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35)화 (35/136)

#35

“으응….”

이마에 축축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이마를 짚자 축축한 물수건이 만져졌다.

“아….”

누가 왔다 갔나…. 그나저나 나 아팠구나…. 어쩐지 몸이 무겁더라.

아직도 다 낫지 않았는지 머리에 미열이 남아있었다. 왼쪽 손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고개를 돌렸다. 반쯤 올라간 소매 아래로 수액과 연결된 주삿바늘이 마른 손등에 꽂혀 있었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지금 몇 시야….”

한쪽 눈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켜자 벌써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해야 하는데. 또 연락도 없이 학원에 무단결석하고, 그렇게 가버려 이준도 많이 놀랐을 거였다. 내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손등과 연결된 주삿바늘을 거칠게 빼냈다. 밀려오는 따끔한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읏-”

너무 세게 빼서 그런지 피가 살짝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피가 난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싸쥐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윽….”

약하게 일던 두통이 강해졌고 고통이 몸 전체로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휘청거리는 몸에 침대 헤드를 붙잡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볼 기력도 없어 겨우 숨만 고르며 서 있었다. 아마도 점심을 가져온 듯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여전히 입맛은 없었고, 오히려 음식 냄새로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점심은 그냥 안 먹을게요, 물만 두고 나가주세요.”

“…….”

상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쪽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입맛이 없어서-”

“유원아.”

순간 몸이 멈칫 굳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라 멍했던 머리가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유원.”

“…….”

권태범과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일인지 다시 전처럼 돌아온 따뜻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울컥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숨을 꾹 눌러 참자 권태범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

하. 정말 최악이다. 그의 따스한 목소리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그에게 들키기 전에 급히 손등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왜…요.”

눈가가 쓰릴 정도로 벅벅 닦았지만, 순식간에 눈물이 다시 차올라 아무리 닦아도 소용없었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앞이 뿌옇게 흩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권태범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를 보았다.

“왜… 왔는데요.”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온 거야. 그렇게 가버릴 땐 언제고, 왜 이제야….

“미안해.”

“…….”

“내가 과했어.”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권태범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미안하다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어린애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안. 내가 다 잘못했어.”

“흐으, 흑…. 끅, 으흐… 윽.”

권태범이 자신의 잘못을 빌며 내 눈가를 문질렀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권태범의 손가락을 따라 길게 번져갔다. 그는 마음이 아픈지 속상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전부 다 미안해.”

“흐윽, 흐…. 흐윽.”

이제 와 용서를 구하는 그가 미웠다. 나를 혼자 둔 그가 미웠다. 나를 꽉 안은 권태범을 밀어내고 그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울었다.

“미워… 흑, 나한테 왜 그랬어요….”

권태범은 내 주먹을 온전히 받아냈다. 한번 쏟아진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쏟아낼 듯 울음을 터뜨리자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흐윽, 왜 그렇게 못되게 말했어요….”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권태범의 사과에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마음을 대변한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흐느끼자 권태범이 내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응어리진 마음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한참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 나는, 흑. 여기 아무도 모르고 흐… 태, 태범 씨밖에 모르는데에…. 흐으….”

낯선 곳에 떨어져 아는 사람이라곤 할머니와 권태범 둘 뿐이었다. 또한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내가 기억하는 폭력적인 권태범과 현실에서의 다정한 권태범의 간극에 매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래.”

“근데, 흐윽, 나한테, 뭐라고 하면, 흣, 나는 어떡해요…. 흡.”

그래도 지금 내 옆에 있는 권태범은 한없이 다정하고 나에게만큼은 따뜻했으니까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제일 의지하던 권태범의 낯선 얼굴에 세상의 빛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무서웠다.

내가 권태범의 품에 안겨 엉엉 울며 혼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놓자 권태범은 그런 나를 더 세게 끌어안고 내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흐윽….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태범 씨… 흑.”

