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logue (23/23)

#. Epilogue

“좋아 보이시네요.”

“…선생님은 좀 늙으신 거 같은데요.”

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는 나의 친근한 농담에 고개를 젖히며 쾌활한 웃음을 터뜨린다. 오랜만에 듣는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 마음엔 따뜻한 감정이 번진다. 그는 나에게 생명의 은인과도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지옥 같은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니까.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고 나더니 그는 그제야 앉으라며 의자를 권한다. 잠시 지금 당장 보내야 할 서류가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나를 향해 스스럼없이 웃어 보인다. 오늘이 이 남자를 마주하는 것이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니 남다른 감회가 피어오른다. 급한 일이 있다기에 그냥 나를 내버려두고 일을 할 줄 알았던 남자는 곧바로 자신이 직접 로스팅하고, 손으로 분쇄한 원두커피를 끓여 내어주고나 서야 책상 앞에 앉는다. 아무튼 그는 환자에 대한 정성이 지극한 건 여전 한 듯 했다. 물론 그 정성이라는 것이 순전히 자신의 방식대로이긴 하지만.

그 날도 그랬다. 그때도 그는 이런 커피를 내어놓았었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무더운 여름, 뜨거운 커피에서만 제대로 된 향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더운 커피를 마주해야 했던 그날. 나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익숙하게 잔에 손을 가져다 댄다. 거짓 1년 만에 마주한 그 만의 특제 커피향을 음미하며 나는 그 남자를 처음 만나게 된 사연들을 아련하게 떠올린다.

한국 땅을 밟자마자 공항에서 전화를 건 상대는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온 죽마고우였다. 전문대를 나온 그는 이미 직장을 다니며 독립한 상태였고, 한동안 소식이 없던 내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잠시만 너와 같이 살아도 되겠느냐는 말을 해도 부담 없이 받아줄 친구였다. 예상대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받아주었다. 이미 한국에도 ‘프랑스의 유명한 뮤지션의 연인이 한국인 동성애자 유학생’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전해진 상태임에도, 세상일에 관심이 없던 그는 내가 프랑스에서 어떤 일을 겪고 돌아온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다는 참담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는 절망에 빠진 채 집에만 틀어박혀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물음으로 매일 같이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은 친구의 집에서 폐인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를 찾아냈다. 귀국에 곧이어 날아온 입영영장이 그들에게 나의 입국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고급스런 슈트를 입고 내 앞에 입영 통지서를 내민 사람은 나의 친형 장진성이었고, 1년 반 만에 만난 형과의 만남은 가식적인 안부의 나눔도 없이 하얀 봉투를 주고받음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어 달 뒤, 나는 군대에 들어갔다. 

끔찍할 줄만 알았던 군대 생활은 오히려 나에게 감사한 생활이었다. 더 이상 세상 밖에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꼭두각시처럼 상사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기만 하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하루가 끝나버렸고, 그렇게 하루 종일 육체의 피로가 축적되어 숙소로 돌아오면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군대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불침번을 서는 밤이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있을 때마다 왼쪽귓불에선 전해져오는 따끔한 고통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침번을 서는 밤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총자루를 쥔 손을 몇 번이나 꽉꽉 움켜쥐며 끔찍한 상상을 곱씹곤 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다시 정신없이 흘러가는 천편일률적인 생활에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의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동안 남자에 대한 기억들은 그대로 정체되어있었다. 

내가 군대생활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난 뒤부턴 친형이 면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형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형을 보며 그날의 일에 대해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이전처럼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저 오랫동안 보지 못해 서먹한 정도의 관계로 회복되어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하루하루 지루하기만 한 군대생활을 나는 끝났다는 자각을 할 틈도 없이 제대해버린 뒤,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형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러나 2년이라는 공백이 우습다는 듯, 군대에서 돌아오고 난 뒤의 나의 시간은 2년 전 프랑스를 떠나온 직후의 상태로 완전히 되돌려져있었다.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일 밤이면 꿈속에선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휘어지는 쥴리앙의 눈매가 떠올랐고, 가슴에 칼을 꽂은 채 돌아본 나에게 지리멸렬한 미소를 짓고 있던 모습이 교차하며 나타났다. 천국과도 같은 거룩한 순간과, 그보다 더 처참할 수 없었던 지옥 같은 순간이 번갈아 머릿속에 펼쳐질 때마다 나는 나의 연옥에 대한 증오심과 패배감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형과 같은 집에 살고는 있었지만 서로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형은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항상 회식과 야근으로 늦게 들어와 저녁식사 마저 함께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홀로 보내며 끝나지 않는 고통과 끝낼 수 없는 삶을 방치하고 있었다. 

제대한 지 한 달 반쯤 지났을 때였다. 한국에서 맞는 세 번째 여름의 장마는 무척이나 길었다. 오랫동안 습한 공기에 방치된 내 왼쪽 귀는 장마가 시작된 이후 내내  아파오고 있었다. 나는 살을 파먹는 듯 아파오는 고통에 귓불에 손을 가져갔다. 혹이 만져지는 것처럼 아물어버린 상처 위로 쥴리앙의 귀걸이가 만져진다.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자리에 박은 것이었다. 내 마음 속에 보석처럼 여전히 변치 않은 빛을 지니고 있는 쥴리앙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장맛비는 지루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그 긴 장마동안 아려오는 고통 속에서 비 때문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낮 동안 내내 울다 지쳐 잠이 든 나는 귓가에서 울려오는 문소리에 정신이 깼다. 웬일인지 그날은 형이 일찍 들어왔다.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밥을 먹는 건지 침묵을 삼키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형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대책 없이 살 거냐.”

“…….”

