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샤워를 하고 온 권태범은 가벼운 슬랙스 차림으로 커피를 내렸다. 그에게서 향긋한 바디워시 향이 솔솔 풍겼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권태범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진하게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의 풍경이 무척이나 평화로웠지만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권태범의 얼굴을 보자 어제 저지른 일이 떠올랐다.
그, 그래. 달밤에 그 많은 사람을 깨워가며 난리를 피웠으니 권태범이 화가 날 만했다.
뺨에 닿는 싸늘한 시선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시선을 피하기 위해 먹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뼈밖에 남지 않은 족발을 쪽쪽 빨고 있는데 누군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형님. 이러다가 형수님 체하시겠어요.”
“푸-흡, 쿨럭.”
갑자기 나타난 준석 아저씨의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사레가 들렸다. 권태범은 콜록거리며 눈물까지 머금은 나에게 물을 건넸다. 목에 음식물이 단단히 걸려 폐가 찢어질 듯 콜록거렸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물보다는 달달한 음료수가 먹고 싶었다. 권태범의 손을 지나쳐 그 뒤에 있는 콜라를 집어 들었다. 권태범이 [업소용 콜라]라고 적혀있는 음료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눈물을 글썽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제 손에 들린 물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내 등을 천천히 두드려 준 권태범이 뒤에 서 있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형님이 저를 찾으셨다고….”
“누가.”
“막내가요.”
“부른 적 없으니까 나가.”
“네? 아, 민수 녀석. 형수님이 걱정됐나. 답지 않게 귀여운 짓을 했네요.”
나와 권태범을 번갈아 본 준석 아저씨는 웃음을 삼켰다. 준석 아저씨의 말에 권태범의 얼굴이 구겨졌다.
“알았으니까 나가. 그때 말한 거 잘 알아보고.”
“네, 알겠습니다. 형수님,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준석 아저씨는 절도 있게 인사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권태범이 나에게 시선을 돌려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 저만 두고 가면 안 되는데요….
화가 난 권태범을 혼자 감당하긴 무서웠다. 점점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보다 뼈만 남은 족발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먹을 걸…. 아니면 조금만 남겨둘 걸….
뭐라도 입에 넣어서 그의 시선을 피할 만한 게 필요했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열심히 찾고 있는데 권태범이 나를 불렀다.
“차유원.”
“네…. 네?”
“이제 말해봐.”
“뭐…가요?”
뜨끔한 마음에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을 피하자 권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원아.”
“네….”
“좋은 말로 할 때 말해. 어제 왜 그랬어.”
조, 좋은 말로 할 때라니…. 좋게 말하는 게 아니면 나를 어, 어떻게 하려고….
권태범의 손에 난 흉터가 신경 쓰였지만 모르는 척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자 권태범이 내 이마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너 그렇게 해도 이번엔 안 통해. 이유가 뭐야.”
저번처럼 장화 신은 고양이 권법을 사용해봤지만 한 번 사용했던 거라 그런지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머리를 굴려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렸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갑자기 권태범이 나를 죽일 거 같아서 무서웠다고? 아니면 나를 여기 가둬 놓고 집착할 거 같아서 무서웠다고?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망상증 환자에 나르시시즘 환자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나 같아도 그럴 거 같고.
뭐라고 말하지…. 아, 현관문! 맞아, 그 일이 있었지.
나는 잠금장치가 반대로 달린 현관문을 떠올리며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현관문 도어락 때문에 조금 놀라서 그랬어요.”
“그게 왜.”
“그거 왜 반대로 설치하셨어요? 저 모, 못 가게 하려고요?”
“어.”
으응…? 이, 이게 아닌데.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면 내가 너무 무서워지잖아요….
여기서 권태범을 밀치고 도망갈 수 있을지 주변 구조를 살피며 시뮬레이션을 돌리는데 아무리 해도 각이 안 나왔다. 머리를 굴리는 내게 그가 농담이라며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더 무서워지게….
“너 몽유병 있는 건 알아?”
“네에?”
몽유병?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몽유병이라니? 금시초문이라 눈을 깜빡이자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너 몽유병 있어. 밤에 계속 돌아다니다가 욕실에서도 자고. 내 방에서도 자고. 거실에서도 자는데 혹시 밖으로 나갈까 봐 그렇게 설치한 거야.”
