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가 만약 이 계단까지 올랐으면 오늘 하루… 아니, 내일까지 다리를 쓰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앞으로 있을 험난한 여정에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 계단을 모두 오른 권태범이 나를 내려주었다. 운동화 밑창에 닿는 폭신함에 고개를 숙이자 푸릇한 잔디가 마당 위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부자네, 부자야.
인조 잔디도 아니고 싱싱한 천연 잔디를 이 넓은 마당 전체에 깔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역시 소설 주인공은 다르긴 다르다고 생각하며 권태범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씹. 옷은 왜 벗고 지랄이야.”
그때 권태범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그의 등에 코를 박았다.
“앗! 으으…….”
비리비리한 몸만큼이나 여린 콧잔등을 문지르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오, 형님 오셨다.”
살짝 허리를 옆으로 숙이자 반나체의 상태로 운동을 하는 남자들이 보였다.
꿀꺽.
‘와씨. 여기 진짜 끝내준다… 여기가 바로 지상 낙원인 건가. 그럼 여기서 평생 갇혀있어도괜찮… 아니야, 정신 차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조폭’ 하면 우락부락한 근육에 험악한 인상일 것만 같았는데 전체적으로 아주 흡족했다. 쩍 벌어진 입에서 침이 뚝 떨어지며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나는 뺨을 몇 번 내려쳐 흩어지는 정신줄을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눈동자가 움직이고 입이 스멀스멀 벌어졌다.
몰래몰래 권태범의 넓은 등을 가림막 삼아 남자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큼지막한 손이 올라오더니 내 시야를 가렸다. 그와 동시에 낮고 울림 있는 권태범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향해 퍼져나갔다.
“박준석.”
“형님. 오셨습니까?”
권태범의 말에 ‘박준석’이라는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와 정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꽤 괜찮은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은근슬쩍 권태범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힘을 주고 있는지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려 의견을 표현했지만, 권태범은 나를 무시한 채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근데 형님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잘 안 보이는-”
“알 거 없고, 1분 준다. 그 안에 애들 데리고 숙소로 들어가.”
“알겠습니다.”
권태범의 말에 가타부타할 거 없이 대답을 마친 남자가 저 멀리 권태범의 부하들을 향해 숙소로 이동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
“옷 좀 입고 다니지.”
“죄, 죄송합니다.”
“가 봐.”
권태범의 싸늘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남자는 서둘러 부하들을 데리고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씨. 아직 덜 봤는데!
권태범과 박준석이라는 아저씨의 대화를 엿들을수록 마음이 초조했다.
‘더 봐야 하는데! 아직 마음껏 구경하지도 못했는데!’
포마드 형식으로 머리를 올린 남자의 등 근육도,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의 이두근도 더 보고 싶었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에 나는 결국 권태범의 손목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태범 씨, 이, 이것 좀 놔주세요!”
그러나 두 손으로 매달려도 권태범은 끄떡도 안 했다.
“권태범 씨!”
점점 멀어져 가는 발소리에 발을 동동 구르자 나를 잡은 권태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용히 해.”
“…네에….”
한층 더 싸늘해진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과, 광공님이 조용히 하라면 조용히 해야지. 순간 이성을 잃고 대들고 말았다. 차유원, 이 밝히는 놈. 남자들의 몸매에 눈이 돌아가 권태범이 어떤 놈인지 까먹다니….
“죄,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절대 쫀 건 아니다. 그냥 사람 목숨은 누구나 귀하니까, 뭐… 조심하는 것뿐이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모아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다물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자 권태범의 손이 몸에서 떨어졌다.
급히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는데 마당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아쉬워하는 내게 권태범이 말했다.
“쪼그만 게 발랑 까져가지고.”
“그냥 멋있어서 구경만 한 건데….”
“내가 멋있다며.”
“네?”
“내가 제. 일. 멋있다며.”
뭐야.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제일’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권태범의 반응에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상한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린 그의 표정을 보니 금방이라도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웃었다간 죽는다. 입술을 꽉 깨물어 웃음을 겨우 눌러 담은 나는 태연한 척 권태범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는 어디서 지내요? 아까 그 아저씨들이랑 같이 쓰면 되나?”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하자 그가 한층 더 미간을 좁혔다. 역시 질투하는 게 맞나 보다. 광공의 색다른 면모에 또다시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따라와. 넌 특별 관리야.”
