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29)화 (29/136)

#29

“어서 오십시오.”

로비를 지나쳐 호텔 라운지로 향하자 깔끔히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이 권태범과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예약은 하셨나요?”

“차유원으로 예약했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외식은 갑자기 정해진 일인 줄 알았는데 예약까지 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것도 내 이름으로. 권태범이 계속해서 내 식사에 신경을 쓰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새삼 고마웠다. 먼저 앞장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다 이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다들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호텔 라운지에서 식사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색이 바래 중간중간 하얘진 청바지와 파란색 후드티. 그리고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 내 모습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권태범은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근사해 보였다. 자꾸만 비교되는 모습에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직원의 안내에 따라 vip 룸으로 들어갔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룸에서 나가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권태범이 주문을 마칠 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뇨. 그냥….”

‘그냥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요.’

갑자기 왜 이런 생각들이 드는지 모르겠다. 역시 나는 권태범이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거 아닐까? 그동안 너무 욕심낸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울한 생각에 이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자 권태범이 손을 뻗었다. 한창 괴롭힘 당하는 입술을 떼며 그가 짐짓 엄한 눈으로 말했다.

“입술.”

“아….”

“후. 피나잖아.”

어쩐지 조금 따끔거린다 생각했는데 결국 피를 보고 말았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살짝 누르자 혀끝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권태범의 시선이 내 혀에 닿았다가 금세 돌아갔다.

“입술 좀 그만 괴롭혀. 그러니까 며칠째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거야.”

이마를 문지른 권태범이 턱짓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아….”

“또 말 안 듣지. 오늘 한 번이라도 바르긴 했어?”

“깜빡했어요.”

그제야 며칠 전 그가 내게 준 립밤이 생각났다. 립밤까지 챙겨주는 광공이라. 누가 이 사람보고 집착광공이래. 다정광공이면 몰라도.

속으로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새 거나 마찬가지인 립밤을 입술에 덕지덕지 발랐다. 피가 나오는 부분에 립밤이 닿았을 때 흠칫, 몸이 움찔거렸다.

“수시로 바르고, 앞으로 입술 뜯지 마.”

“네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찌푸렸던 권태범의 표정이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그가 피식,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번질번질한 입술 끝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치…. 나를 진짜 어린애로 보는 건가. 잠시 기분이 나아졌다가 아까 사람들의 시선이 떠올라 다시 비에 젖은 옷처럼 축축 늘어졌다.

“먼저 애피타이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노르스름한 양송이 수프 옆으로 갓 구운 빵이 함께 놓였다.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겨 뒤늦게 허기짐이 밀려왔다. 정말 속이 울렁거리고 별로였는데 이상하게 권태범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 진단 말이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스푼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하고 조금은 조급했던 인사와 함께 수프가 담긴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앗 뜨-”

쨍그랑 소리와 함께 손등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릇을 놓치는 바람에 수프가 엎질러지면서 뜨거운 수프가 손등을 적셨다. 그 즉시 맞은편에 앉아있던 권태범이 벌떡 일어났다.

“차유원!”

수프가 오랫동안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릇까지 함께 데웠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그 뜨거운 것을 맨손으로 집었으니. 그릇을 놓치면서 엎어진 수프에 화상을 입은 손이 화끈거렸다. 놀란 마음에 대충 손으로 문지르려 하는데 권태범이 내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권태범은 손수건에 물을 적셔 손등을 조심히 닦아주었다. 붉어진 손등 위로 물집이 살짝 생긴 것을 본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란스러움에 다가온 직원이 나를 향해 괜찮냐고 물었다. 권태범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직원에게 차가운 물수건을 요청하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아. 지금 보니 옷도 엉망이었다. 수프가 쏟아지면서 후드티도 엉망이 된 모양이었지만, 옷이 두꺼워서 다친 곳은 없었다.

“아, 괜찮아요. 묻은지도 몰랐는데. 이건 집에 가서 그냥 빨게요.”

“너 진짜 말 안 듣는 거 알아?”

권태범이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뭐….

서늘한 눈을 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허리를 숙여 의자에 묻은 음식물을 닦았다.

으으, 너무 아까워.

