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9)화 (9/136)

#9

버튼을 누를 때마다 초록빛으로 번쩍거리던 전기 파리채를 떠올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할머니. 저 유원이에요. 잠깐만 들어가도 돼요?”

“그려, 들어와.”

다행히 할머니는 아직 안 주무신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밀자 끼익- 하고 오래된 경첩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오소소 돋아난 닭살을 문지르고 방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아직두 안 잔겨?”

“네, 저기 할머니…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꿀꺽.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침을 억지로 삼켰다. 부디 할머니가 허락을 해주셔야 할 텐데. 할머니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싸움 공부도 공부니까… 거, 거짓말은 아니야.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언제 그놈들이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 물러날 수 없었다.

“저, 고, 공부하러 한 달 정도 나가서 살아야 할 거 같아요….”

“…그려.”

“네?”

“이 할미 걱정하지 말고. 너 편한 대로 혀.”

생각보다 할머니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이상하다. 이렇게 쉽게 허락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자 할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많이들 한다는 기숙 학원 뭐시기 그런 거지?”

“예? 아, 네, 네… 맞아요.”

기숙… 학원은 맞지. 나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려. 우리 유원이 공부해보겠다더니 참말로 기특혀.”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내 머리도 쓰다듬어주시고 뺨도 문질러주시다 공부하다가 배고프면 사 먹으라고 꼬깃꼬깃한 오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이나 주셨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지는 지폐를 받은 나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방에 돌아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할머니가 주신 지폐와 차유원이 쓴 일기장을 번갈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차유원. 걱정하지 마. 네 할머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지켜드릴 거니까.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얼른 돌아와.”

일단 지난 며칠간 그놈들이 가게에 찾아온 적은 없었다. 때마침 할머니도 내일부터 시골로 내려갈 준비를 하신다고 했고.

차유원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보면 그놈들이 집 주소까지는 모르는 듯했으니 할머니는 권태범 부하들의 보호 아래 떠나기 전까지 괜찮으실 거였다.

“그래도 자주 와야겠다….”

무심한 척하시지만 주름진 입가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래도 막상 가신다니 아쉽네.”

어쩌자고 그새 정이 들어버린 건지, 할머니를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 애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생각을 떨쳐내자 그다음엔 소설 속 차유원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그냥 소설의 지나가는 엑스트라 중 한 명인 차유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차유원의 몸에 빙의된 후로 계속해서 큰 바윗덩어리가 가슴 위에 얹진 듯 마음이 무거웠다.

일기장을 넘길 때마다 있는 눈물 자국을 떠올리며 밤이 깊어질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을 뜨자 역시나 오늘도 차유원의 몸에 빙의된 상태였다. 도대체 차유원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오늘의 내가 여기서 할 일을 잘 마무리하기로 다짐했다.

“끄응… 할머니, 저 그럼 다녀올게요!”

“오냐, 차 조심하고, 잘 먹고 잘 자고.”

“네. 전화 자주자주 드릴게요!”

전날 밤에 미리 싸둔 가방을 둘러메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아, 새벽 냄새 좋다.”

동이 트자마자 나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맡아보는 새벽 냄새가 참 좋았다. 뭔가 마음이 불끈불끈해지며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

“으윽. 개무거워!”

던 것도 고작 다섯 걸음이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내동댕이치듯 가방을 바닥에 던져, 아니, 내려놓았다.

“차유원… 이번 기회에 너 진짜 힘 좀 기르자.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이 거지 같은 근력에 혀를 차다가 후다닥 집에 들어가 접이식 카트를 들고 나왔다.

“으… 이차.”

가방을 카트에 올리고 떨어지지 않게 줄로 꽁꽁 싸맸다. 완벽한 모습에 다시 손잡이를 끌고 길을 찾아 나섰다.

“이제 진짜 가자!”

그러고 보니 아침 일찍, 점심시간에 맞춰 데리러 온다는 권태범의 문자가 와있었다. 하지만 난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은근슬쩍 집 주소를 알아내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이래 봬도 한국대 나온 사람으로서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계략 광공인 권태범의 마음을 한 번에 눈치챘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광공님의 집을 향해 걸었다.

