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꿈에서 봤던 호랑이가 현실로 튀어나온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엄청 큰 인형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작은 호랑이는 없는 건가? 고개를 들어 호랑이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아쉽게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찾으시는 거라도….”
간신히 나를 말리고 내 맞은편에 앉아 일을 하던 아저씨가 식은땀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내가 언제 다시 튀어 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신 거 같았다.
저 아저씨도 불쌍하지… 권태범 같은 놈을 상사로 둬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이불 위에 샤인 머스캣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당장 이 집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불 위에 앉은 후였다. 하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샤인 머스캣 한 알을 입에 넣고 아저씨에게 대답했다.
“아이에어….”
으… 이건 너무 얼렸다. 꽝꽝 언 샤인 머스캣을 뱉을까 하다 너무 더러운 거 같아 다시 입 안에 넣어 이리저리 굴리며 녹길 기다렸다.
“아…!”
순간 아랫배가 아릿했다. 무언가 콕콕 쑤시는 느낌이었다. 깜짝 놀라 이불을 꽉 끌어당기자 샤인 머스캣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큰 소리와 함께 수많은 파편이 흩어졌다.
비명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예상하지 못한 어떤 것이 다가왔다는 강렬한 예감이 전신을 덮쳤다. 뭐지…?
“괜찮으십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일에 집중하던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 어떡해!
이상한 감각에 멍하니 있다가 아저씨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바닥에 뒹구는 유리 조각을 보고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엄한 얼굴로 나를 말렸다.
“유원 님은 거기에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다가 상처라도 나면 저 정말 죽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렇게 한 건데요….”
“사람 한 명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저씨는 급기야 고개까지 숙였다. 내가 무슨 어린애인가. 스물세 살이나 먹었는데. 대학에서 이 나이면 화석 취급받는다고!
그래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아저씨는 어디론가 연락을 했고 나는 잠자코 침대에 앉아 호랑이 인형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아까 전에 느꼈던 건 뭐지? 분명 콕콕 쑤셨는데….
무언가 배 안에 꿈틀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엄청 깜짝 놀랐는데…. 혹시 기, 기생충 아니야?
차유원 얘, 뭐 잘못 먹었나? 비리비리한 게 풀만 뜯고 살았을 거 같은데, 잘 안 씻은 채로 먹어서 기생충에 감염됐을지도 모른다.
구충제는 분기별로 잘 챙겨 먹었나?
나는 차유원의 몸 안을 휘젓고 다니는 기생충을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근에 입맛이 없고 배가 아픈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만간 병원에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오랜만에 유리 온실도 가고 아저씨가 사 온 치즈 크로켓도 먹고 평화롭다 못해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홍콩에서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지?
“태범 씨! 왜 말도 없이 갔어요?”
내가 볼을 통통하게 부풀리며 화면 너머에 있는 권태범에게 뭐라 하자 그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다 나았나 보네.
바락바락 대드는데도 나를 그저 귀엽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권태범의 미소에 뺨이 화끈거렸다. 크흠. 정신 차려. 아, 아직 완전히 넘어가면 안 돼, 차유원.
“그렇게 하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 너머의 권태범을 노려보자 그가 카메라를 돌려 무언가를 비추었다.
-대신 이거 들고 갈게.
“제…디 쿠키?”
저거 엄청 유명한 쿠키인데. 인터넷에서 많이 봤던 쿠키통을 보며 침을 꼴깍이자 권태범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자꾸 웃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대신 내가 갈 동안 과자 좀 줄이고. 밥은 먹었어?
…오늘도 밥은 잘 들어가지 않아 샤인 머스캣만 겨우 먹은 게 다였다. 이상하게 밥은 하나도 안 들어가는데 과일이나 초콜릿 같은 달콤한 디저트는 무한대로 잘만 들어갔다. 내가 대답을 못 하자 권태범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가면 치과부터 가야겠다.
“그래도 양치는 꼬박꼬박 하거든요!”
자꾸만 양치 안 하는 사람으로 몰고 가는 그가 미워 버럭 소리치자 권태범의 얼굴에서 또 웃음기가 번졌다. 그렇게 권태범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홍콩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불안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 대한 감정을 깨닫고 난 뒤 권태범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을까 망설였는데, 이젠 그럴 이유도 없다고 느꼈다.
