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3)화 (43/136)

#43

“거기가 어딥니까.”

태범은 알파로 발현된 이후 자신의 페로몬이 이렇게 거침없이 날뛰는 걸 처음 느꼈다. 유원이 없어진 걸 알고 난 뒤부터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태범의 날 선 페로몬에 설아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기에 꾹 참았다.

“그게…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고 했었어요. 상담 일지에 적어놨던 것도 같은데. 그러려면 본가에 있는 제 짐이 필요해서요.”

“사람을 붙여드리죠.”

“감사합니다.”

목적을 달성한 설아는 준석과 함께 서재를 빠져나갔다. 태범은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유원을 떠올렸다.

“차유원.”

스산한 눈으로 조용히 유원의 이름을 부르는 태범의 주위로 공기가 얼어붙은 듯 싸늘했다.

***

“하아… 이제 다 갔나…?”

비품실 한쪽에 모아둔 이불 더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비품실로 다가와 급한 대로 이곳에 숨어있었다. 정말 누군가 비품실 안으로 들어왔을 땐 이러다 들키는 게 아닐까 싶어 심장이 터질 뻔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다가 깜빡 잠이…들었다. 딱히 졸리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사방이 포근한 이불에 싸여 있다 보니, 뭐랄까… 요람 같기도 하고 그래서….

“크흠.”

머쓱해하며 천천히 이불 더미에서 빠져나와 문밖의 상황을 살폈다.

“정말 다 갔나 보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자 한바탕 무언가 휩쓸고 간 것 같은 복도는 싸늘하리만큼 조용했다. 피부에 닿던 따가운 느낌도 이제 사라지고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었다.

“아가야. 이제 아빠랑 도망가자.”

너무 울어서 짓무른 눈가를 수습하고 비품실을 나갔다. 고양이라도 된 듯 살금살금 비상구로 다가갔을 때였다.

“차유원?”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버, 벌써 걸린 거야? 이렇게 하, 하루도 안 돼서?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권태범에게 배운 급소 찌르기를 떠올렸다.

목, 명치, 정수리. 아, 남자 거, 거기. 또 어디가 있었지?

“여긴 어쩐 일이야?”

응…? 나 잡으러 온 거 아니었나…?

조금은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이준이 있었다.

“어… 이준 형?”

오랜만에 만난 이준은 그동안 힘든 일이 있었는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유원이 맞네. 여긴 어쩐 일이야?”

“어… 형은 어쩐 일로….”

이준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여기 우리 아버지 병원이거든.”

“…네?”

금수저도 아니고 이거 완전 다이아몬드 수저잖아? 내가 입을 쩍 벌리자 이준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는 무슨 일이야? 혹시 아는 사람이 입원했어?”

그 순간 이준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찾았다. 도망갈 방법!

급한 마음에 이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애달픈 눈으로 입을 열었다.

“형, 저 좀 도와주세요.”

광공 제1 법칙을 떠올려보면 권태범은 분명 CCTV부터 확인할 거였다. 그다음엔 문이란 문에 사람을 세워두고 날 찾으려 하겠지.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도망쳤을 때 그렇게 했으니 아마 지금쯤 출입문엔 그의 부하들이 있을 거였다.

다행히 CCTV 사각지대라 권태범이 날 여태 못 찾은 거 같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병원 밖으로 빠져나가야 하나 막막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이준이 딱 나타날 줄이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의 이준을 잡아끌었다.

“휴우…. 이제 됐어요.”

이준을 데리고 다시 비품실로 들어와 문을 꽉 걸어 잠갔다.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건 일단 여기 빠져나가고 나면 설명해드릴게요.”

이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상관없는 이준을 끌어들여서 너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권태범이 이준을 죽이진 않을 거 아니야. 나와 아기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울상을 짓자 이준이 당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알겠어. 도와주면 되잖아.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혀엉… 고마워요, 진짜.”

감동이다, 진짜. 나중에 하겐다즈 10통이고 100통이고 사줘야지.

혼자 다짐하며 아까 봐두었던 수레를 끌어 그 위에 이불을 쌓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며 이준에게 속삭였다.

“형, 제 위로 이불 더 쌓아주세요, 저 안 보이게!”

“그, 그래….”

