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21)화 (21/136)

#21

태범이 고민에 쌓여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쯤, 어느새 차가 낡은 빌라 앞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태범은 아스팔트 위로 새까만 구둣발을 내디디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저를 뒤따라오는 부하들을 제지하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른 태범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현관 입구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 태범은 미간을 찌푸리고 과일을 피해 거실로 발을 뻗었다.

곧장 유원의 방으로 걸음을 옮긴 태범은 활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잠이든 유원을 발견했다. 다행히 몽유병 증상이 일어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달콤하고도 상큼한 유원의 페로몬 향이 방 안에 진동했다. 그 안으로 발을 뻗은 태범은 최대한 숨을 참으며 잠든 유원에게 다가갔다.

“유원….”

“……으…. 엄마아… 아빠아….”

순간 태범은 뻗은 손을 멈칫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든 유원은 꿈에서 부모님을 만났는지 그들을 애타게 부르며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잡으며 우는 유원의 베갯잇이 축축했다.

“하아….”

안도감과 분노와 안쓰러움이 뒤섞여 공존하는 제 감정을 한숨으로 날린 태범이 눈물로 엉망이 된 유원의 눈가를 문지르며 그를 불렀다.

“차유원.”

꿈에서 훌쩍이던 유원은 사람의 온기를 찾아 태범의 품에 파고들었다. 눈물에 젖은 그의 숨에서 달큼한 향기가 났다.

태범은 이 순간에도 그를 향한 갈망에 허덕이는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다. 그는 씁쓸한 입 안을 훑으며 익숙한 손길로 유원을 안아 들었다.

***

오랜만에 꿈에서 부모님을 만났다. 항상 가게 일로 바쁘셨던 부모님이었는데, 꿈속에서의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데리고 여행을 가셨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부모님의 얼굴이 하얀빛으로 감싸여 잘 보이진 않았지만, 우리 부모님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간 바다는 엄청 깨끗하고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었다. 마치 우리 세 사람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곳에서 부모님과 같이 밥도 먹고 모래성도 만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물속에 들어간 부모님은 무엇 때문인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수영을 하시나 싶어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지만 부모님을 덮칠 듯이 다가오는 파도에 나는 목 놓아 그들을 불렀던 것 같다. 엄마, 아빠! 아무리 소리치고 그들을 불러도 부모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그들을 덮칠 듯 밀려오는 파도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차유원!”

“…흣.”

눈을 뜨자 권태범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으앗, 왜, 왜 또 이렇게 가까워. 눈을 질끈 감자 그의 한숨 섞인 숨결이 눈가에 닿았다 잘게 부서져 내렸다.

“차유원.”

“어, 언제 왔어요?”

어…? 꿈이었나?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는 너무 익숙한 권태범의 방이었다. 할머니 집에 간 건 다 꿈이었나? 아닌데. 무슨 바다에 간 꿈을 꾼 것 같은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기억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일찍 온다더니 정말 일찍 왔네? 반가운 마음에 그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진짜 일찍 왔네요, 태범 씨?”

그의 손을 잡고 양옆으로 흔들며 반갑게 웃자 권태범이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다시 꾹 다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저 꿈 꿨나 봐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쫑알쫑알 떠드는 내 입술을 바라보던 권태범이 입을 열었다.

“말도 없이 왜 나갔어.”

“네?”

“차유원.”

“…네에?”

싸늘한 분위기에 흠칫 몸이 굳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자 조금 지저분해진 권태범의 방이 보였다. 바닥에 물이 흥건한…. 헉, 꿈이 아니었어?

“헉… 저, 태범 씨, 그게, 그러니까요….”

일단 엉망이 된 방을 치우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걸레를 가져오려 문밖으로 향하는데 권태범이 내 손목을 꽉 쥐었다.

“어디 가.”

“네?”

“또 어디로 도망치려고.”

그렇게 말하는 권태범의 눈이 살벌했다. 눈빛으로 나를 옥죄이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무서웠다. 큰일 났다. 이건 완전 비상이었다. 잠자는 사자인지 호랑이인지의 코털을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광공의 스위치가 올라갈 것 같은 분위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읏.”

무거운 분위기를 비집고 입 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자 권태범이 조금 놀란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다.

“시발.”

“저… 미안해요. 그게 머리가 너무 긴 거 같아서, 태범 씨처럼 머리하고 싶… 아, 청소는 제가 깨끗하게-”

권태범의 입에서 나온 욕설에 지레 겁먹어 변명을 내뱉기 바빴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버벅거리며 수많은 이유를 나열했다.

