이 마른침을 삼키며 태범에게 말했다.

“혀, 형님… 그래도 그…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준석의 당부에도 태범은 아무런 대답 없이 문을 벌컥 열고 차에서 내렸다. 준석은 그를 따라가며 부디 아무 일도 없길 기도했다.

“열어.”

이준의 집 앞에 도착한 태범은 담배를 입에 물고 뒤에 선 남자들에게 말했다.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연장을 머리 위로 들고는 망설임 없이 키패드를 내리쳤다. 쾅-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작은 건물 전체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남자는 부서지는 잔재를 치우며 계속해서 내리쳤다. 갑자기 혼란한 상황에 집 안쪽에서 우당탕,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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