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부) (21/23)

#.01 

“그래서… 음, 축하하네. 자네는 빠세passe일세.”

미학 전공의 아르토 교수가 안경알을 치켜 올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 느긋하게 흘러나오는 쉰 목소리의 어조를 따라 정신을 팔다가 겨우 그가 말한 것을 되짚고 나서야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어째 별로 기쁘지 않은 표정인데? 2학년을 한 번 더 다니고 싶었나 보지?”

아르토 교수 옆에 앉아있던 쥐나뻬 교수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나는 그 말에 희미한 웃음을 띄었다. 

“아뇨, 그럴리가요. 정말 기뻐요.”

“그래, 그렇게 웃으니까 훨씬 낫잖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교수의 가벼운 농담조에 무의식적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프랑스에 온 지 수개월이 지났음에도 이십여 년 간 반복해온 습관적 예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어색한 웃음과 함께 조심스럽게 그곳을 빠져 나왔다. 

이로써 2학년 진급을 위한 최종 프레젠테이션까지 모두 끝났다. 걸음을 가눌 수 없어 잠시 복도에 기대었다. 순간 폭발적인 괴성이 청신경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복도의 한 쪽 끝에선 미학 수업 때 봐서 낯이 익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애인사이인지 항상 붙어 다니던 녀석들이었다. 남자 쪽은 욕을 내뱉으며 여리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여자는 그를 껴안은 채 달래고 있었다. 저 녀석, 아마 쏘띠sortie를 받았나보다. 남자 녀석이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또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 또한 인과응보라며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저렇게 이성을 잃는 것도 지금 뿐일 것이다. 앞으론 다른 학교로 편입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한 학년씩 올라갈 때마다 인원을 줄여가는 프랑스 대학의 제도에서 저런 광경은 어쩔 수 없이 항상 연출되기 마련일 것이다. 내년에 내 모습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대 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교수 평가실에서부터 내 머릿속을 휘감았던 기억이 또다시 오롯하게 떠오른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어보았다. 그 숨결 속엔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잔뜩 엉켜 있는 것 같았다. 교수들의 입에서 합격했다는 말을 들으면 이 음식을 얹힌 것 같은 답답함이 단번에 해소될 줄 알았는데 나의 기대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목표대로 얻은 진급시험 합격 덕분에 얻은 고양감과 함께 다른 한 편에서 뻗쳐지는 한없는 침울함은 내 안을 불유쾌로 급격히 팽창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오늘 밤을 꼬박 새고 여유가 생겨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꿈 때문일 것이다. ‘그’ 기억이 꿈속에 또렷하게 재생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쥴리앙의 연주회 날의 기억이었다.

그 날, 우리는 몇 번의 엇갈림과 오해 끝에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그토록 완벽한 조화로운 순간을 느낀 적이 또 있을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얻은 진심과 현실의 일치. 너무도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해명하고 싶은 것도. 하지만 맞닿은 서로의 심장을 통해, 그리고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진심은 그대로 언어의 가치를 퇴색시켰다. 영원할 것만 같던 기나긴 입맞춤을 마치고 나는 쥴리앙이 이끄는 대로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어둠과 침묵 속에서 교차하는 불안정한 호흡. 그 미묘한 긴장을 애써 잊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때 바라본 빠리의 야경은 새삼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 갈 곳을 잃은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던 게 불과 얼마 전까지의 감정이었는데 그 순간은 마치 오래 전 일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식한 손목의 허전함. 

‘프랑스에 있는 동안은 이걸 항상 차고 다니세요. 이것이 당신의 이성과 감정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끊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 순간 모든 일들이 틀어질지 모르니.’