한 숟가락도 못 먹고 쏟아버린 수프가 아까웠다. 휴지가 축축하게 젖어 새 휴지를 찾아 손을 뻗었을 때 권태범이 내 손을 낚아챘다.

“앗.”

갑자기 시야가 뒤바뀌며 발끝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태, 태범 씨.”

놓아달라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럼에도 권태범은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고 묵묵히 방을 빠져나갔다. vip 룸을 나오니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내게 들러붙었다.

호기심과 멸시가 섞인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가 혀에 닿는 인공적인 딸기 맛에 그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꽉 깨문 입술을 놓고 권태범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마다 그의 페로몬 향이 옅게 느껴졌다. 불안감에 작게 뛰었던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달달 떠는 내 머리를 감싸 안은 그는 빠른 걸음으로 라운지를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삐빅- 하는 기계음에 그의 품에서 고개를 떼어냈다.

“전무님.”

“일단 응급 처치는 했는데 물집이 생겼습니다. 흉이 남겠습니까?”

“상태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자 권태범은 걱정 말라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가 나를 소파에 내려주었고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내 손을 살폈다. 손등에 생긴 물집을 조심히 살피던 의사는 내 옆에 서 있는 권태범에게 말했다.

“2도 화상 정도 될 것 같네요. 관리를 잘하면 흉이 남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며칠 동안은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곤 간호사가 건네는 알코올 솜을 손등에 문질렀다. 나에게 당부하듯 의사가 말했다.

“힘주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집게를 내려놓고 뾰족한 주사기를 드는 손길에 겁이 났다. 마취도 없이 저 뾰족한 걸로 손등을 찌른다고?

이거 정말 시, 싫은데.

나는 어떻게 좀 해달라며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붉어진 손만 내려다보며 내 시선을 외면했다. 밥도 못 먹고, 아프고, 나를 외면하는 권태범까지. 속에서 눈물이 울컥하고 차올랐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권태범이 조용히 내 눈을 가려주었다.

그 틈을 이용해 의사 선생님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눈앞이 가려진 탓에 모든 신경이 손으로 향했지만 생각보다 아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 뾰족한 바늘이 손등을 찌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숨 쉬어야지, 너무 긴장하지 말고.”

권태범이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흐, 네에….”

“아픈 거 아니야.”

그의 토닥임에 천천히 숨을 내쉬고 바짝 긴장한 몸을 느슨하게 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두덩이 위를 덮은 권태범의 손이 떨어지자 치료는 모두 끝이 나 있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주의 사항은 혹시 모르니 박 실장을 통해 한 번 더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의사 선생님은 왕진 가방을 들고 간호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손에 칭칭 감긴 붕대에 울상을 짓자 권태범이 나를 안아 들었다.

“저 발은 안 다쳤는데요….”

손을 조금 다친 거지 발은 멀쩡했다. 그런데 나를 무슨 물건 나르듯 번쩍 안아드는 그에게 툴툴거렸다.

“밥 먹어야지.”

“아까 그래서….”

조금 배가 고프긴 했지만, 또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려 할 때, 방 안쪽에서 소리가 나 고개를 돌렸다.

“헐.”

수프가 있었다. 아까 쏟은 탓에 먹지 못했던 그 수프가. 권태범을 보자 그가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태범 씨, 얼른.”

침을 꿀꺽 삼키고 권태범을 재촉했다. 그가 살짝 몸을 떨더니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태범 씨…?”

“아, 아무것도 아니야.”

턱 아래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린 권태범이 나를 꼭 안으며 다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수고하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그럼, 필요하시면 다시 불러주세요.”

식사를 준비해주려는 직원을 보낸 권태범이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직접 몸을 움직였다.

“제가 해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가 수프가 담긴 용기에 손등을 대보더니 그것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먹여줘?”

“아, 아니요. 잘 먹겠습니다.”

원래 그가 다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다정한 그의 모습에 잠시 얼이 빠져있었다. 고개를 붕붕 젓고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맛있어요!”

고소한 냄새만큼 맛도 좋았다.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수프를 금세 한 그릇 비워냈다. 쓰렸던 속이 점점 진정되며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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