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20XX, 9월 28일(x요일)]
몸이 으슬으슬하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거 같다. 요즘 가게 일이 바빠서 복싱장도 잘 가지 못했는데 너무 속상하다. 머리가 너무 뜨겁고 누가 아랫배를 칼로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팠다.
[20XX, 10월 11일(x요일)]
오메가로 발현되었다. 내가… 오메가라고 한다. 부모님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모두 베타인데 어떻게 된 건지 무섭다. 그 새끼들이 알게 되면 나를 어떻게 할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거 같다. 앞으로의 희망이 없었다.
[20XX, 10월 30일(x요일)]
자퇴서를 제출했다. 담임 선생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짐을 챙기러 교실에 가니 책상에 나를 희롱하는 낙서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페로몬으로 위협하는 애들도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학교를 그만둔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할머니껜 너무 죄송했다.
[20XX, 11월 3일(x요일)]
형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 요즘 많이 바쁜 걸까. 보고 싶다.
[20XX, 11월 18일(x요일)]
그놈들이 할머니 가게로 찾아왔다. 할머니 가게가 어딘지 그놈들이 찾고야 말았다. 그놈들은 할머니의 안전을 가지고 협박하며 내게 돈을 요구했다. 일단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줬지만 언제 또 찾아올지 몰랐다. 나보단 할머니가 걱정되었다.
[20XX, 12월 6일(x요일)]
할머니가 계약이 끝나는 대로 가게를 접으신다고 한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놈들은 그래도 집까지는 모르니까.
위험한 일이 생기기 전에 할머니가 얼른 시골로 내려가셨으면 좋겠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20XX, 2월 12일(x요일)]
죽고 싶다.
[20XX, 2월 22일(x요일)]
할머니 죄송해요.
***
그것을 끝으로 일기는 끝이 났다. 마지막 날짜를 보니 내가 차유원에게 빙의하기 딱 2년 전이었다. 그럼 그동안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기장 중간중간이 다 뜯어져 있어서 전부 다 볼 순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차유원은 학교 폭력 피해자였다.
“이 개새끼들이….”
일기장을 읽는 동안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다.
턱 끝이 부들부들 떨리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가만 안 둬. 그동안 차유원, 이 불쌍한 애를 괴롭혔다는 거지? 심지어 학교까지 그만둘 정도로 도망치고 싶었던 애를 쫓아와서 괴롭히고!
걔네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차유원이 혼자 공부하면서 검정고시에 합격한 걸 생각하면 내 일이 아님에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미친놈들을 진짜···! 그리고 이 형이라는 놈은 누구야. 어휴… 딱 보니 순진한 차유원이 제비 같은 놈한테 걸렸구먼, 쯧-. 이가 빠득빠득 갈리고 눈이 뻑뻑해졌다.
“그래. 차유원.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다 해결해준다. 이 형만 믿어.”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통이 큰 소매가 쭈르륵 내려가 차유원의 마른 팔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근데 얘 힘이 있나···?’
빼빼 마른 손목, 근육이 하나도 없이 말랑말랑한 차유원의 몸을 보면 영 글렀다.
지금 당장 힘을 키우려면···. 시발, 언제 근육 키우고, 언제 복수해!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안전을 택하느냐, 복수냐.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며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만 정신 차리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한 가지밖에 없는 선택지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을 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권태범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더니, 무슨 일이야?
권태범은 그답지 않은 장난기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저기, 태범 씨. 혹시 일반인이랑도 거래하시나요?”
오랫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했다. 우선 내가 권태범에게 부탁한 것은 딱 두 가지. 할머니의 확실한 신변 보호와 싸움을 가르쳐달라는 것.
너무 슬프게, 아니 위험하게도 지금 이 상황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권태범밖에 없었다. 할머니 가게까지 안다는 그놈들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몰랐고, 할머니를 위협하지 않다는 보장도 없었다.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혼자서 떠들어대던 나는 마지막으로 용기 내서 입을 열었다.
“이 두 가지만 들어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할게요.”
침을 꿀꺽 삼키며 돌아올 권태범의 대답을 기다렸다. 근데 보통 소설 속에서 광공들은 어떻게 하더라…?
Q. 조직 보스가 직업인 광공에게 싸움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돌아올 대답은?
1. 네가 무슨 싸움이야? 무시하기.
2. 안 돼 위험해. 걱정하기.
