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권태범의 말에 퍼스널 쇼퍼는 눈치 있게 청자켓과 어울리는 옷 한 벌을 꺼내 내 앞에 놓아주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자 그가 내 손에 토마토 주스를 쥐여주었다.
“가볍게 착용할만한 시계도 좀 봅시다.”
“아, 아니에요. 시계는 진짜 필요 없어요!”
시계는 진짜 아니야. 그런 비싼 걸 차고 다녔다간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할 게 뻔했다. 토마토 주스를 내려놓고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권태범의 손을 붙잡았다.
“어차피 학원에도 시계 다 있고, 핸드폰도 있잖아요. 그리고 시계 차면 불편해서 공부 못해요.”
이런저런 말로 둥글게 거절하자 그가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직원을 향해 말했다.
“그럼, 평소에 착용하고 다닐만한 것 외에 착용감이 가벼운 시계도 추가해서 보여주세요.”
‘망했다….’
결국 옷부터 신발까지. 거실 한쪽에 쌓여가는 물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는 그래, 내 돈으로 사는 거냐, 다 니 돈이지. 하는 불순한 생각까지 하며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수천만 원 어치의 쇼핑을 마친 뒤에는 헤어디자이너가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한결 가벼워진 머리에 고개를 살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때요?”
거실로 나와 권태범에게 물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멋있어. 이제 갈까?”
내 손을 잡는 그의 손에 깍지를 끼며 웃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가 꾸며준 그대로 하고 나와 조식을 먹으러 갔다. 어젠 낡고 추레한 모습이라 눈치가 보여 보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천장과 화려한 샹들리에. 큰 통창으로 된 유리창까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내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기 앉아서 먹을까?”
웬일로 프라이빗 룸에서 먹는 게 아니라 창가 쪽을 가리킨 권태범이 말했다.
“네, 좋아요.”
나는 어디에 앉으나 상관없었다. 권태범이 가리킨 자리로 향하며 그가 빼주는 의자에 앉았다. 아…. 무심결에 주변을 살피다 건너편 테이블에 어제 나를 보며 피식, 조소하던 남자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 옆에는 마치 격 떨어진다는 얼굴로 나를 훑어보던 여자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어제와 다른 옷차림을 한 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휙, 하고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떼어내곤 내 손을 감싼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잘 입을게요. 감사해요.”
“네가 하고 싶은 건 전부 다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래도 옷 한 벌이면 충분한데….”
평생을 내가 산 옷보다 오늘 그가 사준 옷이 더 많을 것 같았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권태범은 붕대로 칭칭 감아져있는 손을 엄지로 문지르며 물었다.
“손은 아프지 않아?”
“하나도 안 아파요.”
사실 붕대까지도 오바긴 했다. 근데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가 걱정할 테니 얌전히 있었다. 어제와 다른 시선을 느끼며 아침부터 무려 스테이크 한 덩이를 해치웠다. 간단히 빵과 커피를 먹는 권태범과 달리 두둑하게 배를 채웠다.
“이제 가자.”
“네.”
권태범도 회사에 가야 하고, 나도 학원에 가야 하니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가볍게 양치를 하고 그가 나를 학원에 내려주었다. 새 신발인데도 불구하고 좋은 신발이라 그런지 발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새 신발을 신고 뛰어보는 아이처럼 한번 폴짝 뛴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형.”
“안녕. 이따 저녁에 약속 있어? 오늘따라 엄청 멋있네?”
“그건 아니고요, 어쩌다 보니까 그냥…. 칭찬 감사합니다.”
왜 안 그렇겠어. 이것 때문에 아침부터 그 난리를 피웠는데. 그래도 멋있다는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 손은 왜 또 그래?”
가방을 풀고 교재를 꺼내는데 왼손에 감긴 붕대를 발견한 이준이 물었다.
“아, 수프 먹다가 조금 데었어요. 이렇게 보면 심각한 거 같은데 사실은 아니에요.”
“조심 좀 하지….”
2도 화상이면 그냥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 몇 개 붙이면 될 텐데 손에 붕대를 칭칭 감아 놓은 건 누가 봐도 과했다. 부끄러움에 책상 아래로 왼손을 숨기고 샤프를 집어 들었다. 1교시에 있을 수학 과목을 대비해 예습을 하고 미리 숙제까지 후다닥 끝내자 딱 맞춰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유원이 너는 무슨 과로 진학할 생각이야?”
“저요? 글쎄요….”
