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7)화 (7/136)

#7

마지막으로 한쪽 구석에 쌓인 옷가지를 들치자 그 안에 하얀색 핸드폰이 있었다.

이건 또 누구 핸드폰이지? 아, 이게 차유원 핸드폰인가?

저번에 그 핸드폰은 내 예상대로 권태범이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어서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건 차유원의 방에서 나온 것이니 아마도 차유원의 핸드폰일 거였다. 그의 차를 타고 오는 내내 흥건해진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핸드폰 화면을 두어 번 두드렸다.

“후… 다행이다.”

핸드폰 잠금은 지문 인식으로 풀 수 있었다. 동그란 버튼 위로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자 잠금 화면이 풀리며 기본 배경으로 설정된 핸드폰 화면이 나왔다.

“얘는 무슨 핸드폰을 시간 확인용으로만 들고 다녔나···.”

핸드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게임 어플도 없고, 핸드폰을 살 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어플만 나열되어 있었다. 익숙한 모양의 어플을 클릭하려던 순간, 할머니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유원이, 니. 나 좀 보자.”

“네에 할머니….”

지은 죄가 있기에 곧장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할머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른침을 삼켰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곧이어 다가올 아픔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할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유원아.”

“네…?”

“하이고. 우리 강아지 새끼를 우짜면 좋을꼬….”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배고팠어요… 내, 내일은 양파 하, 한 자루 더 깔게요!”

그래. 어차피 내가 안 하면 할머니가 해야 할 일이었고, 난 젊으니까 이 정도쯤이야.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 팔을 걷어붙이자 깡마른 손목이 드러났다. 할머니도 그걸 보셨는지 한숨을 푹 쉬는 얼굴에 나는 서둘러 다시 걷어붙인 옷을 잡아당겨 마른 손목을 감추었다.

“불쌍한 내 새끼….”

“할머니…?”

항상 강하기만 하셨던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시며 내 손을 문지르자 나도 괜히 눈물이 났다.

“할머니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할머니가 두툼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원아, 니 증말 할머니 따라서 안 갈끼가?”

“…네?”

할머니 어디 가세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기억에 눈을 또르르 굴리자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계약도 얼마 안 남았고, 내도 이제는 힘들어서 장사하기도 어렵다.”

“아….”

“니가 여기서 혼자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할미는 참말로 걱정된다.”

할머니의 걱정 어린 몇 마디에 그 내용이 짐작 갔다. 가게 계약이 곧 만료되고 그에 맞춰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다른 지역으로 가시나 보다. 차유원은 서울에 혼자 남아있겠다고 한 거일 테고.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이제 어린애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실 저 공부도 다시 하고 싶어요.”

“공부?”

공부란 말에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시더니 내 뺨을 매만지셨다.

“유원아, 참말로 괜찮겠나?”

차유원이 그 정도로 공부를 못했나…? 할머니의 떨리는 눈을 보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한국대 가서 할머니 호강시켜드릴게요!”

목표는 한국대. 입시 공부를 안 한 지 벌써 수 년이나 지났지만 한 번 한국대에 갔었으니 두 번은 쉽지 않겠어…? 내가 주먹까지 쥐어 보이며 결심을 표하자 할머니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힘들면 다 내려놓고 할미한테 와도 된다, 아가.”

그런 할머니의 눈을 마주하자 가슴에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차유원. 너 참 사랑받는 애였구나.’

일찍 주무시겠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 맞아. 오메가. 이걸 까먹고 있었네.’

침대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검색창에 ‘오메가’를 입력했다. 땀으로 젖은 손가락 때문에 자꾸 미끄러워 몇 번의 시도 끝에 검색할 수 있었다.

“오메가···. 내가 모르는 오메가라는 뜻이 있는 건가?”

연관 검색어에 오메가 쓰리가 나올 것을 예상하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연관 검색어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오메가···, 알파···, 히, 히트 사이클 이게 다 뭐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장 맨 위에 떠 있는 지식백과사전을 눌렀다. 그러자 10페이지가량 오메가에 대한 방대한 내용이 쏟아졌다. 나는 빠르게 그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10페이지를 모두 넘겼을 때는, 팔뚝에 소름이 돋고 눈앞이 새하얗게 일렁거렸다.

“하···, 하하···. 이게 무슨···. 그럼 내가 오메가라고?”

