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38)화 (38/136)

#38

하아…. 그날 그 일 때문에 지금 팔자가 꼬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감싸자 의사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유원 씨. 아직 미혼이라고 하셨죠?”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끄덕였다. 결혼은 무슨… 여주인공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감정이 북받쳐 울컥했다.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몸이 떨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사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잡았다.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고 있어요?”

임신 8주 차에 내가 기억하는 건 권태범밖에 없으니 아마 200%의 확률로 아이의 아버지는 권태범이 맞았다. 나는 머뭇머뭇,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근데… 지금 제가 아이를 낳을 상황이 안 돼서요….”

낳기는커녕, 권태범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옷자락 끝을 꽉 잡고 고개를 숙였다.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그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한순간의 선택으로 이렇게 되어버린 일에 눈물이 맺혔다. 의사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책상 서랍을 열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럼 차유원 씨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을 거 같네요.”

떨리는 손으로 선생님이 건넨 안내문을 받자 임신 중절 수술 안내 동의서라고 크게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나, 낙태…?

화들짝 놀라 안내문에서 손을 떼어내자 선생님은 다른 손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건넸다.

“나머지 하나는 미혼모, 미혼부 센터 지원서예요. 법적으로 중절 수술은 임신 15주 차까지 가능해요.”

미혼부…. 내가 혼자서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래도 중절은….

과거에 본 낙태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 내 맞은편에 앉은 선생님은 내 손에 안내서를 꽉 쥐여 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시간 동안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아이를 낳을 건지, 아니면 포기할 건지.”

멍한 얼굴로 진료실을 빠져나와 비상구 계단에 주저앉았다.

“미치겠다….”

함부로 남의 몸으로 권태범과의 하룻밤을 보낸 것도 모자라 덜컥 아이를 임신하고 말았다. 언제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에 이런 거대한 짓을 저질러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권태범의 눈에 띄지 않게 꼭꼭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아.”

막막한 현실에 얼굴을 감싸 안으며 권태범을 떠올렸다. 아직 홍콩에 있는 그와 홍콩에 살고 있는 여주인공, 윤설아. 이 세계가 얼마나 원작과 똑같이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권태범이… 윤설아에게 반했으면 나는 정말 끝이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 윤설아를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였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쥐여 준 안내서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혼자서 아이를 낳느냐. 아니면 아이를 지우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

그때 아랫배가 콕콕 쑤시며 또다시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기생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내서를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배를 문질렀다.

“미안해… 널 알자마자 이런 고민부터 해서….”

너도 생기고 싶어서 생긴 게 아닐 텐데 말이야. 나는 배 속의 아이를 떠올리며 복잡한 마음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시간에 맞춰 학원 건물 앞에 서 있는 차에 올랐다. 차에서 내려 가방까지 들어준 준석 아저씨가 따뜻한 유자차를 건넸다.

“유원 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와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대충 인사하고 시선을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학원에서 도저히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려 정신을 차리고 교재를 보니 여전히 처음 펼친 페이지에 머물러있는 걸 보고 그냥 학원에서 무단으로 나왔다.

정처 없이 길을 걸어 다니며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불현듯 당장 아이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가도 배가 콕콕 쑤실 때면 마치 아이가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신호를 주는 거 같아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수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나온 결론은 결국 제자리였다. 창밖 풍경이 점점 빠르게 흘러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넘실대는 착잡함에 눈을 감았다.

***

준석은 오늘따라 기운이 없는 유원이 잠드는 것을 확인한 뒤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태범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목소리를 낮추곤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

“네, 형님.”

-유원이는.

“지금 막 잠드셨습니다.”

-보고해.

준석은 전화 너머의 태범에게 오늘 유원에게 있었던 일을 전했다.

“아까 파일로 보내 드린 대로 오후 12시 42분경 학원과 같은 건물 6층 ‘한정희 내과’에서 진료를 보셨는데 어떤 내용인지 아직 파악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일이 벌어진 뒤로 유원에게 따라붙는 인력을 많이 줄였지만, 아예 없애진 않았다. 아직 그놈에 대한 소재 파악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태범은 그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준석은 꼬장꼬장해 보이던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잠자코 수긍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야.