평소에 유연한 말투를 쓰는 형이 대뜸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꽤나 참아온 모양이었다. 단 한 마디였지만 나는 형의 말뜻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이제 제대도 했으니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직장을 가져야지 않겠냐는 훈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 없어 살고 있는 나에게 그런 설교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물론 평생 형의 집에 얹혀 살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구차한 삶을 연명하려면 그의 말대로 언젠간 직장을 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쥴리앙에 대한 미련을 떼어내는 일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힘겹고 버거운 삶이었다.

그런 말을 형에게 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반항이라도 하듯 한가득 밥을 푼 숟가락을 집어삼켰다. 

그때였다. 형이 나의 손목을 붙잡은 것은. 그리고 형은 제지할 틈도 없이 거칠게 옷소매를 걷어냈다. 그리고 백열등 아래로 팔목에 새겨진 자해의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칠 만큼 길었던 장마, 그때부터 시작된 스스로를 향한 형벌이었다. 어쩌면 화석처럼 남아있던 쥴리앙의 팔에 남겨진 상처를 추억하며 그런 식으로라도 그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놔아…!”

나는 억눌린 목소리로 그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냈다. 부끄러웠다. 제대하고 집에 처박혀 과거의 남자를 떠올리며 자해를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싫었다. 붙잡혔던 손목의 속박이 풀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쫓아와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문 밖에선 깊은 한숨과 함께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직접 그의 모습을 관찰한 건 아니지만 방 밖에서 느껴지는 의미심장한 분위기에 의해서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은 건지 충분히 짐작이 갈만 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잊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숨어들어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이 평생 동안 계속 될 것만 같아서 무섭고 두려웠다. 죽고 싶었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는 스스로 목숨조차 끊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었다.

형이 나를 심리치료센터에 데려간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사실 형이 센터로 데려갔을 때쯤엔 나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무력감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스스로도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형의 처우를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전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나의 어두운 감정의 밑바닥까지 들어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서 나는 형의 대학 친구라는 심리상담사 ‘황석원’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의 외모를 가진 황석원은 나의 형과 어울릴법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황석원은 기껏해야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남자였고, 더구나 형의 친구였기에 도무지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상담일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황석원도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내가 입을 열지 않자 나중엔 그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먼저 말을 꺼낼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미 끝날 것 같지 않던 장마가 끝나고 다시 무더위가 시작 되었던 세 번째 상담. 그날도 언제나처럼 가벼운 인사와 함께 커피를 내어놓고 내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황석원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고, 나는 처음으로 그 앞에 놓인 커피에 손을 가져갔다. 

“…죽고 싶은데, 죽고 싶어 미치겠는데,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

“잊고 싶은데, 잊고 싶어 미치겠는데, 잊을 수가 없었어요.”

남자 앞에 옥죄인 목소리로 처음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황석원은 처절하게 내뱉는 그 한마디에 신중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내 감정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 남자에게 조금씩 나의 이야기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 진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시작한 황석원과의 상담은 2년간 계속되었다. 2년이었다 해도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나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상담을 시작하고 나니 오히려 그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형의 친구라는 점이 걸렸지만 상담을 하면서 황석원은 나에게 그가 절대 내 이야기를 형에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을 주었다.

2년. 그렇게 나는 그 앞에서 쥴리앙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다 털어놓으며 수도 없이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아무리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때에도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 다시는 그런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하나하나 감추고 지우려고만 했던 기억들을 펴보면서, 나는 점차 손에 꾹꾹 쥐고 있던 죄책감과 후회들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었고, 내가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잘못 판단했던 것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다. 달력에는 적혀있지 않은 봄처럼,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이었다. 그래서 처음 맞는 봄의 따스함에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너무도 소중해서 부족한 자신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깨질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저 가슴에만 품으려 했다. 그렇게 절실하게 품으면 깨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진리처럼 여기며 우리는 사랑을 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발견한 것이다. 사랑해서, 너무도 사랑해서 오래토록 품고만 있던 것이 집착과 속박으로 변질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모든 것이 소중하고 절실해서 안절부절 못한 나를 탓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힘들었다’는 한 마디가 먼저 떠오를 정도니까. 그래, 정말로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그냥 공부만 좇기에도 힘겨운 유학생활에 갑자기 찾아온 놓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나의 작은 그릇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버텨내느라 하루하루가 힘겹고 버거웠다. 그래서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자 하기에 나는 너무도 여유가 없었고, 너무도 어렸다. 

쥴리앙도 탓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보다도 미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 역시 좋은 기분으로 나를 아웃팅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게 만든 건 나의 진실 되지 못한 행동들이었다. 그때 나는 그를 보듬어줄만한 그릇이 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만을 가득 남긴 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우리가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을 했다. 마지막으로 쥴리앙을 보던 날, 나는 그에게 우리는 사랑한 게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헤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안다. 너무도 사랑해서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우리 이외에도 많은 연인들의 이별도 그렇게 끝나버린다는 것을. 수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제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분명, 사랑하고 있었다. 상대방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마치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며 미친 듯이 사랑을 했다. 어려서 그 사랑을 보듬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어렸기에 가능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렇게 상담을 통해 쓴 내 나는 약을 삼키듯 뜨거웠던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상담을 시작한지 몇 달 뒤 나는 대학 동창의 소개로 영상물 하청을 받아 제작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나의 삶을 되찾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회사에 다닌 지 1년쯤 지나고부터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다시는 애니메이션에 손을 대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시작하게 된 계기 역시 쥴리앙에 대한 기억을 털어내기 위한 일종의 치유 과정이었다. 그건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썼던 허수아비와 제비의 이야기였으니까. 나는 작업을 시작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나면, 이 지독하게 이어지는 사랑도 그 이야기와 함께 놓아버릴 수 있을 거라고. 쥴리앙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곱씹고 되새기는 방법으로 치유하다니. 조금 모순된 상황이었지만 내겐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곪은 상처를 터지는 게 아프다는 이유로 방치해서는 치료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실은 상담을 하면서 나는 게이 바에서 만난 남자와도 잠깐 사귀어봤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와의 기억도 완전히 잊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굳이 게이 바를 찾은 것은 미사와의 일 이후로 더 이상 여자와 일이 엮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반감과 나의 성 정체성을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이젠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확신이 선 상태였다. 

