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3)

# 19. 추억을 붙잡으려 허공에 뻗은 손이 남긴 잔영의 색

다음날 오후, 기숙사로 돌아왔을 땐 예상치 못한 일이 담담해진 마음을 또다시 뒤흔들어 

버렸다. 그것은 무심코 열어본 우편함에서 시작되었다. 편지가 하나 와있었다. 별생각 없

이 집어든 편지였다. 그러나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만 숨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

다. J. O. 어제 그림에서도 보았던 그 이니셜과 익숙한 필체. 그것은 순간적으로 한 남자

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눈동자에 잔상이 남을 정도로 그 이니셜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 자리에서 빠르게 편지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물에 나는 다시 한 번 눈

을 크게 떴다. 연주회 티켓이었다. 열차 안에서도 몇 번이나 꺼내보았던, 미쉘 씨가 준 것

과 같은 티켓. 나는 문득 다시 편지 봉투의 겉면을 살펴보았다. 수신자 위치엔 또렷하게 적

힌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게다가 지금 보니 편지봉투엔 소인이 찍혀있지 않았다. 그렇다

면 설마 직접 들고 온 것일까? 심장이 더욱 거세게 흉부를 두들기고 있었다. 혹여나 메시

지가 들어있을까 싶어 편지봉투의 단순한 구조에 의심을 품고 몇 번이나 뒤적거렸지만 아

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왜 내게 이걸 보낸 걸까. 이전엔 그렇게 날 괴롭히고 나선 갑자

기 왜……? 설마, 망상이 아니라 사실 쥴리앙도 날 잊지 못하고 있는 건…….

“한발 늦었군.”

문득 기숙사 입구 쪽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쥴리앙의 편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

던 나를 다시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꿈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예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인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자 흥분감에 끓어오르던 피가 한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흰색 터틀넥 스웨터에 고급

스런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 그는 몇 주 전 쥴리앙을 찾아갔을 때 그 곁에 있던 사람

이었다. 남자의 입술을 보다가 문득 쥴리앙과 키스를 했던 마지막 순간이 떠올라 불쾌감

이 치솟았다. 이 남자가 어째서 여길 온 것일까. 도무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당황하는 기

색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와는 달리 여전히 한 가닥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눈을 한 번 슬며시 감았다 떴다. 그 흔들림 없는 잿빛 눈동자를 마

주보며 나는 예감했다. 흑과 백,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변이들이 주는 혼돈을.

자리를 잡은 곳은 학교 근처의 카페였다. 팔짱을 끼고 몸을 비틀어 앉은 남자는 줄곧 말

이 없었다. 이전에는 어두운 곳에서 봐서 잘 몰랐지만 지금 보니 고작 내 또래 정도나 되

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몸집은 비교적 왜소했지만 무테 안경알 안에 자리 잡은 눈동자

는 무척 날카롭게 빛났다. 잠시 뒤, 그렇게 마네킹처럼 굳어져있던 남자는 음료가 오자 그

것을 집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그것과 동시에 그는 입을 열었다.

“얼굴이 생각보다 좋군요.”

“…….”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당신이 불과 일주일 전에 날 봤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

다. 한동안 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으니까. 몸이 아파서, 술에 절어서, 괴로워서.

“그렇게 심한 말을 듣고도 버젓이 잘 지내는 걸 보니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역시 당신

은 쥴리앙에게 있어 해만 되는 존재인 것 같군요.”

“대체 할 말이 뭡니까?” 

아를에서의 휴식으로 겨우 조금 몸이 나아진 것뿐인데 남자는 그것조차 내게 당치 않다

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억울하고 불쾌했다. 내가 비위가 틀린 목소리로 말을 받아치자 남

자의 눈이 조금 꿈틀 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진 않았다. 남자의 눈과 입술은 조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에둘러 말하면 이해 못 할지도 모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는 그 티

켓을 회수하러 왔습니다.”

“…….”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신에게 그걸 갖다 주러 직접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쓸데

없는 기대는 버려주십시오. 지금 당신이 쥴리앙을 다시 만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

도 없습니다.”