차유원이라면 무슨 학과를 전공하고 싶었을까? 이준 형에게 질문을 받자 가장 먼저 이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형은요?”
“나도 아직 확실하진 않아서.”
이준 형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둘 다 싱겁다.”
“그러게요.”
어색하게 웃다 짧은 쉬는 시간이 끝이 났다. 1교시가 시작되면서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차유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차유원을 위해 대학을 진학하는 게 과연 그를 위한 선택일까? 돌아온 차유원이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그냥 내 욕심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오늘도 남들과 다르게 야간 자율 학습을 포기하고 가방을 챙기는데 문제를 풀고 있던 이준 형이 나를 불렀다.
“저 유원아. 내일 학과 체험 박람회 같이 가보지 않을래?”
“학과 체험 박람회요?”
“응.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같이 가보면 좋을 거 같아서. 나도 아직 과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평일엔 학원 때문에 시간도 잘 안 나니까 말이야.”
이준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권태범이 싫어할 텐데….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면 그가 들어줄까? 그래도 한 번은 물어볼까…. 갈등이 되어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머뭇거리다 이준에게 대답했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래, 그럼 생각해 보고 말해줘.”
“네!”
그렇게 학원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니 오늘도 역시 권태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범 씨!”
“천천히 와.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차 안에서 나를 보고 있었는지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잔소리가 이어졌다. 푸흐 웃음을 터뜨리고 가방을 벗어 의자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오늘 이렇게 하고 가니까 다들 멋있다고 해서 기분이 짱 좋았어요.”
“누가.”
어…. 권태범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웃음기를 거두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권태범이 나를 쓱, 훑어보더니 손목에 묻은 형광펜 자국을 문질렀다.
“과외 할래, 차유원?”
“네? 갑자기요…?”
“매일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 피곤하지 않아? 게다가 1대1 수업도 아니잖아.”
처음엔 출장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벌인 일이었지만, 매일 이렇게 집에서 나와 사람들도 만나고 공부도 하다 보니 답답함이 해소되고 스트레스도 덜 쌓였다. 외로웠던 학창 시절을 보상받는 것 같기도 했고. 물론 공부는 어려웠지만 혼자서 끙끙 앓다가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으니 훨씬 수월했고 공부에 점점 재미도 붙었다.
“그편이 시간적으로나 효율적으로나 더 나은 선택지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선생을 붙여준다고 약속하지.”
손목을 은근하게 문지르는 권태범의 표정이 유혹적이었다. 그의 얼굴에 넋이 나가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워, 원래 공부는 혼자 하는 거 아니랬어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하다 보면 스, 승부욕도 생기고 또…. 아무튼 지금이 좋아요.”
그가 아무런 대답이 없어 초조해졌다. 나를 생각해서 해준 제안을 거절해서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봐 걱정되었나.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지금이 좋아요. 아침에 같이 출근하는 것도 좋고…. 혼자 있으면 조, 조금 외로워서….”
최대한 권태범의 마음에 들 법한 말을 골라 하자 권태범이 내 입술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 말했다.
“알겠어.”
휴우…. 다행히 넘어갔다. 근데, 생각해 보면 권태범 진짜 쉬운 남자 아니야?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살살 꼬시면 다 넘어왔다.
‘그렇다면 내일 학과 체험 박람회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태범 씨. 학원에 이준이 형이라고 있는-”
“이준이, 형?”
권태범의 눈빛이 다시 살벌해졌다. 이준의 이름을 되뇌는 목소리도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어우…. 아직 이 정도는 무리였나 보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그의 옆에 찰싹 붙어 기분을 맞춰 주었다. 꽉 막혔던 도로를 뚫고 권태범의 집이 있는 운언동에 곧 도착했다.
“하아….”
“안아줘?”
오늘도 엄청나게 높은 계단이 막막해 한숨을 쉬자 권태범이 물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권태범밖에 없을 거였다.
“제가, 올라갈게요. 요즘 체력도 다시 안 좋아지는 거 같아서 이거라도 해야겠어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계단에 발을 올렸다.
“안 그래도 내일부터 운동 다시 시키려고 했는데. 워밍 업 한다 생각하고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해봐.”
뒤에 이어진 말도 무서웠지만. 내일부터 운동을 다시 시작한다고…? 내가 잘 못 들었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이 피식 입술 끝을 말아 올리곤 계단을 올랐다.
내일 기필코 학과 체험 박람회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계단까지 올랐을 때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