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네. 조심히 가세요!”
“저기, 유원아,”
차를 향해 걸어가던 이준이 발걸음을 돌려 입을 열었다. 태범에게 전화를 하려 핸드폰을 들었다가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너 혹시 만나는-”
“차유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직 시간이 마, 많이 남았는데. 당황스러움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권태범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야.”
“어, 태, 태범 씨… 오셨어요?”
“쟤, 누구냐고, 누군데 네가 저 차에서 내려.”
원작에서의 권태범은 광공이었지만, 현실에서 마주한 그는 한 번도 나를 위협한 적 없고 늘 다정했었다. 하지만 잔뜩 날이 서 인상을 쓴 지금의 분위기는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 그냥 학원 형이에요….”
“형?”
“아, 처음 뵙겠습니다. 백이준이라고 합니다.”
이준이 나와 권태범의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이준을 내려다보는 권태범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다. 서늘한 얼굴을 한 권태범에 이준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손을 거뒀다.
“페로몬.”
“아, 죄, 죄송합니다.”
권태범의 말에 이준이 급히 한 걸음 물러서며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위태한 분위기가 깨져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혀, 형. 어…. 오늘 고마웠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무수한 침묵이 흐르고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이준에게 인사를 건네고 권태범의 손을 잡아당겼다. 권태범은 여전히 자리에 멈춰서 이준을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고 애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 태범 씨. 얼른 가요. 네? 제발….”
우선 권태범과 이준 형을 떨어뜨리는 게 먼저였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나를 바라보던 권태범이 화가 난 얼굴로 내 손목을 꽉 쥐고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평상시와 다르게 배려 없이 넓은 보폭으로 앞서가는 그를 나는 겨우 따라갔다. 잡힌 손목이 욱신거릴 때마다 그의 표정이 잔상처럼 떠올라 가슴이 따끔거렸다.
“타.”
“태범 씨, 잠깐-”
“입 다물고 타, 차유원.”
정말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빠른 속도로 차를 모는 그의 눈에 날이 섰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긴장 서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끼익-
뒷바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권태범의 집에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권태범이 조수석 문을 열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내려.”
정말 순식간에 집에 들어온 나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권태범을 올려다보았다. 숨을 몰아쉬며 눈치를 보는 나를 지켜보던 그가 조금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시발, 아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따, 땀이 나서 그런가. 겨우겨우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씻고 올게요, 땀이 조금 나서….”
“그놈이랑은 무슨 사이지?”
“네? 누구…. 아, 이준 형이요?”
권태범은 아까 이준의 손이 닿았던 내 뺨을 문지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언제 봤다고 형이야.”
“…….”
“언제 봤다고 형이냐고.”
권태범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뭐, 권태범을 부르는 것처럼 ‘이준 씨’ 이렇게 불러야 돼?
가뜩이나 힘든 사람을 붙잡고 추궁하는 말에 서러워졌다. 물론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이준과 학과 체험 박람회에 간 건 잘못한 일이었지만 그 이유는 권태범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얘기를 조금만이라도 하면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그 때문에.
“그럼 뭐라고 불러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입술 끝이 떨려왔다. 나도 모르게 날이 선 목소리로 묻자 권태범이 말했다.
“그냥 이름 불러.”
“씨….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떻게 한 살이나 형인 사람한테 버릇없이 이름만 불러요!”
기가 막혀서 순간 욱하고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태, 태범 씨는 맨날 나한테 뭐라고 하기만 하고! 이럴 거면 저 집에 갈래요!”
누군 집이 없는 줄 아나. 기분이 상해서 고개를 팩, 돌리자 권태범이 내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어딜 간다고?”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얼굴로 권태범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유원.”
권태범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무언가 찔린 듯 피부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가.”
“…….”
“너 못 가.”
번뜩이는 눈으로 내 손목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흐… 흐윽. 지, 진짜 싫어.”
권태범에게서 도망쳐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이불 속에 숨어 눈물을 훌쩍였다.
