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래서 얼른 아침 먹고 학원 가야 해요.”
어젯밤 머리 터지게 고민한 끝에 학과 체험 박람회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지금 권태범과 아침 식사를 하며 어제 떠올린 이유를 들먹여 열심히 설득하는 중이었다.
“4월 모의고사 준비를 굳이 토요일에도 해야 하는 이유는?”
역시나 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제가 그니까! 야간 자율 학습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보충 수업이랄까…. 뭐, 그 비슷한 거죠!”
“매주 이렇게 하는 건가.”
“아뇨!”
그렇다고 하면 당장 학원을 그만두라고 할 기세였다. 다급히 아니라고 부정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게 원래 3월 모의고사가 제일 주, 중요한데 3월은 못 봤으니까 4월이라도 잘 봐야 해서요….”
“몇 시에 끝나.”
“아마 음… 한 4시? 5시?”
“원래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나?”
학과 체험 박람회가 언제 끝날지 몰라서 대충 얼버무린 건데 권태범이 허를 찔렀다.
“그게 오, 오답은 그때그때 다시 풀어봐야죠. 하하….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릴게요. 약속해요.”
어렵사리 그의 허락을 받아낸 뒤에야 가방을 챙길 수 있었다. 어제 권태범이 사준 연분홍색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내 옷차림을 쓰윽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미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자기가 사준 거 입었다고 좋아하는 건가? 이럴 때 보면 귀엽다니까.’
손에 감긴 붕대를 새로 갈아주고 직접 학원까지 데려다준다는 그의 차에 올랐다. 오늘따라 화창한 날씨에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위험해. 손 내려.”
“네에.”
내가 손을 안으로 집어넣자, 권태범은 곧바로 창문을 닫아 버렸다. 아쉬운 마음으로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벚꽃의 계절이 훌쩍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곳곳에 심어진 나무에서는 개화를 위해 조금씩 싹이 움트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따가 알아서 갈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 테니까.”
“네.”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 권태범에게 손을 흔들고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7층에 올라가니 꽉 닫힌 학원 문 앞에 이준이 서 있었다.
“형!”
“어, 왔어?”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새벽부터 아르바이트를 다녀왔다는 이준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이준과 나는 다시 건물 밖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권태범과 헤어진 쪽이 아닌 반대편 입구로 나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 형, 차 있었어요?”
“아, 어….”
선입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준은 항상 옷차림이 검소했고, 그가 알바를 하는 편의점에서 처음 만나서 그런지 차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꽤나 비싼 외제 차였다.
“그냥 할머니가 선물로 주신 거라.”
“와. 형 금수저였어요? 부럽다.”
“너야말로 한도 없는 블랙카드던데 뭐.”
이준이 머쓱하다는 얼굴로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오…. 요놈 매너 좋은데? 알파, 오메가, 베타. 형질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아도 한참 많을 것 같았다. 괜히 뿌듯해진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오르자 이준 또한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제 카드는 아니지만 오늘 점심은 제가 쏠게요!”
무광의 블랙카드를 이마에 탁 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날씨도 좋고 학과 체험을 위해 박람회에 가는 거지만 오랜만의 자유로운 외출에 마음이 들떴다. 창문 너머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만끽했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이루어진 학과 체험 박람회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교복을 입고 온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학부모들까지 수많은 인파가 학교 안을 가득 메웠다.
“이번엔 컴공과로 가볼래?”
“그래요.”
사실 공대 쪽엔 흥미가 없었지만, 이준은 다를지 모르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때 단체로 몰려든 학생들 때문에 앞서 걷던 이준과 멀어져 그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유원아!”
“아, 잠깐만- 윽.”
“헐, 어떡해! 죄송합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앞을 보지 못한 여학생과 부딪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아, 네네 죄, 죄송합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이만.”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고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건지 여학생은 내 눈을 피하기 바빴다. 괜찮다고 웃은 다음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네, 살짝 부딪힌 건데요 뭘.”
“옷에 립스틱 묻었다.”
아까 부딪히면서 묻은 건지 아이보리 색 니트 위에 핑크빛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손으로 쓱쓱 문질러봤자 더 넓게 번지기만 하는 탓에 포기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고…. 그러네요. 집에 가면 빨아야겠다.”