바이 섹슈얼. 정확히 말하자면 동성애자에 가까운 양성애자였다. 어찌 보면 문란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나의 본성은 그러한 것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상담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쥴리앙에게 호감을 가진 것이 동성에게 처음 성욕을 느낀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 나를 유독 예뻐하던 유부남의 미술 선생님에게도 나는 성적으로 흥분했었다. 두어 번, 그와 관련된 꿈을 꾸며 몽정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의미 없는 개꿈이라는 평가절하와 동성애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으로 인해 그것을 완전히 망각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쥴리앙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도 성적으로 흥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사귀었던 남자는 나보다 네 살 어린, 쥴리앙과 같은 나이의 대학생이었다.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었지만 그 녀석과는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어릴 적 내 모습을 떠올릴 만큼 열성적으로 사랑에 목매는 녀석이었고, 이미 그런 사랑을 병처럼 앓고 난 나는 툭하면 토라지고 감정싸움을 걸어오는 그의 사랑에 맞춰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땐 아직 쥴리앙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였는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쥴리앙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었다. 과거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고, 이런 식으로 관계하는 걸 유지하는 것 역시 상대방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좋게 달래며 헤어졌다. 

어쨌든 그렇게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생활을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작업에 점차 열중하면서부터는 바쁜 일과 덕분인지 더 이상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길고 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나의 일상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4년이나 지나버린 5월, 나는 내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을 가져다준 남자를 만났다. 새로 나온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월차를 내고 시카프 영화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상영관을 나오던 중 누군가가 나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돌아보니 다시 만났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 남자가 서있었다. 쟈끄 윌토르. 4년 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쟈끄는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와락 껴안으며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이미 만으로 스물여덟이었고, 쟈끄는 서른두 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법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쟈끄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척이나 기이하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영화관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고, 쟈끄는 자리에 앉자마자 속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에,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할 수가 있어? 그동안 네 소식이 얼마나 궁금했는데.”

쟈끄는 나에게 접촉을 취하기 위해 그 이후 학교에 남아있는 연락처로 한국의 집에 틈틈이 연락을 시도했다고 한다.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부모님은 쟈끄가 쥴리앙이라 착각하고 그동안 연락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안 하신 모양이었다. 

쟈끄는 2년 전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뒤에서야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쟈끄는 한편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다. 의미 없는 사과에 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괜스레 어색해진 기분에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뿜어대자, 희뿌연 시야 사이로 조금 놀란 것 같은 쟈끄의 표정이 비친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운 거야?”

“군대에서 배웠어.”

“하여간 군대에서 가르치는 거라고는 죄다 인간의 의지력을 굴복시키는 것들뿐이구나.”

“담배를 피우고 보니 사람들이 왜 피우는지 알겠더라. 올곧은 정신으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끔찍한 거야. 그래서 담배로써 스스로를 감각을 둔화시키는 거지.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비실비실 웃으며 개똥철학 같은 소리를 지껄이자 쟈끄는 씁쓸하게 웃어 보인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소리였는데 그걸 쥴리앙의 일과 연관시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한 소리를 했다고 짧게 후회해본다.

“그래서, 요즘엔 어떻게 지내?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하고 있는 거지?”

곧바로 화제를 돌려 물어오는 질문에 나는 조금 뿌듯한 이야기를 한다. 애니메이션과는 관련 없는 회사에 다니면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노라고. 그 말에 쟈끄는 곧바로 눈을 번뜩이며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을 보여 달라고 졸랐고, 그날 저녁 곧바로 그를 집으로 초대해 삼분의 일정도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었다. 쟈끄는 식탁에 앉아 녹차와 간단한 다과거리를 먹으면서도 줄곧 내 애니메이션과 스토리보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몇 번이나 진중히 검토하더니 양 손을 깍지를 끼며 이렇게 말했다.

“지노, 괜찮다면 나와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뭐?”

“너도 알다시피 내 이야기는 좀 가볍고 재미를 추구하는 편이잖아.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나에겐 밸런스를 맞추는 게 참 어려운 일이거든. 내 스튜디오에 있는 애니메이터들도 대부분 나랑 비슷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너의 이야기 색깔은 일상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다고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호소력도 충분히 있고. 네 이야기 스타일이 보완된다면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

“충동적인 제안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나 이전부터 너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해왔어.”

“…아니, 잠깐. 갑자기 스튜디오라니…, 그럼 정말 너 회사를 차린 거야?”

오랜만에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탓에 빠르게 내어놓는 그의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되묻자 쟈끄는 강단지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회사라고 하긴 뭐하지만 재작년부터 정식으로 이름을 걸고 시작했어. 아직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춘 건 아니고 우선 단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올해부턴 본격적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볼까 하고 있는데 너처럼 재능 있는 스토리텔러가 참여한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아.” 

“…….”

“무엇보다 나, 네 이야기를 참 좋아하거든.”

진심어린 칭찬과 함께한 쟈끄의 제안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런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 자신이었다. 다시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을 거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줄곧 동경해왔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1년 반 동안의 기억은 다시는 그곳에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고민 없이 힘든 결정을 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스튜디오에 들어간다면 당분간 결코 안정된 생활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하든 어려운 고행 길을 택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기존의 회사에 들어가 스타일을 귀속당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흔히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게다가 프랑스는 한국보다 훨씬 작업 여건이 좋았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한 뒤로부터는 촉박하게 세상이 돌아가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었기에 이민을 염두에 둔 프랑스에서의 직장생활은 그다지 고민할 것이 못 되었다. 