남자는 차받침까지 집어든 상태에서 홍차를 들이켰다. 전체적으론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

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잔을 기울이는 얼굴이 무척이나 고상해 보였다. 하지

만 내게 있어서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아침부터 낌새가 이상해서 혹시나 와본 건데 정말 쥴리앙이 당신을 찾아왔을 줄은 몰랐

습니다. 하여간 녀석도 너무 물렀어요.”

“…….”

“그래, 그걸 받고 난 소감은 어떻습니까? 그날 그렇게 제 앞에서 추한 꼴을 당했는데 그래

도 기쁜가요? 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그건 너무 비굴해 보이잖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은 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내 미

간 사이는 물론 얼굴 전체가 경직된 것처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남자는 메탈 소재의 손

목시계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찻잔과 차받침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자아, 어서 돌려주고 끝내죠. 저도 바쁜 몸이라 이런 일 하나 때문에 마냥 시간을 뺏길 

순 없습니다.”

“…싫습니다.”

“…뭐라고요?”

“싫다고요. 이건 쥴리앙이 제게 보낸 겁니다. 당신이 대체 쥴리앙의 뭐길래 그가 보낸 것

을 돌려받겠다고 하는 거죠?”

“…….”

나는 결국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불쾌감을 하나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모두 쏟아냈다. 

하나하나 내뱉는 말들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내 태도에 남자

가 사과하거나 난처해하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조금이라도 놀라거나 기분 나빠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나 같은 존재는 아무

리 도발을 해도 가소로울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가 쥴리앙의 뭐일 것 같냐고요?” 

“…….”

“맞춰보시죠. 어떤 사이일 것 같나요?”

남자의 태도는 너무도 당당했다. 내 머릿속은 서서히 어두운 예감에 침식되어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몇 단어를 내뱉었다.

“…설마…그런……”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묻죠?”

“…….”

“맞아요. 당신이 예상하고 있는 관계 그대로입니다.”

“…….”

“뭐, 좋습니다. 당신 뜻이 정 그렇다면 굳이 티켓을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결

국 오진 못하겠죠? 쥴리앙과 제가 어떤 사이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서로 얼굴 붉힐 일을 하

러 오시진 않을 테니까요.”

“…….”

그 단정한 입가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하나하나 그대로 심장 속에 비수처럼 꽂혔다. 남자

는 가죽으로 된 크로스백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나가려다가 다

시 돌아서서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지만 쓸데없는 기대는 갖지 말아주세요. 당신만 힘들 테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쥴리앙 앞에 나타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겪은 사건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어제오늘 이어서 겪은 감정의 

변화는 너무도 굴곡이 커서 내 사고는 그것을 좇아가는 데만도 극심한 멀미를 느꼈다. 나

는 떠나기 전 깨끗하게 정리해둔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하고 단단했다. 미쉘 씨에게서 쥴리앙의 과거를 듣

고 난 이후엔 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도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만난 남자의 등장은 또다시 나

를 갈등의 파도 속으로 던져버렸다. 괜히 쥴리앙에게 화가 났다. 차라리 내게 편지를 남기

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좀 더 늦게 와서 차라리 나와 마주쳤더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

도 되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나는 그 남자가 두려웠다. 쥴리앙의 연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내게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는 남자가. 이제야 쥴리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겨우 그를 찾아가 고백

할 용기를 가졌는데, 쥴리앙의 연인은 이젠 그마저도 가져선 안 되는 오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그런 어른스런 연인이 있었다면, 쥴리앙은 어째서 

내게 티켓을 준 것일까. 그것도 직접 찾아와서. 녀석은 나와 마주치면 뭐라고 말할 생각이

었을까. 어린 시절의 쥴리앙 온전히 이해했지만 여전히 현재 그의 심중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언제나 조바심을 내고 불안해한다.

그런 생각들에 정신이 묻혀갈 때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롤리타였다.

[얼마 전에 기숙사에 전화했더니 안 받아서 기숙사 본부로 연락했더니 오늘쯤 돌아온다

고 기록해놨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지금 전화했는데 역시 돌아왔네?]

