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행이다. 잘 넘어갔어. 후우···.
권태범의 입에서 나온 ‘젠’이란 음절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젠부··· 다···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씨이······. 어떻게 얻어낸 기회인데. 설마 맞춤법이 다르다고 목을 조르진 않겠지? 다시 시선을 움직여 힐끔, 권태범의 눈치를 살폈다.
“실.”
생각보다 엄청 깐깐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려운 구간을 넘긴 나는 자신감에 차서 그다음 문장을 이어갔다.
“실망하셨죠?”
“수.”
“수없이 생각해도 왜 그런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어요.”
“였.”
“였 같으셨죠?”
조금 전에도 맞춤법이 다르다고 혼내진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살짝 애교를 섞어 문장을 이어갔다.
“습.”
오오, 넘어갔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는데?
“습습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실은 그게 본심은 아니었는데 그냥 부끄러워서···.”
근데···, 하면 할수록 왜 사랑 고백이 되는 거 같지? 나 권태범이랑 거리 두기 해야 되는데···?
문뜩 든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자 권태범과 두 눈이 마주쳤다.
“저기···, 계, 계속··· 할까요?”
“어, 재밌네. 더해봐.”
망했다···. 싸늘했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권태범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자 묘하게 어디선가 생겨난 불안감이 몸을 덮쳐왔다.
“니.”
꿀꺽. 나도 모르겠다. 죽이려고 하면 그냥 도망가지, 뭐! 될 대로 되라 싶어 길게 생각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내뱉었다. 그래도 권태범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기에는 너무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니···, 니가···!”
“······.”
“가라고 해도 이제 절대 못 가요.”
긴 적막이 흐르고 나는 눈을 살며시 떴다. 이번에도 성공···?
“다.”
“다··· 좋아해요, 태범 씨의 모든 걸 전부 다···.”
성공이긴 한데···. 저기 유, 유원아?
“잊.”
“잊…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태, 태범 씨를 좋아하는지.”
너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지?
“으.”
“으··· 으제는···.”
“세.”
“세상에서 제일 조, 좋았습니다.”
너 이게 아무리 빙의라고 해도 쟤는 권태범이다? 너 진짜 뚫린 입이라고 막 뱉으면 안 돼.
“요.”
“요만큼··· 아픈 것만 빼면요······.”
결국 순간의 두려움을 피하려 얼떨결에 내뱉은 12행시는 권태범에 대한 사랑 고백이 되어버렸다.
하아···. 이 대책 없는 새끼.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욕하며 볼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이리 와, 차유원.”
내 사랑 고백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범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느릿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족쇄가 채워지듯 내 허리에 권태범의 두꺼운 팔이 감겼다.
“노력이 가상하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줄게.”
“······.”
“하지만 다음은 없어. 이 작은 머리로 똑똑히 기억해야 할 거야.”
나는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고 권태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권태범에게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권태범에게서 안전하게 멀어질 수 있는 대책이.
***
권태범이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는 것을 집이 엄해서 들키면 죽는다는 핑계로 근처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에게서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집 주소를 알려 주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그를 돌려보내고 혼자 집 앞에 도착한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반나절 사이에 기력이 다 빠진 몸을 겨우 움직여 집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
“시방, 이 썩을 놈의 새끼! 지금이 몇 신디 이제 기어 오는겨!”
“히윽- 저, 저기… 할머니···?”
문을 열자마자 할머니가 프라이팬과 전기 파리채를 양손에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랴. 내가, 니 할미다 이 호로 잡놈아.”
“그, 그게요···.”
긴장을 놓았던 것도 잠시,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할머니의 모습에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변명은 다 필요 없고,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거나 해야 쓰것지, 안 되것다.”
아···. 나는 뒤늦게서야 이 소설 속에서 권태범보다 무서운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기 파리채를 들다 못해 옆에 달린 버튼까지 꾹꾹 누르며 나를 향해 손을 뻗는 할머니가 너무너무 무서웠다.
할머니 저, 전기 파리채는 좀 내려놓으시고··· 그거 저, 전기 통하잖아요, 히윽···.
“으아! 자, 잘못했어요!”
나는 곧장 차가운 현관에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었다. 파리보다도 더 열심히 빌었다. 꿈인 줄 알고 마음대로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남의 몸을 함부로 굴린 건 맞았다.
