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오는 전화에 퍼득, 고개를 들었다.
“아 혹시 이거 차유원 핸드폰 아닌 거 아니야?”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핸드폰 통화 버튼을 쭉 밀었다.
“여보세요···?”
-나야.
어···. 이 목소리는… 설마 권태범?
그래, 이 수화기 너머까지 섹시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권태범밖에 없었다. 그럼 이 핸드폰은 역시 권태범이 넣어두고 간 건가?
“태범 씨···?”
꼬르륵-
그 순간 또다시 꼬르륵 소리가 울렸고 손에 든 양파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모든 게 서럽고 슬퍼졌다. 배도 고프고 허리도 아프고 잠도 자고 싶고 무엇보다 진짜 사과가 너무 먹고 싶었다.
“흐윽···, 태범 씨. 저 너무 배고파요······.”
갑자기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도 권태범은 담담하게 어디냐고 물었다. 몇 번의 질문 끝에 내가 처한 상황을 파악한 그가 할머니의 가게 앞으로 오겠다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뭐…? 지금 여길 오겠다고?”
광공놈이랑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건만, 마지막 남은 양파를 손질하고 있을 때쯤 스멀스멀 올라오는 허기짐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손에 밴 양파 냄새를 빼기 위해 찬물로 빡빡 씻고 할머니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식당을 빠져나왔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데 식당 밖으로 나가자마자 마치 나를 오래 기다린 것처럼 권태범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사…과.”
그리고 그의 손엔 아주 새빨갛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사과가 한 바구니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것에 홀렸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권태범의 차 안이었다.
광공놈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너무 배가 고파 사각사각 소리까지 내며 사과를 허겁지겁 두 개나 먹었다. 정신없이 사과를 먹다가 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에는 중국 음식점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중국 음식이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근데 엄청 먹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권태범이 자주 오던 곳이었는지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들어가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권태범은 곧바로 이것저것 다양한 메뉴를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열심히 먹고 있을 때, 고소하고도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뭐지, 이 향긋한 냄새는?’
콧구멍을 발랑거리며 주변을 보자 옆 테이블에서 크림 새우가 맛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너무 먹음직스러워 나도 모르게 자꾸만 옆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권태범이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저것도 시켜줘?”
“······저 돈 없어요, 태범 씨.”
“뭐?”
입에 묻은 자장 소스를 닦으며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번에 주머니에 넣어놨던 오만 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할머니가 빨리 씻고 나오라고 재촉해서 급하게 씻고 나왔는데, 그 후로 오만 원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땡전 한 푼 없는데 자기 마음대로 탕수육까지 시켜버린 권태범이 너무 미웠다. 진짜 이러다가 할머니 식당에 이어서 이 중국집에서도 양파를 까는 거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손처럼 쭈글쭈글해진 손끝을 꾹꾹 누르며 권태범을 올려다보자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 보았다.
“먹고 싶으면 먹어. 자꾸 불쌍한 개새끼처럼 옆 테이블만 쳐다보지 말고.”
먹고 싶으면 시켜도 되는 건가? 아니야. 그러다가 내가 내는 거면 어떡해···. 가뜩이나 지금 시킨 음식값도 권태범에게 빌려야 할 판인데 크림 새우까지 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과는 달리 시선이 자꾸만 옆 테이블로 향했다.
오늘따라 뽀얀 크림을 덮고 있는 새우의 윤기가 자르르하니 시선을 끌어당겼다. 고소하고 느끼한 냄새가 솔솔 나서 콧구멍이 자기 마음대로 벌렁거렸다.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눈은 자꾸만 크림 새우로 향했다.
딩동-
자장면에 이어 달짝지근한 소스에 탕수육을 푹 찔러 넣었을 때였다. 권태범이 갑자기 손을 뻗어 테이블 옆에 달려 있는 동그란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다가온 직원이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크림 새우, 대자 하나 주세요.”
“태, 태범 씨? 저기, 잠깐만요.”
다급한 내 손짓에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나와 권태범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내 모습에 태블릿에 시선을 두고 있던 권태범이 고개를 들어 다시 직원에게 말했다.
“그냥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먹어.”
