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태범 씨도 얼른 드세요.”
빵을 작게 찢어 수프에 적셔 입에 넣었다. 빵을 오물오물 먹으며 나만 빤히 보는 그에게도 권했다. 그럼에도 권태범은 음식을 먹지 않고 스테이크를 썰어 내 앞에 놓아준다든지, 빈 물 잔에 물을 따라준다든지 하는 자잘한 수발을 들어 내 식사를 챙겼다.
“하…. 배부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만감에 기분 좋은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정말 제대로 된 식사는 며칠 만이었다.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던 권태범도 만족감이 서린 내 표정에 씩 웃었다.
“근데 오늘 돈 많이 쓰셨죠…?”
문득 걱정이 들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엄청 넓은 호텔 방에 아까 먹지도 못한 음식값까지. 꽤 나올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우물쭈물 입을 뗐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유원아.”
“네?”
“너한테 아까운 건 없어.”
“…….”
“그게 뭐가 됐든. 얼마나 중요한 거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떨렸다. 진한 검은색 눈동자 위에 내가 담겨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뭐든 다 해. 그렇게 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줄 테니까.”
묵직하게 다가오는 시선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뚫어지게 나를 보는 강렬한 눈빛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냥 권태범과 같은 곳에서 함께 하는 게 너무 좋았다. 행복했다.
아… 어떡해. 나 권태범이 좋은가 봐.
위태롭게 넘실거렸던 감정이 표면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넘쳤다. 결국 그를 향한 내 감정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와의 사랑은 끝이 정해져 있었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그가 없는 내 미래를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흣, 어떡, 흐으….”
기쁨을 마주한 순간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이제는 권태범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저 윤설아를 만나고 변하게 될 그가 무서울 뿐이었다. 나를 버리고 그녀에게 사랑을 쏟을 그 모습이. 혼자 남겨질 나의 모습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의 품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당황한 권태범은 내가 울다 지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자 어떻게든 나를 달래려 노력했다. 담요를 가져오려 일어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가지 마세요….”
눈물로 짓무른 눈가가 따끔거렸다. 잘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고 그를 잡아당겼다.
“제발 나만 두고 가지 마세요….”
내 간절한 외침에 권태범이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내 등을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아 한참 동안 그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한참 등을 토닥여준 덕분에 차츰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넓은 품에 기대자 안락함이 밀려왔다.
“씻어야지.”
“힘들어요….”
너무 고된 감정 소비에 기운이 없었다. 말끝을 늘였더니 권태범이 나를 안아 들었다.
“어, 이, 일어났어요. 태범 씨, 저 일어났어요!”
“가만히 있어.”
“아니 바, 발은 안 다쳤잖아요!”
“꼬맹아, 그냥 가자.”
오랜만에 들어보는 꼬맹이란 단어에 입을 합하고 다물었다. 하아… 왜 나는 매번 후회할만한 짓을 골라 하는지. 오늘도 결국 권태범의 손에 몸이 달랑달랑 들려 욕실로 향했다. 손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는 명목으로 권태범은 끝까지 욕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진짜 울먹이면서까지 그에게 제발 나가달라 애원했지만 권태범은 내 애원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이 나쁜 놈…. 나는 권태범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에게 맞섰다. 물론 나 혼자 하는 고독한 싸움이긴 했지만 나름 노력했다. 결국 혼자만의 싸움에서 진 나는 머리를 말려주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속으로 주문을 외며 묵언 수행을 하는데 머리를 다 말린 권태범이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차유원.”
흥. 나를 부르는 소리에도 그를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차유원.”
안 들린다, 하나도 안 들려어….
“내일 옷 사줄게. 제일 멋있는 걸로.”
“…정말요?”
고개를 휙 하고 돌려 귀를 쫑긋거렸다. 정말 옷을 사줄 거냐며 권태범을 올려다보자 그가 양쪽 뺨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
“그래.”
씨이…. 뭘 또 뽀뽀까지 하고 그래….
그를 향한 내 마음을 깨달은 상태라 싫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끄럽긴 했다. 나 너무 쉬운 남자 아닌가 했지만 그래도 옷은 좀…. 아까 보니까 조금 창피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오늘만 쉬운 남자가 되기로 했다.