주름살이 곳곳에 잡힌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할머니를 보자 어젯밤 일찍 들어가서 쉬라는 거짓말로 할머니의 등을 떠밀었던 사실이 양심에 콕콕 찔렸다.
“흐윽, 죄송해요 할머니···.”
“후우···. 니는 오늘 나랑 정신 교육 좀 해야 쓰것다. 당장 옷 갈아입고 따라와!”
진심 어린 내 사과가 통한 건지, 할머니가 손에서 무시무시한 장비를 내려놓고 뒷짐을 지며 말했다.
“네에···.”
나는 코를 훌쩍이며 할머니를 뒤따라갔다. 정신 교육이라는 게 뭔지는 몰랐지만, 정신을 차리긴 해야 할 거 같았다.
***
“예···? 이걸 전부 다요?”
“그려. 그래 봤자 양파 10자루, 마늘 20접 밖에 안 되니께, 오늘 장사하기 전까지 전부 다 혀. 알겠냐?”
“할머니···. 제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건데요. 이건 노동력 착취 아닌 가요···? 아! 맞아 저 하, 학생 아니에요···?”
주방 한구석에 잔뜩 쌓여있는 양파와 마늘에 눈앞이 캄캄했다. 소심하게 항의하자 할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시방, 어제부터 뭘 잘못 처묵읏는지 자꾸 헛소리만 하네. 니가 학교 그만둔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이러냐!”
“예···? 저 대, 대학생 아니에요?”
“대학은 무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기!”
“···차유원. 아니, 저 고, 고등학교도 안 나왔어요?”
학교를 그만뒀다고···? 그럼 차유원 직업은 뭔데? 그리고 대체 얘 나이는 몇 살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쥐어짜며 ‘차유원’이라는 인물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차유원은 권태범이 자주 가는 식당 주인의 손자일 뿐이었고, 조연 중에서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었으니 차유원에 대해 내가 잘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아······.”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오늘 안에 그거 못 끝내면 밥도 못 얻어먹을 줄이나 알어!”
쾅-
“하아······.”
꽉 닫힌 주방 문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적이었다.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할 텐데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니···.
대학은 그렇다고 쳐도 고등학교는 졸업했어야지, 차유원. 잘생기고 귀엽기만 하면 다냐!
그 와중에 대야에 받아 놓은 물에 비친 얼굴이 귀여웠다. 열이 난 건지 볼이 불그죽죽 붉은 게 화장이라도 한 거 같은 얼굴이었다.
“어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잘생기기만 한 놈······. 쓸데없이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하얗고, 우아한 귀족 턱에 눈은 주먹만 하며 콧대에 손이라도 닿으면 그대로 베일 놈······.”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실속 없이 너무 잘나기만 한 차유원을 욕하며 천천히 칼을 잡아 들었다.
“흑, 아파···.”
마지막 남은 양파를 하나 집어 들며 옆에 차곡차곡 쌓아둔 양파와 마늘을 바라보았다. 저 쪼그만 것들이 맵기는 얼마나 매운지, 양파와 마늘을 까면서 흘린 눈물만 해도 한 그릇은 나올 듯했다.
“흐윽··· 너무, 매워어···.”
결국 똑,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콧물을 훌쩍였다.
꼬르륵-
설상가상으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작게 울렸다. 배가 너무 고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권태범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할 때 얌전히 따라갈걸.
“훌쩍···. 배고파아···. 허리도 아픈데···.”
진짜 생각할수록 나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그냥, 진짜. 진짜, 딱 한 번 잘생긴 남자랑 뭐라도 해 보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대가가 이렇게나 혹독할 줄이야···.
배고픔에 못 이긴 나는 새하얀 살결을 드러낸 양파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이건 사과다, 엄청 달고 맛있는 사과다···.”
눈을 감고 다른 손으로 코를 막으며 머릿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했다.
‘그래 이건 사, 사과야….’
그리고 양파에 입술 끝이 닿았을 때.
지잉-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엄청 가까이에서.
“누구지······?”
나한테 핸드폰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엉덩이를 간지럽히듯 닿는 진동에 쭈그리고 앉았던 빨간색 의자에서 일어나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모르는 번호인데···. 그나저나 이거 차유원 핸드폰인가?”
게다가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스팸인가?”
스팸 전화여도, 차유원을 아는 사람이 한 전화여도 문제였다. 일부러 수신 거부를 한 뒤 다시 칼을 집어 드는데 똑같은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뭐지… 중요한 전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