“아, 응. 방금 돌아왔어.”

[그렇게 오랫동안 어딜 다녀온 거야?]

“그냥……여행을 좀 다녀왔어.”

[그랬구나. 아, 저기 혹시, 쥴리앙의 티켓 받았어?]

“……네가 어떻게 그걸……?”

[까트린느가 그러는데 쥴리앙이 얼마 전에 만나자고 하더래. 그래서 카페에서 만났는데,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헤어지면서 연주회 티켓 주고는 나랑 꼭 같이 와달라고 했대. 그리

고 그 옆자리는 지노 네 자리라면서 너한테도 보낼 거라고 말해줬거든.]

“옆자리……? ……왜 준 건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대?”

[글쎄, 그런 말은 없었다고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여행이라니, 어딜 다녀온 거야?]

“아……그러니까, 그게……”

롤리타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에 나는 간단하게 아를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결국 그전에 쥴리앙의 형과 마주쳐서 초대를 받았다

는 이야기와 실제 아를에 가서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꺼내놓게 되었다. 롤리타는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더니 그제야 모든 정황을 이해했다는 듯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쥴리앙의 형과 마주친 데다, 초대받은 곳이 우연치 않게도 네가 본래 가려고 했던 친척

집과 같은 지역이기까지 하다니…….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너랑 쥴리앙은 정말 강

한 연결고리로 이어진 운명인 것 같아.] 

“…….”

[그래, 어쨌든 연주회엔 올 거지?]

“저, 그래서 말인데……”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롤리타는 내 말에 처음엔 의아해하다

가 내가 고집을 부리자 더 이상 그것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색함 속에서 그대

로 통화를 마쳤다. 작게 미동하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

다. 입술은 제지할 틈도 없이 제멋대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젖은 솜처럼 몸

을 침대에 뉘였다. 피곤함이 그대로 만져지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대체 무슨 의미인 거지. 쥴리앙. 넌 이미 애인이 있다며. 그런데 네가 이걸 내게 보

낸 이유는 뭐지? 게다가 까트린느와 롤리타의 옆자리라니. ……다시 친구라도 되자는 거

야?”

*

그러나 그날 이후로는 녹록하게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3학년 진급시험 때문이

었다. 프랑스 미술대학에서의 진급은 한국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실질적인 수업은 

1~2월에 모두 끝내고 두 번에 걸쳐 빌렁Bilan이라는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이 테스트에

서 통과를 해야만 6월에 있는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받을 수 있다. 학년 진급을 가늠하는 

최종 프레젠테이션은 일정하게 공간을 부여받고 그곳에 각자 1년 동안 자신이 작업해왔

던 과제물들을 전시하고 교수들에게 작품설명을 하며 1년간의 성과물을 보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여기서 떨어질 가능성은 상당하며 심한 경우에는 아예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수도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이 프레젠테이션 전에 패스해야 하는 빌렁 시험 준비 때문

에 그동안은 줄곧 쥴리앙과의 일에 대해 잠시 생각을 접어두어야 했다.

두 번째 빌렁 시험을 통과하고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을 때, 이미 쥴리앙 오르로제의 연

주회는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게 바로 오늘, 빠리에서의 마지막 연주회이자 내가 초대

받은 공연 날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검은색 정장을 꺼냈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입

어보는 정장이었다. 옷을 전부 차려입고 나는 내 모습이 어색해선지 한참이나 거울을 통

해 바라보았다. 흰색 스트라이프 셔츠 위에 넥타이는 핏빛처럼 붉디붉은 색이어서 그런지 

내 목을 강하게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거울 속의 내 왼쪽 귀엔 별모양의 오팔 귀걸이가 눈

에 들어왔다. 그동안 세심하게 관리를 해서인지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확실

히 얼굴은 아를에 다녀온 이후 훨씬 좋아졌다. 그러나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었다.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움과 불안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기 얼굴을 보

며 위태롭다고 느끼다니, 나도 참 꼴불견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날카롭게 드러난 턱 

