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26)화 (26/136)

#26

아침부터 한바탕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오늘도 속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달콤한 과일은 잘 들어가서 권태범이 씻어준 포도랑 사과를 몇 개 집어 먹었다. 다른 건 이상하게 비린내가 너무 났는데 과일은 술술 잘 넘어가는 게 신기했다.

“가는 길에 학원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버스 타면 돼요.”

순간 얼굴에 닿는 차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권태범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다정하다가도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무서워진단 말이지….

결국 백기를 들고 권태범과 함께 가기로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삐까뻔쩍한 회장님 차 뒷좌석에 탄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형수님, 오늘 혼자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권태범에게서 내 스케줄을 전해 들은 건지 준석 아저씨가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 네…. 제가 어린앤가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형수님 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고 겨우 대답했다. 권태범은 저 호칭이 낯간지럽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하. 스물세 살이면 어린애 맞죠. 우리 형님이 아주 개새, 아니 도둑, 아 크흠, 아무튼… 네, 뭐.”

개새끼와 도둑놈이라는 말에 권태범의 시선이 준석 아저씨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차 안이 싸늘한 공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핸드폰은.”

“여기요.”

“약은.”

“챙겼죠.”

권태범이 물어볼 때마다 하나씩 그에게 보여주며 확인을 받았다. 진짜 내가 어린애인 줄 아나. 그러고 보면 어린애를 홀라당 잡아먹은 건 자기면서 웃겨, 정말.

“자, 이걸로 학원비 결제하고 앞으로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헐….”

광공이라… 카드도 블랙이구나. 무광이지만 번쩍번쩍 빛이 나는 카드를 홀랑 받아 들고 속으로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카드 한도까지 써도 돼요?”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묻자 권태범이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 한도가 얼마인 줄 알고?”

와씨…. 개 멋있어. 이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재벌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손에 든 카드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서둘러 주머니에 넣었다.

회장님 차라는 수식어가 붙은 차답게 권태범과 내가 탄 차는 승차감이 아주 좋았다. 속이 메슥거려서 멀미를 하진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인 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태범 씨, 저 그럼 다녀올게요.”

“정말 같이 안 가도 되겠어?”

“태범 씨도 정말 저를 어린애 취급하시는 거 아니죠?”

가방을 메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알겠다는 듯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그럼 조심해서 가고. 이따 연락할게.”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차에서 내린 유원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태범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준석에게 물었다. 유원과 있을 때 잔잔하게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입가는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애들은 잘 붙여놨지.”

“네, 3교대로 24시간 인력 보충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원은.”

“알아보니 이쪽에선 꽤나 알아주는 학원이라고 합니다. 학원 측에는 미리 연락했고 문제없이 진행하도록 전달해놨습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유원이 공부하는 것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매일 밤 혼자 끙끙거리며 공부를 하다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잔적도 있었고, 가끔은 아침을 먹다가 코피를 쏟은 적도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원이 처음으로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얘기를 했을 때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서 그나마 동안인 애들로 골라 위장시켜놨고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 수고했어.”

하지만 차유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호시탐탐 틈만 나면 도망갈 생각만 하는 그를 혼자 둘 순 없었다. 그래서 결국 몇몇 애들을 추려 유원의 곁에 붙이기로 했다.

아직 그놈들을 완전히 정리하지 않았으니 유원에게 사람을 붙인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혼자 하는 외출이라 신이 난 건지 폴짝폴짝 토끼처럼 뛰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유원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태범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원의 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태범을 둘러싼 분위기가 순식간에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강화로 가.”

“네, 형님.”

속도를 높이던 준석은 빨갛게 바뀐 신호에 잠시 멈춰서 룸미러로 태범의 표정을 살폈다. 보스의 분위기를 보니 오늘도 쉽게 끝이 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준석은 피에 젖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한 준석은 거침없이 차를 몰았다. 도로가 한산해서 생각보다 일찍 강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화의 한 공장에 도착한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아직 한낮이지만 외진 곳에 있어 공장 안은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컴컴했다. 태범과 준석이 익숙한 발걸음으로 들어가자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던 덩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90도에 가깝게 상체를 숙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아준 태범은 덩치들이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달칵거리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인 그가 준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준석은 재빠른 눈치로 덩치들을 향해 물었다.

