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20)화 (20/136)

#20

요즘 들어 잘 먹지 못하는 나 때문에 아저씨는 매일 같이 색다른 메뉴를 연구했다. 아저씨는 오늘도 처음 보는 음식을 내 앞에 놓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부 양배추 닭고기 죽입니다.”

이름이 참 길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아저씨는 작은 그릇에 담긴 밑반찬을 놓아주며 말했다.

“요즘 잘 못 드신다고 해서, 최대한 속이 편하면서도 영양가 있게 만들어 봤습니다. 얼른 드셔 보세요.”

이제 막 이유식을 시작하는 아기들이 먹을 법한 음식이었지만 아저씨의 정성을 생각해서 숟가락을 들었다.

밑반찬까지 모두 비워내고 산책 겸 소화를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푸릇푸릇한 잔디를 밟으며 이제는 익숙해진 권태범의 집 주변을 거닐었다. 몸을 움직이자 너무 많이 먹어 빵빵한 배가 조금씩 가라앉고 소화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유원은 그동안 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겨우 마당 몇 바퀴 돌았다고 다리도 저렸다. 하는 수 없이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권태범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늘은 뭐 좀 먹었다던데.

그새 권태범의 귀에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죽을 두 그릇이나 먹고 후식으로 조각 케이크까지 먹었다는 걸 다 알았나…?

“네에.”

부끄러움에 말끝을 늘이며 대답하자 권태범이 말했다.

-잘했어. 오늘 일찍 들어가니까 이따 집에서 보자.

“네에. 화이팅 하세요.”

-그래.

말랑말랑해진 기분에 두 뺨을 문지르며 올라간 입꼬리를 숨겼다. 진짜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서 설레게 하는지. 정말 정신줄을 단단히 잡지 않으면 그에게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붕붕 젓고 두 뺨을 아프지 않게 탁탁 쳤다.

“정신 차리자. 어젠 나도 모르게 그랬지만 앞으로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돼.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했어.”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반복해서 말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살짝 긴 것 같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머리를 조금 잘라야 할 거 같은데.”

이 주변에 미용실이 있던가.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끝을 매만지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 길로 방에서 나와 권태범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 음…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맨날 포마드 형식으로 머리를 올리는 권태범이 떠올랐다.

그게 조금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섹시해 보이기도 하고….

아빠를 따라 하고 싶은 어린애처럼 권태범이 하는 건 뭐든지 다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오, 여기 있다!”

욕실과 이어진 화장대 위에 헤어 왁스가 놓여 있었다. 이거 써도 되겠지? 누가 있는지 슬쩍 문 앞을 살핀 후 문고리를 잠갔다. 욕실 안으로 들어가 왁스를 손에 가득 묻혀 앞머리를 중심으로 쓱쓱 문질렀다.

“티브이 보니까 이렇게 하는 거 같던데.”

손에 찐득하게 달라붙는 왁스의 느낌이 기분 나빴지만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하지만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엉망이 되어가는 모습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머리는 점점 떡이진 채 갈라지고 팔은 저려왔다. 손바닥에 번질번질 묻어있는 왁스는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거울에 비친 차유원이 아무리 귀엽고 잘생겼다고 해도 남자는 머리빨이 절반이다.

머리카락이 쩍쩍 갈라진 거울 속 남자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결국 포마드 머리는 포기하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남의 방에서 샤워하는 게 조금 그랬지만 같은 남자끼리 뭐 어때.

어차피 내 방에서 씻은 것보다 여기서 씻은 적이 더 많았다. 뜨거운 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를 감고 내친김에 목욕까지 마치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니 원래도 반곱슬인 머리가 힘을 받아 더 복슬복슬해졌다. 눈 밑을 찌르는 머리카락에 입술을 꽉 깨물다 주먹을 꽉 쥐었다.

“잠깐 나갔다 오자. 지금 감금당한 것도 아닌데 나가는 게 뭐가 무섭다고 그러냐, 차유원.”

나간 김에 할머니도 뵙고 올까?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게다가 오늘 권태범이 일찍 들어온다고 해서 없는 시간이 더 부족했다. 축축해진 옷을 들고 내방으로 건너와 옷을 갈아입었다.