하루빨리 권태범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권태범이 돌아오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나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뒤에 박준석 있지.
“네, 형님 저 여기 있습니다.”
-온도 좀 올려.
깜짝이야. 갑자기 표정을 굳히는 모습에 순간 가슴이 덜컹했는데 내가 코를 훌쩍이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었나 보았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괜히 부끄러워져 준석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진짜 너무 과보호야….
“올렸습니다, 형님.”
“태범 씨. 근데 이 호랑이 말이에요.”
내가 핸드폰을 움직여 호랑이를 비추자 권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태범 씨가 맨날 안고 자요? 그렇다고 하기엔 태범 씨 방에서 한 번도 못 봤는데.”
“푸흡-”
내 말에 아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나도 권태범이 호랑이 인형을 꼭 안고 자는 상상을 하니 웃긴 했지만,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반면 권태범은 잠잠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없어 내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권태범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닐까 걱정되어 시무룩해져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자 그가 대답했다.
-아니. 어렸을 때 어머니가 사주신 거야. 네가 자꾸 호랑이 찾길래 좋아하는 줄 알고 갖고 온 건데.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너무 좋아서요. 여기서 태범 씨 냄새도 많이 나서 너무 좋아요!”
아,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다 싶어 방긋 웃으며 호랑이를 꼭 끌어안았다. 권태범이 미묘한 얼굴로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내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을 참고 있던 아저씨마저도 목을 가다듬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네? 뭐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연히 페로몬 조절이 미숙한 어릴 때 쓰던 거니 내 페로몬이 묻어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차유원은 오메가였지만 나는 오메가나 알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조금 이상한 건가….
“그냥요! 하하…. 그나저나 태범 씨는 언제 돌아와요? 보고 싶어요….”
혹시 내가 차유원이 아니란 사실이 들킬까 봐 얼른 말을 돌렸다. 진심 반 회피 반인 의도를 가지고 보고 싶다고까지 했다. 그러자 권태범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나도 보고 싶어. 금방 갈게 유원아.
***
권태범이 출장을 간 지 5일째가 되던 날, 완치 판정을 받았다. 0.5도만 높아도 절대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정상 체온으로 돌아오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어쨌든 권태범과의 다툼도 잘 마무리됐고, 몸도 많이 회복되어 다시 학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아저씨는 출장 안 가도 됐어요?”
오늘부턴 그동안 나를 감시하던 남자들 말고 준석 아저씨가 나를 직접 데려다주고 데려오기로 했다. 근데 소설 같은 데서 보면 오른팔 역할이 참 중요하던데 매일같이 권태범 옆에 따라다니던 아저씨가 나를 따라다녀도 되나?
권태범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아저씨한테 물었다.
“글쎄요, 형님은 일보다 사랑을 택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는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어쩐지 그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그쪽에 따로 통역가도 고용하고,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제가 따라갔어도 큰 도움은 안 됐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유원 님.”
그 순간, 통역가란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권태범과 매일 통화를 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흘러가서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손이 잘게 떨렸다. 여주인공인 윤설아를 떠올리니 심장이 쿵쾅거렸고 토할 거 같았다. 지금 보니 준석 아저씨가 권태범의 출장에 따라가지 않은 이유도 다 소설에 필요한 장치였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설아는 권태범이 고용한 통역가였으니 말이다.
씁쓸해진 입 안을 훑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쩌지…. 아니야. 아니야, 현실의 권태범은 다를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학원까지 가는 동안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내게 아저씨가 청포도 맛 사탕을 건넸다.
“공부하면서 당 떨어질 때 이거 드세요. 입천장 안 까지게 하루에 하나만.”
“감사합니다.”
청포도의 단내가 진동하는 축구공 모양의 사탕을 만지작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저, 아저씨 오늘… 아, 아니에요!”
학원이 끝나고 병원에 갈 생각이었지만 괜히 걱정만 끼치는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병원은 같은 건물에 있기도 했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금방 다녀올 거라 굳이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학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아저씨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 다녀오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유원 님.”
가만 보면 아저씨도 괜히 나를 놀리는 거 같단 말이지. 유원 님, 유원 님. 아주 낯간지러워 죽겠다. 나를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차에 손을 흔들어주곤 학원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