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1)화 (11/136)

#11

근데 지금이 소설 전개 어디쯤이지? 그걸 생각 못 했네. 가장 중요한 것을 까먹어버렸다는 사실에 머리를 쥐어박으며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내용을 정리하자고 다짐했다.

“근데 저… 태범 씨. 옷은… 원래 그러고 다니세요?”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여전히 끝내주는 권태범이 보였다. 나 같아도 저 몸매면 하루 종일 삼각팬티 한 장만 입고 돌아다닐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춥지 않나?

나는 물기가 말라 보송보송해진 권태범의 몸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

“배 차갑게 하면 배탈 난대요.”

“…….”

“하, 할머니가 그랬어요.”

또또, 저 표정.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를 듯, 가느다랗고 고운 내 목을 지그시 바라보는 저 표정이 위험했다. 머릿속에서도 그런 권태범이 위험하다며 새빨간 신호를 보냈다.

“힉- 저, 전 그럼 이만 먼저 가볼게요!”

너무 과한 참견이었나. 여전히 냉랭한 권태범의 눈에 급히 몸을 돌렸다.

가, 갔나?

몇 걸음 걸어간 다음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던 권태범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권태범이 이상했다.

저 아저씨, 왜 저래 진짜….

***

“자자, 그럼 정리를 해보자면. 여주인공인 윤설아를 만나는 게 벚꽃이 피는 계절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4월쯤이겠지?”

엉망이 된 옷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집에서 챙겨온 노트를 꺼내 기억이 나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사건을 적어나갔다.

지금이 2월인데. 혹시 작년에 이미 윤설아랑 만났나? 그렇다고 하기엔 권태범이 윤설아를 두고 나랑 잤을 리가 없으니 이건 엑스.

그럼 아직 만나기 전이라는 건데….

앞으로 벌어질 사건은 크게 권태범이 여주인공이랑 만나는 거랑. 권태범 부하의 배신. 다른 조직이 쳐들어오는 거랑….

아. 가장 중요한 걸 안 적을 뻔했네.

권태범이 여주인공을 집에 가두는 게 있었지. 지하실에 족쇄까지 채워가면서.

그 모습을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혀를 차며 까만색 볼펜을 내려놓고 빨간색 볼펜을 집어 들었다. 으으, 진짜 미친놈. 겉보기엔 멀쩡한 얼굴로 그런 짓을 한 권태범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적힌 문구 옆에 ‘감금’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그 옆에 별표까지 조그맣게 그려 넣었다.

다 됐다.

시간 순서대로 쭉 적은 노트를 손가락으로 훑어 가장 먼저 시작될 사건인 권태범의 출장을 눈에 담았다. 지금은 2월. 권태범이 출장 가서 여주인공을 만나는 게 4월이니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래, 권태범이 출장을 가기 전에 빨리 근육도 키우고 싸움도 좀 배워서 얼른 그 못된 새끼들 혼 좀 내주자. 그러면 차유원도 안심하고 다시 돌아올지 몰라.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차유원을 떠올리며 노트를 침대 매트리스 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머리를 너무 썼더니 배가 고파졌다. 이제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나를 이대로 방치한 권태범은 어디로 간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썩을 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그를 찾기 시작했다.

똑똑-

“태범 씨… 태범 씨, 혹시 여기 계세요…?”

가만 생각해보면 맨날 내가 먼저 권태범을 찾는 거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굶주림에 지쳐 쪼그라든 배를 부여잡으며 텅 빈 방 앞에 주저앉아 울상을 지었다.

“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권태범’인 주제에 왜 안 나와….”

신분증을 보니 차유원 나이가 고작 스물세 살이던데, 내 정신 연령도 차유원의 나이만큼 어려진 걸까. 배고픔을 느끼자 속절없이 눈물이 나오며 이 상황이 서러워졌다.

“태범 씨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가며 2층에 있는 방을 전부 돌아다녔다. 하지만 권태범은커녕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은 가게에서 잠깐 봤던 그 콧수염 아저씨뿐이었다. 아까 이 집에 들어올 때 부하들이 잔뜩 있는 걸 보면 그 아저씨도 이 집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그 아저씨도 권태범처럼 가게 단골손님이라고 했으니 나를 모르는 체하진 않겠지. 지난번에 그 설…사약 사건은 조금 죄송하긴 했지만 지금 배가 너무 고팠다.

“나 진짜 뻔뻔하네.”

하지만 이대로 배고파서 쓰러지는 것보단 나았다. 민망함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문지르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1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한 번 봤던 풍경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못 볼 꼴이라 눈을 질끈 감고 현관문을 세게 밀었다.

“무, 무슨 문이 이렇게 무겁고, 흣, 안… 열려!”