그렇게 잠시 팔찌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도착한 곳은 쥴리앙의 집이었다. 다시 그 하얀 집 앞에 마주선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처음 이 집을 찾아갔던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고백 받은 쥴리앙의 감정, 내 진심에 대한 부정으로 빚어진 거짓말, 그리고 헤어짐. 어째서 이 집으로 나를 데려왔을까? 예전에 그를 만나기 위해 이 집을 찾았을 때엔, 분명 이곳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런 사소한 것들을 물을 수조차 없었다. 쥴리앙은 내 손을 붙잡고 다급하게 그 집으로 이끌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쥴리앙은 거침없이 밀어 붙인 채 격하게 옷을 풀어헤치며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여유 없는 모습에 머릿속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땐 나 역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몸은 그의 단단한 팔에 가두어진 채 그대로 거실의 소파에 눕혀졌다. 그 자극적인 움직임에 나는 한음씩 목소리를 높여가는 것처럼 숨을 내쉴 때마다 달뜬 숨에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진득한 애무를 받으면서 나는 가까스로 끈을 놓지 않은 이성을 붙잡고 생각했다. 사실 조금은 그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정말 이대로 몸을 섞는 다는 생각이 머리에 미치자 뜻밖의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고조되는 흥분만큼 슬며시 한구석에서 익숙하게 피어오르는 어두운 불안감.

온전히 그와 몸을 섞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결국 또 다시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우습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무서웠다. 욕구에 이끌려 몸을 섞고 나면 그땐 정말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을 거라는, 스스로 조심스럽게 남겨놓은 마지막 보루. 게다가 오랜만에 마주해서인지 쥴리앙의 몸은 타인의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남자끼리 몸을 섞는 행위 자체도 의식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내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젠 완전히 사라졌을 줄 알았던, 가슴속 깊이 새겨진 터부. 그 터부가 그의 여린 가슴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 미약한 거부의사로 그의 격정적인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나의 저항에 쥴리앙의 움직임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까스로 몸에 힘을 주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제야 자각했다. 어느새 두 눈에서 새어 나오는 눈물로 또다시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미안…….”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음은 이미 널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다만 보잘것없는 이기심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지만 입술 밖으로 내뱉어진 단어는 우습게도 '미안'이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쥴리앙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후회가 섞인 미소였다.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손은 축축하게 젖은 볼로 미끄러져 내려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지독히도 다정해서 더욱 눈물샘을 자극했다.

“아니야. 내가……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군 것 같다.”

“…….”

“놀라게 해서 미안해.”

“…….”

오히려 사과를 받는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책감으로 범벅 된 안도를 느끼면서. 

“…기다릴게.”

쥴리앙은 한결 차분해진 숨결과 함께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렇게 가슴 벅차던 재회의 끝은 그 쓰디쓴 입맞춤으로 침식되었다.

학과장 교수에게 '빠세'라는 말을 듣고도 기쁨을 느낄 겨를 도 없이 쥴리앙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비단 오늘 아침의 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로맨틱한 재회 이후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금은 조금 데면데면한 상태이긴 하지만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예전과 같은 친구관계도 아니었다. 

그동안 쥴리앙은 프랑스에서 6월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음악제 준비로 바빴고, 나 역시 진급시험 때문에 거의 집에 붙어있질 않았다. 아주 가끔씩 전화로 서로 안부를 묻곤 했었다. 재회한 다음 날 아침 쥴리앙은 음악제 일 때문에 리옹Lyon으로 급히 내려갔다. 나는 전날 밤 쥴리앙의 집에서 나온 이후 줄곧 미묘한 기분에 휩싸여있었다. 하도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져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렇게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나의 갑작스런 태도변화로 인해 쥴리앙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쓰였다. 그동안 그렇게 틀어지고 엇갈려왔는데 이대로 또 잘못될 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날 저녁 쥴리앙에게 온 전화는 나에게 새로운 심경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쥴리앙의 목소리는 전혀 상처받았다거나 화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걱정은 불필요한 걱정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어색하게 드문드문 꺼내는 목소리에서는 소년과 같은 순수함이 묻어났다. 갓 사랑에 빠진 소년의 순수함. 내가 알던 쥴리앙의 모습을 발견하자 나 역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쥴리앙은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가벼운 안부와 함께 앞으로도 당분간 음악제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 정도를 털어놓는 정도였다. 별 것 아닌 대화를 제법 오래 끌다 전화를 끊을 때 즈음이었다.

