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차유원, 너는….”
꾸르륵-
이 작은 몸에서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귀엽게 꼬르륵도 아니고 꾸르륵….
우렁차다, 우렁차…. 내가 낸 소리지만 신기한 눈으로 내 배를 꾹꾹 눌러보았다.
“애가 좋아할 만한 걸로 가져와.”
내 우렁찬 꼬르륵 소리를 들은 권태범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아저씨한테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까 그때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인사도 못 했네.
동방예의지국의 국민답게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권태범이 그런 나의 어깨를 꾹 눌러 막았다.
“얌전히 누워 있어.”
어… 따라가려고 한 거 아니었는데. 그래도 나 걱정해준다니까 좀 좋네.
권태범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뜻하다….
이런 눈을 본 게 언제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 그동안 외로웠구나. 새삼 깨달은 감정에 머쓱해져 눈가를 문지르다 권태범의 손을 잡아 뺨을 기댔다.
“저 걱정했어요?”
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몸집이 커서 그런가, 아니면 어른스워서 그런가. 자꾸만 권태범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
“아….”
그냥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꺼낸 말에 권태범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귓가가 후끈거렸다. 홧홧한 귓불을 문지르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까 그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근데 아까 그 아저씨 엄청 실력 좋아 보여요. 나를 한 번에 팍! 파팍! 이렇게 해서 제압하는데!”
괜히 과장된 몸짓으로 호들갑을 떨었더니 권태범은 고개를 끄떡인다거나 그랬냐며 내게 호응해 주었다. 아, 근데 그러고 보니 앞으로 여기서 어떤 걸 배우게 될지 궁금해졌다. 아까 그 남자가 했던 호신술 정도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뜩이나 배고픈데 오버스럽게 행동하느라 지친 나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땀이 살짝 맺힌 내 이마를 쓸어 올리는 권태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근데 싸움 누구한테 배워요?”
***
“아! 항복! 태, 태범 씨, 저 항복이요! 못해요, 안 할래요!”
싸움을 배운다고 권태범의 집에 찾아온 지 겨우 하루가 되던 날, 나는 권태범에게 항복을 외쳤다.
“히윽, 저 못해요. 꼬맹이라면서요! 꼬맹이는 이런 거 못해요!”
권태범은 싸움의 첫 번째는 선제공격이라며 내게 칼을 내밀었다. 과, 과도는 양파 깔 때밖에 안 써봤다. 게다가 이걸로 자기를 찔러보라니. 저 미친놈이 차, 착하다 착하다 해주니까 미쳤나 보다.
“오지 마세요!”
“이리 와.”
“시, 싫다니까요?”
미친놈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온 내가 멍청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려는 생각으로 문 앞으로 내달렸다.
“하아, 헉….”
“달리기도 빠른 편은 아닌 거 같은데.”
언제 쫓아온 건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권태범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이 무식한 놈아! 라고 외치고 싶은 걸 권태범의 손에 들린 칼을 바라보며 억지로 꾹 참았다.
“자. 일단 잡아 봐.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줄 테니까.”
억지로 내 손에 칼을 쥐여 주려는 권태범의 행동에 결국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흐….”
“차유원?”
갑자기 물기를 머금은 내 목소리에 권태범이 내 이름을 불렀다.
“흐엉- 무서운데, 흐윽. 나, 이, 이런 거 싫어요. 으흑….”
서러움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런 걸 배우려고 한 게 아니었다. 기본적인 호신술이나 급소를 공격한다거나 그런 걸 배울 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려 했다.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 갈래요… 흑, 차라리 학원, 다니는 게 나을, 흐으, 나을 거 같아요, 흐엉….”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진짜 권태범은 나를 살인자 혹은 자기 조직의 막내로 스카우트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흑. 잘생기고 귀여운 데다 머리까지 좋으니 탐이 날 만하지. 내가 좋아서가 아닌 나를 조직의 고급 인력으로 쓰려고 제안을 받아들인 걸지도 몰랐다.
“흐으… 할머니이… 흑.”