다만 마음에 걸렸던 것은 내가 과연 쟈끄의 스튜디오에 들어갈 만한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다. 쟈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장진호라는 사람은 대외적으로 프랑스인들이 알만한 학교에 졸업하지도 못했고, 이렇다할만 한 개인 작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나온 긍정의 대답에 이어 나는 쟈끄에게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지금 만들고 있는 「JOIN」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고 페스티벌에 출품했을 때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는지 시험해본 뒤에 프랑스로 옮겨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참여하겠노라고 말이다. 쟈끄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은 건지 잘 알겠다며 그렇게 하자고 수락하며 우리는 서로 간에 구두계약을 맺었다.

처음으로 쥴리앙의 소식을 찾은 건 이듬 해였던 올해, 겨울에 완성한 「JOIN」이란 작품이 3월 안시에서 경쟁 작품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옴으로써 나의 프랑스행이 결정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건 프랑스를 떠나온 지 4년 뒤, 내가 만으로 스물아홉이 되었을 봄이었다. 그동안 줄곧 쥴리앙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그 전까지는 어째서인지 그의 소식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힘들었던 시기에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던 나의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은 이미 격렬한 감정을 수반했던 기억들이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의 차분한 기분이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쥴리앙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살고 있었다. 과거에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변화시키고 끔찍한 상처마저 깨끗이 아물렸다. 나는 그렇게 시간에 아물린 상처를 안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집어넣었다. 

공교롭게도 검색된 기사에서는 쥴리앙 오르로제가 그 해 겨울, 2집을 냈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완성했을 무렵과 비슷한 시기였다. 2집 앨범의 제목은 「푸른 회상Le memoire bleu」. 그의 2집은 이미 한국의 음악사이트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상당한 성공을 이룬 상태였다. 앨범 소개에는 ‘젊은 시절의 그의 1집에 비해 한층 성숙되고 깊이가 느껴지는 음악들이 수록되어있다’는 평이 덧붙여져 있었다. 2집 이후의 기사를 제외하면 내가 프랑스를 떠났던 겨울 이후로는 쭉 소식이 부재된 상태였다. 아마도 쥴리앙 역시 내가 떠난 뒤로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를 다스리는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처럼 최근에 와서야 조금씩 아픈 기억을 시간에 마모시켜 버린 듯하다.

쥴리앙의 음악을 컴퓨터로 틀어놓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앨범 “푸른 회상”의 첫 곡 「칸느」라는 제목의 곡은 듣는 것만으로도 안온한 기분이 들게 하는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나와의 순간을 이렇게 평화롭게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했다. 미친 듯이 쥴리앙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그와 헤어지고 난 뒤에도 그와의 추억을 소중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소소한 것들이 그의 음악에 열매처럼 영글어 내 안을 풍요롭게 채우고 있었다. 

                                                                    ⊙

회상에 잠긴 채 커피를 모두 다 마셔버렸을 때쯤 황석원은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곧바로 내 앞에 앉으며 은연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기분이 어떠세요?”

“…뭐가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 말이에요.”

내가 잠시 입을 다문 채 스스로의 감정을 되짚어보고 있는 동안 황석원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 선을 매만진다. 그건 자신이 관심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습관이었다.

“…담담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요.”

나는 지그시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 어떤 꾸밈도 가하지 않은 순수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진심어린 마음이라고 느꼈는지 황석원 역시 마주 웃어 보이며 “그거 참 다행이네요.”라고 말한다.

“쥴리앙을 찾을 건가요?”

“아니요.”

“어째서죠?”

“…찾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곧바로 이어지는 남자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답하고 나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찾아야 할 이유는 없다.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 사이는 그렇게 완벽하게 종결되어버린 건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다. 나는 돌연 나 자신에게 지독하게 잔인한 질문을 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황석원은 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정시키려는 듯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단지 작년에 나와 상담을 끝내던 날 진호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물어본 겁니다. 지금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대답했었잖아요. 지금이라면 쥴리앙을 온전히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젠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현실이라고요.”

“…….”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다시는 쥴리앙과 마주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의 대답이었다. 비록 쟈끄의 스튜디오가 일 드 프랑스ill de  France에 있어서 빠리에서 지내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 해도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와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라로 돌아갔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마음속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커피향이 묻어나오는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이미 끝난 일이고 지금은 더 이상 그 어떤 미련도 없어요.”

“만약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요. 그건 쥴리앙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나는 내 삶을 살아갈 테고, 그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거니까요.”

관조로운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진다. 한 점의 망설임도, 거짓된 마음도 가해지지 않은 대답이라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우유부단함과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20대의 장진호가 아니었다. 아픔의 상처를 딛고 한층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져 있는 성정을 자각하며, 나는 속으로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만약 쥴리앙이 다시 시작하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그 땐 뭐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

아무리 모든 상황을 생각해 둬야 한다 해도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곧 마음이 편안하게 이완됨을 느꼈다. 끈질기게 물어오는 황석원의 목소리에 짓궂음이 배어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의 속내를 파악하려 다양한 방식으로 핵심을 찔러오는 것은 상담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직업적 습성이었다. 그건 미쉘 씨를 알았을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황석원과의 오랜 상담 덕분에 이젠 이런 대화방식에 익숙해져있었다.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대답한다.

“…어차피 상담도 끝났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울 만큼 무더운 6월이었다. 나는 간단한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무거운 짐들은 전부 쟈끄가 구해둔 집으로 부친 상태였다. 그의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7월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나는 일찍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6월에 열리는 안시 페스티벌에 직접 가서 본선에 진출한 내 작품이 상영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친형과 어머니가 마중을 나왔다. 사실 어머니와는 내가 제대한 이후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부터 지속적으로 접촉을 해왔었다. 그녀는 그때, 내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듣고 전화통을 붙들고 오열을 했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나의 진심을 부정하라는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그 분노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나의 어머니였다. 세월은 깊이 새겨진 그녀의 통한을 남김없이 지워버렸고, 지금은 프랑스로 떠나기 전처럼 나를 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의 일은 거의 함구된 채였다. 

