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으윽, 트렌스젠더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가게에서 겨우 발에 들어가는 하이힐을 구했는데 왜 이렇게 껴? 아파 죽겠네.”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온 쟈끄는 자리에 앉자마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네 원래 신발로 갈아 신지 그래?”
“집에서 이대로 입고 나와서 갈아 신을 신발도 없어. 하여간 여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불편한 걸 신고도 하루 종일 잘 걸어 다닐 수 있는지 신기하다니까.”
나는 그 꼴로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너나, 2미터가 넘는 네 덩치를 지탱할 수 있는 하이힐이 존재하는 빠리라는 도시가 더 신기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쟈끄는 갈증이 나는지 꼬냑을 맹물 마시듯 벌컥 들이키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왜 그러느냐는 듯 눈썹을 올려 뜨자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진짜 예뻐서. 동양 사람들 눈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프랑스인들은 완전히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거든. 역시 준비한 보람이 있어.”
“으휴, 됐다. 너한테 그런 소리 들어도 하나도 안 기뻐.”
나는 이미 포기했다는 쟈끄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여전히 썩 내키는 건 아니지만 사실 지금은 처음 여장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프랑스 생활을 회상하게 된다면, 우울해서 잊고 싶었을 지도 모르는 이날을 이 녀석 덕분에 재미있는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준 쟈끄에게 조금 고마운 마음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쟈끄에게 이런 생각을 직접 말하진 않을 것이다. 생색내기는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얄밉게 잘난 척 하는 녀석이니까.
오랜 시간 동안 줄기차게 놀아서 그런지 자꾸 눈꺼풀이 감기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창밖을 보니 이미 하늘은 새벽의 푸른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해가 뜨려나 보네.”
“크큭,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 그대~로 입고 기숙사로 들어가겠네? 그렇죠, 마드모아젤 쟌느?”
“…그만 해라, 이 악마 같은 놈.”
여장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도무지 치마가 적응되지 않아 쟈끄에게 이제 이만큼 견뎠으면 충분하니 내 옷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녀석은 뜻밖에도 순순히 쇼핑백을 내어주었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지어진 의미심장한 웃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나는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그 안엔 올 때 입고 왔던 옷가지들이 모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저히 입을 수 없을 만큼 물에 축축하게 젖은 채라는 것만 빼면. 돌아가기 전까지 옷을 갈아입지 못하게 하려는 쟈끄의 고난이도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전 다섯 시가 되어서야 술집을 빠져 나왔다. 아침공기엔 제법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끌로드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조제뜨를 바래다주겠다며 먼저 택시를 잡아탔다. 쟈끄와 나는 지하철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 문득 쟈끄가 말했다.
“근데 끝끝내 안 물어보네?”
“…뭘?”
“왜 하필이면 여장 컨셉으로 준비했는지 말이야.”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어? 그냥 놀리려고 한 거 아니야?”
쟈끄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국은 동성애자에 대해 프랑스만큼 관대하진 않지, 아마?”
“아……, 으응.”
“얼마 전에 둘이서 잠깐 그 때 우연히 헤퓌블리끄 광장에서 게이 빠라드parade 같이 봤었잖아. 그때 게이 행렬을 보던 네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이었거든. 그래서 너한테 한 번 직접 여장을 시켜보고 싶었어. 뭐, 여장을 해보는 것과 게이 문화를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표정이 어땠는데?”
“음, 딱히 혐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처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뭐랄까, 그냥 웃고 즐기며 어울리는 빠라드인데 마치 풀기 어려운 퍼즐을 대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더라고.”
“…….”
쟈끄가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집으로 가는 방향의 지하철이 도착했다. 쟈끄는 나에게 덕분에 즐거웠다며 푹 쉬었다가 나중에 내가 두고 간 작업 도구들을 챙겨가라고 말하고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어려운 퍼즐을 대하는 것 같다’라…….”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혼자 곱씹어본다. 어쩌면 쟈끄의 표현이 정확한 건지도 모르겠다. 게이 퍼레이드를 보면서 나는 그것을 어떤 위치에서 바라봐야 할지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동성애자일까, 아니면 양성애자일까. 둘 중에 하나라면 왜 아직도 저 당당하고 화려한 게이나 트렌스젠더를 보며 이질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렇다면 난 이성애자일까? 그럼 남자인 쥴리앙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 감정이 평범한 이성애자가 갖는 단순한 일시적 혼돈이라는 명제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지만 내 안에서 쥴리앙에 대한 감정은 이미 내 생애 처음으로 타인에게 느낀 ‘사랑’이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게이 빠라드를 보고 온 뒤로 나는 한동안 범람하는 질문들 속에서 성(性)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 수많은 질문들에 답하고 반론도 제기해 해보았지만 그런 것과 관련된 지식이 부족한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확정 지을 수 없었다. 당분간은 그것을 ‘지금 풀기에는 어려운 퍼즐’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다. 스물 다섯이라면 이미 풀고도 남았을 퍼즐이지만 말이다.