“그 새끼, 어디 있어.”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준석의 말에 남자들이 공장 한편에 마련된 창고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꺼내.”

“예, 형님.”

태범의 단 두 마디에 덩치들이 창고를 향해 뛰어갔다. 태범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데리고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덩치들이 태범의 앞에 남자를 무릎 꿇렸다.

“으, 으으!!!”

“조용히 해!”

재갈을 문 남자의 뒤통수를 내리친 덩치가 뒤이어 정강이를 발로 찼다.

“윽, 우으, 으!”

덩치에게 맞은 몸을 동그랗게 만 남자가 뒤늦게 태범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팔다리가 묶인 몸을 비틀거리며 무어라 소리쳤다. 하지만 재갈에 가로막힌 입에 그의 말소리는 형태가 부서져 비명만 남게 되었다.

“후우….”

눈을 길게 내리깐 채 남자를 천천히 지켜보던 태범은 짧게 줄어든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불씨를 꺼트렸다.

“최명진.”

낮은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부른 태범은 덩치 중 한 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최명진이라는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덩치가 재갈을 거칠게 벗겨냈다.

“이, 이러고도 우리 형님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막혔던 입이 자유를 되찾자 명진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그런 명진의 모습이 우스운 듯 태범은 길게 꼰 다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허리를 숙여 명진을 내려다본 태범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가만 안 있으면 쌍곤 따위가 어쩔 거지?”

“이, 이…!!”

“그리고 그쪽에서는 이미 널 포기한 거 같은데.”

태범의 말에 명진의 눈빛이 크게 일렁거렸다. 설마 하는 얼굴로 잔뜩 굳어진 명진의 얼굴이 이어진 태범의 말에 균열이 갔다.

“박 사장이 머리는 나빠도 처세술은 괜찮나 봐. 자기 목이 달아날까 눈치 빠르게 꼬리부터 자르는 걸 보면.”

“그, 그게 무…슨…!”

“차유원 알지.”

태범의 말에 머리를 굴리던 명진의 눈빛이 순간 탁한 이채를 띠었다. 차유원. 오랜만에 들어보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유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당황을 금치 못하는 명진을 내려다본 태범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차유원에 대해서 아는 거 전부 다 말해.”

명진은 태범의 눈빛을 보곤 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제가 한 짓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명진은 고개를 저으며 태범의 말을 부정했다.

“아, 아무것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차유원한테 한 짓까지, 전부 다.”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 명진의 모습에 태범의 눈에 어둠이 깔렸다.

“데리고 와.”

태범의 말에 덩치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들을 따라 명진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방치되어 있던 누군가를 발견한 명진의 눈이 크게 번쩍였다.

“흐윽…!”

그리고 그 누군가가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자신의 친구임을 깨달은 명진은 꽉 묶인 손발을 움직여 태범의 앞으로 기어갔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 사,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몸을 꿈틀거리며 제 발아래까지 기어온 명진을 내려다보던 태범의 턱 아래가 작게 떨렸다. 태범은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명진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저 몇 줄로 그 모든 일이 적혀 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눈앞의 남자는 지독하게 유원을 괴롭혔다.

“살고 싶으면 전부 말해. 너희가 차유원한테 한 짓 전부 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꼭 쥔 새까만 카드는 다름 아닌 블랙카드였다. 심플하게 권태범의 영문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카드를 꼭 쥐고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진짜 쓸 수 있는 카드겠지?”

무광의 자태를 뽐내는 블랙카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마음 같아선 카드 목걸이를 하나 사서 목에 걸고 다니고 싶었다. 근데 이러면 이 블랙카드의 멋이 안 살겠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쭉 내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지 권태범이 타고 있는 회장님 차가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딱 10초를 센 뒤에 그 길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후다닥 발을 움직여 옆 건물 1층에 있는 24시간 편의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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