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5)화 (15/136)

#15

순간 심각해진 얼굴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얼어붙은 표정을 풀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에이, 설마.”

사실 권태범과 첫날밤 이후로 혹시 모를 일에 밤만 되면 긴장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그와 내 사이엔 야릇한 분위기는 전혀 돌지 않았다. 또 어디다 옮겨놓고 까먹은 모양이었다.

아, 맞아. 내 노트!

그거까지 없어졌다면 이건 정말 내 방에 도둑이 든 게 분명했다. 침대로 가 매트리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으며 노트가 여전히 매트리스 안에 잘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럼 그렇지. 근데 가방은 진짜 어디로 갔지? 얘가 발이 달려서 저절로 사라진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자리에 멍하니 서서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일단, 청소부터 하면서 찾아보자.”

내가 쓴 방이니 갈 때 가더라도 잘 정리하고 가고 싶었다. 특별히 어지럽힌 부분은 없었지만 말이다. 근데 나 진짜 잠귀신이라도 붙었나. 왜 이렇게 피곤하냐.

“삼십 분만 잘까…?”

노트가 잘 있는지 확인하느라 침대 옆으로 왔더니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하품을 하며 두툼해진 뱃가죽을 문질렀다. 그리곤 어딘가에 있을 차유원에게 깊은 사죄의 말을 보냈다.

“차유원, 미안. 근육 키워 준다면서 내가 살만 찌우고 있는 거 같네. 그 대신 내가… 착한 아저씨랑 친해졌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지난 며칠 동안 권태범에게 음료수도 따라주고 열심히 일하고 오셨냐고 다정하게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나중에 가서 모르는 척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면 차유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쌩하고 무시하진 않겠지.

“아…. 좋다.”

이불을 들추고 그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극세사 이불이 몸에 착하고 달라붙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꿈에서 봤던 호랑이를 다시 만나면 좋을 텐데. 엄청나게 귀여웠던 백호가 떠오르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

“형님. 말씀하신 형수님 여권입니다.”

“수고했어.”

“넵, 그러면 홍콩은 형수님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이맘때 홍콩 날씨면 바람 쐬기 나쁘지 않겠지.”

태범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태범은 머릿속으로 유원이 좋아할 만한 곳을 떠올렸다.

케이크같이 단것을 좋아하는 유원이니 디저트 가게에만 데려가도 분명 기뻐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풍경 보는 것도 좋아하니 야경으로 유명한 침사추이에 데려가도 기뻐할 테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눈을 반짝일 유원의 모습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그럼 형수님도 같이 가는 걸로 알고 준비해놓겠습니다.”

준석은 눈치껏 대답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그때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준석의 말에 유원을 떠올리며 살짝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태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알아보니 그놈 중 한 명이 쌍곤 놈이더라고요. 이번에 창현동 비리 사건으로 의원직이 박탈된 이건명 의원과는 고종사촌 관계고요.”

“상관없어. 잡아 와,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

유원의 얘기를 할 때와 달리 날 선 표정으로 반응하는 태범에 준석은 자신이 더 긴장되었다. 불쌍한 놈들. 쯧. 그러니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했다. 앞으로 지옥에서 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놈들을 떠올리며 준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

“헉, 흐아…. 힘들어.”

팔이 덜덜 떨리며 오십견에 걸린 사람처럼 손이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창문 청소까진 오버였나?”

의자에 올라가 창문까지 깨끗하게 닦는 것까진 좋았으나 그 후유증이 장난 아니었다. 창문 틈까지 꼼꼼하게 닦느라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게다가 너무 무리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차유원…. 알고 보면 배 속에 거지 키우고 있었던 거 아니야?”

말랑말랑한 배를 툭툭 치며 ‘혹시 거기 누구 있나요?’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곤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아, 배고파아…. 달밤에 운동하면 잠이 온다던데 낮잠을 너무 자서 그런지 잠도 안 오고….”

그러고 보니 아까 티브이에서 지나가듯 나왔던 족발이 너무 먹고 싶었다. 막국수도 새콤달콤하게 무쳐 족발이랑 싸서 한입에 딱 넣으면…!

꼬르륵-

역시나 주인이 굶는 건 절대 참지 못하는 배가 우렁찬 소리로 애달프게 배고픔을 호소했다.

“구, 구경이나 해볼까…?”

다행히 여기도 배달 어플은 존재했다. 야식이라고 쓰인 배너를 클릭하자 윤기가 좌르르한 족발이 나를 유혹했다.