지하철역에서 빠져 나오자 주변은 벌써 아침기운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역시 프랑스의 여름은 해가 일찍도 뜬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한 가발 때문에 가려운 머리를 긁적이며 기숙사로 향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답답한 가발을 벗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옷차림이 이렇다 보니 가발을 쓰고 있는 편이 주변 시선을 피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지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사이 기분은 또다시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어제 쥴리앙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쥴리앙은 알까. 내가 전화를 건 사실을. 혹시 내가 나갔다 온 사이에 전화를 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이 이른 아침에 그의 전화가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마음속에선 그 동안 매일매일 수없이 되풀이 해온 궁금증을 떠올리고 있다. 쥴리앙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내 방 문고리에 웬 쇼핑백이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치 위험한 물건을 향해 다가가듯 천천히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쇼핑백을 열어보자 그 안엔 포장된 상자와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지노, 어제 최종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서 친구들과 만나고 있나 보구나. 밤새 앞에서 기다리다가 다섯 시쯤 떠나. 곧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이 쪽지를 읽는 즉시 이 휴대폰으로 전화해줬으면 좋겠어. -Julien
다섯 시? 아니, 그것보다 휴대폰이라니? 나는 설마 하며 그 자리에서 다급하게 상자의 포장지를 벗겨냈다. 그 상자는 쥴리앙이 말한 대로 휴대폰 모델이 그려진 출품용 박스였다. 상자를 열어보자 심플한 디자인의 휴대폰은 이미 개통된 상태로 전원이 켜져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쥴리앙이 나를 만나기 위해 다섯 시까지 기다렸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찾아온 거나 휴대폰을 남기고 간 건 적어도 현실이 아까 떠올렸던 그 끔찍한 시나리오의 상황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다섯 시에 이곳을 떠났다면 아직 공항에 도착하진 않았겠지. 비행기가 이륙해서 휴대폰이 꺼져있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지금 당장 전화를 해야 할까, 그렇게 망설임에 대한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쥴리앙의 휴대폰 번호를 거침없이 누르고 있었다. 귓가에 닿은 휴대폰에서 전해지는 미미한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끊어버릴까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쥴리앙은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지노?! 지금 돌아온 거야?]
“……아, 응.”
[잠깐만, 차 돌려서 지금 바로 거기로 갈 테니까 나와 있어줘. 한 10분이면 도착할거야.]
“뭐…? 하지만 넌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
[기다려, 금방 갈게.]
쥴리앙은 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끊어버렸다. 시계는 벌써 다섯 시 반을 넘기고 있었는데 10분 안에 도착한다는 쥴리앙의 말이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나는 정서불안 환자처럼 방 안을 계속 서성거리다가 얼마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방을 나와 버렸다.
쥴리앙은 15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10분 안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으레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애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했다.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쥴리앙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오고 나서야 아직도 여장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얼른 돌아가서 갈아입을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쥴리앙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장난기가 발동해 버린 것이다. 아까 메르세데스에 있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으니까 아마 그도 예쁘다며 좋아해줄 것이다. 어쩌면 처음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겠지. 내가 불러서 겨우 알아보곤 당황하는 쥴리앙의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절로 났다.
자꾸 비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고 입술을 말아 올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쥴리앙의 차가 보였다. 나는 놀려주기 위해 일부러 몸을 돌려 얼굴을 가렸다. 등 뒤에선 시동도 끄지 않고 급하게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커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자, 이젠……
“지노!”
“……!”
이젠 쥴리앙이 기숙사 입구 앞에서 헤매다가 나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을 것이라는 예상은 갑자기 덮쳐오는 따뜻한 품에 의해 완전히 빗나갔다. 쥴리앙은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와 팔을 휘어잡아 몸을 돌렸고, 그대로 중심을 잃은 나를 그대로 꼭 껴안았다. 어떻게 나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 너무도 놀랍고 궁금했지만 쥴리앙이 너무도 절실하게 껴안은 채로 놔주질 않아 그대로 있어야 했다. 나는 목덜미를 간질이는 그의 숨결이 차분해질 때까지 천천히 등을 쓸어주었다.