출국장 앞에서 어머니는 나를 애틋하게 껴안았다. 나는 한참이나 목을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는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자식을 먼 곳으로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짐작하기 어려운 나로서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겨우 손을 풀어내며 몇 번 코를 훌쩍거린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내 앞에 눈을 내리 깐 채 불안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윽고 어머니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랑 다시 시작하려고 프랑스로 가려는 거니 ?”

“…….”

“…엄마.”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내가 표정을 굳히자 옆에 있던 형이 가늘게 떨고 있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는다. 형의 나무람에 어머니는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미안하다. 그럴 리 없을 텐데…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닌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구나.”

“…….”

“그냥…, 엄마가 그동안 이해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해서 그래. 너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엄마 맘 알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의 친형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짓는다. 그동안 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형 장진성은 이제 더 이상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다.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직장을 다니면서도 내 꿈을 위해 열정을 쏟아 붓는 내 모습을 보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만의 꿈이 있다는 것을 가장 부러워해왔기 때문이리라. 또한 자신의 친구인 황석원을 통해 ‘가족 상담’이라는 것을 꾸준히 받았고, 형은 점차 자신의 마음을 열고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소잡한 공항의 소음 속에서 우리 세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가족을 끔찍이 여기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들을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차에서 아버지 기다리고 계시는데 만나고 가지 그러니.”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형의 조심스런 제안이었다. 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냥 갈게.”라고 말했다. 5년이라는 시간동안 세월이 바꾸어 놓는 변화의 흐름 속에 거의 변하지 하나 있다면 아마도 아버지의 태도일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나를 보려 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나를 찾아오던 날, 3년이 다 되도록 나를 용서치 않는 아버지에 대한 해명을 늘어놓으셨다. 쥴리앙과 나에 대한 기사가 프랑스 신문에 났던 다음 날, 한국의 유명 포털사이트에는 나에 대한 기사가 메인 창에 떴다고 한다. 그로 인해 나의 아버지 장현섭 교수의 지인들 사이에는 은연하게 나의 아웃팅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그 때문에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상담을 받은 이후 형은 아버지를 찾아가 수차례 그의 마음을 돌리려 시도해왔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랑스러운 장남의 변호라도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보수적인 관념을 고수해온 아버지에게 나를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처음에는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이제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완벽한 가치관을 가진 절대자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 살아가는 개인일 뿐이었다. 어렸던 나를 그토록 옭아 매왔던 그의 생각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었다. 나는 스물여섯이 넘어서야 겨우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엄연히 다른 나의 자아를 그의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자극적인 사건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가치관의 충돌은 잘못된 관념의 알을 깨트리기 위해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했던 것이었다. 성장의 계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사건을 도모한 쥴리앙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도착해서 곧바로 전화하는 것 잊지 말고. 거기서도 자주 연락하고 언제든 한국에 오고 싶으면 오도록 해. 엄마는 네가 항상 네가 그리울 테니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씀하면서도 어머니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냉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어머니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뒤돌아 걸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한국 땅을 밟아가면서도, 내 안에는 그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게 남은 것은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고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강건한 뿌리 같은 마음뿐이었다.

                                                                    ⊙

서른.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된다는 건 여느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종이 한 장처럼 지나버리는 하루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형이하학적인 계산에는 어긋나게도, 서른이 된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나는 기묘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내 삶은 어제의 연속선상에 이은 것이었음에도 분명히 어딘가가 변해있었고, 나의 세상은 어제에 이은 세상이었음에도 어제까지 알고 있던 세상이 아니었다. 종이의 앞면에서 뒷면으로 역전되어버리는 느낌이랄까.

스무 살이 되었을 때와 서른 살이 되었을 때의 느낌은 비교할 수조차 없는 감화였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갈 때에는 그것이 넘어갔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조차 잊고 지나쳐버렸다. 그렇게 혈기로 뒤덮인 20대에는 모든 것이 급급했다. 나의 세상은 용암처럼 뜨거웠고, 그 뜨거운 세상은 항상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래서 분노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기어린 용기로 그 뜨거운 용암 같은 세상을 꿋꿋하게 삼켜댔으나 그것은 삼킬 때마다 목구멍을 간질이며 나를 애태웠다. 그래서 그것을 더욱 많이 목 안으로 넘겨내려 조급해 했었다.

서른 살이 되자 나는 잠시 삼켜내는 것을 멈추었고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갈증과 간지러움이 멎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뱃속에는 삼켜진 그 뜨거운 것이 내 깊숙한 곳에서 은밀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먼저 서른을 거쳐 간 사람들로부터 인생에 있어서의 서른 살의 의미에 대해 몇 번 들어왔지만, 지금까지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었다. 추월할 수 없는 나이를 빌미로 그들이 괜한 것에 의미부여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가을 만으로 서른 살이 되면서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청춘만이 가질 수 있다는 열정의 의미를. 그리고 서른이 되면 적어도 한 번쯤은 아무런 가감 없이 자신을 헐벗겨놓고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말의 의미를. 

