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 이거 엄청 달고 맛있는 건데 너도 먹을래?”
나는 다시 돗자리에 철푸덕 앉아 그릇을 옆에 내려놓고 백호의 손을 잡았다. 그런 내 모습에 순간 백호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싫어? 이거 엄청 비싼 거야. 태범 씨가 나만 먹으라고 했는데 너한테 특별히 양보하는 거란 말이야.”
나만 먹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샤인 머스캣이 그만큼 특별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기가 아니어서 그런가. 재차 샤인 머스캣을 내밀어도 백호는 입을 꾹 다문 채 잔디밭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알았어. 다음에 만날 땐 고기로 준비할게….”
‘생고기를 어떻게 빼돌리지.’ 하고 머리를 굴리며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당연히 차갑게 얼음이 낀 샤인 머스캣을 생각했는데 손끝에 부드럽고 따뜻한 솜뭉치가 닿았다.
“으응?”
그 감촉에 고개를 돌리니 엄청 조그맣고 오동통한 새끼 호랑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 귀엽다…!”
“끄흥!”
아기 백호는 두 앞발로 샤인 머스캣을 쥔 채 어른 백호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작게 울었다.
“귀여워… 너는 언제 왔어? 설마 큰 호랑이 따라서 온 거야?”
내가 아기 백호를 안아 뺨에 대고 얼굴을 비비자 아기 백호가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보송보송하고 따끈따끈한 게 너무 귀여웠다.
하품을 하는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을 보니 요 귀여운 아기 백호가 내 샤인 머스캣을 훔쳐 먹은 모양이었다. 근데 차가워서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날 텐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기 백호의 배를 살살 문지르자 백호는 내 손길이 좋은지 배를 까뒤집고 그릉그릉한 소리를 내었다.
“히히 좋아?”
“쿠응! 크으응!”
내 말을 다 알아듣는 신통방통한 호랑이였다. 더 해달라며 아직 완전히 나지 않은 유치로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가 키우고 싶…다. 어…?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며 눈앞의 아기 백호가 사라질까 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배, 백호야, 나 얘 주면 안 돼?”
내가 부탁이라고 무릎까지 꿇으며 백호에게 말했다. 그러자 백호는 눈을 가늘게 해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큰둥한 백호의 반응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내가 못 미더운 건가?
“내, 내가 잘 키울 수 있어. 정말이야. 밥도 엄청 잘 챙겨줄게. 태, 태범 씨한테 말하면 삼시세끼 고기도 사주고 그럴 거야!”
아… 맞아. 태범 씨는 이제 곧 윤설아랑 만날 텐데….
순간 울적해진 마음에 고개를 숙이니 아기 백호가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크으?”
“진짜 너… 너무 귀여워….”
울적해진 마음도 잠시, 이 작고 말랑한 아기 백호를 보니 기분이 살랑거리며 행복해졌다. 이 백호와 함께라면 어떤 것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렁였다.
“내가 알바라도 할게! 어, 엄청 열심히 할게! 그래서 절대 굶기지 않을 테니까 내가 키우면 안 될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아기 백호를 품에 꽉 안아 들자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아, 안 돼!”
금방이라도 백호가 내 품에 안겨있는 아기 백호를 뺏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백호에게서 등을 돌리며 아기 백호를 꽉 껴안았다.
“크흥-!”
“흐읏.”
처음 듣는 백호의 큰 울음소리에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내 볼을 할짝이는 이 어린 생명체가 너무 탐이 났다.
나는 결국 무서운 얼굴의 백호에 맞서 아기 백호를 내 후드티 안에 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후드티 안으로 숨긴 아기 백호의 따뜻한 숨결이 뱃가죽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더더욱 이 아기 백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나는 아기 백호를 꽉 껴안으며 겁도 없이 어른 백호에게 소리쳤다.
“미, 미안해! 그래도 얘는 안 돼! 싫으면 너도 같이 살아!”
***
“가, 같이 살아…! 헉!”
또 호랑이 꿈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나! 설마 나 복권 당첨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에 고개를 숙여 텅 빈 품을 바라보자 아기 백호의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이 허해졌다.
“아기 호랑아….”
잠이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며 나타난 권태범은 가장 먼저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열이 조금 있는 거 같은데.”
갑자기 머리에 들이민 체온계를 순간 총으로 착각해 깜짝 놀랐다. 체온계는 38.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져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요! 정말 하나도 안 아픈데….”