[하루 종일 네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쥴리앙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엔 부끄러움이 배어있어 나 역시 새삼스레 얼굴을 달아올라버렸다. 어떡하지, 왜 이렇게 뻔하고 유치한 말인데 기분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붕 뜨는 걸까. 하지만 나는 쥴리앙의 그 조심스런 고백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와 같은 웃음소리를 흐리게 들려줄 뿐이었다. 내 웃음소리에 쥴리앙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지노,]

“응?” 

[앞으로 언제 또 통화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미리 한꺼번에 내 이름을 불러주면 안 될까?]

“…왜?”

[……아껴두었다가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떠올리게.]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너무 쑥스러워서 싫다고 했지만 쥴리앙은 끈질기게 졸라댔다. 나는 결국 녀석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부탁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 쥴리앙은 전화를 할 때마다 끊을 때가 되면 여지없이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나중엔 익숙해져서 녀석의 그 부탁이 언제 나오나 내심 기다리기까지 했다. 쥴리앙, 쥴리앙, 쥴리앙……. 우스웠다. 그의 이름은 마치 최면과도 같았다. 그를 더욱 사랑하도록 만드는 최면. 횟수도 세지 않고 그렇게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부를 때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너무도 소중하고 그리워서 목이 메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멎어 가면, 조용히 듣고 있던 쥴리앙도 내 이름을 천천히 부르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애틋해서 매번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쩔쩔 매다가, 나는 도리어 무심하게 반응하고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두근거림이 멎질 않아 가슴을 쿵쿵 치는 사실을 쥴리앙은 알까, 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으면서.

재회 이후 일주일 동안은 말 그대로 삶 자체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은 무언가가 가득 충만하게 채워진 기분이었다. 겉보기엔 예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의식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쥴리앙에 대한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잠깐 작업도구만 챙겨 쟈끄네 스튜디오로 갈 계획이었는데도 혹시 전화가 올까 싶어 괜히 먹고 싶지도 않은 커피를 끓이며 늑장을 부리기도 했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 처음 가져본 설렘에 중독되어 그 상태를 나는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감정이 이렇게 좋은 기분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먼저 그에게 전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프레젠테이션 일로 바쁘듯이 쥴리앙 역시 음악제 준비로 전혀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전화를 걸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우습지만, 그게 나의 배려 방식이었다.

그렇게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쥴리앙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는 내 상태의 심각성에 자각하지 못한 일주일 뒤, 사건이 하나 터졌다. 쥴리앙과의 추억을 되새기다 지하철에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과제용 드로잉을 두고 내려버린 것이다. 드로잉을 찾기 위해 몇 번이나 지하철 사무실에 연락을 했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나 달콤하고 애틋한 연애의 기분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3학년으로 진급하느냐, 2학년을 한 번 더 다니느냐, 아니면 학교에서 쫓겨나느냐를 가늠하는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연애 감정은 방해가 될 뿐이었다. 쥴리앙 3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쥴리앙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차츰 쥴리앙의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쟈끄네 집에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다 잠을 자기도 했다. 과제물들을 준비하기에 기숙사는 너무나 비좁았기 때문에 녀석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감날짜가 다가오면서 나중엔 의도치 않게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연락은 차츰 소원해졌다. 아니, 연락이 소원해진 건 내가 그의 전화를 피한 일방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쥴리앙이 얼마나 자주 응답 없는 신호음을 마주해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어쨌든 실제로 통화한 건 열 손가락도 채 안 되는 횟수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동안 마지막 전화에선 과제 마감이 막바지에 이르러 스트레스로 그 동안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계속 투정하는 쥴리앙에게 짜증까지 내버리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 마지막 통화가 열흘 전. 그 이후 줄곧 전화는 오지 않았다.

                                                                   ⊙

부스에 전시했던 과제물들을 전부 챙겨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눕히거나 쉴 수가 없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의 원인은 아마도 쥴리앙에게 진급시험에 통과한 것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조여 오는 그 목소리에게 잘했다고, 축하한다고 가장 먼저 칭찬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녀석의 휴대폰 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내 전화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서일까.

그 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쥴리앙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무려 한 달이 넘는 시간. 얼굴을 마주한지는 오래됐지만 그렇다고 재회의 순간부터 쥴리앙에 대한 내 감정이 일관되어온 건 절대 아니었다. 지나고 나면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매 순간마다 감정이 극단으로 오가는 상태의 반복이었다.