쥴리앙. 나의 20대는 반년 이상 한 남자에 의한 삶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실에 조금 억울한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모든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개체인 것 같다. 내면의 성숙이라는 것은 언제나 타인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내 인생이 기록되는 노트가 있다면 철없던 스물넷의 페이지에는 ‘쥴리앙 오르로제’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도 그 이름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내 안에 너무도 깊숙이 새겨놓은 탓이다. 너무도 깊이 새겨 뒤에 이어지는 노트의 페이지에도 이름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그리고 서른 살의 페이지로 넘기면서, 나는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아마도 나의 노트의 마지막 장까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다만 변한 것은 서른으로 넘어가면서 빈 페이지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름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노트에 남겨진 흔적들을 돌아보며 말할 수 있다. 나에게도 20대가 있었노라고. 내 안에도 인생을 뜨거운 감자처럼 여기며 그것을 다루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젊은 피가 흘렀었노라고. 어수룩한 번민을 도발한 것도, 서른이 되어 그것을 무리 없이 삼키게 해준 것도 전부 다 쥴리앙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보다도 불완전해 보이던 청년이 오히려 오만으로 가득 찬 나의 설익은 자아를 일깨워주었노라고.

그러나 서른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왼쪽 귀에는 여전히 쥴리앙의 귀걸이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제대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것을 박았을 땐 자해하는 심정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울을 통해 한쪽 귀에 박힌 그것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나의 미력한 자아를 한층 성장시켜준 그에 대한 감사의 의미였고, 동경의 표식이자, 과거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증거였다. 언젠가 이 귀걸이가 내 귀에서 벗겨지는 날이 온다면 그건 아마도 진정으로 사랑을 주고 싶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라고 스스로 규정하며, 나는 서른이 되던 그날도 거울에 비친 사파이어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프랑스에 돌아온 지 6개월이 조금 넘었을 무렵의 12월의 어느 오후. 가로등이 하나 둘 꺼지고 거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쟈끄와 나는 함께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다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프랑스 애니메이션 협회 측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우리의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기획 중인 장편 애니메이션 「구스타프」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 보름 전 프랑스 애니메이션 협회에 기획서와 시나리오, 콘티 등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원해주는 작품은 한두 편 정도의 극히 소량인데다가 쟈끄가 듣기로는 올해에는 유독 여러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진행 중하고 있어서 아마 경쟁률이 엄청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 지원금을 받게 된다면 미진한 상태의 프로젝트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 분명했다. 

“쟈끄, 제발 엉덩이를 의자에 좀 붙이고 있어. 정신 사나워 죽겠잖아.”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까지 오지 않는 연락에 쟈끄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앞에서 이리저리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나의 지적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내 앞 소파에 앉더니, 이번에는 정서불안인 것처럼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왜 아직도 연락이 안 오지?”

“다리.”

“응?”

“다리 떨지 말라고.”

“그럼 불안해 죽겠는데 어떻게 해.”

“그렇게 초조해 한다고 지원금 받는다는 연락이 오면 나도 사지를 다 덜덜 떨며 기다리겠다만 그런 게 아니잖아.”

“…….”

내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토를 다는 게 불만스러운지 쟈끄는 곧바로 세모눈을 하고는 볼멘 표정을 짓는다. 생각보다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그는 예전의 학생시절답지 않게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스튜디오를 이끌어가는 프로듀서로서의 무게감이 학생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인 나라도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달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되든 안 되든 오늘 안에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보자. 그것 말고도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잖아.”

“…….”

“그렇게 넋 놓고 있지 말고 같이 일정표나 좀 짜보게 이리 와봐. 지금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보충되어야할 스태프랑… 그리고 만약 지원이 안 될 경우 스폰서를 부탁할만한 회사…”

일정노트를 들춰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쟈끄는 가만히 앉아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시선을 올려 그와 마주치자 그는 툭 내뱉듯 한 마디를 던진다.

“너 많이 변했구나.”

“뭐가?”

“뭐랄까, 많이 여유로워진 것 같아.”

“…너는 지금의 내가 여유로워 보이니.”

“아니….”

바빠 죽겠는데 비꼬는 거냐는 듯한 물음에 쟈끄는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감독이 하나의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건 단순한 개인의 창작 작업과는 다른 것이었다. 감독이라는 위치는 그야말로 멀티형 인간이 되어야만 가능한 위치였다. 감독은 스토리나 연출은 물론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문제에도 관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원화, 동화, 배경, 프로그래밍, 음악, 성우 쪽에 있어서의 스태프 고용,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될 장소 조사 작업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 아직은 프리프로덕션의 단계이긴 하지만 실제 작업 단계가 시작되면 각 부문 별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 의견 조정과 그에 맞춰 일정 조정을 하는 것 역시 감독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창조 작업이 아닌 일종의 콘텐츠 산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가 죽은 것 같은 표정에 내가 한숨 섞인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다시 서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쟈끄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변명의 말을 덧붙인다. 

“내가 여유로워 보인다는 한 건 외부적 행위 자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야. 좀 더 내면적인 문제라고나 할까.”

“무슨 의미야?”

“이런 말 하면 우습지만, 예전의 너는 항상 상황에 시달리는 것 같아 보였거든. 너를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어. 뭐가 저리도 급급한 걸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쉬운 일을 뭘 그리 복잡하게 고민해서 스스로 힘든 일을 자초하는 걸까.”

“…….”

“하지만 지금은 생각의 여유 공간이 넉넉하게 남을 정도로 안이 훨씬 넓어진 것 같아. 지금만 봐도 그래. 여기서 지원을 못 받으면 작업 진행에 있어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텐데 지금은 오히려 나보다 침착하잖아.”

그의 말을 들으니 문득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의 말대로 나의 젊은 시절은 번잡한 생각과 고민들로 흠뻑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영향을 미칠 미래가 뚜렷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할 정도로 즉물적이었고, 보인다 해도 조금이라도 걸릴만한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미리 해결책을 찾아놓기 위해 무의미한 일로 마음을 졸였다. 그런 행동과 불안한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쥴리앙과의 사건 이후 상담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그런 행동과 불안한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쥴리앙과의 사건 이후 상담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나는 변했다. 스스로도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한꺼번에 많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전보다 내 안에 훨씬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다양한 일들을 수행해야 하는 감독으로서의 자질 역시 어느 정도 길러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지금 쟈끄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갖는 것 역시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과정적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많이 치이며 살아서 둥글어진 거지 뭐. 사람은 아프면서 성장하잖아. 나도 그동안 나이 헛먹은 게 아니라구.”

