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22)화 (22/136)

#22

“쿠, 쿨럭, 저… 저요?”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 권태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도 같이 간다고? 어딜…? 설마 그… 홍콩은 아니겠지…? 내가 무슨 소리냐며 눈을 깜빡이자 권태범은 당연하다는 듯 턱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아니면 누구겠어, 유원아.”

권태범은 그렇게 알라며 내게서 시선을 떼고 신문을 읽었다. 그나저나 홍콩이라니….

‘눈치 봐서 절대. 절대 못 간다고 해야겠다. 내가 가면 윤설아는 어떡해!’

그 뒤로 은근슬쩍 권태범을 피해 다니며 도망치기 바빴다. 도망치는 루틴이야 심플했다. 아침엔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무리 날 흔들어도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낮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유리 온실에 콕 박혀 있었고 저녁엔 어쩔 수 없이 그와 저녁을 먹었지만 그 뒤론 방에 들어와 일찍 잠들, 아니, 잠든 척을 했다. 콕콕 얼굴에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억지로 하품을 했다.

‘봐라, 광공이여, 난 지금 엄청 피곤한 상태다!’

“오늘도 일찍 잘 모양이지?”

“하음…. 그러게요, 요즘 왜,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네요, 하하.”

하품을 하며 어색하게 입을 가리자 그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사람처럼. 권태범 특유의 관찰하는 시선을 피하며 마지막 남은 동그랑땡을 입에 넣었다.

“그, 그럼 잘 먹었습니다-”

“앉아.”

“넵.”

저렇게 권태범의 기분이 저조할 땐 얌전히 그의 말을 듣는 게 상책이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침을 꿀꺽 삼켰다.

“며칠 동안 네가 왜 그러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

‘눈치… 챘나. 에이. 한국 사람이 여행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설마 내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겠-’

“나랑 홍콩에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푸흡-”

이 귀신같은 놈. 입을 급히 틀어막는 바람에 손바닥에 묻은 침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런 내가 더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얼굴에 기분이 상했다. 씨이,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진짜 그거 때문이야?”

권태범이 헛웃음을 터뜨리고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았다. 결국 들켜버리고만 이 상황에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마, 맞아요. 저 그… 홍콩 모, 못가요.”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그의 모습이 마치 흥건한 피를 닦는 소설 속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 목구멍을 비집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혀를 꽉 깨물며 겨우 참아냈다. 무섭지만 할 말은 해야지. 홍콩엔 갈 수 없어. 내가 가고 싶다고 가서도 안 되고.

“저 고, 고소 공포증도 있고요. 아! 여권도 없어요. 그리고 영어랑 중국어 한마디도 못 해요. 땡큐, 하이, 쉐쉐 이 정도밖에 모른다고요!”

듣기 싫다는 듯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권태범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주절주절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갔다.

“저 진짜 죽는다니-”

싱크대에 그릇들을 내려놓고 몸을 돌린 권태범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를 올려다보며 울먹이자 권태범은 그런 나를 쓰윽 내려다보았다.

“고소 공포증이면 배로 이동하지. 여권은 이미 만들었고. 네가 영어나 중국어를 쓸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됐지?”

“저, 태범 씨…? 그게 아니라 제가 또 폐-”

“폐소 공포증 있다는 소리 할 거면 당장 네 방문부터 떼어줄까?”

씨이…. 이 미친놈은 진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결국 나는 권태범을 잡은 손을 살며시 풀고 파들거리는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폐…를 끼치는 거 같아서요. 저, 저는 너무 좋죠, 하하. 여권은 또 언제 준비하셨는지…. 참 능력도 좋으시네요… 남의 여권을 본인 확인도 없이 척척 만드시고…. 하하….”

지금 당장이라도 내 방문을 똑 하고 떼어낼 거 같은 표정에 열심히 웃었다. 그래, 웃자. 웃는 것만이 살길이다. 권태범은 방긋방긋 웃는 나를 지나쳐 냉장고로 향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냉동실에서 폭이 큰 그릇을 꺼내더니 내 품에 안겨주었다.

“이게 뭐… 헐!”

뜬금없이 뭘 주는 건가 싶었는데 샤인 머스캣이었다.

“와! 이거 엄청 비싼 건데.”

센스 있게 살짝 얼려놓은 것까지! 막무가내로 나를 데려가려는 권태범에게 살짝 짜증 났었는데 그런 마음이 싹 다 사라질 정도로 샤인 머스캣이 너무 반가웠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샤인 머스캣 한 송이가 만 원이 훌쩍 넘어 생일 때나 먹었었다.

그렇게나 귀한 걸 이렇게 한가득….

내가 감동에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늦은 시간이니까 몇 개만 먹고 내일 낮에 먹어.”

“태범 씨이….”

“먹고 양치는 꼭 하고. 안 그럼 이 썩는다.”

권태범이 내 볼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씨… 황제 감금이 이런 거구나…. 감금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이런 거라면 너무 좋다….