마지막 전화의 일로 쥴리앙이 변심을 하진 않을까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선 쥴리앙을 만나러 갔을 때 그가 보였던 차가운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차갑게 얼어버릴 것만 같은 시린 기억. 내 태도가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예전의 차디찬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자꾸 전화기가 눈에 밟혔다. 그렇게 전화기에 다가가는 것조차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수화기에 손을 댔다 놓기를 반복한 건 그보다 더욱 많았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되돌릴 순 없다. 그 동안 내 상황 핑계를 대며 소홀히 대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쥴리앙이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게 옳았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에 음악제도 끝났으니 아주 바쁘진 않을 것이라는, 전화 거는 것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대한 정당성 따윈 잊어버리기로 했다. 하나, 둘.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신호음을 세고 있는데 돌연 전화가 걸렸다. 

[…….]

전화를 받은 소리가 분명히 들렸는데, 어째서인지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저……”

[쥴리앙은 지금 전화 받기 조금 곤란합니다.]

“……!”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숨이 탁 막혀버렸다.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내가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안이 쥴리앙의 휴대폰을 받으리라고는. 한 마디뿐이었지만 그건 분명히 이안 스미스였다. 내게 쥴리앙에게서 멀어지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남자. 차마 쥴리앙에게 묻진 못했지만 예전에 이안이 내게 했던 말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그 두 사람간의 관계가 줄곧 마음에 걸렸었다. 

어째서 그 남자가 쥴리앙의 전화를 대신 받은 것일까? 이 시간까지 그 남자와 뭘 하고 있었길래? 일 때문에 같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겨우 용기를 내서 전화를 다른 사람이, 그것도 하필이면 그 남자가 전화를 받을 게 뭐란 말인가. 불안이 엄습해왔다. 어쩌면 이안 스미스는 그 동안 줄곧 쥴리앙과 같이 다녔을 지도 모른다. 내가 함께할 수 없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쭉. 

도무지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가 알고 싶지 않는 현실을 알게 될 까봐. 내가 내 전화에 쥴리앙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라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잡았던 마음은 이미 갈피를 잃어버렸다. 차라리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젠 머릿속에서 상상조차 하기 끔찍한 시나리오가 제멋대로 쓰여지고 있었다. 피곤한 얼굴을 감싼 채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쥴리앙, 쥴리앙… 쥴…….”

어느 순간부터 이름에선 그 이름을 연신 빚어 하나씩 뱉어내고 있었다. 고장 난 녹음 인형처럼. 그 이름이 빠져나올 때마다 내 안의 우울과 그리움은 커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순간적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면, 전에 걸려온 전화도 바쁘다는 핑계로 항상 먼저 끊자고 하지 않았다면, 쥴리앙이 부끄러운 말들을 할 때마다 조금쯤은 솔직하게 반응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 이런 공허감과 외로움 따윈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까.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마에 얹었던 손등이 눅눅하게 젖어 불쾌감을 느낄 때쯤이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발작을 일으키듯 울리기 시작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선뜻 전화기에 손을 대기가 꺼려졌다. 쥴리앙일까, 아니면 그 남자일까. 어느 쪽이든 전화를 받기가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화벨이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쨌든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판단에 마른 침을 삼키고 수화기를 들었다.

[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전화를 건 사람은 예상했던 그 누구도 아니었다. 

“아…, 쟈끄구나.”

[너 또 위베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기숙사에 처박혀서 자고 있었지? 내가 끝나고 돌아오면 연락하라고 했잖아!]

“하하…, 그냥 좀…….”

[……뭐야, 설마 진급시험에서 떨어진 거야?]

“…아니, 다행히도 통과 했어.”

[쳇, 그럼 그렇지. 통과했을 줄 알았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나 아닌 다른 학생들도 다 열심히 했을 텐데 뭐.”

[…왜 그렇게 목소리가 저조하냐,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데 눈치 빠른 쟈끄는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세 감지했나보다. 나는 괜히 밝은 톤으로 목소리를 돋우었다.

“어, 그래? 별 일 없는데.”