선을 손바닥으로 흐르듯이 매만져보면서 우스운 생각을 또 하나 해버렸다. 이렇게 차려입

으니 나도 유혹적인 호스트 같다는 재미없는 유머. 그게 너무도 실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

는 거울을 향해 조소를 한 번 보이고 돌아섰다. 나는 시계를 한 번 슬쩍 보고는 일찌감치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노을은 이미 스러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초저녁이었다. 사실 나는 연주회에 가는 

것에 대해 아직도 조금 망설여졌다. 시험 준비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짐짓 연주회에 갈 생

각을 하니 두 달 전 만났던 남자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쥴리앙을 다시 만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쥴리앙과 제가 어떤 사이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서로 얼굴 붉힐 일을 하러 오시진 않으시

겠죠.’

‘쓸데없는 기대는 갖지 말아주세요.’

그 말들은 하나같이 내가 애써 결심했던 것들을 부질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섬뜩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연주회에 갔을 때 쥴리앙이 날 발견한다면, 겨우 안정되어가는 그

의 인생에 다시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마지막

이다. 거절당할 때 거절당하더라도, 모욕을 당할 때 모욕을 당하더라도 딱 이번 한 번만 녀

석을 만나고 난 뒤엔 내 마음에 앙금처럼 쌓인 미련을 깨끗하게 정리할 것이다. 나는 그런 

무거운 결심을 안고 쥴리앙의 연주회에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숙사 앞에 서서 지나다니

는 차를 보고 있는데 몇 분 뒤, 낯익은 레몬색 엔틱카가 내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미쉘 씨

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 차에 올라탔다. 그는 반가운 웃음과 함께 간단한 

안부를 물어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바쁘게 지냈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 학년 진급시험기간이지? 정말 정신없이 지냈겠구나.”

“…….”

나는 그냥 진급시험기간이기만 하면 이정도로 마음이 무겁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쉬어버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네?”

“아니, 예전에 나와 아비뇽 역에서 헤어질 때만 해도 제법 굳은 결심이 선 것처럼 떠났잖

아. 난 그래서 네가 오늘을 무척 고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래보이지가 않길래.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데 일부러 무리해서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나는 미쉘 씨에게 쥴리앙의 연인을 만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이내 접어버렸다. 이건 온전히 내 문제였고, 미쉘 씨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 남자

가 내게 말했던 것들이 거짓이 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요즘 무리해서 몸이 별

로 안 좋다고 대충 둘러댔다.

미쉘 씨는 운전을 하며 한 손으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를에서 이곳까지 운전하고 오

는 데 힘이 들었는지, 안경 속에 눈은 피로에 잔뜩 젖어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생각할 틈도 없이 묻고 싶었던 말을 툭하고 내뱉었다.

“애인 있어요?”

“푸흡-!”

미쉘 씨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커피를 마시다 사래가 들어서 몇 번이나 

힘겹게 콜록거렸다. 기침이 멎지 않아 연신 가슴을 치다가 간신히 멎고 나서야 그는 거칠

어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고 그래? 게다가 그런 시선으로.”

“그냥 예전부터 궁금해서 별 뜻 없이 묻는 건데요. 그런데 그런 시선이라니 무슨.”

“……아니, 턱을 괴고 얼굴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면서 갑자기 툭 던지는 말투로 그런 질문

을 하니까, 꼭 작업 거는 호스트 같잖아.”

“……너무하는데요, 그 말. 안 그래도 방금 나오면서 그런 생각 하고 있었는데.”

“하핫, 미안. 하지만 넌 가끔씩 무방비한 데가 있어, 확실히.”

가벼운 농담과 함께 그와의 대화는 한층 격의 없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뭐, 됐어요. 그나저나 예전에 게이 바에 간 걸 보면, 역시 애인이 없으신 건가요?”

“……글쎄, 몸은 솔로인데 마음은 솔로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 그래요?”

“예전에 헤어진 한 녀석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거든.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이리저

리 찾고는 있지만 녀석은 완전히 종적을 감춰버렸어. 그를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도 모른다

고만 하고……. 아마도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준 상처가 너무 커서인지 더 이

상 나와 마주치고 싶지도 않나 봐.”

