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허이고… 씨 발라왔누?”
“힉.”
깜짝이야. 순간 할머니께서 욕하신 줄 알았다. 근데 씨를 다 발랐다니… 어…?
할머니의 허탈한 숨소리에 고개를 들자 딸기씨가 모두 발라진… 정말 씨 발라진 딸기가 뽀얀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딸기씨가 있는 표면이 전부 다 잘려나가 그 크던 딸기가 손가락만 했다. 게다가 수박씨도 모두 발랐는지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깔…끔하게 잘하셨네요.”
역시 칼을 잘 쓰긴 했다. 너무 과하게 써서 그렇지. 수박씨도 이렇게 바를 수 있는 거였는지, 기막힐 지경이었다. 차라리 족집게를 빌려줄 걸 그랬나.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망고는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보기 좋게 사각형 체크무늬로 잘라 뒤집은 모양새가 맛있어 보였다. 나는 가장 먼저 포크로 망고 하나를 콱 찍어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 한번 드셔 보세요. 이거 엄청 달고 맛있어요.”
이가 튼튼하지 않은 할머니껜 딱이었다. 할머니의 입맛에도 맞았는지 내가 입에 넣어드린 이후로도 할머니는 몇 번 더 망고를 드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다 다른 포크를 집어 권태범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태범 씨도 얼른 드세요.”
설마 이번에도 먹여달라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권태범이 내 손에서 포크를 가져가 수박을 입에 넣었다. 모두에게 하나씩 먹여준 다음 나도 얼른 권태범이 손수 씨 발라 준 수박을 입에 쏙 넣었다.
“헉, 너무 맛있다!”
‘수박이 너무 달콤하니 맛있다. 꿀을 발라놨나,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게다가 아직 수박 철도 아닌데!’
차유원의 몸에 빙의된 이후로 정말 좋은 것만 먹고 다닌 거 같았다. 이러다가 입만 고급되면 어쩌지 하는 하찮은 걱정도 들었다. 권태범이 한 시간가량 다듬은 과일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내 배 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권태범이 턱 밑으로 흐르는 과즙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에 딸기가 가득해 그 밑으로 과즙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에….”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지만 너무 민망했다. 누가 뺏어 먹을까 꾸역꾸역 입에 넣는 것처럼 보였을 거 아니야.
아, 쪽팔려….
“태벙 씨, 긍데-”
발음이 자꾸 새는 터라 서둘러 입을 오물거리며 욕심껏 집어넣은 딸기를 모두 삼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수박을 콕 찍으며 물었다.
“이거 씨는 대체 어떻게 바르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순간 그가 내 질문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런 의미로 나를 바라본 게 맞는 듯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냥 칼로.”
“…….”
“잘하면 되던데.”
“…….”
설마 식칼로 한 건 아니겠지…. 과도도 아니고 식칼로 이 조그만 수박씨를 바른 거였으면 이 광공놈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가야했다. 안 그런 척해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할머니의 시선이 권태범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크흠. 너도 어여 먹어.”
권태범을 이놈, 저놈이라고 부르던 할머니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러면서 나와 그를 번갈아 보는 할머니의 시선에 내 뺨이 왜인지 모르게 화끈거렸다. 내가 포크를 내려두고 티브이를 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자 권태범이 망고를 찍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망고도 먹어.”
“네에….”
그는 접시에 담겨있던 망고 조각 중에 가장 큰 가운데 부분을 내게 주었다. 이건 완전 붕어빵 꼬리를 주고, 치킨의 닭 다리를 주고, 피자 토핑이 잔뜩 있는 앞부분을 내게 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떡해…. 권태범, 진짜 나 엄청 좋아하나 봐…….
오늘 할머니 옆에 은근슬쩍 달라붙어서 안 가려고 했는데…. 내가 힐끔, 눈을 돌려 권태범을 보자 이번에는 딸기를 찍어 내밀었다.
그가 건네주는 과일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도 괜한 죄책감에 눈을 피했다. 과일도 먹고 연속극 재방송도 보고 할머니가 뜨개질하는 것까지 옆에서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 있었다.
“유원이 니 안 가누?”
“네?”
할머니의 말에 창밖을 보자 해가 반쯤 기울어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공부한다는 아가 이렇게 하루 종일 놀아도 되나?”
그게요, 할머니… 저 가, 가기 싫은데요. 이대로 갔다간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데요……. 내가 권태범의 눈치를 보며 입을 벙긋거리자 그보다 먼저 할머니가 내 등짝을 내려치며 말했다.
