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1)화 (41/136)

#41

“태범 씨!”

계단을 두 칸씩 올라 권태범 앞에 멈춰 섰다.

아이고 힘들어.

“하아, 태범 씨, 학, 있잖아요, 하….”

임신 초기에 뛰면 안 된다는 말에 차마 뛰지는 못하고 계단을 두 칸씩 올랐는데, 그것만으로도 숨이 모자랐다. 권태범의 팔을 잡고 숨을 헐떡이자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이렇게 급해.”

내 상태를 꼼꼼히 살핀 권태범은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얼굴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땀에 젖은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하아, 하… 태범 씨한테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래.”

“어, 태범 씨?”

갑자기 발이 공중에 떴다. 권태범이 나를 안아 올린 것이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저… 이제 괜찮은데요?”

성큼성큼 걸어 방으로 들어간 권태범은 나를 침대에 내려주었다.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서 시선을 맞추었다

“차유원. 진짜 어디 아픈 데 없어?”

권태범이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 아저씨 왜 이렇게 진지해?

“…네?”

갑작스러운 권태범의 반응에 내가 더 당황해버렸다. 아니, 권태범을 만나면 무조건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이 새끼, 진짜 귀신 아니야?

매번 어떻게 다 아는 건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병원엔 왜 갔어.”

“그걸… 태범 씨가 어떻게 알아요?”

설마 또 감시했어? 내가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는데도 그는 겁내 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아니, 사람 붙이고 감시하는 게 광공의 기본 원칙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나랑 그렇게 싸워놓고서.

눈에 힘을 더 세게 주고 노려보았다. 권태범은 빵빵해진 내 입술을 톡톡 건드리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 밥도 잘 못 먹는다며. 옷 갈아입어. 병원부터 가게.”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범은 옷장으로 다가가 두툼한 재킷을 꺼내 들었다. 또 사람을 붙여놨다는 데에 화가 난 것도 잠시,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병원에? 절대 안 돼!

“그, 그냥 소화가 좀 안 돼서 간 건데 아무 이상 없어요! 완전 건강하대요, 저!”

권태범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가 나를 쓰윽 내려다보더니 재킷을 입혀주었다.

“안 돼. 살이 너무 빠졌어. 원래 안 그래도 병원에 한 번 데려가야지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남은 한쪽 팔에 재킷을 끼워 넣는 권태범의 손이 빨라졌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권태범은 막무가내였다. 당장 끌고 갈 기세라, 반사적으로 팔을 움츠렸다. 이대로 병원에 가면 임신한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

안 돼. 일단 윤설아가 여기 왜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돼…!

나는 대뜸 권태범의 멱살을 잡았다.

“제 얘기부터 들어주세요!”

어… 이게 아닌데?

그냥 좀 박력 있게 말하고 싶어서 멱살을 잡은 건데 왜 내가 매달린 꼴이지?

나는 권태범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풀며 그새 주름 잡힌 셔츠를 슬쩍 문질러 폈다.

권태범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다, 단추는 잘 잠가야죠… 아직, 날씨가 엄청 추…워요. 하하.”

단추를 겨우 하나 풀어놓은 권태범이었지만 셔츠를 목 끝까지 채워주며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당겨 웃었다.

“아, 아무튼! 제 얘기부터 들어주시면 안 돼요? 저 태범 씨한테 물어볼 거 있단 말이에요.”

빠르게 말을 돌리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권태범은 듣고 있다고 말하면서 재킷에서 립밤을 꺼내더니 부르튼 내 입술에 발라주었다.

그거 며, 몇 번 안 썼는데…. 제대로 안 썼다고 혼날까 봐 눈을 또르륵 굴렸다. 그가 혀를 차고 입가에 번진 립밤을 닦아주었다.

“네? 태, 범 씨 제 말 듣고 있어요?”

내가 눈을 깜빡이며 권태범의 손을 흔들자 그가 장난기 머금은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 멱살까지 쥐면서까지 물어보고 싶은 게 뭐지?”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거 참, 새삼 잘생겼네. 이목구비의 자기주장이 강렬한 권태범의 얼굴을 넋을 놓고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아까 어떤 여자분을 봤는데요…. 그 여자분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왜 여기에… 있어요…?”

내가 우물쭈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권태범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금세 풀렸다.

“아, 윤설아 씨. 벌써 만난 건가?”

…역시 윤설아가 맞았구나. 애써 태연한 척했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을 남몰래 바지에 문질렀다.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지만 긴장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나중에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뭔데요. 지금 말해주면 안 돼-”

내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을 때였다.

