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형, 이건 이렇게 풀면 될 거 같아요!”
국어 문법 문제를 조금 헷갈려 하는 이준에게 개념을 설명해주곤 그가 민망해하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어제 공부했던 건데 다행이네요.”
이준은 내 설명을 듣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넌 다른 과목도 잘하던데 학원은 왜 다니는 거야?”
“에이. 저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한국대 가려면 더 열심히 해야죠.”
“역시 한국대가 목표구나.”
“네! 형은요?”
“글쎄…. 그냥 어디든 거기만 아니면 괜찮을 거 같아.”
이준이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어 눈치껏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같이 밥 먹을래?”
시간을 확인한 이준이 내게 물었다. 벌써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어…. 저는 안 먹어도 괜찮아요.”
괜히 밥을 먹었다가 또 구역질하기 싫었다. 별로 먹은 게 없어 속이 조금 쓰리긴 하지만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한 것보다는 나았다.
“점심을 안 먹는다고? 저녁까지 공부하려면 배고플 텐데?”
“그게, 요즘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사실 밥이 먹기 싫은 거지 내 책상 한구석엔 빈 초콜릿 봉지나 사탕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이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 뺨이 화끈거렸다. 급히 책상 위를 치우며 변명을 늘어뜨렸다.
“디저트는 예외에요….”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병원…은 가봤어?”
“그냥 체해서 그래요. 원래 한 번 체하고 나면 뭐 먹기 싫어지잖아요. 전 걱정하지 말고 형 얼른 다녀오세요!”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중간하게 서 있는 이준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맛점, 즐점하고 오세요!”
이준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 A반엔 나를 포함한 몇몇의 학생들만 남아있었다.
‘다들 열심히 하는구나….’
점심을 건너뛰고 교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에 괜히 공부에 대한 열의가 불타올랐다. 혼자 샤프를 만지작거리며 몇 문제를 더 풀었다. 하지만 불씨가 너무 작았던 탓일까, 몸이 찌뿌둥해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바람도 쐬고 할머니에게 전화도 할 겸 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가장 먼저 할머니께 전화를 하니 친구분 집에 가셨는지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아쉬운 마음에 통화목록을 바라보는데 할머니 바로 아래에 있는 권태범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저씨, 내가 걱정되지도 않나.”
아침에 나를 내려주고 간 지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는데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확 도망가 버릴까 보다. 괜히 심술이 났다. 먼저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실수인 척 권태범의 이름을 꾹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달칵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태범 씨?”
-어.
어? 어어어~? 참나. 나는 매일같이 붙어있었다고 마음이 조금 허하구먼, 이 아저씨는 ‘어.’가 끝이었다.
“아저씨.”
그래서 호칭을 바꿔 불렀다. 생각해보면 맨 처음에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나이도 차유원보다 9살이나 많고, 차유원이 초등학생일 때 권태범은 군인이었으니 아저씨 맞지! 말끝을 늘여서 놀리듯 아저씨이- 하고 부르자 그가 또 ‘어.’ 하고 대답했다. 에휴. ‘할아버지이-’까지 하려다가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반쯤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오늘 많이 바빠요?”
-조금.
왜 이렇게 단답으로 얘기하지? 단어로만 뚝뚝 끊어 말하는 그의 대답에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쯤 그의 숨소리 너머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 혹시 운동하고 계셨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난 이후로 항상 같이 있는 그가 운동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근데 몸매는 여전히… 큼. 좋아서 무슨 비결이 있나 싶었는데 점심 시간에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순간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음흉해 보여서 깜짝 놀랐다.
“죄송해요, 방해한 거 같아요. 이만 끊을게요!”
랩을 하듯 빠른 속도로 대답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권태범이 말했다.
-밥은.
여전히 짧은 문장이지만 운동 중에도 나를 챙기는 것 같아 서운함이 녹아내렸다.
“어… 먹었어요.”
-카드 안 썼던데.
“문자 갔어요? 아무 소리도 없어서 혹시 다른 사람 거 도용한 건가 걱정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키득거리자 수화기 너머, 권태범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태범 씨?”
-어, 말해. 듣고 있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운동하나? 퍽퍽 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도 같았다. 중간중간 누군가의 신음 소리도 들렸고.
“혹시 복싱하세요?”
복싱이면 나도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이참에 권태범 따라서 배워볼까?’ 하는 마음에 물었다.
-…어.
“그랬구나. 어쩐지.”
-점심은 뭐 먹었어.
“저… 그게. 사실은 아까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이랑 같이 샀었어요.”
-아이스크림?
“네…. 조금 비싼 거긴 한데…. 죄송해요! 앞으로 안 먹을게요.”