“저녁까지 일정 있으셨던 거 아니셨습니까?”

-취소했어.

“네?”

금요일 저녁, 홍콩의 거부인 리첸 회장과 태범의 약속을 떠올린 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급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사업 확장을 위해서 홍콩에 간 김에 겸사겸사 식사 자리를 만드느라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준석은 태범이 일정을 취소한 이유가 유원 때문이라는 걸 얼핏 느낄 수 있었다. 태범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준석이 피곤한 얼굴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을 때 태범이 말했다.

-그리고 별채에 방 하나만 준비해놔.

“어떤 용도로 말입니까?”

-누구 한 명 좀 데려갈 일이 생겼어. 아직은 유원이가 모르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까 본채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네, 알겠습니다.”

준석은 태범에게 유원의 일과 나머지까지 보고했다. 오늘 유원이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중간에 학원에서 나와서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등, 유원의 일거수일투족을 태범에게 전했다. 이미 파일을 넘겨받아 대충 내용을 알고 있을 텐데도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물어보는 태범의 모습에 준석은 우성 알파의 소유욕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형님. 곧 있으면 러트 아니십니까?”

그러고 보니 태범의 러트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러트도 억제제를 써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집에 유원을 데려온 이상 함께 보낼 확률도 있어 태범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억제제로 넘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어. 그리고 이번에는 호텔로 갈 거야. 말 나온 김에 예약해놓고.

“알겠습니다.”

애인을 두고도 이번 러트에 억제제를 사용할 모양이었다. 오메가인 유원을 위해 장소도 따로 준비하라는 걸 보면, 함께 있을 생각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준석은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피곤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아… 퇴사할까.”

요즘 따라 시린 옆구리를 괜히 문지른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

“유원 님.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 아녀, 마싯어요. 강사함니다.”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억지로라도 밥을 먹으려 했다. 다른 건 정말 역해서 물도 삼키기 어려웠지만 흰 쌀로 만든 죽은 코를 막고 먹으면 그나마 먹을 만했다.

“도통 잘 못 드셔서 큰일이네요, 병원 한 번 가보실래요?”

“푸읍- 아, 아뇨!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갑자기 병원을 가보자는 준석 아저씨의 말에 코를 꽉 막았던 손을 필사적으로 저었다. 아저씨와 병원에 가면 내가 임신했다는 얘기를 권태범이 알게 될 확률이 거의 99.999%였다. 아직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대로 그가 알게 되는 건 싫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신 거라면 저한테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형님이 유원 님을 제게 맡기고 가셨으니 말이에요.”

“네….”

‘저 임신했어요, 아저씨….’

나는 차마 말은 못 하고 속으로만 토로했다. 어떻게든 먹으려 했지만 역하기도 하고 입맛이 없어 겨우 세 숟가락 정도만 먹고 남은 배는 과일로 채웠다. 앉은 자리에서 망고 한 개와 멜론을 1/4이나 해치웠지만 냉장고에 있는 케이크가 생각났다.

큼지막한 딸기가 곳곳에 박혀있는 딸기 케이크는 준석 아저씨가 오늘 아침 나를 위해 특별히 H 호텔에서 사 온 케이크였다. 하지만 그동안 과자나나 과일을 식사 대신 주로 먹었다는 내 말에 의사 선생님이 당 수치를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 나름 조절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예 아무것도 안 먹는 것보단 과일이라도 먹는 게 좋다고 해서 먹긴 했지만, 케이크까지 먹으면 아기한테 너무 안 좋을 거 같았다.

‘근데 너 이 아이. 진짜 낳을 거야…?’

아직도 마음이 반반이었다. 언제 돌아가게 될지도 확실히 몰랐고, 권태범에게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그가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믿을 수 있지만 분명 소설 속의 권태범은 집착광공 그 자체였다.

가끔 그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날 때도 있었고. 게다가 지금쯤이면 두 사람이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깊게 자지 못한 탓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고 수많은 고민을 적어 놓은 노트를 침대 매트리스 안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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