오늘은 할머니를 보러 가기로 했다. 과일도 잔뜩 사고 어차피 가져온 짐도 얼마 없으니 그대로 할머니 옆에 붙어있을 예정이기도 했다.
혹시 눈치라도 챘나? 싶은 마음으로 권태범을 올려다보자 잠시 생각에 잠긴 권태범이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최 박사 올라오라고 해.”
“태범 씨…? 저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요?”
“네가 의사야?”
씨… 가만 보면 권태범도 사람 말 더럽게 안 들어. 내가 고개를 붕붕 젓자 권태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사 한 대 맞고 가.”
“주사…. 네에….”
주사라는 말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권태범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머니한테 보내줄 거 같았다. 한숨과 함께 알겠다고 대답하자 권태범은 그제야 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일을 시작했다. 그런 권태범의 모습을 침대에 누워 구경을 했다. 이제 못 볼 얼굴인데 지금 많이 봐두자.
‘그동안 잘생긴 얼굴 많이 봐서 행복했어요. 아쉽지만 나는 원래 내 삶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태범 씨는 윤설아 씨랑 행복하게 잘 사세요. 이번에는 감금. 납치. 집착 이런 단어와는 멀어지시고.’
지금 나한테 해준 것처럼만 윤설아에게 해주면 그녀는 엄청 행복한 여자가 될 거 같았다. 권태범의 얼굴이랑 눈빛이 쪼금 무섭긴 하지만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저, 태범 씨.”
“왜.”
서류를 넘기던 권태범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요. 새삼 엄청 잘생기셨네요.”
“꼬시지 말라니까.”
권태범은 피식 웃더니 시선을 돌려 다시 서류를 읽어나갔다.
‘아깝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보면 볼수록 너무 잘생기고 잘난 권태범을 바라보며 이불 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진짜 현실에는 왜 이런 사람이 없는 걸까….’
내가 입 안 살을 잘근거리며 발버둥을 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권태범의 말에 처음 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애 상태 좀 확인해 봐. 열이 조금 있는 거 같아.”
“네, 전무님.”
전무님…? 그냥 보스…가 아니었단 말이야?
처음 들어보는 권태범의 호칭에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열 한 번 재겠습니다. 사모님.”
“쿠, 큽.”
형수님에 이어서 이젠 사모님까지 됐네. 미간을 콱 찌푸렸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체온만 쟀다.
“열이 조금 있으시네요.”
“못 나갈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내가 경계 어린 눈으로 의사 선생님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네, 처방전대로 약만 잘 드시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럼 주…사는요?”
“이 정도면 굳이 안 맞으셔도 될 거 같네요.”
봤죠?
마치 그렇게 말하는 눈으로 권태범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와 권태범을 번갈아 보던 최 박사님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아, 혹시 임신 가능성은 있으신가요?”
“예?”
무슨 개똥 같은 소리를….
“저 남자인데요?”
“오메가 아니십니까?”
“…그건 맞지만.”
아, 맞아. 여긴 남자여도 임신할 수 있었지. 진짜 어렵다. 오메가여도 딱히 페로몬이라는 향에 대해서 모르겠고. 히트 사이클? 그것도 첫날만 몸이 조금 이상했지 그 이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검사를 받아 보시-”
“에이.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튼 저 빨리 할머니 보러 가고 싶어요. 태범 씨도 그랬잖아요!”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옷장으로 걸어갔다. 두툼한 겉옷을 걸치고 권태범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최 박사님을 보냈다.
“태범 씨, 얼른요. 저 할머니 빨리 보고 싶어요.”
“그래. 가자.”
또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한 내 눈을 본 권태범이 손짓으로 준비를 지시했다.
겨울의 끝 무렵이 훌쩍 지나서 날씨가 따뜻했지만 열이 오른 관계로 두꺼운 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장갑까지 끼워주는 다정한 행동에 마음이 울컥했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차유원의 집과는 걸어서 30분. 차로는 겨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 거리였으면 맨날 와도 됐을 텐데.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권태범 때문에 할머니도 못 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미워졌다.
흥, 하고 권태범에게서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달려갔다.
“할머니! 저 왔어요!”
“시방, 이게 누구여! 우리 강아지 아니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에 있던 할머니가 버선발로 나와 나를 반겼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공부는 잘하고 있는 겨?”
거친 손으로 내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은 여전히 따스했다.
“열심히는 하고 있어요.”
생각만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는 하고 있다.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권태범에게서 문제집을 빼앗긴 적도 있었다. 결국 그와 합의 끝에 하루에 8시간만 공부하는 것으로 정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