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2)화 (42/136)

#42

그렇게 되면 둘 중 하나다. 엄청 짱 잘 도망가거나, 아니면 진짜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던 대로 급소를 찌르고 선제공격을 하거나. 근데 둘 중 한 가지는 확률이 너무 낮으니까…. 그나마 현재의 내가 잘할 수 있는 도망 계획을 미리 짜놔야겠다.

‘아가야, 미안해. 그래도 혹시… 진짜 혹시 모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배 속의 아이가 그냥 자고 있길 바라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침을 챙겨 먹고 병원에 도착하니 낯선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를 듯 다가왔다. 속이 또 안 좋아져서 아랫배를 조심히 문질렀다.

걱정하지 마, 너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마음속으로 아기한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금색으로 둘러싼 엘리베이터를 타자 아저씨는 익숙한 듯 VIP 병동이라고 적힌 가장 맨 위층을 눌렀다.

“아, 아저씨 근데 첫 방문인데 빈손으로 가도 될까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곤란한 얼굴을 하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래도 어른을 뵈러 가는 건데 빈손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뭐 좀 사 오는 게 좋겠어요.”

“유원 님, 그럼 제가 가서 사 오겠습니다. 유원 님은 먼저 올라가 계십시오. 형님께는 미리 말해놨으니까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어… 그럼, 그럴까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저씨에겐 죄송했지만 사실 마음이 급하긴 급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를 만큼. 내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아저씨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따뜻한 미소로 답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5층… 8.층… 빠른 속도로 상승한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VIP 병동이 있는 10층에 멈춰 섰다. 내려서 본 VIP 병동은 일반 병동과는 구조가 확연히 달랐다.

“흠… 부자들은 이런 데 입원하는구나.”

병동 앞에 서 있는 가드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멀리서 권태범이 보였다.

“태범… 어… 윤설아가 저기에 왜….”

곱게 원피스를 차려입고 권태범 옆에 서 있는 윤설아의 얼굴에 눈에 들어왔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이 잘 어울렸다. 가슴이 찌릿하고 아파왔다.

“태범 씨,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윤설아 씨 덕분입니다.”

“그래도 러트 잘 넘겨서 다행이에요.”

‘뭐…? 지금 뭐라고….’

멀리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에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려오며 배가 욱신거렸다. 러트…. 그건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처럼 알파들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발정기였다. 그리고 그건 각인한 오메가나 파트너와 함께 보낸다고 했는데 왜 권태범의 러트에 윤설아가….

“아….”

뺨이 척척해서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온통 적시고 있었다. 누군가 심장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 울지마, 차유원….’

서둘러 눈물을 닦고 점점 거세게 뛰는 심장 위를 꽉 쥐었다.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배를 문지르는데 위잉, 하고 기계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 맞아. 아저씨.’

…안 돼.

이대로 권태범에게 가고 싶지 않았다. 윤설아와 나란히 선 권태범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앞뒤가 꽉 막혀 오갈 데 없는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을 잘근거렸다. 점점 숫자가 바뀌며 빠르게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무언가 내 눈에 들어오며 나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1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띵동 하고 소리가 나며 그와 동시에 나는 문이 살짝 열린 비품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달칵.

문을 꽉 닫은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콩닥콩닥 너무 빨리 뛰는 심장 소리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다행이다.”

발소리가 이곳을 지나쳐 점점 멀어져 갔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그제야 안도하고 비품실을 둘러보았다. 침구류나 병원복을 보관하는 곳인 듯 빨래 더미와 함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충동적으로 저질러 버린 일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는지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며 당황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준석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윽.”

갑자기 피부가 따끔하고 무언가 나를 옥죄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그 순간에도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를 보호하듯 감싸며 몸을 둥글게 말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후… 하… 아가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부디 아기가 많이 놀라지 않았길 기도하며 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닦았다.

***

“죄송합니다, 형님.”

준석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했다. 태범은 그런 준석을 서슬 퍼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준석은 당연히 태범과 유원이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마주치지 않은 유원과 그리고 제게서 유원을 찾는 태범의 말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얼굴의 준석을 보며 태범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둘러 유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음이 나올 뿐이었다.

“…병원 출입구에 애들부터 배치하고 CCTV 확보해 와.”

“네, 알겠습니다.”

유원을 혼자 남겨 둔 준석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가장 급한 건 유원을 찾는 일이었다. 준석은 발걸음을 돌렸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설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원이가 사라졌어요?”

“…일단 윤설아 씨는 먼저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태범은 답답한 듯 목을 꽉 조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유원이 직접 채워준 단추는 건들지 못하고 그 주위만 맴돌며 심경을 표현했다.

설아를 보내고 한쪽 벽에 기댄 태범은 이를 악물었다. 유원이 다시 올지 모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이 상황도, 누군가 유원을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난생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태범은 꽉 말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하아….”

익숙하게 담배를 찾던 태범은 지금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짜증 어린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

서늘한 집 안의 공기에 멈칫 걸음을 멈추던 준석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문을 두드렸다.

“형님.”

“들어와.”

점심때가 훨씬 지나고 나서도 유원을 찾지 못한 상황에 태범의 얼굴에 날이 서 있었다. 태범은 최대한 이성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원에 관한 일에는 자꾸만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그게… 아직 VIP 병동을 빠져나가지 않은 걸로… 파악됩니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나올 리가 없… 죄송합니다.”

준석의 말에 태범은 CCTV 영상이 담긴 태블릿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준석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태범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애초에 내가 차유원한테 붙인 사람이 몇 명인데 누구 하나 이 상황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군.”

담배 끝에 불을 붙인 태범은 서늘한 눈으로 준석을 바라봤다. 준석은 금방이라도 빵하고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상황에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하아…. 죄송하다는 말 같은 건 필요 없어.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몇 시간 사이에 급격하게 피곤해진 눈을 꾹 누르고 담배를 껐다.

“차유원이 핸드폰 언제 켤지 모르니 실시간으로 위치 확인하고. 납치됐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 확실한 거야?”

“네, 쌍곤파는 지금 그럴 여력도 없고 CCTV 확인 결과 수상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상철의 경우도 가정해봤는데, 그렇다기엔 VIP 병동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 중에서 그나마 나은 소리에 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동태 잘 살피고.”

“네, 형님. 그리고 지금 윤설아 씨가 찾아왔는데요.”

“허락 없이 본채로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미간을 찌푸린 태범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유원이 있는 본채로는 절대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다들 일 처리를 똑바로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범의 어두워진 표정에 준석은 침을 삼키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나중에 말하라고 해. 지금 그럴 기분 아니니까.”

“형수님에 대한 얘기라고 하십니다.”

“하아….”

유원에 관한 얘기라는 소리에 태범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태범의 허락이 떨어지자 준석이 설아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왔다.

“아직 유원이를 찾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태범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새 어떤 새끼가 입을 놀린 건지, 아무 상관 없는 윤설아가 그 얘기를 알았다는 사실에 태범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설아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태범의 표정에 눈치를 살피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혹시…. 유원이가 거길 간 게 아닌가 싶어서요. 예전에도 답답할 때마다 거기로 간다고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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