[아무튼 그러고 있지 말고 지금 당장 메르세데스로 튀어나와. 시험도 끝났는데 같이 뺏뜨fete를 즐겨야지. 조제뜨랑 끌로드랑 미사랑 전부 모였어. 네가 우리들 중 마지막으로 시험 본거거든.]

나는 잠시 갈까 말까 고민하다 곧 준비해서 나가겠노라고 했다. 그래, 어차피 집에 죽치고 있어봤자 내게 이로울 건 하나도 없었다. 그 동안 그렇게도 나를 힘들게 했던 최종 프레젠테이션에 통과한 날이지 않은가. 쥴리앙 일로 계속 우울해하고 있는 것보다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편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노! 여기야, 어서 와!”

“2학년 빠세한 거 축하한다.”

“고마워, 끌로드. 너도 졸업하게 된 거 정말 축하해.” 

나를 부르는 자리엔 조제뜨와 끌로드만이 앉아 있었다.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한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르세데스의 분위기는 이미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우리 외에도 우리 학교 학생들이 제법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다들 시험의 해방에서 벗어나 즐거워 보였다. 

“근데 쟈끄랑… 미사는?”

“미사는…… 아까 일이 있다며 급히 갔어.”

“……아, 그래.”

조제뜨는 갑작스런 볼 일이라는 어설픈 이유를 댔지만 나는 이미 두 사람의 표정에서 어떤 상황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미사는 아마 쟈끄가 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엔 헤어진 이후 생긴 불편감이 변함없이 존재하니까. 나 때문에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쟈끄는? 쟈끄 이 녀석은 나오라고 불러놓고 어딜 간 거야.”

“…….”

나의 어색한 투덜거림에 끌로드는 한숨을 푹 쉬며 말없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스테이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웬 여자가 화려한 금발 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엄청난 떡대에, 부담스럽게 커다란 가슴에, 보는 것만으로도 시력이 나빠지는 것 같은 짧은 미니스커트 아래에 드러난 부담스런 알통다리, 나를 발견하곤 듬직한 팔놀림과 함께 하이힐을 신은 채 뒤뚱거리며 다가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오도록 하는 저 여자 아니, 괴물은…… 그랬다. 쟈끄였다.

“호호, 이게 누구야? 내 친구 지노잖아~?“”

“…….”

“어머 얘도 참~ 아무리 내가 예뻐도 그렇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부끄럽잖니~”

녀석의 모습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잊은 것뿐인데 괴물 쟈끄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부끄럽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그게 전혀 귀엽게 보이지 않는 건 비단 떡대뿐만 아니라 얼굴을 매만질 때 쓰윽 하고 들리는 수염 쓸리는 소리가 시끄러운 실내에서도 유독 크게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꼴이라니! 마드모아젤에게 실례되는 말은 삼가줬으면 해.”

“…….”

“이제 난 졸업이잖아.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추억을 뜻 깊게 남기고 싶어서~”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가 뜻 깊은 거냐고. 나는 되묻고 싶었지만 워낙 정신세계가 독특한 놈이니 말해봤자 소용없는 짓이라고 결론지었다. 

“흐흐. 자 이제 그럼 지노가 도착했으니 본격적으로 파티를 시작해볼까?”

쟈끄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본격적인 파티고 뭐고 간에 나는 꿈에 나올까 무서운 녀석을 애써 무시하며 주문한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자 쟈끄가 새끼손가락을 치켜든 두터운 손으로 내 손에서 맥주병을 채가며 말했다.

“지노~ 예전에 했던 약속은 잊지 않고 있지이~?”

“무슨…… 설마,”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생각에 나는 차마 말도 잇지 못했다. 며칠 전 쟈끄가 신체 사이즈나 신발 사이즈를 물었을 때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에 몸이 흠칫 떨렸다. 쟈끄는 내 심상치 않은 표정에 바로 맞췄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요염한 포즈로 테이블 밑에 있던 쇼핑백을 매고 막무가내로 내 팔을 채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내가 소란스런 반항을 하는 사이에도 쟈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에게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남기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녀석의 거센 손힘은 화장실로 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풀어졌다. 