“풋, 인생 다 산 노인네 같은 말을 하네.”

“그래, 그러니까 현명하신 노인네의 말을 듣고 얼른 같이 일정표나 짜보자고.”

그의 우스운 감상에 나는 가볍게 대꾸해주며 쥐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하지만 쟈끄는 그것을 성의 없이 펼쳐 보다가, 일정과 관련한 내 이야기가 시작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덮어버리고는 게으른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아- 죽겠다. 그 전에 커피나 한 잔 하고 싶어. 연락을 기다리느라 아침부터 계속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피곤해 죽을 지경이거든.”

“…솔직히 말해봐. 너 일하기 싫은 거지.”

“아냐~ 정말 피곤하단 말이야. 너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너무 하잖아!”

“그래그래, 알았어. 그럼 너 마시는 김에 내 것도 부탁할게. 나도 하루 종일 너의 성화에 시달리느라 피곤했거든.”

쟈끄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나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말했다. 쟈끄는 “체, 하여간 예쁜 말만 골라서 해요.”라고 투덜거리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이 닫히고 곧이어 꺼질 듯한 적막감이 찾아왔고, 어색한 기분에 무심코 바라본 창 밖에서는 며칠 째 끊이지 않던 비가 어느 새인가 모르게 그쳐있었다. 

자각할 새도 없이 그쳐버린 비처럼 끝나버린 나의 20대. 홍수처럼 범람하던 쥴리앙에 대한 집착과 미련, 그로 인한 슬픔 역시 그렇게 끝나버렸다. 더 이상 비가 내릴 것 같이 보이지 않는 맑게 갠 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한 번 더 큰 비가 쏟아질 지도 모른다고. 

상담의 종료와 더 이상 내 볼에 흐르지 않을 줄 알았던 최후의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 건 20대로서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그날은 나의 작품 「JOIN」이 안시 페스티발의 단편 경쟁 부분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날이었다. 경쟁 단편 부문 그랑프리 수상자를 호명했을 때 내 이름을 듣고서도 쟈끄의 언질을 받기 전까지 멍청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던 건 그 애초부터 수상에 대한 기대를 접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올해 안시에는 노련한 중견 감독들의 작품들이 대거 출품되었고, 내 작품이 훌륭한 현역 감독들의 작품들과 함께 평가받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시상대에 올라 크리스털 상패를 받아들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어렸더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자만에 빠졌을 지도 모르겠다. 안시에서 나의 작품이 그랑프리를 받는다는 건 줄곧 손에 닿지 않는 꿈처럼 멀게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야 안시 페스티발에서 수상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지독한 희열도, 자만심도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직 쥴리앙뿐이었다. 그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도, 작품의 메인 테마곡 「JOIN」도 전부 그 남자가 남겨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감독들을 위한 간단한 만찬회가 열렸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무슨 정신으로 숙소까지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의식할 틈도 없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쥴리앙은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었지만 내가 그에게 안겨준 건 괴로움과 고통뿐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인정할 때까지 쥴리앙은 나로 인해 오랫동안 절망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어렵게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를 사랑을 하던 순간조차도 나는 그에게 온전히 나의 사랑을 내어주기를 망설여했었다. 그 하잘 것 없는 스스로 옭아맨 터부와 사회의 시선,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욕심 때문에. 굳이 그에게 남긴 것을 찾는다면 ‘우리가 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는 끔찍한 말뿐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욱 서러워졌다. 

쥴리앙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쥴리앙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난 날의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기적인 겁쟁이였고, 나의 그런 불안정한 성정은 결국 그의 불안감을 촉발시켜 극단의 선택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간 열심히 만든 작품이 안시의 그랑프리까지 받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구토감이 일정도로 나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상담을 하면서 어렸던 자신을 탓하지 말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음에도 나는 그날 밤 지독한 자책감과 후회로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어리석은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쥴리앙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이제는 진정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노라고.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내게 기회를 달라고.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할 그날 밤, 그토록 처절하게 오열했던 건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 치유되기 직전의 마지막 고통일 뿐이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이후 다시 눈을 뜬 나는 그날 밤 그토록 갈구했던 소망들에 또다시 무덤덤해져 있었다.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해도 그를 찾아가지 않으리라는 것도, 억지스럽게 연결고리를 지어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건 너와 내가 정말 그 무엇도 가를 수 없는 인연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확신으로 빚어진 단념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도 비참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단 하루 만에 그렇게 모든 걸 털어낼 수 있는 건 서른을 앞둔 길목에 있어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여전히 어제에 이은 내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세 달쯤 뒤에는 담담한 마음으로 서른이라는 나이를 맞으며 너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환기시켜 받아들이고 있었다.

회상이 끝나갈 무렵 나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프랑스의 비싼 담배값 때문에 끊으려고 며칠 째 금연 중이었는데, 오늘은 담배라도 한 대 피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문을 열자 축축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살결을 스치며 밀려온다. 아직 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청량한 공기에 더운 담배연기를 뱉어냄과 동시에 나는 괜스레 헛헛한 기분을 느낀다. 

프랑스 북부는 지난 일주일동안 기상이변으로 인해 일주일 가까이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렸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해까지 났다고 한다. 그러나 길고 긴 비에도 때 아닌 수해에도, 그리고 지루했던 비가 그친 뒤에도 내가 서있는 이곳은 일주일 전과 다름없었다. 