***

유원은 결국 울다 지쳐 쓰려졌다. 태범의 호출에 달려온 최 박사는 수액 한 대를 놔주고 돌아갔다. 수액과 연결된 유원의 손목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유원의 옆에 앉은 태범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야윈 유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들어와.”

태범은 준석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습니다. 본가에 있는 걸로 일단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예.”

태범은 준석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다 시선을 다시 유원에게 고정했다.

“으응….”

불편한 건지 유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였다. 태범은 방 안의 조명 밝기를 낮추고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유원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태범은 준석이 본가에서 가져온 물건을 꺼내 들었다.

“다녀올 테니까 얘랑 있어.”

태범은 자신이 어렸을 적 가지고 놀았던 호랑이 인형을 유원의 옆에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독 자신이 어렸을 때 쓰던 물건을 모으는 것에 취미를 가진 어머니 덕분에 20년이 넘도록 잘 보관되어온 인형이었다.

1차, 2차 발현이 나타날 때도 가지고 있었으니, 자신의 페로몬이 강하게 응집되어 있기도 했다. 그런 물건을 유원의 곁에 남기고 가는 것이 욕심이라면 욕심이겠지만.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난 태범은 마지막으로 유원의 뺨에 입술을 맞추고 자리를 떴다.

“형님, 9시엔 출발하셔야 합니다.”

“어.”

“형수님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유원을 확인한 준석의 물음에 태범이 대답했다.

“이번엔 나 혼자 가. 그리고 너는 남아서 유원이 곁에 있어.”

“네? 그럼 일 처리는 어떻게….”

“기찬이도 있고 어차피 얼굴만 비추고 올 거라 굳이 너까지 안 가도 돼.”

“알겠습니다.”

원래는 유원과 함께 홍콩 출장을 가려던 태범이었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은 유원을 데리고 갈 순 없는 일이었다. 태범은 이 집에서 그나마 유원과 안면이 있는 준석을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아픈 유원을 두고 집을 비우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모든 일정을 간소화하면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태범은 자꾸만 돌아가는 시선을 어렵게 떼고 집을 나섰다.

“그럼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그럼 부탁한다.”

“네, 형님.”

***

“으….”

“일어나셨습니까, 유원 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준석 아저씨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으앗!”

급하게 일어나느라 침대 헤드에 부딪힌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잡으며 인상을 쓰자 나보다 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준석 아저씨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린 아저씨가 내 머리를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 나셨는데요…. 하하…. 저는 이제 죽었군요.”

“네?”

“형님이 형수, 아니 유원 님 손끝 하나 안 다치게 잘 살피라고 하셨거든요.”

유원 님…? 언젠 형수님이라면서 그새 바뀐 호칭이 부담스러웠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가 나를 왜 살펴…?

“아, 아저씨… 태범 씨는요?”

설마 그렇게 하고 그냥 가버린 거야?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콧수염 아저씨가 그런 나를 말렸다.

“더 누워계셔야-”

“태범 씨!”

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태범을 부르자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형님은 출장 가셨습니다.”

“네?”

홍콩 출장…?

설명해달라고 입을 다물자 준석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유원 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으셔서 집에서 안정을 취하라고-”

씨이. 권태범 이 개새끼! 나쁜놈!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가 그런 나를 말리려고 다가왔지만 나는 재빠르게 몸을 숙여 아저씨를 피해 문 앞으로 뛰어갔다.

‘만약 문까지 잠가놨으면 진짜 이번엔 권태범 죽고 나 사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내리자 다행히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유원 님!”

“따라오지 마세요!”

“형님께서 선물을 두고 가셨습니다.”

그 말에 나는 절반 이상 빠져나간 몸을 다시 뒤로 물리며 고개를 돌렸다.

“선물이요?”

“다른 건 아니고 형님 대신이라고 생각하라면서….”

아저씨는 내 침대 옆에 있던 호랑이 인형을 가리키며 머쓱하게 웃었다.

“호, 호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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