“어… 나도 모르게 가입까지 해버렸네….”

배고픔에 못 이겨 나도 모르게 잠재력이 발휘되나 보다. 겨우 몇 번 봤던 차유원의 주민 등록 번호가 바로 떠오르는 걸 보니.

‘가입 완료’라고 안내 문구가 뜬 화면을 넘기고 물 흐르듯 첫 주문 할인 쿠폰까지 다운 받았다.

“이건 진짜 안 쓰려고 했는데….”

옷장으로 달려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할머니가 집을 나오기 전 꼭 쥐여 주신 지폐를 꺼냈다.

“그래도 굶지는 말라고 하셨으니까….”

꼬깃꼬깃한 오만 원권을 쫙쫙 펼쳐 신사임당과 두 눈을 마주했다. 그러곤 얼른 미리 봐두었던 식당을 클릭해 현재 위치로 배달을 시켰다.

야무지게 [벨은 누르지 마시고 문자 남겨주세요!]라는 요청 사항도 입력했다.

“맛있겠다…!”

배달 예상 시간이 60분이라는 문구에 눈이 반쯤 돌아갈 뻔했지만 침대 위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10분 뒤 도착 예정입니다^^* 준비해주세요.]

“왔다!”

까만색 화면 위로 나타난 메시지에 침대 밖으로 튕기듯 빠져나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우, 어두워….”

핸드폰에 플래시 기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복도를 걸었다. 밤이 되자 깜깜한 인테리어는 빛을 모두 흡수해 더 깜깜했다. 조심스럽게 바닥을 살피며 천천히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와 1층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손이 닿지도 않은 문이 저절로 열린 것에 의아함이 든 것도 잠시, 밝은 불빛과 함께 피에 범벅이 된 권태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아아악!!!”

***

“괜찮아?”

“흐윽, 흡, 무, 무서워요…. 저리 가요…. 흑.”

“후….”

코를 훌쩍이며 손을 내젓자 권태범이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일단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있어.”

권태범은 제 손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내려다보더니 손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돌려 멀어지는 권태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짙은 붉은색으로 물든 그의 바지 밑단으로 시선을 내렸다.

처음에는 귀신인 줄 알았다. 그다음엔 권태범이 어디선가 칼에 맞고 온 줄 알았고. 하지만 손과 다리 같은 특정 부위에만 피가 묻은 걸 보니…. 아무래도 권태범은 자신의 직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비에 젖은 핏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권태범이 남기고 간 핏자국에 등줄기가 선득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잠깐 있었을 뿐인데 여전히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그동안 내게 너무 잘해주고 다정해서 권태범의 본 모습을 잊고 있었다. 그는 [조폭이 사랑한 그녀]의 남자주인공이자 태호 그룹의 전무이사 권태범이라는 것을.

“도, 도망가야 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윤설아가 나타나고 정신을 차린 권태범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할지 몰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겠지. 그리고 혼자 남은 차유원의 할머니는….

절대 안 돼.

손에 땀이 흥건해졌고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흐아… 흑.”

후들거리는 다리로 빠르게 권태범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빛을 모두 빼앗긴 것 같은 집 안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어, 어디 갔어.”

급한 나머지 핸드폰을 챙기는 걸 잊어버렸는지 바지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어떡하지…. 일단 가자.”

뒤를 돌아보니 온통 새까만 집 안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권태범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더욱 두려웠다. 순식간에 쫓아온 권태범이 내 뒷목을 잡아 지하실로 질질 끌고 가는 상상을 하자 오금이 저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으아…! 흐, 흡.”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얄팍한 기억에 의존해 앞으로 걸어가다 바닥에 놓여있던 물건에 부딪쳤다.

“윽, 으….”

그때 딱딱한 것에 걸려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다.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손목이 꺾였는지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아파….”

넘어질 때 혀를 잘못 깨물어 입 안에서 피 맛이 살짝 느껴졌다. 피 냄새가 나자 자연스럽게 조금 전에 피범벅을 한 권태범이 떠올랐다.

“가, 가야 돼.”

희미하게 들렸던 물소리도 이제 멈춘 것 같았다. 권태범이 욕실을 빠져나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현관문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무릎과 팔꿈치가 욱신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길고 길었던 거실을 지나 현관문 앞에 겨우 도착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고리를 잡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덜컹- 덜컹.

“이, 이게 왜….”

문고리를 아무리 돌려도 꽉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억지로 문을 밀어냈지만, 이 집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두껍고 단단한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멀쩡하게 밖으로 나갔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