“이제 퍼뜩 가서 공부해라! 할미 다음 주쯤 내려가니께 그전에 또 보믄 되지!”
“그래도….”
다음 주라고 해도 오늘이 벌써 토요일이니 길어봤자 일주일이 전부였다. 내가 아쉽다는 듯 눈꼬리를 축 내리며 할머니를 보자 할머니는 남사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미는 복길 수선집 할멈이랑 잠깐 보기로 했으니께 너네도 이만 가고. 쟈는 회사도 안 다니는가 부지? 젊은 놈이, 쯧쯧.”
“할머니 진짜 가시게요?”
“그라믄 진짜로 가지 가짜로 가것냐. 아무튼, 우리 강아지 열심히 공부혀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들어가서 푹 자그라잉~”
할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내가 아쉽지도 않은지 나와 권태범을 향해 인사를 하곤 순식간에 집을 나가셨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할머니의 뒤를 쫓았지만 할머니는 정말 미련 없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셨다.
“어…….”
또다시 둘만 남은 상황에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꿋꿋이 옆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권태범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도 이만 가자.”
“…네.”
결국 그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또다시 실패해버린 나의 원대한 계획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이대로 다시 집에 돌아가는 건 실패했고. 앞으로 남은 건 윤설아와 권태범을 이어주는 것만 남았다.
***
플랜A를 실패하고 다시 권태범의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생각했다. 윤설아가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건 4월에 마카오에서 권태범의 통역가로 일할 때였다. 시간상 아마 이번 출장인 거 같고.
따라서 방해꾼인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출장에 따라가면 안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국에 남을 수 있을까?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노트에 방법을 하나씩 적어 내렸다.
1번. 아프다고 하기.
이러면 당장 최 박사님이든 누구든 불러서 확인을 할 테니, 이건 엑스.
2번. 정면 승부! 안 간다고 하기.
근데 내가 권태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칼만 안 들었지 작정하면 엄청 무섭던데. 이것도 엑스.
3번. 도망가기…?
출장을 갔을 때 도망가는 건 몰라도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이러다가 괜한 집착욕만 불러일으킨다면 윤설아 대신 지하실에 꽁꽁 묶여있게 될지도 몰랐다.
이건 완전 엑스 엑스!!
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도대체 무슨 핑계를 대냐고!!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며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문제집을 사면서 덤으로 받은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재수 좋은 재수학원]
노트 앞에 작게 난 광고에 재수학원이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어… 혹시?”
***
일어나자마자 여느 때처럼 권태범의 잠든 모습이 보이자 입술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오늘은 잠든 척만 하고, 계속 자지 말고 버텨야지!
눈이 조금 감기긴 했지만 그때마다 손바닥 사이로 손톱을 박아 넣으며 잠기운을 물리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범의 눈꺼풀이 파들거리며 그가 깨어났다. 나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크게 외쳤다.
“태범 씨! 저 재수학원 다니려고요!”
“재수학원?”
권태범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저, 11월에 수능 봐야 되잖아요! 그러려면 지금도 많이 늦었긴 한데 개강 반에 들어가야 될 거 같아요.”
“언제부터.”
“너무 급해서 오늘부터 등록해서 다니려고요. 어제 할머니랑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요.”
역시. 한국인에게는 공부 핑계가 짱이다. 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권태범이 말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
오케이. 혼자 속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기쁨의 미소가 자꾸만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해서 감추고 준비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그래서 너무너무 아쉽지만 하는 수 없이 태범 씨 출장 따라가기로 한 건 취소해야 할 거 같아요. 태범 씨 혼자-”
“왜?”
엥. 그야… 학원 다닌다니까?
하지만 차마 그렇게는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학원을 다니면 시간이 안 날 거 같다고 빙빙 둘러서 대답했다. 그러자 권태범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날 못 배운 진도는 내가 직접 가르쳐주지.”
“예…?”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게 아니고 태범 씨가 어떻게요…?”
“이미 10년도 넘은 일이지만 나도 한국대 나왔으니 그 정도야 가르쳐 줄 수 있어.”
이 인간…. 진짜 넘사다, 넘사. 그 와중에 한국대까지 나오셨어? 허, 참. 그리고 졸업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나도 수능 공부를 다시 하려니 헷갈려 죽겠는데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라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거 아니야?
“그, 그래도 학원비가-”
“그건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아… 그래요. 돈이 많으셔서 아주 좋으시겠어요. 어쨌거나 이번에도 결국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