“쥴리앙! 너 진짜 내 손에 죽고 싶어?!”
불안정한 숨결이 조금 고르게 돌아왔을 때쯤 한쪽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언제 따라 온 건지 이안이 자신의 차 안에서 창문만 연 채로 소리를 치고 있던 것이었다. 혈안이 된 채로 나와 쥴리앙을 째려보고 있는 이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쥴리앙은 그제야 겨우 나를 놓아주곤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 지금 다시 빨리 공항으로 가야 돼.”
“…….”
“못 다한 얘기는 휴대폰으로 하자.”
거의 한달 반 만에 본 연인은 첫마디부터 마지막까지 헤어짐의 인사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냥 이대로 가는 건가. 아쉬운 마음을 느낄 겨를도 없이 고개 돌린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쥴리앙의 동작이 멈칫했다. 그리곤 의아한 시선이 아래로 꽂힌다. 왜 그런가 싶어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느 틈에 내 손이 그의 재킷 소맷자락을 쥐고 있었다.
“…….”
“…아, 미안.”
나는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빡빡하게 굳은 손을 떼어냈다. 붙잡던 손을 치웠는데도 쥴리앙은 자신의 옷소매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곧이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민망함을 무마하기 위해 파란 눈동자를 향해 어색하게 입의 양 끝을 끌어올렸다.
“야! 빨리 가자니까!”
이안의 예고치 않은 또 한 번의 불호령에 겨우 만든 내 억지 미소는 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쥴리앙은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내가 가라고 재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얼른 가봐. 몸 조심하…”
잠깐이지만 뭔가 생각에 잠겼던 눈은 해답을 찾은 듯 빙긋 웃는다. 그러더니 곧 망설임 없이 내 두 눈앞에 다가와 그대로 감겼다. 다정하면서도 깊은 입맞춤. 갑작스럽게 와 닿은 쥴리앙의 입술에 내 두 눈은 일순 크게 떠졌다가 이내 파르르 떨며 감겨버렸다. 단순히 입술을 마주친 것뿐이었지만 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키스였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멀리서 보면 내가 여자로 보일 테니까.
이안은 견디다 못해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짜증 섞인 경적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보듬었다. 언제 다시 마주칠지 기약할 수 없다는 절실함 때문에. 키스를 마친 그의 보드라운 입술은 천천히 내 이마로 옮겨져 다시 한 번 가볍게 닿았다. 그렇게 쥴리앙은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한없는 아쉬움이 배어 있었지만, 입가에 핀 미소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고동소리도 함께.
⊙
헤어진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쥴리앙이 작곡한 라망뜨L’amante가 울리기 시작했다. 쥴리앙에게 받은 휴대폰에서 나오는 벨소리였다. 나는 애써 웃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문 채 전화를 받았다. 그는 결국 예약했던 비행기를 놓쳤다고 한다. 나 때문에 스케줄에 지장이 생긴 것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곧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되니까 걱정하기 말라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스케줄을 많이 잡지 말 걸 그랬어.]
쥴리앙의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유럽 투어 콘서트를 시작으로, 앞으로 1년간은 쭉 세계 각지에서 콘서트를 가질 것이라고 했다. 나와 헤어지고 난 뒤,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음정리를 하기 위해 일부러 해외 일정만 잡아놓았다는 것이다.
속상해 하는 쥴리앙의 말에 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그가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쥴리앙이 몽마르트르에서 만난 미쉘 미라쥬였을 땐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달려와 위로 해주고 만날 때면 항상 즐겁게 해주었다. 그런 쥴리앙 덕분에 나는 힘들다는 유학생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아무리 우리의 관계가 예전보다 훨씬 특별해졌어도 말이다. 그는 이제 평범한 대학생 미쉘 미라쥬가 아닌 뮤지션 쥴리앙 오르로제니까.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원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에게 이 솔직한 아쉬움을 숨겨야 할 것이다. 그는 이제 막 겨우 날갯짓을 시작했을 뿐이다.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드러내고 세상 밖으로 나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날갯짓을. 항상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내 이기심 때문에 그 생동하는 커다란 날개를 꺾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일부러 세상에서 능력을 인정을 받는 쥴리앙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과장된 감탄을 해 보였다.
[…넌 하나도 섭섭하지 않나 보지?]
쥴리앙은 아쉬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나의 태도가 불만스러운 듯 했다. 나는 그의 그런 마음을 눈치 챘음에도 일부러 모르는 척 한 번 되물었다.
