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0)화 (40/136)

#40

“안 돼…. 흑.”

이대로 아이를 보낼 수는 없었다. 모든 일에 아이의 잘못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호를 따라가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 순간 형체 모르는 무언가가 내 발목을 감싸 쥐고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했다.

“아, 안 돼. 하지, 흐윽, 하지 마!”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만큼 눈물이 고였다. 내 발목을 단단히 쥔 형체 없는 것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손에서 불이 붙은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령 앞으로 손을 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가지 마! 제발, 흑, 내가, 내가 잘못했어, 제발…!”

내 흐느낌을 들은 건지 아기 백호가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다급한 마음에 아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나, 나랑 살자…. 흐… 내가 잘못했어, 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나를 잡은 형체 모를 무언가를 끊어냈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이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가!”

그리고 마침내 그것들에서 풀려난 나는 목청껏 아이를 부르며 팔을 크게 벌렸다. 미안함과 안도감에 차오른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한번 아기를 간절하게 불렀다. 그러자 나를 올려다보던 아기 백호는 언제 울었냐는 듯 힘찬 발걸음으로 내 품에 뛰어들었다.

“끄흥-!”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아기 백호는 내 뺨을 핥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눈물을 닦고 위로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따뜻하고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내가 평생 너를 책임질게.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아이는 내 말에 서럽게 울었다. 그 울음이 멈출 때까지, 평생 너를 지켜주겠노라 속삭였다.

긴 꿈을 마치고 잠에서 깬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정말 아이를 만난 것처럼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꾸던 꿈은 태몽이었다. 저를 알아주지 않는 나 때문에 몇 번이고 꿈에 찾아왔을 아이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천천히 손을 내려 배를 작게 문질렀다. 여기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빠가 너를 꼭 지켜줄게.”

결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 안에 숨겨두었던 임신 중절 수술 안내서를 꺼내 조각조각 찢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조각난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할머니와 진짜 차유원에게는 너무 미안했지만 내게 찾아온 아이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가,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죄인이 될게.”

나는 배 속의 아이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물든 얼굴을 감쌌다.

***

“임산부한테… 좋은 음식, 임신 초기 주의 사항….”

권태범이 두고 간 호랑이 인형을 쓰다듬으며 핸드폰 검색창에 임신 초기에 대한 정보들을 검색했다.

“엽산은 꼭 챙겨 먹으란 거지? 철분제는 16주부터 먹고. 또… 뛰지 말고, 격한 운동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했네….

비 오는 날 미친놈처럼 뛰어다닌 과거가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아가야, 앞으로는 정말 조심할게. 약속이야.”

배를 살짝 토닥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나저나 태범 씨는 언제 오지?”

오늘 아침 비행기로 온다고 들었는데. 그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것도 일이었다.

그를 만나면 아이에 대해 상의해야 할 거 같은데.

혹시 홍콩에서 윤설아를 만나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아이와 함께라는 생각을 하자 무서운 것도 없어졌다.

“일단 분위기만 어떤지 슬쩍 떠본 다음 말해보자. 어차피 윤설아를 만났다는 소리는 없었어.”

매일 같이 통화할 때 본 그의 모습에서 달라진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편하긴 했지만 무작정 임신했다고 말할 순 없으니 상황을 잘 보면서 이야기해야겠다.

“가벼운 산책은 좋다고 했으니까!”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긴 했지만 혹시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가장 두꺼운 남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그 위에 두툼한 뽀글이 재킷을 겹쳐 입었다. 넘어지지 않게 신발 끈도 고쳐 매고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찾아온 봄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기분 좋은 상쾌함을 느끼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오늘따라 어딘가 소란스러웠다. …권태범도 없으니까 한 번 가볼까?