“…….”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게 된 아를은……내가 자원해서 간 거였어.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떤 남자와의 위험한 관계가 비틀려 버려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거든. 혼

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어. ……하지만 그 결정은 의도치 않게도 진짜 파국이 무엇인지 깨

닫게 해주었지…….”

“…….”

나는 미쉘 씨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방금 

말했던 그 사건이 내가 헤어질 때쯤 보았던 쥴리앙과 닮은 미소의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어쨌든 쥴리앙에겐 이번 기회에 내게서 독립하라는 명분하에 녀석을 떼어놓았지만……

어쩌면 나 역시 내 이기심 때문에 녀석을 버린 건지도 몰라.”

“……죄책감 가질 건 없다고 봐요. 쥴리앙은 아직도 당신을 가장 믿고 따르잖아요.”

“그래,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해…….”

“…….”

차 안에서의 대화는 그렇게 무거운 공기와 함께 종료되었다.

*

  우리는 곧 쥴리앙의 공연이 열리는 시떼 드 라 뮈지끄Cite de la Musique라는 콘서트홀

에 도착했다. 정문 쪽에선 함께 들어가기로 했던 까트린느와 롤리타가 먼저 와서 기다리

고 있었다. 그녀들을 오랜만에 본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미쉘 씨의 팔을 잡아끌고 그녀들 

앞으로 향했다. 까트린느는 심플한 디자인의 진청색 드레스에 프린팅이 된 핑크색 스카프

를 매고 있었고, 롤리타는 가슴에 프릴장식이 달린 적갈색의 짧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

었다. 둘이 함께 차려입은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나는 그렇게 서둘러 그녀들의 앞으

로 걸어와 다정하게 비쥬를 나눴다.

“아, 오랜만이야. 까트린느, 롤리타. 오늘 정말 둘 다 예뻐 보여.”

“너야말로 정장이 의외로 잘 어울리는데? 그러고 보니 지노가 정장 입은 거 처음 본 것 같

네.”

비쥬를 마치자 롤리타가 손을 잡으며 위아래로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처

음 보는 인형을 구경하듯이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나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

러워 애정 어린 눈길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귀여운 아기고양이 같은 느낌

이다.

“아, 아직 소개하지 않았지? 이쪽은 미쉘 오르로제 씨. 얘기했다시피 쥴리앙의 형이야.”

나는 뒤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쉘 씨를 앞으로 데려와 인사시켰다. 미쉘 씨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표정은 아마도 쥴리앙은 편지에 까트린느

도, 롤리타도 적어서 익히 알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쉘……?”

“안녕하세요, 미쉘 오르로제라고 합니다.”

미쉘 씨가 먼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네자, 까트린느는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악수를 받았다.

“……아, 네. 저는 까트린느 랑베르라고 해요, 이쪽은 제 애인 롤리타 밀랑이고요.”

“반가워요, 미쉘. 그런데……쥴리앙과 정말 많이 닮았네요.”

“요즘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미쉘 씨는 롤리타의 말에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빙긋 웃어 보였다. 나는 그 웃음에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미쉘 씨와 처음 만난 날 그에게 저질렀던 추태가 떠

올라서 마음 한쪽이 무언가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롤리타와 까트린느는 모두 마

치 쥴리앙의 유령이라도 보는 것처럼 미쉘 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곧 우리 넷은 그렇게 잠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장내로 들어갔다. 좌석은 이미 많은 사

람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미쉘 씨는 먼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아있었고, 나는 까트

린느와 롤리타의 자리까지 에스코트해주기 위해 가장 앞줄에 왔다. 그녀들이 앉은 자리의 

옆 좌석은 아마 오늘 저녁 단 하나의 빈 좌석으로 남겨질 것이다.

“……대답이 뻔할 거라는 거 알고는 있지만, 역시 우리랑 같이 앉지 않을 거야?”

“원래 같이 앉기로 약속도 한데다가……다른 일도 좀 있고…….”

“다른 일이라니, 무슨?”

