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벌써부터 맛있는 걸 사 먹을 생각에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세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편의점 앞에 도착한 나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동안 금지 구역처럼 거리를 뒀던 냉동 코너로 향했다.
365일 24시간 꺼지지 않는 냉동고의 환한 빛 사이로 하겐다즈가 영롱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예쁘게 줄지어 있는 하겐다즈는 아이스크림 중에서도 가격이 있는 편이었다. 그동안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먹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스크림 할인점도 아닌 편의점에서 이런 고급 아이스크림을 사게 될 줄이야.
이런 건 정말 찐부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생각했는데 권태범 덕분에 나도 걱정 없이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몇 개월뿐일 테지만, 지금은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권태범의 돈을 팍팍 쓰는 게 양심에 조금 찔렸지만, 이렇게 쓸 수 있을 날이 얼마 안 남았기도 했고… 권태범도 막 쓰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귀, 귀여운척하고 예쁘게 말하며 그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힘들었는데, 이 정도는 마음껏 써도 괜찮을 것 같다고 혼자서 합의를 보았다.
‘집을 사는 것도 아니고 차를 사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이… 겨우는 아니고. 아무튼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는 건데 뭐….’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리며 자기 합리화를 마친 뒤 당당하게 냉동고 문을 열었다.
‘하아… 시원해.’
냉동고가 이렇게나 시원했던가. 그냥 단순히 찬기가 느껴졌던 냉장실과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찬기에 섞인 공기가 상쾌하다고나 할까.
“무슨 맛을 먹어야 하나….”
초코. 그래 오늘은 초코 맛이다. 아직 시간도 넉넉하니까 오늘은 초코 맛을 먹고 내일은 딸기 맛, 그다음 날은 바닐라 맛을 먹자!
“역시 돈이 최고긴 해…. 조금만 덜 무서웠으면 내가 완전 꼬셔버렸을 텐데. 아깝네, 아까워.”
나는 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집으며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딸기 맛과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으음. 맛있겠다.”
기분이 좋아짐에 따라 엉덩이가 저절로 씰룩거렸다.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계산대 앞에 섰다. 삑- 하고 경쾌한 소리로 하겐다즈 바코드를 찍던 직원이 내가 건넨 카드를 받아들더니 말했다.
“이거 할인왕 이벤트로 1+1이네요, 하나 더 가져가실 수 있으세요.”
“1+1이요…? 정말요?”
“네.”
어떡해…! 나 진짜 운 대박이네. 호랑이 꿈이 설마 이거? 내가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고 발을 동동거리자 편의점 알바생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등을 돌려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초코 맛 하겐다즈를 하나 더 꺼낸 뒤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는 알바생에게 건넸다.
“이거 하나는 알바생님 드세요! 오늘 알바생님도 완전 운이 좋으시네요. 저는 그럼 이만 갈게요 수고하세요!”
상큼하게 윙크를 날리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내 윙크를 받은 알바생의 얼굴을 보자 데자뷔처럼 콧수염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손끝에 닿는 차가운 한기에 생각을 멈추었다.
“아, 뿌듯해! 너 너무 착한 거 아니니?”
혼자서 자화자찬을 하며 편의점 맞은편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헉… 아, 차유원, 바보 같아.”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벗기고 있을 때, 문뜩 카드 내역이 권태범에게 갔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럴 거면 뭐 하러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을까…….
혼자 첩보 작전 뺨치게 권태범의 눈을 따돌렸다며 좋아했던 게 부끄러워 허공에 발차기를 했다.
“하… 쪽팔려.”
생각할수록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 손목을 따라 주르륵 흐르는 물방울에 하겐다즈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걸로 찐하게 위로받자.”
아직 3월이라 춥긴 했지만 아이스크림은 잘못이 없으니까.
재킷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포장지를 마저 벗겨냈다. 마침내 매끈한 자태를 드러낸 아이스크림 단면 위로 숟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으니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며 온몸에 달콤함이 퍼졌다.
“으… 겁나 맛있어!”