그때 우리가 마주 앉아 사랑을 노래하던 강변의 벤치는 이번 수해에 아무 일 없겠지. 설사 무슨 변괴를 당했다 해도 내 기억은 변함이 없겠지. 네가 무슨 변괴를 당한다 해도 내 기억은 변함이 없겠지. 

‘쥴리앙이 다시 시작하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그 땐 뭐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프랑스에 오기 전 황석원은 그런 질문을 했었다. 그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를 피했던 건 아마도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또 다른 미련으로 비춰질까봐서.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오고, 세상으로부터 작품을 인정받고, 서른을 넘기고, 한 회사의 수석 감독이 된 지금,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쥴리앙에 대한 그리움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은 미련이 아닌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는 것을. 과거의 나를 그토록 속박하던 그에 대한 열등감, 사회로부터의 소외감,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내면적인 죄책감을 모두 털어내 버렸기에 가질 수 있는 내 사랑에 대한 당당함이었다. 

내 지순한 감정을 접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쥴리앙의 마음뿐일 것이다. 나는 지난 과오와 미련을 전부 씻어낸 뒤에도 그와 새로운 사랑을 꿈꿀 만큼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쥴리앙은 어떨까.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분명 너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어쩌면 너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내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야속한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이 없더라도 나에 대한 사랑을 지워버렸다면 그것 또한 원망하지 않으리라. 어떤 식으로든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히 기쁜 일이니까. 나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담고 있다는 것을 너의 새로운 음악들로 증명해주었으니까.

만약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 황석원에게 말한 건 아마 그런 의미였으리라.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 해도 새로운 사랑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가 나를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내 사랑을 비워버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원한다면 그 원하는 마음 역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줄 수 있다는 것. 각자의 온전한 삶과 감정을 뒤흔들지 않고도 서로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유지시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느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진짜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하고.

그렇게 수년이 지나서야 진짜 사랑을 깨달은 나에게 너는 다시 찾아온 것이다. 

“…….”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신중한 노크 소리에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을 때 내 앞에 서있는 너를 발견했을 땐. 문을 열기 전에 창틀에 비빈 담배꽁초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미한 열기를 전해오는 것만이 내가 그때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5,6년 만에 나를 본 네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나를 일부러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닐 터였다. 뒤늦게야 어째서 네가 이곳에 온 건지 궁금해졌을 때 너의 입술은 꿈틀거렸고, 그와 동시에 너의 뒤에서는 양손에 커피잔을 들고 오는 쟈끄가 오고 있었다.

“어…,”

너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건 쟈끄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눈이 마주친 쟈끄는 오던 걸음을 멈추고 몇 번이나 눈을 끔뻑였고, 셋 중 가장 먼저 그 기묘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저, 실례지만 여기에는 무슨 일로…”

“…리비에르 씨를 통해 2주 전 쯤 데모 시디를 보내드린 사람입니다.”

“…….”

“음악이 마음에 드신다는 연락을 받고 「구스타프」라는 작품의 음악 감독으로 자원한 쥴리앙 오르로제라고 합니다.”

또렷하게 들려오는 너의 음성에 내 모든 청신경은 민감하게 자극받으며 그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데모 시디를 들었다면 분명 너라는 것을 알아챘을 텐데. 쟈끄가 매번 집에서 깜빡하고 두고 와서 ‘네 마음에 그렇게 쏙 들면 그 사람을 음악감독으로 하지 뭐.’라고 무심하게 반응한 것이 한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쟈끄는 뭔가가 걸리는 지 너의 말에 난감한 듯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 

“…저, 뭔가 착오가 생긴 것 같은데요. 데모로 보내주신 음악은 분명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저희측은 유감스럽게도 저희 스튜디오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스튜디오라 오르로제 씨 같은 유명한 분을 음악감독으로 채용할 만큼 충분한 자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리비에르에게도 가급적 네임 밸류가 없는 작곡가로 부탁했는데….”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익명으로 보내드린 겁니다. 받아본 스토리가 워낙 마음에 들어서 객관적으로 제 음악을 평가 받아 기회를 얻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만약 이쪽에서 제 음악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면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좋은 작품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

“아, 금전 문제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생각해 두었던 액수대로 받겠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언어가 유연하게 오가던 중, 쟈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슬쩍 나를 흘려본다. 갑작스런 그와의 조우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너를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너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머릿속에 수개월 전의 확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와 내가 정말 그 무엇도 가를 수 없는 인연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너의 눈동자가 쟈끄의 시선을 따라 내게로 옮겨지는 순간, 나는 너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반갑습니다. 처음 장편 작품을 맡는 거라 여러모로 많이 미흡하겠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구스타프」의 각본 및 총감독을 맡고 있는 지노 장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하고 곧은 행동과 목소리였다. 나의 당당함에 여전히 아름다운 너의 눈은 조금 크게 뜨여지고, 나는 내 입 꼬리가 언제부터인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올라가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럼 네가…,”

“…….”

“…하하.”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너는 다시금 되묻는 언어는 나의 무결한 미소에 완벽한 문장 대신 봄바람 같은 웃음으로 이어진다. 정말이지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나보구나, 하는 행복한 체념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참으로 모순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수년 전 헤어졌었다. 그보다 처참한 방법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기고. 그래서 나는 지난 세월동안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순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순간을.

그러나 수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 만난 우리는 지금 웃고 있었다. 인기 있는 작곡가와 보잘것없는 학생에서 음악감독과 총감독으로 변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상대방의 귀에 또렷이 박혀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쥴리앙은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채 나의 왼쪽 귀에 박힌 푸른 보석을 바라보며 인사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그리고 나는 온화한 웃음으로 화답한다. 금이 가 있었지만 굳게 붙여져 온전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는 그의 왼쪽 귀에 박힌 오팔 귀걸이를 향해서.

“Bonsoir, Julien.”

-만약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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