“…….”

“네가 오늘 앉을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봤을 때, 쥴리앙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미안.”

“나한테 미안해할 건 없지.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게다가 네가 앉을 자리

가 그렇게 안 보이는 곳도 아니니까 혹여나 쥴리앙의 시선을 피할 생각이라면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만 알아둬.”

“…….” 

까트린느는 약간 뾰로통한 목소리로 팔짱을 끼며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하지만 그녀

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이미 마음먹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쥴리앙의 연인

이란 사람이 의식되었던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자리에 앉기를 망설이게 하는 건 그 

자리에 쥴리앙이 나를 초대한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미쉘-쥴리앙-을 

기억하는 그녀들과 같은 친구의 존재로서 불러준 거라면, 나는 더더욱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우호적인 상태로 여기까지 녀석을 찾아온 게 아니었다. 

끝낼 거라면 확실하게 극단에 서서 모든 고통을 한 번에 받아들이고 깨끗하게 마음을 접

기 위해 온 것이었다. 타오르는 백열등 전구에 곤두박질 치러가는 한 마리의 부나비와 같

았다. 이 연주회를 찾아온 나의 심정은.

나는 미쉘 씨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자리는 무대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객석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비교적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눈앞

에 펼쳐진 자줏빛 커튼의 주름을 바라보다가 문득 로비에서 가져온 팸플릿이 생각나 그것

을 펴보았다. 연주회의 제목은 「Le Mirage」였다. 신기루, 예전에 썼던 그의 성(姓)이었

다. 그것을 연주회의 제목으로 쓰다니,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미쉘이 연주했던 곡도 미라쥬라는 제목을 가진 곡이었다. 팸플릿에 나온 쥴리앙의 사진을 

매만져보았다. 이젠 만질 수 없는 사람. 그야말로 그는 이제 내게 있어서 신기루가 되어버

린 것이다. 성의없이 팸플릿을 뒤적이다가 이내 덮어버리고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 위에 

얹어진 손은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고 있었다. 미쉘 씨는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곤 웃으

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긴장되니? 손까지 차가워졌구나.”

“아……그냥, 좀 진정이 되질 않아서요.”

“기분이 어때?”

“잘……모르겠어요. 지금은…….”

“여자든 남자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모두 아름다워. 자신의 진정한 모습

을 타인을 통해서 깨닫고 찾아가게 된다고나 할까.”

“…….”

가끔씩 미쉘 씨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나는 항상 뭐라 대꾸하

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공연 시작을 알리는 멜로디가 울렸다. 이윽고 조명이 꺼지더니 커튼 안에서 미약한 피아

노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군중을 사로잡는 멜로디에 나 역시 머릿속에서조

차 침묵을 하고 넓은 무대를 덮고 있던 자줏빛 커튼이 물결처럼 주름이 잡히며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걷힌 커튼 뒤에선 검은색 그랜드피아노와 그 앞에 앉아있는 다갈

색 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가 조명에 강렬하게 드러났다. 내가 앉은 쪽과 반

대편 무대에 있는 터라 멀어서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예전에 쥴리앙의 

연인이라 말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나는 그의 손가락에서 휘감겨지듯 빠져나오는 멜로디

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렇게 내 결심을 비틀려 들던 남자는 쥴리앙

의 연인인 동시에 같은 연주자였던 것이다.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재회하게 된 그 남자

는 진지한 표정으로 쥴리앙의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처럼 그것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애잔한 멜로디는 내 기억 속의 무언가를 아

릿한 고통과 함께 끄집어내고 있었다.

