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24)화 (24/136)

#24

고개를 돌려 권태범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께서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건 그렇고 저놈은 우쩐 일로 여길 왔대?”

“같이 살-”

“우연히 집 앞에서 만났어요!”

나는 서둘러 권태범의 입을 틀어막고 급히 할머니의 말에 대답했다. 저 아저씨, 나랑 같이 산다고 말하려던 게 분명했다. 뾰족한 눈길로 그에게 눈치를 주자 권태범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할머니 요리 먹고 싶다고 해서 제가 오라고 했죠! 하하… 다, 단골이셨잖아요!”

그런 내 말에 권태범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할머니께 말했다.

“네, 유원이 말이 맞습니다.”

“썩을 것. 내가 장사를 그만둔 게 언젠디! 시방 퍼뜩 앉기나 혀! 메뉴는 주는 대로 처먹든가 말든가 허고!”

히윽. 역시 우리 할머니가 이 세계에서 최강자였다. 권태범의 얼굴에 대고 썩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가 유일할 거 같았다.

역시 할머니한테는 절대 반항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손을 걷어붙이고 할머니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텐디 방에 들어가 쉬어!”

“그래도….”

“쓰읍. 야, 이눔아. 뭐 허냐. 애 데리고 들어가지 않고.”

“하,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주방에서 내쫓은 것도 모자라 뒤에 서 있는 권태범을 ‘놈’이라고 부르며 나를 데리고 들어가라 명령했다.

결국 주방에서 쫓겨나 거실로 나왔다. 할머니 몰래 물티슈를 집어 들어 가구와 얼룩진 바닥을 닦으려 했지만 권태범에게 마저 일감을 빼앗겨 버렸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을 조심스럽게 닦는 권태범의 뒷모습을 보며 ‘광공’의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렸다. 저 모습이 과연 광공다운 행동일까. 캐릭터 붕괴가 됐나?

“아…. 맛있는 냄새.”

창문을 따라 맛있는 냄새가 거실까지 솔솔 풍겨왔다. 권태범의 집에서 먹는 깔끔한 한정식도 좋았지만 그래도 집 밥이 최고였다.

밥이 다 됐다는 전기밥솥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힐끔,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상을 차렸다. 뽀얀 쌀밥을 뒤적거리는 할머니는 다행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니 놈도 맛나게 먹고!”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작은 간이 식탁에 벽돌같이 두툼한 계란말이와 칼칼한 김치찌개,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육볶음이 한가득 차려졌다. 짧은 순간 뚝딱, 하고 마법같이 많은 요리를 완성한 할머니의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와-! 역시 할머니 짱! 진짜 맛있겠다.”

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함박웃음을 짓자 할머니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태범 씨, 맛있게 드세요.”

“그래. 너도.”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앉은 권태범에게 작게 속삭였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진수성찬이라 어떤 반찬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일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노르스름하니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두툼한 계란말이를 집어 들어 케첩에 폭 찍은 다음 입에 가져갔다.

진짜 맛있겠….

“욱- 우웩-.”

“차유원!”

“아이고! 유원아!”

속이 왜 이러지? 계란에서 나는 묘한 비린내에 속이 뒤틀렸다. 바로 맞은편에서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잠깐 이상- 읍!”

일부러 더 괜찮은 척을 하며 입을 크게 벌리는데, 아까보다 계란 비린내가 역하게 느껴졌다. 숨을 꾹 참아도 코끝에 스며든 냄새가 지독해 헛구역질이 나왔다.

와, 씨. 안 되겠다.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속이 울렁거리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밀려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 커버를 들었다.

“우웁-”

“차유원!”

“시방, 내 새끼! 이게 무신 일이여!!”

뒤에서 권태범과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쫓아왔다.

“우엑- 흐… 웁…!”

어제저녁에 먹은 밥은 이미 소화가 된 건지 입에서 쓴 위액만 쏟아졌고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혼자서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하고 있자 권태범이 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태, 윽, 들어오지, 웁, 마세요…! 더, 더러, 으윽-”

손을 뒤로 저으며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권태범은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 주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토해.”

그렇게 한참을 변기를 부여잡고 눈물을 쏟아 부은 결과 어느 정도 속이 가라앉았다.

“이제 괘, 괜찮아요….”