1층으로 내려가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 집을 유지하려면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할 텐데, 이상하게 이 집엔 사용인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제일 많이 본 주방장 아저씨도 식사 시간이 아니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권태범의 저택 밖으로 나가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서울 만큼 높았던 계단을 내려가 오랜만에 보는 문을 밀자 처음 온 날 마주했던 가파른 언덕이 보였다.

“여긴 여전하네.”

이따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폴짝폴짝 뛰어 차유원의 집으로 향했다. 주방에 널리고 널린 게 과일이라 할머니 드리려고 챙겨 나왔는데, 말하고 가져왔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근데 어차피 나 다 먹으라고 권태범이 그랬으니까 내 거지, 뭐….

그래도 조금 미안하니 이따 집에 가면서 권태범이 좋아하는… 음, 권태범이 뭘 좋아했더라. 아, 광공들이 좋아하는 에비앙 생수를 몇 개 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안함을 지워냈다.

***

“할머니!”

익숙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집 안이 조용했다.

“할머니?”

할머니의 방을 열고 차유원의 방을 열어도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게 일은 그만두신다고 했는데, 혹시 가게에 가셨나? 다시 운동화를 신고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할머니의 가게로 향했다.

“이상하네… 어디 가셨지?”

유리창 너머로 불이 전부 꺼진 가게 안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대체 어디로 가신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까부터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고 있지만,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권태범이 알아서 잘하겠다고 했으니까… 그걸로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고.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자. 불안한 마음을 애써 밀어내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사 준비로 집 안 곳곳에 포장된 짐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러던 중 상자 맨 위에 놓여있는 사진첩이 내 눈에 들어왔다.

“…차유원 부모님인가?”

오래되었는지 색이 바란 사진첩을 한 장 넘기자 어린 아기와 그런 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남녀 부부가 있었다. 차유원의 눈매를 닮은 여자와 차유원의 밝은 머리카락과 똑같은 머리 색의 남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들이었다.

차유원의 부모님은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을까. 오랫동안 그가 써왔던 일기장에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얘기는 없었다. 나만큼이나 혼자 외로웠을 그를 떠올리며 사진 하나를 빼서 차유원의 침대에 누웠다.

계속해서 그들의 얼굴을 보았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유원의 부모님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

“형님.”

피가 묻은 장갑을 벗어 던진 태범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 그게….”

머뭇거리며 말끝을 늘이는 준석에 태범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 함께한 만큼 태범의 표정에서 그의 기분을 파악한 준석이 어렵게 입을 뗐다.

“형수님께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언제.”

“정확한 시간은 모르고 지금 확인 중에-”

태범은 곧장 발걸음을 돌려 공장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로 집에 들어가기 전 무조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그였지만 오늘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태범을 뒤따라 빠른 걸음으로 운전석에 오른 준석은 곧장 집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집에 도착한 태범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확인. 했다면서.”

말이 뚝뚝 끊기긴 했지만, 그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물었다. 그러자 오늘 집 안 보초 였던 남자가 다가와 태범에게 말했다.

“그게,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에- 윽.”

남자는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차유원 눈에 띄지 말라고 한 게. 애를 혼자 두라는 말은 아니었을 텐데.”

싸늘한 어조로 남자에게 말한 태범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돌려 준석을 바라보았다.

“현관 CCTV 확인 결과 약 1시간 전에 직접 나가신 걸로 확인됩니다.”

그나마 제 발로 직접 나갔다는 소리에 태범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냥 처음부터 묶어뒀어야 했나. 준석이 건넨 CCTV 영상을 보며 태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 집에 있는 동안 딱히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대부분 온실에 콕 박혀 있길래 이젠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착각했다.

태범은 그 와중에도 옷차림이 가벼워 보이는 유원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아래턱은 잘게 떨렸고 눈동자는 유원을 쫓아 움직였다.

이 집에 유원이 없다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곧장 발걸음을 돌린 태범은 조금 전 영상에서 유원의 손에 들린 과일을 떠올렸다.

혹시….

“차유원 할머니 집으로 가.”

“아…! 알겠습니다.”

태범의 말에 준석 또한 무언가 깨달은 게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에 올랐다. 차에 탄 태범은 시트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대리석으로 높게 뻗은 집이 눈에 들어오며 본채 아래 유원이 알지 못하는 지하실이 떠올랐다.

“후….”

순간 그곳에 있는 유원을 상상하긴 했지만, 그렇게 한다면 지금의 관계는 이어 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며칠 전의 그날을 떠올리며 태범은 제 입술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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