3. 무슨 일이야? 이유를 물어보고 대신 복수해주기.
하지만 우리의 광공님은?
-돈은 있어?
“네에?”
다짜고짜 돈은 있냐고 물어보는 말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도, 돈을 바랄 줄은 몰랐다.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수화기 너머로 권태범이 피식 웃었다.
-지인 특가로 해서 최저 시급으로 해준다 해도 하루 24시간, 최소 3개월. 거기에 야근 수당까지 하면….
“그, 그만요!”
-꼬맹이, 돈 많은가 보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진 않지만 어쩐지 권태범의 입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려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씨이… 그나저나 돈은 어디서 구하지. 그냥 취소해야 하나?
답답한 마음에 울상을 지은 채 혹시 몰라 다시 물었다.
“저… 요리로 대신 퉁 쳐주면 안 돼요…? 저 할머니 닮아서 요리 조, 조금 하는데.”
물론 뻥이다. 이전에도 삼시 세끼 냉동 음식, 배달 음식으로 살았는데 요리는 개뿔. 하지만 일단 권태범의 도움을 받는 게 먼저였다.
-그거면 딱히 네 도움은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다른 걸 제시해봐.
하… 돈도 많은 자식이 좀 도와주지. 그냥…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게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그럼 이러는 건 어때.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할 때 무조건 세 번 들어주기.
무슨 소원 쿠폰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광공이라면서 꽤 귀엽네?
“돈 드는 거 아니죠? 그리고 신체 일부에 손상이 가는 일도 안 돼요.”
-……야.
“아, 알겠어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도 잠시 무조건 콜이라고 외쳤다. 내 별명이 예스맨이었다.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다치는 것도 아닌 일인데 이 정도면 개꿀이지. 그렇게 권태범과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모든 훈련은 우리 집에서 합숙 훈련으로 이루어질 거야. 그래도 괜찮아?
“에이, 당근이죠. 해병대 캠프 가는 거 같고 좋아요.”
-그래. 짐 싸서 내일 바로 와.
“네! 저 빨래도 엄청 잘하고요. 요리도 꽤 해요!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
막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막내 들어왔다고 빨래도 시키고 청소도 시키던데. 여기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거 같았다. 싸움만 배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보이진 않겠지만 나는 정말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네? 잘 못 들었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흐음… 무슨 말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를 묻는 내게 권태범이 직접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그건 혹시 모를 뒷일을 대비해서 거절했다. 결국 권태범의 집까지는 알아서 찾아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은 뒤 길 찾기 어플을 켰다.
“여기서… 뭐야, 걸어서 30분? 엄청 가깝네.”
충분히 걸어서 갈만한 거리였다. 어차피 싸움을 배우려면 기초 체력부터 키워야 하는데 내일은 간단하게 조깅으로 시작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말랑한 허벅지를 탁탁 내리치며 내일부터 시작될 훈련을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우선 일단락된 일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합숙 훈련 때문에 할머니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마른 몸의 차유원보단 우락부락한 조폭 아저씨들이 더 믿음직스럽긴 했다. 그리고 배우는 입장에서 이래라저래라할 처지도 못 됐고.
일단 편하게 입을 옷 3벌이랑 트레이닝복 5벌, 속옷은 대충 하루에 3번 정도 갈아입는다고 생각하고 혹시 모르니까 거기에 여분으로 5개 더 추가하면….
“어, 그럼 14개네. 살짝 아쉬우니까 하나만 더 챙길까?”
혼잣말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15개의 속옷을 가방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 이후로도 차유원이 평소 먹었던 것 같은 약부터, 드라이기, 칫솔 등등 필요할 만한 것을 가방 안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아이고, 힘들다.”
뭘 챙겼다고, 가방이 벌써 터질 듯 빵빵해졌다. 차마 끝까지 닫지 못한 지퍼를 비집고 터져 나오려는 옷가지를 꾹 누르다 혀를 찼다.
“쯧. 더 큰 가방은 없는 거 같고. 차유원. 힘 좀 써보자. 할 수 있어!”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워 넣고 힘을 주었다. 좁아진 거리에 이때다 싶어 지퍼를 잡고 끌어당겼다. 하지만 다리와 팔 힘이 풀리며 반쯤 잠겼던 지퍼가 다시 쭉, 하고 되돌아갔다.
“끄…응… 아, 몰라. 포기!”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닫히지 않는 가방에 결국 가방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자… 이제 그럼 할머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