왜 이럴 때 차유원의 할머니가 떠오르는 걸까. 내 손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언제든 할머니한테 돌아와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서럽다는 듯 눈을 감고 울음을 터뜨리자 권태범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는데, 앞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내 등을 감싸는 손길이나 권태범에게서 나는 시원하고도 독특한 향이 그가 나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흣, 왜, 왜 안아요. 왜 마음대로 안아… 흐으….”
항상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 남자가 미웠다. 내가 몸을 비틀며 또다시 흐느끼자 내 등을 천천히 토닥인 권태범이 말했다.
“그러니까 뭘 이런 걸 배우겠다고 그래.”
권태범이 얼굴을 떼어내며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고개를 들자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권태범과 눈이 마주쳤다.
“많이 무서웠어?”
권태범은 눈물로 짓무른 내 눈가를 조심히 문지르고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 넘겼다.
나 근데… 이 대사 생각나는 것도 같아. 권태범이 윤설아를 구해주면서 했던 말… 아니었나…?
아마도 이다음은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에이… 설마.
침을 꿀꺽 삼키며 권태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권태범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고,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괜히 다른 생각 말고 내 옆에 있어.”
그렇게 말하는 권태범의 눈빛이 순간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권태범의 생각을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다만, 권태범의 말대로 이젠 정말 늦어버렸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이거 진짜 큰일이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굳게 잠근 뒤 서둘러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침대 매트리스 밑으로 손을 밀어 숨겨두었던 노트를 꺼냈다.
“치, 침착하게. 침착하게 생각하자.”
크게 심호흡하며 노트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권태범이 윤설아를 감금하게 된 이유가 뭐였지? 그것부터 알아내야 해. 노트를 한 장씩 넘기며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조금 전 권태범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의 관심이 차유원. 즉, 나에게 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옴므파탈 같으니라고… 그동안 남자 하나 안 꼬여서 매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그냥 얼굴이 문제였지….
아무튼! 그래도 어떻게 밤 한 번 같이 보냈다고 팔자가 이렇게 꼬이는지, 기분이 좋다가도 권태범이 앞으로 저지를 집착과 미친 짓을 떠올리면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아… 어떡해….”
노트를 넘기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 나… 도대체 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꼼꼼하게 읽는 건데. 잠깐 병원에 입원한 동안 시간을 때울 겸 읽었던 소설이라 모든 내용이 또렷하게 생각나진 않았다.
“미치겠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기억나지 않는 내용에 결국 노트를 닫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플랜 B를 실행하는 수밖에.
윤설아. 미리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은 다… 이기적인걸….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윤설아를 위해 기도를 했다.
얼른 나타나서 권태범 좀 데려가 줘….
***
“형님, 이동혁은 어떻게 할까요?”
준석의 말에 자료를 살피던 태범이 고개를 들었다.
주로 해외에서 지내는 동혁은 유원의 존재를 아는 다른 부하들과 달리 유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국에 돌아오던 날 유원을 마주하고 사고를 치고 말았다. 태범은 쯧-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쯤이면 반성했겠지. 데리고 나가서 밥이나 먹여.”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형수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저번에 보니 많이 놀라신 거 같던데.”
준석은 눈치껏 호칭을 정리하며 태범에게 말했다. 태범은 ‘형수님’이라는 호칭이 나쁘지 않은 듯 눈매가 순간 느슨해졌다.
“칼은 무리야. 아직 애라서 그런지 무서워하는 거 같더군.”
태범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을 쥐여 주니 덜덜 떨면서 왈칵 눈물을 쏟는 유원을 보자 자연스럽게 그와의 첫날밤이 떠올랐다.
그때도 울먹이며 매달리는 모습이 꽤 괜찮았었는데. 그날의 유원을 떠올린 태범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형님?”
준석은 생각에 잠긴 태범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다른 생각에 푹 빠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근래 태범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뭐. 그동안 병적일 정도로 일에만 몰두하셨으니 오랜만에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지.
“아, 말해.”
“그럼 총은 어떠십니까? 이번에 러시아에서 건너온 F9-NP 괜찮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