“응? 뭐가?”
[…됐어.]
아무렇지 않은 척 됐다고 말했지만 그 말투엔 토라진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도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새침한 투정 앞에서도 ‘나도 실은 무척 아쉬워’라는 솔직한 심정을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까지 섭섭한 감정을 보이면 쥴리앙의 아쉬움은 더 커질 테니까. 나라도 어른스럽게 굴어야 했다. 지금 당장은 조금 섭섭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그를 덜 힘들게 할 것이다.
“쥴리앙, 세상엔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하지만 네 음악은 음반을 내자마자 세상의 관심을 받았잖아. 그게 얼마나 굉장한 건데.”
[…지노, 넌 내가 만약……]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망설이는 숨결 사이로 침묵하던 쥴리앙은 그렇게 입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상대방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뭔데? 괜찮으니까 말해 봐.”
나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눈치를 보며 그가 겨우겨우 꺼낸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만약 벤자민이 아니었다면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을까.]
“뭐? 무슨 말이야?”
[그냥……. 세상이 벤자민의 음악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어서.]
“…….”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내게 있어 벤자민과 쥴리앙, 그리고 미쉘 미라쥬 사이엔 어떤 경계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과거의 쥴리앙일뿐이었다. 벤자민이라는 뮤지션의 이름은 내게 그의 존재를 알렸고, 미쉘 미라쥬라는 친구의 이름은 내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시킨 건 쥴리앙이라는 연인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내 안에선 그 세 가지 이름이 온전히 일체화 되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쥴리앙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쥴리앙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해야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꺼냈다.
[어젠 미안했어. 진급시험 끝났는데 먼저 연락하지 못해서. 오늘 끝난다는 거 기억하고 있었는데 녹음작업이 있어서…….]
“아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갑작스런 쥴리앙의 사과에 조금 놀랐다.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 동안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일부러 그를 피했으니 말이다. 쥴리앙은 내가 자신을 피했다는 것을 모르겠지.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문득 쥴리앙에게 어제 왜 이안이 휴대폰을 받았는지 묻고 싶어졌다. 아니면 내가 전화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쥴리앙에게 있어 그 남자는 어떤 존재일까. 내 마음속엔 그와 이안의 관계에 대한 유치한 의심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 물어봤다가는 그에게 나의 치졸한 질투심을 내보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쥴리앙이 내심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합격한 거…… 맞지?]
“아…… 응. 합격했어.”
[다행이다. 늦었지만 정말 축하해.]
정말 축하해. 어제부터 줄곧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그 진심 어린 말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장을 훨씬 뜨겁게 고동치게 했다.
[다음번에 만나면 같이 축하파티라도 열자.]
“……뭐? 아니야. 별것도 아닌데 축하파티라니 우습잖아.”
[그…런가…?]
나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내게 있어 진급시험에 통과하게 된 건 충분히 축하파티를 열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 일이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세상에서 인정받는 뮤지션인데, 난 이제 겨우 학교 교수에게 3학년 과정을 받을 자격을 인정받은 것일 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한참 뒤쳐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학생들과 아등바등 경쟁하고 그 속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 부끄러운 내 모습을 그에게 일부러 파티까지 열며 축하 받고 싶진 않았다. 충분히 알고는 있다. 일에 있어 녀석과 내 능력의 차이 정도는. 하지만 천재에게 느끼는 범재의 유치한 열등감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노,]
“응?”
망설임과 함께 질질 끌리던 쥴리앙의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런 말투로 물어왔다.
[아까 대체 왜 그런 옷을 입고 있었던 거야?]
“아…, 그냥 어제 만난 친구가 입으라고 억지로 시켜서 입은 거야.”
[친구? 내가 아는 애야?]
“응. 쟈끄라고, 내가 몇 번 얘기 했었잖아. 예전에 나랑 같이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했던 친구.”
[아아. ……그런데 대체 그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너한테 여장을 시킨 거지?]
“……그냥 시험도 끝났으니 재미좀 보자고 그런 거지, 뭐.”
게이 퍼레이드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놓고서 아직도 마음의 번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게 미안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말끝을 흐리자 쥴리앙은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저어, 어땠어?”
[뭐가?]
“그… 옷차림 말이야.”
[이상했어.]
쥴리앙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대답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 주위사람들은 제법 어울린다고 하던데…….”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
[보기 싫었어. 아무튼 앞으로 다신 여장 같은 거 하지 마.]