그동안 남녀칠세부동석… 아니, 남남칠세부동석도 아니고 나와 부하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꼴을 못 보는 권태범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을 꼽자면 권태범… 준석 아저씨, 주방장 아저씨, 나를 감시했던 남자 두 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집에 들어온 첫날 끝내주는 식스팩을 가졌던 아저씨들은 그 후 보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치밀하기 짝이 없는 권태범의 보호를 빙자한 차단에 속으로 박수를 보내고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내게 알려준 산책로 말고도 새로운 길이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까운 곳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잔뜩 들뜬 마음으로 열심히 걷자 하나둘씩 모르는 얼굴의 남자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형수님!”

“아… 안녕하세요.”

역시나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 남자들은 권태범의 부하들이 맞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들어보는 형수님이라는 호칭이 왜 이렇게 부끄럽지. 게다가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남자들의 냄새가 생각보다… 너무 별로였다. 뭔가 속에서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몸을 돌려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하아…. 이제야 좀 괜찮네. 빈속이어서 그런가?”

권태범이 아침 일찍 올 거라는 소리에 같이 아침을 먹으려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곧 있으면 도착할 권태범을 떠올리자 본채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침내 본채와 연결된 마당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생각보다 되게 재밌는 곳이네요.”

“윤설아 씨는 앞으로 여-, 어 유원 님.”

“아…. 안녕하세요.”

내가 여기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나와 마주친 준석 아저씨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긴 어떻게. 아, 형님 지금 막 돌아오셨어요. 바로 본채로 가셨는데 한 번 가보시겠어요?”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저씨 옆에 있는 청순한 미인의 여자를 힐끔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고 나는 눈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숨도 쉬지 않고 마당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저 여자는 여자주인공인 윤설아가 맞을 거였다.

이 세계는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난간을 잡았다. 울컥, 하고 화가 치밀어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난간을 꽉 잡았다.

“지금 윤설아를 집에 데려온 거야?”

무슨 진도가 이렇게 빨라? 권태범과 윤설아는 홍콩에서 만난 게 분명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봄바람에 휘날린 벚꽃 잎이 내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발등에 떨어진 벚꽃 잎을 내려다보며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벚꽃 잎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 울고 있는 내 앞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딱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묘사하던 그 문장처럼 마당 한쪽에 있는 벚꽃 나무에서 떨어진 벚꽃 잎이 바람에 따라 마당 전체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럼 뭐. 나 이제 쫓겨나는 거야?

“씨이….”

내가 그동안 자기한테 얼마나 방긋방긋 웃어주고. 인사도 잘하고 주는 것도 열심히 받아먹고 그랬는데. 됐어, 나도 나 싫다는 사람은 싫어!

차유원은 권태범보다 9살이나 어린 창창한 나이였다. 그뿐이야? 이렇게 귀엽고 잘생긴 얼굴에다가 미래의 한국대생인데. 이런 나를 놓치면 자기만 손해지. 흥.

게다가 우리 아가의 태몽은 무려 호랑이였다. 그것도 그냥 호랑이도 아닌 새하얀 백호. 이런 나와 우리 아이를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권태범이었다.

“그래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씩씩하게 우리를 놓치면 후회할 사람은 권태범이라고 놀란 가슴을 달랬지만, 조금 전에 마주한 원작 여자주인공을 떠올리자 마음속 한구석에 걱정이 싹텄다.

“아니야. 그래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나가라고 하면 할머니랑 살고. 아가야,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빠는 급소 찌르기도 이미 마스터한 몸이야.”

권태범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에게 배운 선제공격을 시도해서 도망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착광공도 별거 아니었다. 어느새 다리에 힘이 단단하게 들어갔고 자신감도 가득 충전됐다. 차유원, 괜찮아. 세상에 남자가 권태범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너 정도면 결혼하겠다고 줄 설 사람이 한 트럭이야!

침착하게 속을 다스리자 어느 정도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 길로 집으로 들어간 나는 큰 목소리로 권태범을 불렀다.

“태범 씨!”

아니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전화라도 하든가! 아니, 공항에 내리자마자 연락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아아~ 윤설아랑 같이 있느라 바빴나 보지? 대체 뭐하느라 바빴을까아~?’

콧바람을 씩씩 내뿜다 2층에서 내려오던 권태범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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