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거세게 몸부림치고 저항하는 나를 붙잡은 권태범이 서늘한 눈빛을 한 채 말했다.
“당분간 외출 금지야. 과외 선생 붙여 줄 테니까 학원은 그만둬.”
“으… 흑, 진짜 태범 씨 너무 싫어요.”
권태범 앞에서 울기 싫었다. 나는 입 안 살을 깨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곧 죽어도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앞으로 나 대신 이 두 사람이 네 옆에 있을 거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권태범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지나쳤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이 하루 사이에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 건가. 허탈함이 몰려왔다.
“들어가시죠.”
결국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방에 갇히고 말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정신을 차리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벌써 시간이….’
꼬르륵-
요새 입맛이 없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만 하루를 굶은 허기진 배에서 당장 음식을 넣으라고 시위하듯 작은 울림소리를 내었다. 아직 따끈따끈한 죽이 협탁에 놓여 있었지만 권태범이 준 건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배고파… 흑.”
얼마나 배가 고픈지, 이제는 콕콕 쑤시기까지 했다.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가방을 주섬주섬 끌어안았다. 어제 부스에서 나눠준 빵이 있었던 거 같은데….
“어, 있다!”
보름달 모양의 크림빵이 살짝 짜부가 되었지만 터지지 않고 잘 있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싶어 허겁지겁 빵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얼마 먹지 않아 또 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낼 듯 꿈틀거리는 위벽에 빵 봉지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를 잡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데도 위가 쪼여대며 시큼한 위액이 나왔다.
“하아…. 진짜 나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입을 헹구고 침대에 기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냥 처음부터 권태범과 인연을 맺으면 안 됐다. 그 허우대 좋은 겉모습에 넘어간 내가 바보였다.
차유원을 괴롭힌 그놈들 일도 해결해야 하고, 할머니도 잘 챙겨드려야 하는데 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겨웠다. 거울 속의 남자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회피하듯 이불 안으로 몸을 숨겼다.
또다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자 싸늘한 냉기가 몸에 닿았다. 하루 종일 잠만 자서 그런지 바위를 얹어 놓은 듯 몸이 무거웠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었지만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고 배는 아프고, 모든 게 무섭고 서러웠다.
“흐… 흐흑, 흐으으…. 엄마아…. 흡, 으… 아, 빠아…. 흐윽.”
하루아침에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차유원이 아닌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게 지치고 부담스러웠다.
“흑… 나쁜 놈…. 흣… 진짜 나쁜 놈….”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그러지. 처음부터 원래 모습대로 이러지. 왜 잘해줘서 내 마음을 이렇게 만든 건지 원망이 담긴 화살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관자놀이를 따라 흐르던 눈물이 귓가를 축축하게 적시고 베갯잇에 떨어졌다. 그렇게 머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권태범을 떠올리며 울고, 또 울었다.
***
“형님. 형수님 진짜 저렇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모두를 대표해 서재로 들어온 준석이 답답한 듯 한숨을 토해냈다.
“지금 며칠째 아무것도 안 드시고 계속 누워만 계십니다.”
태범은 저를 향한 불순한 시선을 무시하며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형님!”
태범은 준석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잔을 들며 찰랑거리는 술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원이 하루 종일 저렇게 누워있다는 사실은 태범이 가장 잘 알았다. 유원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런 유원의 방 앞에서 태범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밤새 서 있다가 서재로 돌아오곤 했다.
“저러다 형수님 진짜 쓰러지세요! 당장 내일이 출국일인데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세요!”
걱정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준석을 향해 고개를 든 태범이 경고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 다물어, 박준석.”
“하아…. 일단 말씀하신 백이준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일단 이거라도 읽고 다시 생각해 보라며 서류를 건넨 준석이 입을 떼어냈다.
“이름, 백이준. 나이는 스물네 살로 강명동 백 병원, 백성한 병원장의 차남입니다. 현재는 집을 나와 혼자 생활하고 있는데 대학 진학에 관해 백 병원장과 마찰이 있던 걸로 보입니다.”
강명동에 있는 백 병원이라면 꽤 규모가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그런 병원의 병원장 아들이나 되는 이준이 혼자 나와 산다는 말에 태범의 미간이 좁혀졌다.