“지, 지가 뭔데… 흑, 못 간다 만다 난리야. 흐윽.”
권태범은 그동안 내가 모르는 다정함으로 본색을 숨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돌변할 수는 없었다. 강압적인 권태범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는 곧바로 현관문을 전부 잠그고 나갈 수 있는 문은 전부 폐쇄시켰다. 심지어 방으로 끌고 가더니 문 앞에 부하들을 배치하고는 가버렸다.
“씨이… 나쁜 놈. 흐윽. 진짜 싫어.”
근데 어째서인지 나를 가두고 억제하는 것보다 권태범이 나를 보던 싸늘한 표정에 마음이 더 아팠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결국 마음 한구석에 뿌리를 내린 불신의 감정이 싹을 틔웠나 보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니 짓무른 눈가가 화끈거렸다.
“엄마 보고 싶다… 흑….”
밤새 훌쩍이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얼굴에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떴다. 밤새 울어서 그런지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보나 마나 엄청 부었겠지….
어제저녁에 사용인이 가져다준 저녁은 여전히 협탁 위에 있었다. 이미 차갑게 식은 음식을 외면하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들고 왔던 큰 배낭 안에 권태범이 사준 옷을 제외하고 짐을 챙겼다. 밤새 생각하고 생각한 결론은 아무래도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여기서 그만두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빠른 손길로 짐을 모두 싸 들고 후드티 모자를 머리에 눌러썼다.
달칵.
입술을 꽉 깨물고 문고리를 돌렸다. 잠겨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부드럽게 열렸다.
“안 됩니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딛자 남자가 곧바로 나를 제지했다. 가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켜요.”
“죄송합니다.”
“나 좀 가게 비키라고요!”
남자는 자신을 밀어내는 나를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가방을 포기하고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내자 조용했던 집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권태범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나를 막아선 남자의 손을 밀치자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권태범이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
어제 그 일로 손목엔 이미 손자국이 생겨있었다. 거기에 또 힘이 가해져 눈물 나게 아팠다. 입술을 꽉 깨물자 넝마가 된 입술에서 피가 났다. 눈물도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거 놔요.”
“안 된다고 했어.”
“놓으라고요! 태범 씨가 뭔데-”
“왜. 백이준 그 새끼가 집을 나오라고 그래? 같이 살자고 꼬시기라도 했나?”
하. 머리에 열이 올랐다. 권태범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이준이 형이 여기서 왜 나와요?”
“눈물겨울 지경이군.”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미 차를 타고 오면서, 그에게 오해한 거라고 누누이 얘기하고 또 얘기했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그가 답답해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권태범은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혀를 찼다.
“가져와.”
“혀, 형님.”
“가져오라고.”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바짝 얼어붙어 있던 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준석에게 서류 봉투를 받아 든 권태범이 그것을 내게 건네며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뭔데…! 서류 봉투를 열자 수많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란 마음에 서류 봉투를 떨어뜨리자 그 안에 들어있던 사진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저한테 사람 붙여놓으셨어요…?”
당연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를 감시한 그에게 배신감이 느껴져 두 손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말도 없이….
“왜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물론 그에게 거짓말을 한 건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저…!
“왜, 왜 그러셨어요? 미리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요, 최소한 미리-”
“내가 뭘 믿고.”
“…뭐라고요?”
“널 뭘 믿고 그걸 말해.”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보는 눈빛에 힘이 탁 풀렸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놀란 남자들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런 그들의 손을 떼어내며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태범 씨 말이 다 맞아요.”
피가 새어 나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나는 오기에 찬 얼굴로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더더욱 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겠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할머니와 함께 이사를 가든, 호신술을 다시 배우든 앞으로 권태범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싸늘한 눈으로 그에게서 돌아섰다. 당황한 남자들이 나와 권태범을 번갈아 보며 갈 길을 잃은 아이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잡아.”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숨이 콱 막혔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