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동반된 감정에 덜덜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순간, 밖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끄떡도 안 했던 문고리가 반대쪽으로 돌아가고 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수님?”
“으… 흐으… 흣.”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번쩍하고 번개가 치고 빗줄기가 흘러들어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하늘이 번쩍거릴 때마다 아저씨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너무 놀란 마음에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눈을 질끈 감았다.
“형수님…!”
서, 설마… 나를 부르는 소리인가? 고개를 들자 미간을 찌푸린 아저씨와 두 눈이 마주쳤다.
형수님….
그건 권태범의 부하들이 윤설아를 부를 때 쓰던 호칭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머리가 새하얘졌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아저씨에게서 권태범과 마찬가지로 비릿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피….
여긴 조폭의 소굴이었다. 나는 그런 곳에 스스로 들어왔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말았다. 귀에서 삐-하고 이명이 들려오며 숨이 가빠왔다. 지금이 아니면 저 현관문이 다시 꽉 막힐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도망갈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숨을 헐떡이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조금 전 다친 손목에서 선명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눈높이를 따라 아저씨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아저씨가 내 손목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디 다치시기라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아저씨를 밀어냈다. 거센 비가 쏟아지는 마당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형수님!”
나를 뒤쫓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집 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권태범의 부하들이 눈치챈 건지 저택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잡히면 죽는다.
폭우를 뚫고 입구를 향해 달리는 동안 귀에서 누군가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피에 젖은 인영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윽.”
머리가 두 갈래로 깨지는 고통과 함께 비에 젖은 잔디가 발을 잡아당기는 착각이 들었다.
“흐으, 하아….”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처음 보는 장면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자꾸만 몸이 발아래로 꺼지는 것 같아 다리가 휘청거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온몸을 덮쳐 모든 게 다 역겹고 무섭게 느껴졌다.
살기 위해 발끝에 온 힘을 주어 도망쳤다. 뒤에서 여러 명이 나를 불렀지만 무작정 달렸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뛴 결과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마당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권태범의 품에 안겨 아무 생각도 없이 올라왔던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수많은 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둠이 나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았다.
“형수님-!”
뒤에서는 여전히 남자들이 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더는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물이 흥건한 대리석에 미끄러지며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아…!”
곧이어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짧은 순간, 넘어질 땐 이렇게 넘어져야 아프지 않다고 하나씩 알려주는 다정한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소설 속 권태범과 현실에서 직접 마주한 권태범의 이질적인 모습이 엇갈리며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흐, 윽.”
“시팔, 차유원!”
감은 두 눈 사이로 땀인지, 빗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얘 상태가 왜 이래.”
권태범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당황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권태범의 모습이 보였다.
왜… 울고 있는 거 같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눈을 뜬 걸 발견한 권태범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정신 놓지 마, 차유원.”
“…….”
“안 돼. 그러지 마, 유원아.”
왜 울어요?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팠다. 손목도 아프고 너무 추웠다.
“너네는 뭐 하고 있어! 당장 최 박사 불러 와.”
내 몸을 추슬러 안는 권태범의 모습을 끝으로 흐릿해지는 눈을 감았다. 분명 조금 전 그에게선 비릿한 피 냄새만 났는데, 지금은 특유의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그 향을 맡자 몸의 떨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를 감싸 안은 권태범의 손을 꽉 쥐었다.
***
배고픔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내 손을 쥐고 나를 내려다보는 권태범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태범 씨?”
“차유원.”
한숨도 자지 않았는지 눈 밑이 거뭇해진 권태범이 나를 불렀다. 그의 눈에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깨질 듯한 두통도 가라앉고, 꽉 막혔던 숨도 트였다. 눈을 깜빡일수록 생생했던 어제의 두려움은 물에 씻겨나간 듯 사라지고 나를 바라보는 권태범의 얼굴이 뇌리에 스며들었다.
“유원아.”