알고 있다, 이 익숙한 멜로디를. Benjamin 앨범의 1번 트랙, 「무아Moi」였다. 가장 아름

다운 선율이면서도 그 멜로디 속에 배어있는 슬픔이 진하게 묻어져 나온다고 생각하는 

곡. 그와 처음 접촉한 곡, 무아.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외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나와 같은. 눈을 감고 나직하게 멜로디를 마음속으

로 따라하고 있는데, 이윽고 어두운 반대편에 조명이 천천히 부드럽게 비춰졌다. 그러자 

그곳에선 상아색 그랜드 피아노와 그 앞에 앉아있는 흰색 정장의 어떤 남자가 조명에 눈부

시게 드러났다. 조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동시에 자신의 연인이 깐 멜로디의 베이스

에 맞춰, 물에 퉁길 듯 영롱한 멜로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천사

처럼 하얀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그 존재에 관객들은 살짝 술렁이고 있었다. 쥴리앙은 

나와 가까운 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서 그를 볼 수 있었지만, 그는 내 쪽을 등지

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얀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그의 

표정은 꿈을 꾸듯 눈을 감은 채 나직하게 미소 짓고 있었고, 그 모습은 내가 지금껏 봐온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쥴리앙의 흰색 피아노는 검은 피아노

에 비해 좀 더 가볍게 조율한 음색이라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두 개

의 조명 아래 두 피아노가 한 소절을 끝내자, 이윽고 무대 안쪽에서 바이올린과 첼로의 연

주가 뒤따랐고, 곧이어 다른 악기가 이어졌다.

연주회를 열면서 편곡을 한 「무아Moi」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바이올린 소리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첼로의 밑바탕 음색이 짙게 깔려있어, 그 어느 때 들었을 때보

다 더욱 우울하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곡이 절정에 달하며 푸른빛으로 전체 조명이 들어왔

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들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꺼풀 속에 숨겨져 있던 보석은 어째

서인지 내 눈엔 곧 흘러내릴 구슬처럼 그 어느 때보다 푸르게 젖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

든 관객은 그 아름다운 선율과 무대에 압도되어 연주에 빨려 들어갔다.

첫 곡이 끝나자 그가 무대 앞으로 인사하러 나왔다. 나는 언제인지 모르게 찔끔 나온 눈물

을 닦고 그의 음악을 흠모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걸어 나올 때 그의 시선

은 또렷하게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이 닿은 곳이 분명 나를 

초대한 그 좌석이라는 걸. 쥴리앙은 주인 없는 좌석을 한참이나 되짚어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지그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

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쥴리앙은 곧 준비된 마이크에 손을 

갖다 대고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쥴리앙 오르로제입니다.”

홀에 퍼지는 그 매력적인 목소리에 눈에 띄게 많은 좌석을 차지하고 있던 젊은 층의 아가

씨들과 소녀들이 꺅꺅하며 소리를 질렀다. 쥴리앙은 전날 공연에서 겪은 일인지 태연하게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우선 제 보잘것없는 연주회에 찾아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빠리에선 이틀뿐

인 공연이라 오늘이 빠리에서의 마지막 공연인데요, 앞으로 1년여 동안 프랑스 지방뿐만 

아니라 유럽 대도시를 돌 계획입니다. ……요즘은 예전 일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벤자민이라는 가명으로 음반을 냈을 때 말입니다. 충동적으로 낸 음반이었는데 많은 분들

이 저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해하셔서 저 또한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

실 그때 음반을 냈을 땐 제 존재를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밝히리라고는 저조차도 미처 생

각지도 않았습니다. 음반을 낸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도 한 적도 있었습니다만……저는 이

것으로 인해 잃은 것보단 얻은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자리에서 여러분과 만날 

수도 있게 되었고, 저 자신과 남은 생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 

……특별한 인연도 만났고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어째서 거의 1년이 다 되

어서야 밝혔는지. 할 말은 많지만 결국 한가지로 줄일 수가 있겠군요. 행복해지고 싶어서

입니다. 이기적인 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제 행복을 찾고 싶어서 이렇게 나서게 된 것입

니다.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는 있으니까요. …말주변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네

요. 아무쪼록 이 연주회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여러분 모두가 삶의 행복을 느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갈채가 쏟아졌고, 쥴리앙은 웃음으로 화답하며 이내 뒤돌아 퓨전 오케

스트라 가운데 지휘자의 자리에 섰다. 그의 자리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연주자가 상아