-뭘 먹든, 얼마를 쓰든 상관은 없는데 밥은 제대로 먹어야지.
권태범의 말에 책상 위에 산처럼 쌓아 놓은 빈 과자 봉지들이 떠올랐다.
-한 끼라도 제대로 된 걸 먹어, 차유원. 요즘 밥도 잘 안 먹으면서.
“네에….”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건데. 자꾸 밥만 먹으려고 하면 속이 울렁거리면서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걸 어떡해.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권태범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초콜릿. 사탕 그런 것만 먹지 말고. 자꾸 그런 것만 먹으면.
“…….”
카드 뺏는 거 아니야? 내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자 권태범이 말했다.
-이 썩는다, 꼬맹아.
참나, 누가 꼬맹이야. 안 그래도 요즘 이가 조금. 아주 쪼금 시큰거리는 것 같아 신경 쓰였는데 괜히 권태범의 말에 뜨끔했다.
“네에, 아저씨.”
-뭐?
아까도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역시 그땐 내 말을 듣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권태범의 목소리가 순간 바뀌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또 다시 아저씨라는 말을 덧붙여 말했다.
“공부해야 돼서 이만 끊을게요, 아저씨!”
흥. 나는 잔소리를 퍼붓는 권태범의 전화를 먼저 끊고 방해 금지 모드까지 설정해두었다. 혹시 여기로 찾아오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아까 권태범이 내려준 다음 들어간 건물은 이 건물이 아니었다. 그의 눈속임을 하려 옆 건물로 간 거였지.
“음하하, 역시 난 똑똑해!”
어이없다는 얼굴로 통화가 종료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을 권태범의 얼굴이 상상되었다. 그러자 기분이 다시 괜찮아졌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옥상에서 내려왔다.
교실로 들어가니 점심을 먹고 온 이준 형이 아침에 아이스크림을 줬던 보답이라며 샌드위치를 건넸다. 빵 사이로 빼꼼 튀어나온 오이에 머뭇거렸지만, 한 끼라도 제대로 된 것을 챙겨 먹으라는 권태범의 말이 떠올라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런 노력에도 또다시 속이 울렁거려 겨우 조금 베어 먹은 것으로 점심 식사는 끝이 났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공부를 했다. 오후 수업까지 끝이 나고 아쉬운 마음으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너는 야자 안 해?”
“네. 저는 집에 일찍 가야 해서….”
나처럼 일찍 가는 학생들은 아까 점심시간에 같이 있었던 몇 명밖에 되지 않아 조금 민망했다. 내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먼저 가보겠다고 하니 이준이 형이 손을 흔들어 내일 보자고 인사했다. 나도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싶었지만, 권태범과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집에 가서 양초를 켜서라도 몰래 공부를 해야겠다.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에 손을 꽉 쥐며 권태범이 기다리고 있을 1층으로 내려갔다. 그냥 버스를 타고 가도 되는데 굳이 굳이 데리러 온다는 그에 말에 못 이기는 척 알겠다고 했다.
권태범이 볼세라 옆 건물로 후다닥 들어가 그 건물에서 빠져나온 척 태연한 얼굴로 나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아까 전에 마음대로 끊었던 전화 내용이 떠올라 심장이 작게 쿵쿵거렸다.
“다녀왔습니다.”
뒷좌석에 기대 태블릿으로 서류를 읽고 있던 권태범이 내 등장에 고개를 돌렸다.
“왔어? 저녁은.”
“안 먹었어요.”
“그럼 오늘은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
권태범은 그 길로 준석 아저씨에게 H 호텔로 가라고 했다. ‘호텔’이라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에 나 혼자 괜히 눈동자가 떨렸다. 그러나 태연한 얼굴로 다시 전자 서류를 읽는 그의 모습에 나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져 눈을 감았다. 해가 저물자 서울 시내는 네온사인으로 밝게 빛났다. 첫 학원 방문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눈이 저절로 감겼다. 머리 위로 닿는 단단한 어깨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차유원.”
“아…!”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그새 잠이 들었나보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소스라치듯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우, 심장이야. 누가, 후…. 누가 저렇게 잘생…기래.
지금 입에서 나온 침은 저 얼굴 때문에 흘린 게 아니다. 자, 자면서 흘린 거지, 절대 아니다. 입가를 소매로 쓱 문지른 다음 정신을 차리고 이곳이 어딘지 살폈다. 화려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보니 그 유명한 H 호텔이 맞았다.
“내려.”
“네.”
권태범을 따라 차에서 내리자 회장님 차가 멀어졌다. 준석 아저씨는 같이 안 가는 건가? 고개를 들어 권태범의 단정한 얼굴을 보았다. 뭐, 둘이 먹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움직이는 권태범을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