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37)화 (37/136)

#37

오랜만에 학원에 가자 원장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지난 며칠간 많이 아팠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괜찮냐고 안부를 물었다.

치…. 언제는 그만두라더니 미리 연락해둔 모양이었다.

그동안의 수업 자료를 챙겨주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원장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도망치듯 반으로 향했다.

“이준 형, 무슨 일 있었나?”

항상 일찍 와 있던 이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늦잠을 잤겠거니 싶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조금씩 걱정이 되었다. 설마 권태범이 어떻게 한 건 아니겠지…?

당장 권태범에게 전화를 걸려다 괜히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래, 권태범이 무슨 깡패도 아니고- 까, 깡패… 비슷한 조폭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음…. 뭐랄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머리가 복잡해 괜히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이준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에효…. 밥이나 먹자.”

마음 같아선 오늘도 대충 초코 우유나 과자로 끼니를 때우고 싶었지만, 권태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기로 했다.

죽을 먹을까 하다가 갑자기 돈가스가 먹고 싶어져 근처에 있는 김밥지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딸랑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김 비린내가 확 나며 역하게 느껴졌다.

혹시 차유원이 해산물을 잘 못 먹나…?

비린내에 특히 예민한 거 같았다. 결국 코를 부여잡고 입으로 숨을 쉬며 간신히 빈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들어 일반 돈가스, 치즈 돈가스, 고구마 돈가스 중에 고민하다 손을 번쩍 들었다.

“이모, 스페셜 돈가스 하나요!”

나는 고민 끝에 무려 스페셜 정식을 주문했다. 이건 완전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만 먹는 거였는데, 권태범이 주고 간 블랙카드가 있으니 걱정 없었다. 가만 보면 나 엄청 사치 부리는 거 같은데…. 조만간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지금까지 마음대로 쓴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역시 김밥지옥은 모든 음식이 패스트푸드 뺨쳤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앞에 놓인 스페셜 돈가스에 꿀꺽 삼켰다. 다양한 돈가스가 두툼한 자태를 뽐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허기짐에 서둘러 나이프를 들어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소스를 잔뜩 묻히고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소스가 느껴지며 촉촉한 육즙의….

“욱-”

소스까지는 맛있었는데 돈가스를 씹자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느껴져 속이 매스꺼웠다.

“우윽-”

내가 헛구역질을 하자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죄, 죄송, 읍-”

그들을 보며 사과를 하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가지고 있던 현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왔다.

“흐아…… 으….”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에 속이 한결 진정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차유원, 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지난 몇 주간을 곰곰이 떠올리니 그동안 제대로 된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끔 권태범이랑 있을 때 수프나 죽을 조금 먹은 게 전부였다. 게다가 어제는 아랫배가 따끔하며 무언가 꿈틀대는 느낌까지.

이거 생각보다 아주 심각한 일인 것 같았다. 두려움이 치밀어 차마 다물지 못한 입술 끝이 파들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많은 간판 속에서 병원을 찾았다.

“…6층.”

불안한 마음을 갖고 엘리베이터를 올라탄 나는 예민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체향에 코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어떡해….’

두려운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진료 접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차유원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파들파들 떨며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되었다. 천천히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자 젊은 의사 선생님이 나를 보며 차트를 쭉 훑었다.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

“저…. 배가 따끔거리고 바, 밥을 못 먹겠어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고….”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프시죠?”

“아랫배요….”

의사 선생님은 잔뜩 얼어붙은 내 표정을 살피며 질문을 이어갔다.

“증상이 나타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한 3주 정도….”

“히트 사이클은 마지막으로 언제 하셨죠?”

“자, 잘 모르겠어요.”

오메가라는 것도 몰랐는데 히트 사이클을 알 리가 없지…. 아직까지 호르몬이고 뭐고 아는 것도 없었다. 이상하게 권태범의 체향은 맡기 좋은데 다른 사람들의 냄새는 별로라는 게 유일하게 느끼고 있는 점이랄까…? 그리고 사실 다른 사람의 페로몬이 잘 느껴지지도 않았고.