자신만만했던 것도 잠시. 나는 곧이어 마주한 현실에 엉엉 울고 싶어졌다.

“하악, 하아… 이런, 미, 미친 누가 산 위에다가 집을 지어?”

정확히 말하자면 산 위는 아니었지만 한없이 올라가는 언덕길에 철푸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억… 우, 우웩….”

너무 힘들다 못해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빈속이라 그런가. 아닌데, 나오기 전에 바나나 두 개나 먹었는데.

“아이고… 나 죽어요, 태범 씨….”

“누가 죽어?”

“엄마야!”

생각보다 바닥이 차가워 꾸물꾸물 일어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태범 씨? 아니, 언제부터 있었어요?”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권태범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인공 버프로 생긴 후광인지 단순한 햇빛 때문인지, 그의 머리에서 비치는 빛에 눈을 비비며 권태범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카트 던질 때부터.”

“…….”

무심하게 제가 본 상황을 담담히 말하는 입술에 눈알을 또르르 굴려 한쪽 구석에 내팽개쳐진 카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더, 던진 건 아닌데요… 잠깐 내려…놓고 다시 찾으러 올 생각이었어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카트까지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건 정말 무리였다. 그래서 살짝. 정말 사알짝 내려놓고 다시 찾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그걸 언제 봤지?

“아니, 근데 보고 계셨으면 도와주시지! 너무해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복수를 하기도 전에 죽을 뻔했다. 봐봐. 다리 후들거려서 일어날 기력도 없는 거.

“그래서 도와주려고 왔잖아.”

권태범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권태범은 평소와 다르게 편하게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바람에 따라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와… 씨… 가만히 서 있어도 화보네….

그런 권태범의 모습에 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갔다. 한동안 넋을 잃고 그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저릿한 다리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아이고 다리야….

쥐가 날 거 같은 느낌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앗!”

이 몸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이 된 건지. 고작 언덕을 올랐다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다 말고 딱딱한 아스팔트에 엉덩이를 찧었다.

꼬리뼈에 금이 가는 고통에 엉덩이를 문지르며 울상을 짓자 그가 혀를 차곤 손을 뻗어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헛, 이, 일으켜주시기만 해도 되는데요….”

손을 버둥거리다 또다시 뒤로 넘어질 뻔한 나를 권태범이 감싸 안았다. 그에게 기대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있는데 얼핏 풍기는 체향이 정말 끝내줬다. 아니지. 이런 게 그 말로만 듣던 페로몬…향? 그런 건가?

벼, 변태 같지만 그래도 좋다….

권태범이 눈치채지 않게 힘이 없는 척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조금씩 그의 향을 들이마셨다.

“차유원.”

“네… 네?!”

조금씩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욕심껏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부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 왔는데.”

“아, 네네. 내려주세요. 제가 걸어갈게요.”

“그거 말고.”

뭐 어쩌라고?

수수께끼 같은 권태범의 말에 얌전히 눈을 깜빡이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커다란 대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공이 사는 집답게 무광의 새까만 대문은 아주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소설 속 광공들은 새까만 가구에, 새까만 벽지에, 새까만 소파가 있는 집에서 살던데. 설마 권태범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보다시피 내가 손이 없어서.”

“…네?”

“열어 달라고.”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권태범이 내 몸을 추슬러 안으며 말했다. 그 탓에 얼굴이 화끈해진 나는 얼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면 끼익-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던 차유원의 집과는 달리 권태범의 집은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그래 광공집이 뭔들 안 좋겠….

“허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수십 개의 계단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까만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마치 요새처럼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신기한 구조에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나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겠지? 하하하….

묘한 긴장감에 고개를 돌리자 권태범이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우, 무서워. 눈이 마주치자 새삼 권태범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저 눈빛만 봐도 다들 줄행랑을 쳤다던데. 왜 그런지 알 것도 같았다.

천천히 권태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훅훅 시야가 변했다. 숨소리도 안 내고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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