아무리 소설 속이라지만 이건 너무했다. ‘오메가’라는 형질을 가진 사람은 여자 남자 상관없이 임신할 수 있다니. 게다가 알파는 러트,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이라는 일종의 발정기가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아무리 여기가 허구의 세상이지만···, 심지어 원작에서는 이런 설정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차, 차유원. 그러고 보니 얘는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어떻게 도, 돌아갈 수 있는 건데?”

갑자기 몸이 서늘해지며 사방이 꽉 막혀 아무 데도 오고 갈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더듬더듬 손을 짚어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차유원의 물건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뭐라도 차유원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찾아야 했다.

“여기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 서랍 안쪽에 숨겨져 있던 차유원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래, 도대체 너는 어떤 인생을 살았던 거니. 나는 제발 이 일기장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천천히 일기장을 펼쳤다.

[20XX, 11월 12일(x요일)]

돈이 하나도 없어서 집까지 걸어왔다. 가지고 있던 현금을 책 사이에 끼워뒀는데 그놈들이 발견하고는 모두 가져가 버렸다.

할머니 생신 선물로 립스틱을 사려고 했는데. 이번 생신에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해드리게 되었다. 너무 죄송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20XX, 11월 30일(x요일)]

팔이 부러진 거 같다. 할머니 앞에서는 괜찮은 척을 하고 있지만 저번에 맞은 이후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20XX, 12월 16일(x요일)]

배고프다. 개수대에서 물로 배를 채우는 것도 이제 너무 힘들고 지쳤다. 하지만 급식실에 가면 그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갈 수가 없었다. 무섭다.

[20XX, 1월 8일(x요일)]

기록적인 한파에 아침 일찍 가게로 갔다. 역시나 수도관이 터져 주방이 전부 물난리가 났다.

그 아저씨가 아니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나를 도와준 것도 모자라 엄청난 돈을 사례비라고 주셨다. 난 진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튼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다.

[20XX, 2월 22일(x요일)]

할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걸 느낀다. 매일 새벽 기침 소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았다. 할머니마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벌써 무섭다.

[20XX, 3월 19일(x요일)]

그때 그 아저씨가 할머니 가게에 왔다. 할머니 말로는 단골손님이라고 하던데. 더 자주 왔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홍삼 캔디를 카운터에 올려두었는데 그냥 가셨다. 다음에는 다른 맛을 사야겠다.

[20XX, 4월 7일(x요일)]

할머니의 가게가 엄청 잘 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할머니 음식 솜씨가 최고다. 하지만 할머니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여서 마음이 안 좋다. 얼른 성공해서 할머니께 효도하고 싶다.

[20XX, 7월 20일(x요일)]

내 머리를 잡고 테이블에 누르려는 그 새끼의 손을 깨물고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벌써 핸드폰엔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학교에 갈지 걱정이다. 그냥 죽고 싶다.

[20XX, 7월 22일(x요일)]

형의 말대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제발, 내가 우리 할머니를 지킬 수 있길. 내 스스로 나를 지킬 수 있길 기도했다.

[20XX, 7월 23일(x요일)]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아 집 근처에 있는 복싱장을 찾아갔다. 하루 종일 줄넘기만 하고 왔지만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얼른 건강해지고 싸움도 잘하고 싶다.

[20XX, 8월 23일(x요일)]

줄넘기만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관장님과 스파링이란 걸 했다. 많이 맞기도 했지만 얼른 기술을 익혀서 내 몸도 지키고 할머니도 지켜드리고 싶다.

들어가는 길에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수박을 사갔더니 할머니께서 잘 드셨다. 여름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20XX, 8월 24일(x요일)]

복싱장에서 형을 만났다. 앞으로는 이 시간에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사준 음료수를 차마 먹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너무 행복했다.

[20XX, 9월 3일(x요일)]

개학 날 그놈들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가만히 참고만 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항을 했던 거 같다. 특히 그놈이 많이 놀랐는지 나를 놓아주었다.

복싱을 시작하길 잘한 거 같다. 이게 전부 형 덕분이었다.

[20XX, 9월 10일(x요일)]

오늘은 형이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었다. 처음으로 탕수육 대자를 시켜서 먹었다. 배가 불렀지만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게 되었다. 다음엔 할머니도 모시고 가야지.

형이 점점 좋아진다. 얼른 1월 1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20XX, 9월 16일(x요일)]

형이 알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니다. 그냥 오늘은 힘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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