나는 알이 가장 큰 샤인 머스캣을 집어 들어 입에 쏙 하고 넣었다. 시원하고 상큼하고 달콤한 게 정말 내 입에 딱이었다. 맨날 마감 세일 할 때 말라비틀어지고 알이 몇 개 빠져있는 포도만 먹다가 이렇게 실한 샤인 머스캣을 먹는 건 내 인생 처음이었다.

“마이써… 어흑…. 너무 맛있어….”

진짜 주책이다, 나…. 맛있는 걸 먹으니까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그러고 보니까 차유원의 할머니도 생각났다. 맛있는 걸 먹으면 가족부터 생각난다더니, 어느새 차유원의 할머니는 정말 내 친할머니가 된 것처럼 정이 들어 버렸다.

할머니 잘 계시려나…. 매일 아침 할머니와 통화를 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달랐다. 그리움이 넘실넘실 흘러넘칠 것 같았다. 이 불효막심한 놈. 뒤늦게 떠오른 할머니의 존재에 샤인 머스캣이 들어 있는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얼굴을 감싸 안았다.

“흐… 흐윽….”

“…차유원. 너 울어?”

“하, 할머니…. 흐으윽. 흐헝….”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며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흑, 나 너무 머, 못됐, 흐엉… 할머니 보고 시, 흐흣, 흐….”

입 안에서 달콤하게 흐르는 과즙과 눈물, 콧물이 섞여 짭짤한 맛이 났다.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손등이 떠올랐다. 내게 돈을 쥐여 주며 웃던 할머니의 얼굴이 생생했다.

“흐…. 태버, 흑 씨. 나, 집에 가고 싶, 시퍼요.”

나는 그릇을 식탁 위로 쭉 밀어내며 권태범에게 다가갔다.

“나 우리 할머니…흐…. 그때도, 흑, 못 보고 그냥 와, 왔는, 흐헝….”

눈물로 시야가 가려졌다. 권태범의 얼굴이 흐릿해져 그의 표정이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최근 들어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고, 사소한 것에 너무 슬펐다. 오메가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혼자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아무튼 지금은 너무 슬펐다.

“유원아.”

권태범은 그런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울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권태범은 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싫어했다. 그것을 알기에 울음을 그쳐야 했지만 자꾸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그치기가 어려웠다.

“죄, 죄송해요. 흑, 근데 갑자기 너무 슬퍼져서….”

권태범은 내 눈물을 닦고 이마를 쓸어 올려주었다.

“널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태범, 흑, 씨…. 나 할머니… 흐으….”

누군가 나를 토닥여주자 눈물이 더 세게 터져 나왔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더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알겠어.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할머님 뵈러 가자.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과일도 잔뜩 사 들고.”

“흣, 네에….”

“여기서 더 울면 머리 아파. 그만 뚝.”

권태범은 붉어진 내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일 할머니를 볼 수 있다는 말에 북받쳤던 감정이 조금 차분해지며 마음이 점차 안정되었다. 뒤늦게 어린애처럼 권태범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는 사실이 쪽팔렸다. 길게 나온 코를 그가 건넨 휴지로 닦고 퉁퉁 부은 얼굴을 가렸다.

“태범 씨…. 나 이제 졸려요….”

일정한 속도로 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에 눈이 끔뻑끔뻑 감기고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밥 먹고 바로 자면 안 되는데 요즘 내 일상은 항상 이러한 패턴의 반복이었다. 매일 자는 척하면서 잠들어서 그런가, 아직 이른 저녁이었는데도 잠이 왔다.

“내가 애를 데려온 건지. 애인을 데려온 건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권태범의 한숨과 함께 무슨 말이 들렸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따뜻한 품에 파고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그 품에 기댔다.

내가 이대로 잠들면 태범 씨가 나를 방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일어나면 할머니를 보러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어! 호랑아!”

오랜만에 백호가 나를 찾아왔다.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얼굴에 열심히 먹고 있던 샤인 머스캣을 내려놓고 호랑이를 반겼다.

“푸하- 아, 간지러워!”

호랑이도 내가 많이 반가웠는지 만나자마자 연신 내 얼굴을 핥으며 크흥- 하는 울음소리를 내었다.

“잘 지냈어? 그때 거긴 괜찮은 거야?”

간신히 백호를 떼어놓고 확인하니 목덜미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래도 길게 난 상처 주변이 이미 아문 것을 보니 아마 오래전에 생긴 상처 같았다.

“에효… 다음부턴 그냥 무조건 도망가. 도망만이 살길이야. 괜히 너보다 쎈 사람한테 덤볐다간 너만 손해야. 알겠지?”

아님 나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뒷일을 도모해도 되지만, 저 백호가 방긋방긋 웃을 일은 없어 보였다.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조언이라고 귀에 입을 갖다 대고 말하자 백호는 그런 내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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