저절로 들썩이는 엉덩이를 진정시키고 다시 한번 숟가락 끝까지 밀어 넣었다. 두 번 먹어도 여전히 시원하고 달콤한 초콜릿 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매스꺼웠던 속도 싹 가라앉았다.
“아…. 하나 더 먹고 싶다….”
눈 깜짝할 새에 아이스크림 한 통을 전부 비워냈다. 아쉬운 마음에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스푼에서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손에 닿아 끈적끈적했지만, 너무 맛있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입 안에 남은 달콤함에 입맛을 다시며 얼른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또 먹어야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1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손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옷을 단정하게 정리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건물의 가장 꼭대기인 7층에 있는 학원은 한 층 전체를 사용하는 듯 입구부터 굉장히 컸다. 어젯밤에 검색 한 바로는 이 학원이 인원수 대비 수도권 대학 합격률 1등이라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입구에는 수많은 대학과 합격생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분이 나를 보며 물었다.
“저 학원 등록하려고 왔는데요. 혹시 오늘부터 수업 가능한가요?”
“네, 가능하세요. 일단 상담부터 하고 테스트 도와드릴게요.”
“네.”
직원을 따라가니, 원장실이 나왔다. 알고 보니 나를 안내해 준 직원분이 이 학원 원장님이었다.
상담은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일단 내 수준을 파악하고 반 배정을 위해 테스트를 했다. 3월 모의고사를 풀고 난 결과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상담이 이어졌다.
“테스트 결과가 나쁘지 않네요. A반으로 바로 가도 될 거 같아요.”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는 테스트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혼자서 공부할 때와는 달리 테스트지에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꿈틀거리며 들뜬 미소가 숨겨지지 않았다.
‘내 실력, 아직 죽지 않았네.’
한국대에 들어가서도 남들은 동아리 활동이나, 여행 등 다양한 대외 활동으로 바쁠 때 생활비와 등록금을 위해 과외를 했다. 그 덕을 이제 보는 건가. 그때 너무 힘들어서 목에 피 맛도 나고 그랬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조금 슬펐다. 다시 돌아간다면 조금은 여유를 갖고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그때의 일을 통해 지금 내가 차유원에게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거니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선 오늘 진도 나갈 부분은 복사해서 줄 테니까 내일모레까지 교재 준비해서 오면 돼요.”
“네, 선생님!”
교재 이름이 적힌 종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작된 수험생 생활이 벌써부터 까마득했지만, 차유원 덕분에 소원도 이뤘으니 이걸로 퉁 치기로 생각했다.
원장 선생님을 따라 A반으로 향했다. 이미 0교시 자습이 시작된 이후라 학생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 반을 가득 채우는 빼곡한 교실에 빈자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유원 학생은 저기, 저 자리에 앉으면 되겠다.”
“아, 네.”
다행히 맨 뒷자리에 빈자리 하나가 남아있었다. 다른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교실 내부의 온도가 후끈거렸다.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
“어… 하겐다즈?”
남자도 나를 알아봤는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때마침 0교시 자습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종소리와 함께 몇몇 사람들은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짧은 잠을 청했다.
“안녕하세요. 알바생님도 여기 다니시나 봐요?”
내가 먼저 살갑게 인사하자 뒷머리를 긁적이던 알바생도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어… 네, 또 만나네요, 아까는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저도 짱 잘 먹었어요. 엄청 맛있더라고요. 아, 저는 차유원이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세 살!”
“저는 백이준입니다. 나이는 스물 넷이고요.”
오, 형이었구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유원보다 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형이 있었다. 나는 부끄러운 듯 귀를 살짝 붉힌 이준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맨날 무뚝뚝한 얼굴의 권태범만 보다가 이렇게 어린 남자애를 보자 귀여웠다.
‘좋을 때다. 파릇파릇하니 아주 풋풋하네.’
나이도 원래의 내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려서 그런지 귀여운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준이 내민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형!”
형이란 호칭에 닭살이 돋았지만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씨익 웃었다. 그러자 이준은 고개를 돌려 목을 가다듬은 다음 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래… 크흠. 나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