“집엔 갑자기 왜 갔어.”

“네? 아….”

아, 맞아 나 말도 없이 몰래 나갔었지. 그것도 새까맣게 잊었네. 이거 어디 뷰티인사이드 다음에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찍나…. 이거 왜 이래?

“머리가 너무 길어서 미용실에 가려다 잠깐 들렀어요. 근데 태범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 맞아, 우리 할머니는요?”

할머니 보고 싶었는데. 조금 울적한 얼굴로 머리카락에 찔려 아픈 눈을 비볐다. 그러자 권태범이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할머님은 친구분네 집에 가셨어. 그리고 다음부턴 말없이 나가지 마.”

“죄송해요. 걱정 많이 했어요?”

너무 편하고 다정한 나머지 그의 본성을 잊고 있었다. 이 사람 집착광공이었지.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어도 제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하니 그럴 만도 하지.

“앞으로 꼭 말하고 나갈게요. 태범 씨 오시기 전에 갔다 오려고 했는데 깜빡 잠이 들었어요. 미안해요.”

권태범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내가 어질러 놓은 방을 치워야 할 것 같았다. 손을 걷어붙이며 그에게 말했다.

“저… 어지른 건 제가 지금 치울게요.”

“됐어. 밥 먹자. 일단 먹고 나서 얘기해.”

마른 내 팔을 내려다보던 그가 내 손을 잡고 침실을 나섰다. 함부로 남의 방에 들어와 어지럽히기까지 해서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이상했다.

아슬아슬했던 그 날의 일이 끝이 나고 그 뒤로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던 집 안엔 늘 누군가 상주해 있었고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이 많아진 것이 새삼 느껴졌다.

“후우….”

이래 가지곤 윤설아가 나타나기 전까지 꼼짝 못하겠다. 키스까지 한 사이지만… 어차피 그녀가 나타나면 물거품이 될 관계였다. 침대 밑에 숨겨둔 노트를 괜히 뒤적거리며 점점 다가오는 시간에 아쉬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워…?’

“미쳤어.”

불쑥 튀어나온 감정에 머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뭐가 아쉽다는 거야. 기억도 안 나는 그날을 권태범과 함께 보내서? 아니면 뭐, 이제 와서 권태범을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고개를 붕붕 저으며 머릿속에 가득 차 들어가는 그의 얼굴을 지워 내려 애썼다.

“정신 똑바로 차려. 권태범이 누군지 너도 잘 알잖아.”

소설 속에서의 그의 모습과 비가 퍼붓던 그날, 피에 잔뜩 젖은 그의 모습. 다정하긴 하지만 순간순간 나를 가둬두고 싶다는 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 연쇄적으로 떠오른 모습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더 이상은 그와 가까워지면 안 됐다. 권태범은 여전히 위험한 사람이었으니까.

***

“태범 씨, 그 출장은 언제 가세요?”

다짜고짜 출장 언제 가냐는 내 말에 커피를 마시던 권태범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3월 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슬슬 갈 준비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권태범과 윤설아가 만난 건 새하얀 벚꽃이 비처럼 휘날리는 날이라고 소설에 나와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4월이 코앞에 다가왔으니, 권태범이 출장을 떠나면 두 사람은 그곳에서 만날 것이다.

“내가 출장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아, 맞아. 권태범이 나한테 말해준 적은 없었지. 순간 허를 찌르는 권태범의 말에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요. 태범 씨는 엄청 조, 좋은 회사 다니니까….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데 지, 집도 엄청 좋고 그래서 당연히 높은 사람이고, 음… 그러니까 당연히 출장도 자주 가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횡설수설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미 나와 버린 말을 주워 담기에 이미 너무 많이 흘러버린 뒤였다.

“아직 어, 엄청 젊은데 막 사람들도 거느리시고 태범 씨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머, 멋있으세요. 자, 잘생긴데다가 능력도 좋으시니 누가 봐도 일등… 신랑감이시네요!”

내가 서둘러 양손 엄지를 치켜세우고 열심히 해명하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권태범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더 해보라는 듯 눈썹만 꿈틀거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권태범은 긴말을 끝으로 숨을 헐떡이는 내게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네? 뭐가요?”

혹시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럼 나야 땡큐지.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권태범이 먼저 말을 꺼내주니 다행이었다. 나는 얼른 이어서 말하라는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너도 같이 갈 거야. 조만간 출국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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