권태범을 따라 들어간 집 안은 암흑이었다. 이게… 정녕 사람 사는 집이란 말인가. 작가 양반. 설정 잘못 짜신 거 같아요.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밤에 화장실 가려고 나왔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기 딱 좋게 생겼다. 지금은 다행히 햇빛이 잘 들어서 문제가 없지만 밤이 되면 그 상황이 많이 다를 것이었다.
나는 온통 새까만 집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밤에는 웬만해선 밖에 나오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흑색 대리석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오니 2층도 1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게 다 구분이 되나? 진짜 신기해서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네가 쓸 방이야.”
권태범이 가장 안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살짝 방문을 여니 침대며 바닥이며, 한 사람이 쓰기에는 엄청 넓어 보였다.
“와. 엄청 넓네요. 혹시 누구랑 같이 쓰는 거예요?”
“아까부터 자꾸 같이 쓸 사람을 찾는 거 같은데, 왜. 같이 쓰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말에 아주 살기가 흘러넘쳤다. 있다고 하면 누구 한 명이라도 죽일 기세였다.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나는 흡, 하고 입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짐 풀고. 이 방은 너. 그리고 나 이외엔 출입 금지야. 명심해.”
“네!”
나는 권태범의 살기 어린 눈빛이 또다시 내게 닿을세라 서둘러 방 안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아, 태범 씨. 있잖… 어, 갔네.”
고개를 돌려보니 권태범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점심은 언제 먹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꼬르륵-
아니나 다를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배가 너무 고팠다. 차유원의 몸은 하루 종일 배고프다고 울어대는데 왜 이렇게 마른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저번에 태범 씨가 사다 준 사과가 엄청 맛있었는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가방에서 짐을 하나씩 꺼낼 때였다.
툭.
갑자기 허벅지에 차갑고 축축한 것이 떨어졌다. 진한 갈색의 정체 모를 액체에 고개를 기울였다. 헉. 집을 나설 때 재킷 안쪽에 넣어뒀던 아이스크림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 어떡해!”
권태범의 집에 오면서 먹으려고 안주머니에 넣어뒀었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짐에 정신이 팔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아… 날씨가 추워 밖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아이스크림이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오자 녹아버린 모양이었다. 흐물흐물해진 종이 껍질 사이로 줄줄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못 살아….”
주머니 안쪽이 축축하게 젖은 옷을 똘똘 말아 들었다. 초콜릿 색깔로 짙게 물든 것을 보니 얼른 빨아야 할 거 같았다.
“세탁실이 어디지?”
방에서 나와 세탁실을 찾아 헤맬 때였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어딜 가?”
샤워를 마친 권태범과 마주했다.
…그래, 여기가 진짜 찐낙원이었구나.
남은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고 나는 바쁘게 권태범의 몸을 훑었다. 탄탄한 구릿빛 몸매에 선명한 복근,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저 강렬한 호랑이 문신. 머리도 감았는지 촉촉하게 젖어있는 머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꿀꺽.
“저 권태범 씨,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내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권태범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맛있는, 아니 멋있는 몸을 보여주셔서요… 라고 하면 또 매서운 꿀밤을 때릴 거 같았다.
“저, 싸움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그거 감사하다고요! 하하.”
이 방정맞은 입이 문제지. 입을 몇 번 찰싹찰싹 때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해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싸움이야? 애새끼답게 공부한다더니.”
“…공부도 할 거예요.”
안 그래도 차유원 방에 문제집이 몇 개 있길래 필통이랑 이것저것 챙겨왔다. 월요일부터는 인터넷 강의도 들을 생각이었고.
목표는 한국대. 기한은 11월 수능까지. 아자!
“그리고 그냥 제 몸은 제가 지키고 싶어서요. 안되면 할머니라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창피하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근육 늘리기일 뿐, 싸움 같은 건 1도 모르는 내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놈들을 마주쳤다간… 으으, 안 돼.
권태범은 진저리를 치는 내 머리에 큼직막한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뭐든 배우면 좋지. 잘 생각했어, 차유원.”
대수롭지 않은 어조인데도 권태범의 말은 따뜻했다. 이 사람 진짜 광공 맞나…? 왜 이렇게 착하지…? 안아 달라고 하면 안아주고, 밥도 사주고. 눈빛이 좀 무섭긴 하지만 사람 자체는 다정함 그 자체였다. 그렇게 권태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데 문뜩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