권태범이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고, 그 시선에 흠칫 몸을 떤 나는 직원에게 속삭였다.
“그게···, 대···자 말고, 소자로 부탁드릴게요. 대자는 너무 많아서···.”
안 먹는다는 게 아니었는데. 씨이···. 괜히 권태범 때문에 더 창피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직원의 눈을 피해 서둘러 테이블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씨… 창피해 죽겠어···.
이미 테이블에는 호기롭게 시킨 자장면과 탕수육, 군만두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미 점심을 먹은 권태범은 손 하나 대지 않아 이건 전부 내 몫이었다.
하아···. 가격은 얼마나 나오려나. 음식에 손도 안 댄 권태범에게 돈을 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양심에 찔렸다. 그 오만 원만 어떻게 안 잃어버렸어도···.
그나저나 권태범한테 이 정도 돈은 있겠지? 나는 티슈로 입가를 꾹꾹 눌러 닦으며 나를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권태범에게 말했다.
“저, 태범 씨.”
“왜 또, 이번엔 다른 게 먹고 싶어졌어?”
내 부름에 아예 태블릿 화면을 끈 권태범이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그게 아니라요. 돈···, 있으시죠···?”
“뭐?”
“혹시 현금 가지고 계신 거 있으면 저 오만···, 아니 십만 원만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권태범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설마 모르는 체하진 않겠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권태범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입가가 파들파들 떨렸지만 끝까지 미소를 띠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야, 꼬맹이.”
이번에는 잘생긴 얼굴이 통하지 않은 건지 권태범의 얼굴에 웃음기가 메말라 있었다. 어떻게 검지로 내 볼따구니라도 찔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서늘한 눈을 한 권태범이 물었다.
“너 지금 나를 뭐로, 후우···, 아니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예? 그야···.”
‘조폭?’이라고 대답하려다가 나는 흡 하고 입술을 입안으로 머금었다.
미친. 하마터면 조폭으로 2행시를 할 뻔했다. ‘조폭’이면 ‘조아해요, 포오옥 저를 안아주세요?’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근데 왜 자꾸 이런 대사만 떠오르는 거지? 차유원! 넌 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길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권태범의 눈치를 보았다. 그 앞에 놓인 나이프가 오늘따라 더 날카로워 보였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물었어.”
“···예? 그야···, 그러니까 말이죠···.”
“3초 준다.”
“···어···.”
“2초.”
아니 광고도 60초는 주던데 겨우 3초가 뭐냐고요! 나는 억울한 마음에 눈을 뾰족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권태범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
“자, 잘생긴 사람이요···.”
“······.”
“도, 돈도 많고···?”
“······.”
“엄청 멋있어요···.”
풀릴 듯 말듯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머문 얼굴에 할까 말까 고민만 하던 말을 내뱉었다.
“딱 제 스타일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권태범의 구겨진 얼굴이 다시 허물어졌다.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자 권태범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쌌다. 히윽.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반으로 쪼개버리는 걸까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다.
“으핫?”
갑자기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아 눈을 떴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권태범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이런 게 어디서 튀어나왔지?”
뜨끔.
서, 설마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눈치챘나···?
침을 꿀꺽 삼키며 제발 살려만 달라는 눈으로 권태범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내 입술을 꾸욱 눌렀다.
“차유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권태범의 시선이 내 얼굴을 진득하게 훑어 내려갔다. 그의 시선에 따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도 벌벌 떨렸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고소한 냄새가 훅하고 다가왔다.
“주문하신 크림 새우 나왔습니다.”
“아···.”
나는 눈을 또르르 굴려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직원을 올려다보았다.
“태, 벙씨···?”
입술이 눌려 발음이 샜다. 어린아이 같은 발음에 볼이 달아올랐다. 민망함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시선을 돌렸다. 권태범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랫입술을 살짝 문지르곤 손을 거두어갔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직원은 꾸역꾸역 빈 공간을 만들어 내 크림 새우를 조심히 내려놓은 뒤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뭐 해? 먹고 싶다며.”
“아···.”
아직도 그의 뜨거운 체온이 닿은 것 같아 입술을 문지르며 포크를 들었다. 큼지막한 새우를 콕 찍어 소스를 듬뿍 묻힌 후 입으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