짙은 한숨을 내뱉곤 나를 꽉 끌어안는 그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마치 내가 없어지기라도 할 듯 내 몸을 꽉 감싸 안는 그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이런 사람인데 어제는 왜 그렇게 무서웠지…?
이미 나는 권태범의 직업이 그런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무서운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자마자 뭐에 씐 것처럼 그가 무섭게 느껴졌었다. 오로지 엉망이 된 머릿속은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어제 기절했어요?”
권태범의 등 너머로 작게 난 창을 보자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저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신 거예요?”
피곤해 보이는 권태범의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긴 숨을 내뱉으며 내 손에 얼굴을 기대는 모습에 더 미안해졌다.
꼬르륵-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그와 내 사이를 갈라놓았다. 한숨도 못 잔 권태범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진심으로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나를 그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어제 족발… 시켰었는데….”
내 말에 권태범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그래도 조, 족발인데….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크게 떠서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 안 쓰려고 했는데 일단 입에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
“혀, 혀엉…. 유, 유원이 배고파요….”
그 길로 식당에 내려온 나는 식탁에 있는 배달 봉지를 발견했다.
“내 족발! 아, 맞아. 계산!”
뒤늦게 계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화들짝 놀라 서둘러 족발집에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권태범이 내 손을 잡아 만류했다.
“계산은 이미 했어.”
“네? 어떻게…?”
“애들 시켜서.”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말한 권태범에 마음이 안 좋았다. 나 때문에 아저씨들을 귀찮게 한 것 같았다. 앞으론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한숨과 함께 비에 젖어 엉망이 된 봉지를 열었다.
“에구….”
오랜 시간 방치된 족발은 차게 식어있었고, 막국수는 팅팅 불다 못해 떡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족발은 차게 먹어도 맛있으니까-
“내놔.”
침을 꿀꺽 삼키며 포장지를 뜯으려는 나를 권태범이 말렸다.
“시, 싫은데요?”
배고픔에 이성을 잃고 권태범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나도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족발이었다. 권태범의 시선을 피해 족발 그릇을 품에 안고 등을 돌리자 그가 낮게 말했다.
“차유원.”
띵동-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혼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두고 가.”
“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처음보는 얼굴의 남자가 봉지 하나를 권태범에게 건네고 후다닥 주방을 빠져나갔다.
킁킁.
남자가 두고 간 봉지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봉지를 가리키자 권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이리 주고, 이걸로 먹어.”
권태범이 내 손에서 봉지를 빼앗고 방금 남자가 가져온 봉지 안에서 막국수와 족발을 꺼냈다. 어? 새로 시켰나? 아직 따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이 시간에도 족발집이 여는구나. 권태범의 손이 빨라질수록 맛있는 냄새가 더욱 심하게 풍겨왔다. 침을 꿀꺽 삼키자 권태범이 내 앞에 포장지를 벗긴 음식을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먹고 있어. 씻고 올 테니까.”
“네에-”
손에 묻은 소스를 내려다본 그는 등을 돌려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나는 냉큼 젓가락을 들었다. 한 입도 먹지 못한 막국수는 아까웠지만 떡 진 것보다 이 갓 만든 막국수가 훨씬 더 윤기가 자르르 하니 맛있어 보였다.
얼른 족발 한 점을 집어 그 위에 막국수를 돌돌 말아 한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하고 적당히 고소한 참기름 맛이 나는 막국수와 쫄깃쫄깃하고 부드러운 족발이 한데 어우러져 너무 맛있었다.
“아… 너무 맛있다.”
젓가락과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침부터 어찌나 술술 잘 들어가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막국수 그릇은 바닥을 보이고 족발은 뼈만 남아있었다.
“후… 나 진짜 돼지 다 됐나봐.”
혼자서 이 많은 양의 족발을 다 먹었다는 사실에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먹은 음식의 뒷정리를 하려는데 권태범이 식당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