“결혼은 하셨나요?”

“아, 아니요?”

동거는 하고 있지만 사,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은 더더욱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까 조금 그러네…. 내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대답하자 의사 선생님이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말했다.

“단순히 체하신 건 아닌 거 같아서 초음파 한 번만 보겠습니다. 이번에 개정된 오메가 법안 때문에 소화기 쪽에 이상이 있는 분들은 무조건 검사를 해야 하거든요.”

“초음파요?”

“네, 아픈 건 아니니 너무 염려 마세요.”

“비, 비용은….”

그거 비싼 거 아니야…? 권태범 몰래 온 거라 블랙카드도 쓸 수 없고 남아있는 현금이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전부인데…. 외상도 되려나?

“오메가의 초음파 검사는 나라에서 100% 지원되니까 비용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감사, 합니다.”

내가 불안한 눈으로 의사 선생님을 올려다보니 의사 선생님은 부드러운 미소로 웃으며 내 걱정을 잠재워주었다. 초음파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자 곧이어 배에 닿는 차가운 젤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 받아보는 검사에 겨우 몇 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에 돌아오자 차트를 손에 들고 자리에 앉은 의사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차유원 씨. 임신하셨어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와는 달리 내 머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긴 침묵이 흐르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내가 입술을 떼어냈다.

“…네? 지금 뭐, 뭐라고….”

“임신이요. 벌써 8주 차가 넘으셨네요.”

“…이, 임신이라고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얼어붙어 있는 나를 보며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검은색 바탕을 배경으로 정 가운데에 코딱지만큼 작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티브이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초음파 사진이었다.

“어… 어…. 이거 제 거 맞나요? 저는 남자인데요?”

믿을 수 없어 재차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조그만 콩알 같은 점을 가리켰다.

“차유원 씨가 남자긴 해도 오메가시잖아요, 게다가 아마도 히트사이클에 맞춰서 관계하신 거 같은데, 그때라면 임신 확률이 아주 높은 편이죠.”

임신이라니.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내가 임신이라고?

이 소설 속엔 오메가, 알파, 베타. 총 세계의 형질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아직 낯선데 임신이라니!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테이블을 간신히 붙잡은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속이 안 좋으신 거 외에도 기분이 오락가락한다든지, 시도 때도 없이 졸린다든지 하는 증상은 없으셨어요?”

“마, 맞아요.”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요즘 며칠간 정말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락가락했다. 사소한 일에도 울적해졌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감정조절이 되지 않거나 피로감이 많은 건 임신 초기의 대표적인 증상이에요. 밥도 제대로 못 드신다고 하셨으니 이미 입덧도 시작하신 거 같고요.”

이게 다 임신해서 그런 거였다니.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속이 울렁거리며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왔던 이유가 입덧…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임신이라니. 근데… 배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거 같긴 했는데.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도 배 속의 아…이가 걱정되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선생님. 배가 따끔…거리고 막 꿈틀거리는 느낌이 났어요. 그, 그건 왜 그런 건지.”

혹시 그동안 너무 먹지 않아 아기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기가 걱정되었다.

“아마 태아가 자리를 잡느라 그럴 겁니다. 아직 젊으시고 보통 남성체 오메가의 태아들은 성장이 빠른 편이거든요. 하지만 뭔가 꿈틀거리는 느낌은 아기집이 커지면서 근육 떨림 같은 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시는 거일 수도 있어요. 일반적인 증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검사상 문제 될 것도 전혀 없었고요.”

다행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그제서야 초음파 사진 속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새끼손톱만큼도 안 되는 크기였다. 너 어쩌자고 나한테 왔니, 아가야….

한숨을 푹 내쉬며 각진 초음파 사진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문질렀다.

“저 그, 그럼…. 진짜 제 배 속에… 후….”

도대체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임신… 남자… 차유원… 권…태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권태범과 그 밤을 보냈던 날에 임신이 된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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