“또 잃어버리지 않게 여기 잡아.”
이준은 제 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이렇게 잡으면 옷 늘어날 거 같은데. 알고 보면 이 옷도 엄청 비싼 거 아니야?
이준이 가리킨 옷 대신 손을 잡았다.
“옷 늘어나게 뭐 하러 그래요. 이렇게 하면 되지. 얼른 가요!”
벌써 대기 줄이 길어진 체험 부스를 보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얼른 다 돌아보고 4시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멍하게 서 있는 이준의 등을 밀며 사람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복도를 가리켰다.
조금 정신없고 복잡했지만 나름대로 궁금했던 학과는 거의 체험할 수 있었다. 너무 정신없어서 그런지 본관 건물 밖으로 나오자 숨이 탁하고 트였다.
“여기. 이거 마셔.”
“감사합니다.”
근처 벤치에 앉자 이준이 이온 음료를 건넸다.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뚜껑까지 따서 준 걸 보면 정말 몸에 매너가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 주기엔 참 아깝단 말이지. 여기서 여동생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소개시켜 줬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이준이 건넨 음료수를 마셨다.
“오늘 도움은 좀 됐어?”
학과별로 나누어준 책자를 가방에 넣은 이준이 물었다.
“네, 완전요. 오길 잘한 거 같아요.”
“그래?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던데.”
이준은 피곤한지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건물 안에 사람이 많고 갑갑해서 그런가 이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일부러 이준이 그늘진 곳으로 갈 수 있게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러자 이준이 흠칫 고개를 들더니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짜식, 뭘 놀라고 그래. 안 잡아먹는다, 안 잡아먹어!’
그가 귀여운 동생같이 느껴져 피식, 웃었다. 그런데 문뜩 이준에게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준에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내뱉었다.
“원래 이 학교 다녔었죠?”
“어떻게… 알았어?”
이준이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보니까 이 건물이 무척이나 익숙한 거 같아서요. 어디가 어딘지 다 알던데.”
“…그렇구나.”
“근데 재수학원은 왜 다니는 거예요? 전과하면 되지 않아요?”
한국대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고, 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과하면 될 일 아닌가? 자세히 말해보라는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이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의예…과는 전과가 안 돼서.”
“의예과요?”
“사실 피를 무서워 해. 피를 무서워하는 의사라니. 처음부터 말도 안 됐던 거지. 몇 번이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못했다가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살고 있어.”
와, 씨…. 역시 고된 삶 속에서의 문뜩문뜩 여유로움이 보이더라. 약간 반항하는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이란 거지?
멋쩍은 얼굴로 음료수를 마시는 이준에게서 어쩐지 후광이 나는 것 같았다.
역시. 여동생이 없다는 것이 이럴 때는 너무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이 형이랑은 친해져야지.
눈앞에 펼쳐진 금 동아줄… 아니, 다이아몬드 동아줄에 눈을 반짝였다.
“형, 점심은 뭐 먹을래요? 늦점이네요 완전.”
“학식 먹고 가자. 한국대 학식 싸고 맛있어.”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그래도 배고프긴 했으니 이준을 따라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이준의 말처럼 학식은 무척 싸고 퀄리티도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돈가스가 최고였다. 한국대를 다니게 되면 이런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동기부여가 됐다.
이준과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고 한국대를 빠져나와 학원으로 향했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니까.”
“괜찮아요. 사실 누구 몰래 나온 거라.”
“누구?”
“있어요, 엄청 질투 많은 사람.”
권태범이 생각나 키득거리자 이준이 나를 슬쩍 보더니 운전대를 꽉 잡았다. 줄줄이 신호가 바뀌어 생각보다 일찍 학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권태범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것을 확인하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어? 그냥 가셔도 되는데요.”
“그래도. 정말 혼자 있을 수 있어?”
“그럼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생각도 정리된 거 같아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이준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늘 왔다 갔다 운전도 해주고 그 덕분에 학과 체험 박람회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니.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잠깐, 너 여기 속눈썹 떨어졌다.”
이준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나자 이준이 손가락에 붙은 속눈썹을 보여주며 웃었다.
‘아, 깜짝이야. 어린 게 뭐 저리 잘생겼어.’
순간 다가온 얼굴에 화들짝 놀라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놀란 심장이 작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