***

드르륵-

조용한 복도에 수레 끄는 소리가 울리자 중간중간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시큐리티가 다가왔다. 하지만 이준의 얼굴을 보곤 아무런 의심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병원장 아들 얼굴 정도는 다 아는 건가? 어쨌든 진정한 프리패스에 혼자서 키득거렸다. 무사히 병원을 빠져나와 그의 차가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참다못한 이준이 내게 물었다.

“근데 도대체 뭐 때문인데 이래?”

“사실 저 도망가는 중이거든요.”

“뭐? 도망이라고?”

“형, 쉿, 쉿.”

갑자기 높아진 데시벨에 나는 황급히 이준에게 목소리를 낮추라 말했다.

“갑자기 무슨 도망? 너도 가출했어?”

고개를 숙여 내게 말하는 이준에 나는 이불 더미에서 고개를 살짝 빼내며 말을 이어갔다.

“가출은 아닌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형 근데 저 하나만 더 부탁해도 돼요?”

“또 뭐…?”

내가 이번엔 무슨 부탁을 할지 불안하다는 듯 잘게 떨리는 이준의 목소리에 나는 씨익 웃었다.

“편지 한 통만 보내주세요.”

“편지…?”

“네네, 꼭 전해줘야 할 말이 있어서요. 일단은 병원 밖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그럼 전 이제 조용히 할게요. 형도 쉿!”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얼른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제는 이 상황에 적응을 한 건지 이준은 차분하게 내 위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이준의 차에 올라 무사히 권태범과 그의 부하들을 따돌리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경로를 떠올리며 이준에게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달라 부탁했다.

“형, 완전 고마워요! 저 형 아니었으면 진짜… 아무튼!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을게요.”

“너 진짜 위험하고 그런 건 아니지?”

“네네. 오히려 이제 위험한 거에서 벗어났어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잘된 일이다. 우리 아가나 잘 키우자!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 이준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아까 말한 편지 말인데요, 편지봉투 하나만 구해서 여기 적힌 주소로 보내주시면 돼요.”

덜컹거리는 차에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으려고 노력했지만 완성된 편지를 보니 다섯 살 꼬맹이만도 못했다. 편지라고 하기엔 그냥 이면지에 급하게 날려 쓴 메모처럼 보였다. 그래도 내용만 확실하게 전달하면 되는 거니까.

내가 건넨 종이를 힐끔댄 이준의 눈과 입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졌다. 이준의 반응만 보아도 이 편지를 읽을 권태범이 어떨지 예상이 가서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권태범. 윤설아랑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개새끼야!

활짝 웃으며 차에서 내리는데 이준이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되냐고 재차 물었다. 당연히 되지. 그러라고 보내는 건데.

“네. 진짜 그대로 보내주시면 돼요. 아무튼 나중에 봐요. 제가 밥 사드릴게요!”

이준에게 빌린 모자를 푹 눌러쓰며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렸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며 멀리 보이는 공항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럴 줄 알고 미리 권태범의 카드로 현금을 조금씩 모아놨던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사실은 수술비용으로 모아둔 거였지만.

‘아가야, 미안. 그래도 이 돈은 너를 지키기 위해 쓸게.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해서 미안해.’

미안한 마음에 배를 문지르며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막상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여유가 생긴 기분이었다. 도망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체력, 끈기, 계획이 아니라 바로 돈이었으니 말이다.

‘권태범 씨. 이 돈은 우리 아가 양육비라고 생각할게요.’

권태범의 얼굴을 떠올리며 푹 눌러쓴 모자 위로 후드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핸드폰 전원을 길게 누른 뒤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탕-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윤설아는.”

“찾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거 같다고 합니다. 워낙 자료가 많고 오래돼서 찾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잔뜩 긴장한 준석을 보는 태범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분명 아까 윤설아가 말하길 바다에 간 것 같다고 했다. 바다라….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차유원을 찾을지. 게다가 차유원이 바다로 갔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태범은 웃음만 나오는 상황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알았으니까 이만 나가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에 눈치만 겨우 보던 준석이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태범은 버릇처럼 몸에 남은 담배 냄새를 털어냈다.

차유원. 결국 차유원이 제게서 도망을 가고 말았다. 언제나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짓는 웃음 뒤로 저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가 오던 날도 배달 음식 핑계를 댔지만 자신에게서 도망가려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언제 또다시 도망가려 할지 몰라 더 조심하고 조심했던 건데, 결국….

“난 이미 한 번 놓아줬었어. 제 발로 다시 돌아온 건 너야, 차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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