“계속해.”
태범은 빈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이준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학원 바로 옆 건물 1층 편의점에서 새벽 알바를 하고 있고, 형수님과는 같은 클래스라고 합니다. 애들 말로는 성적도 비슷하고 바로 옆자리라 친해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딱히 이상한 기류는 없다고 합니다.”
준석은 독한 양주를 잔에 계속 채우는 태범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갔다.
“형수님께서 워낙 친절하고 활발한 성격이셔서 친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두 분이 가셨던 학과 체험 박람회에서도 딱히 아무런 일은 없었고요.”
서늘한 표정이지만 어딘가 지쳐 보이는 태범의 모습에 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파 페로몬이 형수님께 묻어 있긴 했지만 그건 열성 알파가 종종 하는 실수…지 않습니까, 형님.”
“…….”
“이성적으로 판단하시고 형수님과는 대화로 풀어보시는 게….”
태범은 그간 유원의 곁에 심어두었던 부하들을 통해 이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유원의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고 거슬렸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귄 것임을 알기에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다. 엊그제 일만 아니었다면.
모의고사를 핑계로 백이준과 함께 한국대에 가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유원의 곁에 붙여둔 사람만 수십 명이었다. 그럼에도 태범은 유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유원을 기다리며 부하에게 전송받은 사진을 봤을 때, 자신의 오메가를 보호하려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몸 안에서 꿈틀거리며 비틀렸다.
유원을 바라보는 백이준의 눈빛은 자신이 유원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알파로서의 본능이 유원에게서 그놈을 떼어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백이준의 페로몬을 몸에 묻힌 채 그와 얼굴을 맞댄 유원을 본 순간, 그동안 쌓아두었던 인내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제 오메가를 탐내는 이준을 부수고 유원을 지하에 가두고 싶었다. 저만 바라보며 저만 기다리는 유원의 모습이 유혹적으로 머릿속에서 상상되었다.
“이만 나가 봐.”
서류를 내려놓은 태범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눈을 꼭 감았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아이처럼 엉엉 울던 유원이 떠올랐다. 자신이 무섭다며 흠칫 굳던 그 작은 몸이 떠올랐다.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붉어진 눈시울로 한숨을 내쉬던 유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아… 시발.”
그와 동시에 어떤 기억이 떠오른 태범은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혼자서 훌쩍이고 있을 유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미칠 거 같았다. 유원의 방 앞에 도착한 태범은 머뭇거리는 손길로 문을 두드렸다.
“유원아.”
꽉 닫힌 문이 저를 대하는 유원의 마음처럼 느껴져 초조해졌다. 새하얗게 질린 손으로 문을 두드린 태범이 다시 한번 유원을 불렀다.
“차유원.”
하지만 몇 번을 불러도 유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범은 초조했다.
“들어갈게.”
결국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태범이 문을 열었다.
“차…유원.”
늘 둥글게 말아 산을 이루고 있던 유원의 모습이 사라지고 텅 빈 침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머릿속에서 새빨간 신호가 울려 퍼졌다.
“차유원!”
손끝이 잘게 떨리며 태범이 핸드폰을 들어 유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 시발.”
지이잉, 진동 소리가 울렸다. 유원이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핸드폰을 발견한 태범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유원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유원이 갈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래도 유원이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이미 자신에게 정이 떨어진 거라면….
거친 발걸음으로 몸을 돌린 태범이 다급한 손길로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방 안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서 작은 동물이 낑낑거리는 것처럼 작고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몸을 돌린 태범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아….”
문을 열자 유원 특유의 달콤한 체향이 코끝에 닿았다. 좁은 욕조 안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 넣고 자고 있는 유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다가 잘못 건드린 건지 샤워기 끝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물에 젖은 유원의 티셔츠가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유원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불안감에 떨리던 태범의 심장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큰 수건을 꺼내 유원의 젖은 몸을 닦은 태범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한번 잠에 빠져들 때면 누군가 업어가도 모르는 유원이었다. 역시나 유원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깊은 잠을 잤다. 태범은 이마 위로 달라붙은 그의 연한 갈색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미안하지만 너 없인 안 돼. 이젠 못 해.”
유원을 품에 안고 읊조리던 태범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