“그럼…. 이번에만 그냥 넘어갈게요. 대신 이, 잊으세요.”
잊으세요…. 이 문장을 내뱉고 나니 그 빌어먹을 첫 만남이 떠올랐다. 말 열두 마디 잘못했다가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었지. 나와 마찬가지로 권태범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듯 아랫입술을 문지르고 작은 바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땐 잊지 말라더니.”
“이, 잊으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잊지 마세요. 제가 태범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였지 정확하게는.”
쿨럭, 마른기침을 하며 괴로워하는데도 그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나를 놀렸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으악! 언제 생각해도 이불 발차기 20년은 거뜬한 흑역사에 그의 입을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만…. 그만해요….”
부끄러워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자 권태범이 내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내 눈 위에 입을 맞추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자자. 내일 옷도 사고 머리도 자르고. 할 일이 많아.”
“네….”
욕실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권태범은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이제는 같은 침대를 쓰는 일이 익숙해진 만큼 그의 품에 안겨 자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그의 향을 느껴져 눈을 감았다. 권태범은 내 등을 천천히 쓸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홍콩에도 야경이 근사한 호텔이 꽤 많아. 네가 좋아할 만한 곳도 많고. 뭐 때문에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나간 김에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하다 오자.”
나를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권태범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진짜 차유원이 돌아올 수 있었다. 눈을 꼭 감고 잠든 척을 하며 울지 않기 위해 혀를 꽉 깨물었다.
***
“유원아, 이제 일어나야지.”
“으응…, 오 분만요….”
“이젠 그거 안 통해.”
매일 같이 오 분만을 외친 뒤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지 권태범이 단호하게 나를 깨웠다. 그의 손에 들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거실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자신을 퍼스널 쇼퍼라고 소개한 여자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퍼스널 쇼퍼? 그런 단어는 난생처음 들어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권태범을 돌아보니 그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옷 사준다고 했잖아.”
“여, 여기서요?”
설마, 어제 말한 게 이거였어? 옷을 사준다고 해서 그냥 백화점에 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백화점을 불렀구나. 미치겠다.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 놓고 정작 본인은 태연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를 한참 노려보고 있자 옆방에서 행거를 끌고 나온 직원이 내 앞에 섰다.
“이번 S/S 시즌, 벚꽃 컨셉으로 나온 신상품입니다. 사모님께서 워낙 피부도 하얗고 깨끗하셔서 밝은 파스텔 톤 위주로 준비해봤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연분홍 자켓이나 청자켓도 가볍게 입으시기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아니면 심플한 디자인으로 나온 이런 셔츠에 가디건을 걸쳐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직접 골라보시겠습니까?”
“아, 아니요…, 저는 그냥 티셔츠 하나면….”
흥분에 찬 얼굴로 이런저런 옷을 보여주던 여자는 내가 우물쭈물하게 대답하자 알겠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옆에 선 직원을 향해 손짓을 한 그녀는 밝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과 최대한 체구가 비슷한 모델을 섭외해봤습니다. 마음에 든 상품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여러 명의 모델들이 거실로 나왔다. 아까 그녀가 추천해준 자켓을 입고 있는 모델부터 심플하게 로고가 박혀있는 티셔츠를 입은 모델까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해 권태범의 손을 붙들자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 다 마음에 안 들어?”
그의 말 한마디에 거실 내부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넓은 거실을 무대 삼아 서있던 모델들은 당황한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특히 권태범의 눈치를 보며 마른 침을 삼키는 사람들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니요. 전부 다 예쁘긴 한데-”
“그래? 마음에 든다니 잘됐네. 오늘 준비해온 옷은 전부 집으로 보내주세요.”
“네? 태, 태범 씨! 잠깐만요!”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퍼스널 쇼퍼가 가져온 옷들의 가격이 저렴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남은 봄의 계절 동안 저 많은 옷을 다 입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저는, 저거 하나면 되, 될 거 같아요.”
다급히 아까 퍼스널 쇼퍼가 추천해준 청자켓을 가리켰다.
“그래.”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이 떨어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다행이다. 저거 하나면 충분-’
“오늘은 저거 입고, 나머지는 내일부터 부지런히 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