“시, 싫어! 제발 너의 그 오염된 정신세계를 나한테까지 옮기려고 하지 마!“”

“오염이라니, 이것이 바로 정화라는 거다.”

“웃기지 마! 정화건 뭐건 아무튼 난 싫…,”

“지노, 난 네가 약속도 안 지키는 무책임한 녀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윽.”

“걱정 마~ 내 모습은 미관상 좀 보기 괴롭지만 지노라면 웬만한 남자들도 넘어갈 만큼 섹시할 테니까! 내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서 구한 거거든.”

쟈끄는 당황하는 내 모습에 더욱 신이 난 듯 의욕적으로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쇼핑백에서 나온 옷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설마 내가 이걸 고분고분하게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약속은 약속인 거 알지?”

“…….”

“자자, 얼른 갈아입고 나와! 메이크업도 해야지~”

“그, 그렇지만 이건…!”

쟈끄네 집에서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그 전날 쥴리앙의 마지막 전화를 받고 나서 하루 종일 과제에 집중을 하기가 힘들었다. 진척이 없는 작업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커피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 나오자 보이는 의외의 장면에 나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이상한 파괴음이 들린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졸업을 앞둔 쟈끄가 플레이 스테이션 2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TV앞에서 죽어라 조이스틱을 돌리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졸업생 프레젠테이션은 2학년인 나보다도 일찍 시작해서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말이다. 남의 일이니까 내버려둘까 하다 결국 한마디를 꺼냈다. 

“쟈끄, 너 과제물 다 끝냈어?”

“어…? 아, 조금만 하면 돼. 이번 판만 깨고 할 거야. 마지막 판이거든.”

“그렇게 놀았다가 졸업 못하면…”

“걱정 마셔~ 넌 매사에 뭐가 그렇게 부정적이냐? 그러니까 될 일도 안 되지~”

“…….”

안 그래도 작업이 느리게 진행 되어서 죽겠는데 게임기나 쥐고 있는 녀석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고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녀석은 내 찌푸린 인상 따위는 무시하고 여전히 TV스크린에 몰입한 채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가 준비한 과제물 정도면 수석을 하고도 남는다니까?”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건지, 너무 얄미워서 곰 같은 등짝을 발로 차고 싶은 충동이 물밀듯이 일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네가 수석을 하면 하루 동안 네 종이 되고 말지.”

하도 짜증나서 혼자서 중얼거린 건데 게임이 클리어 되는 소리와 함께 쟈끄의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렸다.

“오호~ 그거 구미 당기는 제안인데? 너 그 말, 물리기 없기다?”

나는 ‘퍽이나 네가 정말 수석을 하겠다’ 생각하며 녀석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쟈끄는 위베를 마치고 돌아와 말했다. 이번 졸업시험에서 자신이 수석을 차지했다고. 

“휘익~ 이게 누구신가?”

“Oh la la~ 세상에, 진짜 예쁘다!”

“…….”

쟈끄가 가져온 옷으로 꾸며 입고 나오자 끌로드와 조제뜨의 반응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녀석들이 하도 난리법석을 피우자 안 그래도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부터 따라붙던 시선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준비한 옷은 새빨간 비단에 수가 놓인 중국 여자 의상이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양 갈래로 땋은 머리 위쪽엔 만두머리 모양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치마가 워낙 짧은데다 옆은 골반 바로 아래까지 트여있어 나는 엉거주춤한 포즈로 자꾸 옷을 잡아 내렸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내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쟈끄는 변신한 나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어깨를 툭툭 쳤다.

“크하하하! 어때, 우리 쟌느의 모습이? 역시 내 안목은 최고라니까!!”

“…쟈끄, 제발 그 옷차림 상태로 그렇게 웃지 말아주라.”

붉은 입술 사이로 목젖까지 보이며 호탕하게 웃는 쟈끄의 모습에 나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장을 한 내 모습보다 저 거구의 금발 괴물 옆에 있는 내 모습이 더 부끄러워지려고 했다. 여장을 하면서 쟈끄가 안경까지 벗을 것을 요구해서 나에겐 녀석의 모습이 흐리게 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노,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얼핏 보면 진짜 여자애 같아. 꼭 살아있는 중국 인형 같달까?”