돌덩이로 만들었나. 엄청 무거운 문을 젖먹던 힘까지 쓰며 겨우 밀어냈다. 밖으로 나오자 아까 보았던 푸릇한 마당이 나왔다.

“와, 좋다. 옛날엔 이런 데서 축구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급한 마음에 맨발로 나오긴 했지만, 막상 발바닥을 간질거리는 풀잎이 느껴지자 잊고 지내던 대학생 시절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때맞춰 불어오는 살랑이는 바람에 배고픔도 잊고 눈을 감은 채 이 평화를 만끽했다.

“야, 너 누구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감각이 목에 닿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쌍곤에서 온 새끼냐?”

“히윽….”

“누구냐고!”

“자, 잠깐만요!”

나는 항복한다는 제스처를 하기 위해 손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윽, 아, 아파요…!”

“허튼수작 부리지 마, 새끼야.”

내가 손을 움직이자마자 남자가 단번에 내 팔을 꺾으며 얼굴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분명 1분 전까지만 해도 너무 좋게만 느껴졌던 잔디가 고스란히 얼굴로 뭉개지듯 닿았다.

“아니면 최동현이 보낸 놈이냐?”

“예? 누구요?”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말고 좋게 말로 할 때 대답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야.”

이게 어떻게 말로 하는 거예요! 팔에 저릿한 고통이 느껴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흐으, 저, 아닌데요, 흑, 진짜 아닌데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5초당 손가락 하나다?”

킬킬거리며 아랫입술을 혀로 핥은 남자가 내 고운 손가락에 날카로운 칼날을 갖다 댔다.

“히윽- 사, 살려주세요, 저 진짜 그쪽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3초.”

“진짜 아니라고요!”

“5초 땡- 이 꽉 물어라. 피 보기 전에.”

“히익, 태, 태범 씨! 태범 씨! 저 진짜 죽어요! 살려주세요! 태범 씨, 어디 있….”

비릿한 웃음을 지은 남자가 칼날을 바로 세웠다. 나는 힘껏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권태범을 찾았다.

이 자식, 사람을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밥을 굶길 때부터 알아봤어. 글썽이는 눈을 하고 목에 핏대를 세워 권태범을 부르자 나를 위협하던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야, 조용히 안 해? 이게 감히 형님 이름을!”

“읍, 으읍!”

“아, 더럽게 꽥꽥거리네.”

내 입을 꽉 막은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제 귀에 손가락을 넣어 막고 미간을 찌푸렸다.

“으! 으그 느으르그!”

“쌍곤파에서 이제는 미인계도 쓰냐? 생긴 건 꽤 곱상해 보이는데 아깝네.”

“으으- 으! 우으, 으!”

내가 아무리 소리쳐 봐도 입이 막혀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윽윽-하는 부서진 신음 소리와 함께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의 몸이 작게 들썩이기만 할 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야, 이 개자식아. 이 생각 없는 놈아! 입을 다물게 할 거면 입만 막아야지. 숨구멍까지 막으면….’

이런 내 상태도 모르고 남자는 여전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발버둥 치느라 힘이 빠졌고 산소가 부족해 점점 눈앞이 흐릿해져 갔다. 눈가를 따라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손목을 잡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려 아래로 떨어졌다.

잔디에 늘어진 가느다란 팔목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작게 조소했다. 아무리 엑스트라라고 해도 진짜 너무 허무하게 죽는 거 아니야?

차유원(엑스트라13) 배고픔에 밖으로 나왔다가 광공의 부하를 만나 생을 마감함.

이게 엑스트라 나부랭이의 결말인가… 시발. 이게 다 권태범 때문이야. 소원 한 번 이뤄보려고 했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마지막 남은 힘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 푸릇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인 것도 같았지만,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

“이동혁은.”

“반성한다는 의미로 지하실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 물도 주지 마.”

“네, 형님.”

여기가 어디지… 천국인가. 근데 천사들의 말투가 왜 이렇게 거칠어… 무시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대화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차유원. 정신이 들어?”

“…태범 씨?”

나 안 죽었어…? 게다가 아직도 빙의 중?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권태범의 얼굴이 엉망이다.

“하아… 시발, 진짜 사람 돌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지.”

“어? 저 안 죽었어요?”

내가 어떻게 된 거냐며 눈을 깜빡이자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권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기절했었어. 이번 일은 사과하지. 내 실수야.”

“아 맞아… 나 숨 막혀서 죽을 뻔했지.”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자 권태범이 목까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약속해.”

“뭘 이런 거 가지고요. 괜찮아요!”

죽는다고 생각했을 땐 조금 어이없고 억울하긴 했지만 살아있으면 됐다. 내가 괜찮다며 배시시 웃자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권태범의 입매가 잠시 굳었다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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