“형님!”

문밖에서 다급한 준석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태범이 내 얼굴을 놓아주며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께서 쓰러지셨답니다!”

나를 발견한 아저씨가 걸음을 멈추더니 당황한 얼굴로 권태범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급히 병원으로 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뇌동맥류 혈관이 많이 부풀어있다고 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응급상황입니다!”

“유원아. 미안한데 이따 다시 얘기하자. 일단 집에서 나오지 말고 있어.”

준석 아저씨의 말에 태범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나갔다. 멀리서 권 회장님의 상태에 대한 대화가 간간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자 남은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권태범의 페로몬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하려던 말이 도대체 뭔데….”

***

회장님. 그러니까 권태범의 아버지인 권 회장님은 결국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다행히 개두술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워낙 조심스러운 수술이라 정확히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래서 오늘 형님께서는 조금 늦으실 거 같습니다.”

“얼마나요…?”

아저씨는 곤란한 얼굴로 내게 쿠키를 건네주었다.

“글쎄요…. 아마 새벽이나 돼서야 들어오실 거 같은데요. 회장님께서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술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고 하네요.”

“마, 많이 안 좋으신 건 아니죠…?”

“원래 뇌혈관쪽 지병이 있으셨지만, 다른 쪽으론 건강하신 분이라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수술이 길어진다는 말에 엄청 심각한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른 쪽으론 건강하시다고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무튼 형님은 회장님께서 일어나시는 거 보고 오신다니까 유원 님은 일찍 주무셔야죠.”

회장님이 아프셔서 그런 건 알지만 오늘도 그를 보지 못한다는 소리에 힘이 빠졌다. 회장님이 얼른 나아야 그를 만날 수 있을 텐데…. 권태범이 내게 주고 간 제디 쿠키만 바라보았다. 우울해서 처진 눈썹을 문질렀다.

아. 그냥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아저씨! 혹시 아까 제가 본 그 여자분이요 혹시 누군지 아세요?”

“글쎄요…. 하하….”

아저씨는 윤설아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아꼈다. 어차피 말해줄 거면 빨리 말해주지. 나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쿠키를 하나 입에 물었다. 쿠키에 아저씨가 데워준 따뜻한 우유를 마시니 잠이 솔솔 밀려왔다.

“유원 님. 양치는 하고 주무셔야 합니다.”

“앗, 네….”

반쯤 감긴 눈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자 아저씨가 칫솔을 내밀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이를 닦았다.

치약이 딸기 맛이네…?

진짜 날 미취학 어린애로 보는 건지 치약까지 어린이용이다.

물로 입안을 헹구고 난 뒤 입안에 남은 딸기향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입맛을 다셨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딸기 맛 치약이 원래 쓰던 치약 옆에 놓여있었다.

뭐… 안 쓰고 버리긴 아까우니까…. 절대 원래 쓰던 치약이 매워서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아무튼 앞으로 이 치약은 내 전용으로 해야지.

일부러 아침 일찍 알람까지 맞추고 일어났지만 권태범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이 시간까지 수술을 하는 건 아니겠지.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거실에 있는 준석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권 회장님 수술 아직 안 끝나셨어요?”

“아니요, 어제 새벽에 잘 끝났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다만 회장님께서 아직 깨지 않으셔서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거 같아요.”

후우… 다행이다. 아직도 수술이 안 끝난 줄 알고 놀란 심장이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권태범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장님께서 아프신 거니 어쩔 수야 없지만…. 그래도 빨리 미래 계획을 짜려면 한시가 급했다.

“아! 아저씨. 저, 저도 병원 가면 안 돼요?”

“유원 님께서요?”

“그게, 배가…. 아니, 머리가 조금 아파서요.”

배가 아프다고 하려다 말이 씨가 될까봐 서둘러 머리를 붙잡으며 아픈 척 꾀병을 부렸다. 심각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든 아저씨가 내 안색을 살폈다.

“많이 아프세요?”

“마, 많이는 아니고 조금…?”

코딱지만큼 손가락을 보여주다가 이러면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까 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근데 병원엔 태범 씨도 있는 거 맞죠? 저 태범 씨부터 보, 보고 싶은데.”

“네, 그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형님께 미리 연락해놓겠습니다.”

됐다. 그럼 권태범에게 윤설아에 대해 대답부터 듣고 그때 생각하자. 어차피 아기의 아버지인 권태범한테 임신 사실에 대해서 말해야 하긴 했다.

근데… 권태범이 진짜 나 죽이려고 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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