“음, 아니 그보다는 중국의 유명한 여배우 같은 느낌이야.”

“…….”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조잘거리는 조제뜨와 눈을 번뜩이는 끌로드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확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에서 메이크업까지 마친 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 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장진호, 니가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외치며 순식간에 던져버린 망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끌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너야 좀 괴롭겠지만 나나 조제뜨는 너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해서 즐거운데? 부끄러워서 빨개진 '여자' 지노라니, 평소에 속을 알 수 없는 무뚝뚝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잖아.”

“그러게, 게다가 정말 잘 어울려~!”

“너무 잘 어울려서 옆에 있는 금발 오크가 불쌍해 보일 정도지.”

“이 자식! 금발 오크라니! 나는 오늘 ‘마성의 쟈클린’ 컨셉이라고!”

“마성이 아니라 ‘공포의 쟈클린’이겠지.”

“이게 끝까지…!”

오늘도 여지없이 쟈끄와 끌로드는 서로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했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조제뜨는 여전히 여장한 내 모습을 관찰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어머, 얘 다리 좀 봐! 무슨 남자 다리가 이렇게 미끈하게 잘 빠졌니?”

“그치? 나 얘 다리 보고 세울 뻔 했잖아. 이 녀석 다리, 완전 내 타입이라니까?”

조제뜨의 끊이지 않는 호들갑과 어느새 그에 음담패설로 맞장구를 치고 있는 쟈끄 덕분에 이젠 주변의 사람들도 괜히 옆에 서서 내 모습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반복하고 있었다. 쟈끄는 불편한 내 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내 어깨를 붙잡고 스테이지로 이끌었다.

“자자,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우리 같이 섹시한 몸놀림으로 여기 있는 남자들을 모두 매혹시켜보자~?”

제발 쟈끄, 이제 그만 좀 하자. 나는 속으로 우는 소리를 하며 그대로 질질 끌려가 한참 동안 금발 오크 옆에서 춤추는 시늉을 해야만 했다. 

새벽녘이 가까워 오자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있던 실내는 많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녀석들과 마시고 춤추며 어울리느라 기운이 쫙 빠져있었다. 가벼운 맥주로 시작했던 자리는 알자스산 꼬냑으로 진득하게 늘어졌다. 끌로드와 조제뜨는 다른 졸업생들 테이블에 껴서 뭔가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쟈끄와 나도 둘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여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래와 관련된 진지한 대화였다.

“세계 일주?”

“응.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대충 1, 2년 정도 잡고 있어. 여기 저기 둘러보며 다양한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싶거든. 다니면서 천천히 사업 구상도 좀 해보고.”

“음…, 1, 2년이면 꽤 돈이 들 텐데 역시 보르도의 포도농장 아들은 씀씀이가 다르구나.”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가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다니지. 하지만 여윳돈이 많진 않으니까 사이사이에 워킹 홀리데이나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려고 해.”

“…부럽다.”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

여전히 부담스럽기만 한 여자 쟈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젖기 시작했다. 녀석의 계획에 대해 듣고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부럽다’고 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건 당연했다. 평소엔 장난치기만 좋아하고 속이 없어 보이는 쟈끄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배울 게 많은 녀석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아주 예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작년에 함께 공동 작업을 할 때에도 팀장 역할을 참 잘해냈었지. 녀석은 팀원들 하나하나의 특징과 성격에 맞춰서 스케줄과 역할을 조절할 줄 아는 리더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녀석의 집에서 작업하느라 잠깐 신세를 졌을 때에도 독특하고 열린 생각이나 발상이 반영된 녀석의 작품들을 보며 머리가 쨍 하고 울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 사실 쟈끄정도라면 수석 졸업도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녀석은 분명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쟈끄의 스튜디오는 10년, 20년 뒤엔 영국의 아드만이나, 일본의 지브리처럼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하나로 꼽힐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녀석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나는 그저 한 없이 스스로가 부족하고 작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어떨까? 나도 졸업을 하고 나서…… 저렇게 남들 앞에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일순 내 앞날에는 아무런 확실한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곤 기분이 우울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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