“제, 제가 몽유병이 있어요?”
난 왜 그걸 여태 몰랐지? 그동안 잠에서 깨면 권태범이 내 앞에 있었던 이유도 몽유병 때문이었나?
밤새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그랬겠어.”
하지만 권태범 씨는 여주인공한테 족쇄도 채우셨잖아요. 물론 그건 소설 속에서의 일이었지만.
“죄송해요…. 전 음식 가지러 갔다가 너무 놀라서….”
일차적으로는 피가 흥건한 그의 모습에 놀란 거였지만 그 일은 그냥 함구하기로 했다. 권태범의 직업이야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조금 무섭더라도 윤설아가 나타나기 전까지 얌전히 지내야지.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어찌 됐든 간에 늦은 밤 소란을 일으킨 것은 잘못했다. 권태범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권태범의 말대로 그가 날 가둬 놓을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막말로 사,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나는 그제야 편해진 마음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네 말을 종합하자면. 나랑 얘기하다 족발이 생각나서 가지러 갔는데 꽉 잠긴 현관문을 보고 놀라서 도망갔다?”
“네….”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요약한 말에 귓불이 달아오르며 뒤늦게 수치심이 느껴졌다.
진짜 오버하지 말랬지, 차유원…. 하아….
“내가 널 가둬 놓은 줄 알았어?”
“네…니요?”
어,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열심히 저었지만 그는 입가를 한 번 문지르더니 입술 끝을 유려하게 올렸다.
“근데 유원아.”
꿀꺽.
“내가 말했잖아. 이미 늦었다고.”
“…….”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거기까지만 해.”
권태범은 긴장으로 얼어붙은 나를 훑더니 다시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저…. 그게 말이에요, 태범 씨.”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난 권태범을 그… 여, 연애 상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고, 권태범과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고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나오지 않는 말에 꽤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잘근거리자 내 입술을 향해 권태범이 손을 뻗었다.
“얌전히 있던 사람. 먼저 꼬드긴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
“네?”
찢어진 내 입술을 문지른 그가 손끝에 묻어난 피를 응시했다.
“너도 성인이니 행동에 마땅한 책임은 져야지.”
“…제가요…? 제가 태, 태범 씨를요?”
“그러니까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핥는 권태범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그 눈 속에는 명백한 소유욕이 깃들어 있었다. 내 얼굴을 훑는 저 눈빛만으로도 그는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시발, 뭐 이렇게까지…. 설마… 권태범 설마, 나랑 처음이었어?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래서 설마 몸정이 맘정 된 거고, 채, 책임지라고 하는 거고. 순결을 잃은 조직 보스…. 그런 거야?
어이없는 생각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권태범이 눈만 겨우 굴리는 내 뺨을 톡 건드렸다.
“또 이상한 생각.”
그렇다면 발뺌하기는 늦었고, 결국 플랜 B에 돌입해야 할 것 같았다. 여주인공인 윤설아를 만나면 권태범도 나 같은 놈은 잊어버리겠지. 사실 이렇게 귀엽고 상큼하고 심지어 성격까지 짱 좋은 귀요미를 한 번에 잊긴 어렵겠지만, 주인공 버프를 받은 윤설아면 뭐….
씨이. 갑자기 왜 또 아쉬워지는 건데. 너 집에 안 돌아갈 거야? 차유원 얼른 찾아서 돌아갈 생각을 해야지. 어휴, 못 살겠다 정말.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쉬운 표정을 갈무리했다.
“잘 먹었습니다.”
억지로 찢어 웃은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숟가락에 비친 얼굴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결국 웃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고 아래로 내려와.”
2층과 이어진 계단을 오르려는 내게 권태범이 말했다.
“저희 또 우, 운동해요?”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눈매를 슬쩍 늘어뜨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산책.”
휴. 다행히 지난번에 했던 그 이상한 훈련을 하려는 건 아닌가 보다. 사람 몸에 있는 급소가 356개나 되는 줄 몰랐다. 그때 종이에 쓰인 급소 위치를 달달 외우느라 죽을 뻔 했다.
“아직 쌀쌀하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와.”
정작 그렇게 당부하는 권태범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그도 옷을 갈아입으려나.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등 뒤로 권태범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장갑도 끼고.”
뒤를 돌아보자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소파로 향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광공이 아니라 다정공을 잘못 적어둔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