예뻤다는 말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무뚝뚝한 말투는 마음에 잘디 잔 상처를 입혔다. 아무리 보기 싫었어도 그렇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쥴리앙이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별일도 아닌 것에 마음 상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 말 하나하나 쥴리앙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민감해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하는 휴대폰과 관한 것도 꺼내기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 꺼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쥴리앙, 이 휴대폰 말야…….”
일방적으로 그에게 휴대폰을 전해 받은 기분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분명 휴대폰은 우리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의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앞으로도 자주 보지 못할 테니까. 내가 지금껏 휴대폰을 사지 않은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휴대전화 요금은 평균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
[아, 그거. 비용은 내가 낼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줘. 내가 너무 힘들어서 장만한 거니까. 네가 기숙사에 없으면 연락 자체가 끊기잖아.]
쥴리앙은 내가 휴대폰 비용 이야기를 할 것을 이미 짐작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돈을 전부 지불한다는 것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당히 불편했다. 서로의 위치가 동등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둘 다 남자인데다가 내가 나이도 훨씬 많은데 어린 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을 위해 매달 휴대전화 요금을 지불하는 것 역시 무리였다.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쥴리앙에게 휴대폰을 받는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했다. 매달 휴대폰 비용의 반은 내가 내겠다고 말이다. 그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계속 고집을 꺾지 않자 결국 쥴리앙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뜻을 받아들였다.
쥴리앙의 비행기가 오를 때까지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3학년으로 진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영국에 갔을 때 런던의 거리를 지나치면서 영국애니메이션 시상식(BAA)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내 생각이 났더라는 이야기 등, 영양가 없는 내용의 대화였지만 나에겐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마 쥴리앙도 그럴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존재에 굶주려 왔으니까. 너무도, 너무도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사람이니까. 쥴리앙은 곧 이륙한다며 베를린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너무도 복잡했다.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누고 난 뒤의 기분은. 그렇게 긴 통화를 나누었는데도 나는 내 솔직한 기분이나 궁금증을 거의 대부분 털어놓지 못하고 스스로 묵살 시켜버렸다. 마음이 갑갑했다. 어째서 친구였을 때보다 솔직하게 그를 대하기가 훨씬 힘든 걸까. 그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드러낼 수도, 그렇다고 친구처럼 쿨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쥴리앙은 그로 인해 나에게 질릴 수도, 혹은 서운해 할 수도 있으니까.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답답함에 못 이겨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흩뜨렸다. 머리카락엔 아직도 물기가 제법 남아 있었다. 더 말려야겠다 싶어 드라이어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들려왔다. 분명 쥴리앙일 것이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일까 싶어 다급하게 휴대폰에 손을 가져갔다.
「실은 아까 네 모습, 보기 싫다고 했던 거 거짓말이야.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기 싫을 정도로 너무 예뻐서 심술부린 거였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예상 밖의 문자는 나를 심란했던 기분에서 단숨에 해방시켰다. 문득 예전에 미쉘 씨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쥴리앙이 전화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데 미숙해서 그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었다고. 전화할 때엔 딱 잘라 이상하다고 하더니 바로 문자메시지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그때 미쉘 씨가 했던 말의 의미를 확실히 체감했다. 의미는 다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문자를 통해 쥴리앙 역시 나를 대하기가 어색했다는 게 기뻤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것이다. 우린 둘 다 너무 오랫동안 외로웠으니까. 쥴리앙도 나도 타인과 특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앞으로 서로 노력하면 되겠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간다는 생각으로. 다음부턴 좀 더 그를 솔직하게 대해야겠다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다짐해본다.
쥴리앙의 문자 메시지를 보며 뭐라고 답장을 보낼 지 고민하다 돌연 스치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아냐, 화 안 났어. 그런데 여장했는데도 어떻게 단번에 나를 알아볼 수 있었어?」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새벽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여장한 내 모습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 쥴리앙은 곧바로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어주었다.
「당연히 알아보지. 누구의 애인인데.」
“뭐야…, 정말.”
나는 어떻게 이렇게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게 보낼 수 있냐며 투정어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행복감에 온 몸이 간질거렸다. 별 것도 아닌 메시지인데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좋아하는 꼴이라니. 주책 맞은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온몸의 피가 산화되는 것처럼 몸 전체가 싸하게 지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내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체력으로 소비했다.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준 프레젠테이션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말이다.
이젠 여름방학이다. 나는 그제야 온전한 해방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몇 번이나 기계적으로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쥴리앙의 귀여운 속마음이 드러난 메시지가 자꾸만 보고 싶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