입 안을 헹구고 거울에 비친 권태범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의 이마가 잔뜩 주름져 있었다. 꽤나 심각한 표정에 지금 당장이라도 최 박사님을 이곳으로 부를 기세였다.

“어제 저녁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그렇다고 하기엔 속에서 나온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나도 알고 권태범도 알지만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고 화장실을 나왔다.

“아이고, 아가!”

“할머니.”

“우찌 된기고. 체한 거 아녀?”

“어제 식사하고 바로 잤더니…. 하하, 많이 걱정하셨어요?”

“어휴. 그람 놀라지, 안 놀라! 이 할미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눔아!”

할머니는 혈색이 조금 돌아온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할머니 죄송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하이고. 사내새끼가 이리 비리비리해서 어디에 써먹을꼬. 쯧쯧.”

할머니는 내 마른 몸을 훑어보시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안 되것다. 할미가 당장 내일 약방 가서 개구락지랑 잉어 달여 올 테니까 그거라도 먹어야 쓰것지, 안 되긋어.”

개구리랑… 잉어? 으으, 계란도 비려서 죽을 뻔했는데 그걸 어떻게.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보약 맛에 고개를 저었다.

“하, 할머니! 저 잠깐 그런 거예요. 그리고 태, 태범 씨가 등 쓸어줘서 이제 싹 다 나았어요.”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들어 팔 근육을 만들어 보았지만, 큰 후드티의 소매가 팔을 따라 훌렁 내려가 마른 손목만 더 도드라졌다.

“할머니… 그래도 개구락지는 싫어요….”

내가 간절하게 할머니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볼록 내밀자 할머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먹어야지. 이래가지고 결혼은 하것냐.”

쯧쯧 혀를 차며 속상해하시는 할머니께 말하고 싶었다. 차유원이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놈이 바로 옆에 있다고.

“일단 알것다, 이눔아. 그나저나 유원이 땀시 밥상은 일단 치웠는디 우쩐댜.”

내가 화장실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할머니는 밥상을 다 치우셨는지 한 상 가득 차려 있던 반찬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할머니는 내 뒤에 서 있던 권태범에게 밥을 먹기도 전에 밥상을 치운 게 미안하셨는지 이것저것 담아놓은 반찬통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이거라도 가져가서 그때 그 시커먼 수염 달린 그놈이랑 나눠 먹어.”

“…감사합니다.”

권태범의 손에 들린 꽃무늬 반찬통이 너무 안 어울렸다.

“푸흣.”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곧장 권태범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웃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 할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얼굴이 더 뽀얘지셨는데 개구락지는 우리 할머니가 드셨나?”

“그라믄 못 지낼 이유가 뭐 있간디?”

할머니의 팔짱을 끼며 살갑게 웃자 할머니는 그런 내 손을 토닥이며 웃으셨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마주 잡고 거실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은 권태범이 현관 앞에 두었던 과일 박스를 들고 왔다.

“할머니, 이거 망고랑 딸기랑 수박! 태범 씨가 할머니 드린다고 사 왔어요.”

“이 앞에서 만났다믄서 우찌 안다냐?”

“뭐… 뭐냐고 제가 물어봐서 그렇죠! 안 그래요, 태범 씨?”

내 말에 권태범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할머니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와 권태범을 번갈아 보셨다. 심장이 쿵쿵 뛰고 딸꾹질이 튀어나올 거 같았지만 꾹꾹 눌러가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여간 우리 할머니 장난 아니었다. 가게 이름부터 [욕쟁이 할머니의 정통 맛집 1호점]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라믄, 니가 함 닦아서 가져와 봐라.”

“하, 할머니…? 그냥 제가 할게요.”

“씁, 얌전히 있어.”

그래도 그렇지 우리 광공님을 무슨 종놈 다루듯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는 할머니에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저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아니 권태범은 또 왜 저래? 비장한 눈으로 과일을 가져가는 그의 표정에 나는 불안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

“저… 태범 씨, 아직… 멀었나요?”

칼을 쓰는 일이라면 여기서 누구보다 전문적일 텐데, 30분이 지나고서도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권태범에 고개를 길게 빼어 그를 불렀다.

“…금방 갈게.”

분명 10분 전에도 그러셨던 거 같은데요.

뭔가 하는 것 같지만 간간이 물을 트는 소리만 나는 터라, 권태범이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거 같았다. 할머니는 뭘 그렇게 궁금하냐며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광공님이 우리 집 주방에서 저러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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