색 피아노 앞에 쥴리앙 대신 앉았다. 쥴리앙의 연인은 지휘석에 서 있는 쥴리앙을 바라보

며 다음 곡을 위해 손가락을 풀고 있었다. 나는 그리 멀지도 않은 무대와 관객석사이가 그

렇게 한없이 멀어 보인 적이 없었다. 그 두 사람과 수백 명의 사람 속의 나 사이에서 뭔가 

끼어들 수 없는 차단된 세계를 느꼈다. 쥴리앙의 연인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 남자

는 그냥 보았을 땐 조금 딱딱해 보이는 이미지였지만 무대에 섰을 때의 남자는, 연주로서 

자신이 숨겨놓았던 매력을 그대로 발산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돌연 팸플릿을 꺼내 남자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아까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그 남자는 사진과 함께 제법 비중있게 소

개되어 있었다. 이안 스미스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계 남자는 사실 쥴리앙과 함께 뮈즈 음

반사에 발탁된 뮤지션으로, 여기선 서브피아노를 맡고 있지만 본래는 프로듀싱 쪽을 전문

으로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벤자민의 음반도 그가 맡았다는 말에 그들의 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쥴리앙의 연인은 그 못지않게 대단한 사

람이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나는 그저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유학생일 뿐이었

다.

쥴리앙의 가벼운 손짓을 시작으로, 곧이어 두 번째 곡인 「베베Bebe」가 연주되었다. 그

와 함께 개선문을 간 뒤, 소설 「개선문」의 주인공 라비크처럼 후미지고 거친 골목 벽을 

손끝의 감촉으로 스치며 눈을 감고 걸었던, 그때 그 태아의 그림을 보고 어렴풋이 벤자민

의 음악과  닮았다고 느꼈던 그 멜로디. 나른하면서도 생(生)의 지순한 기쁨이 넘치는 이 

멜로디는 마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들었던 자장가라는 느낌이 들 정도

로 너무나 포근하게 내 영혼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렇게 연주회 내내 그의 음악에 녹록하

게 배어있는 그와 나 사이에서 공존했던 추억을 한 곡, 한 곡 되뇌어 보았다. 음악에 너무

도 몰두 되어 있는 바람에 사이사이에 짧게 말한 그의 말이 뭐였는지 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음악의 주인인 남자에게 빠져있는 것이다.

쥴리앙은 정말 천재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서 다시금 

자신의 음악적 재능과 곡의 해석력에 특별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감동스러운 건 처음 들어보는 곡임에도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사람의 가장 본능과 연결되

어 그곳을 울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범인(凡人)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쥴리앙, 너는 누구에게든 사랑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을 숨겨왔었

구나. 다행이야. 너는 이제 외롭지 않겠구나. 

그렇게 재회와 또 다른 작별의 의미를 가진 연주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지막 곡 「라

망뜨 L’amante」의 차례가 오자 쥴리앙이 지휘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퓨전 오케스트라 연

주자들은 조용히 일어나 악기와 악보대, 의자를 들고 무대에서 나갔다. 그리곤 각각 무대

의 가에 있던 흰색 피아노와 검은색 피아노가 마주보는 형태로 스태프들에 의해 가운데로 

모아졌다. 

잠시 동안의 어수선함 끝에, 쥴리앙과 그의 애인이 마주보며 앉아 눈짓을 하더니 편곡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눈을 맞추며 시작한 그들의 연주는, 서로 한 옥타브 다른 같은 음

을 엇갈리게 누르면서 그것을 점차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 음의 교차는 점점 더 빨라지고, 

격렬해졌다. 두근거리는 마음, 서로를 향하고 있는, 그렇게 조금씩 좁혀져 가는 감정과 감

정의 틈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곡의 시작은 두근거림 후 마치 서로를 탐색하듯 원

곡보다 느리고 반음이 많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연주가 극에 다다를수록 점점 더 서로의 

다른 음색을 강하게 끌고 있었다. 미칠 듯한 서로간의 소유욕,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뜨거운 정염과 탐닉, 탐애. 그들의 둘만의 대화 같은 연주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덤불 속으로 추락해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연주하는 사이사이 친근하

게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은, 점점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건지, 서로에게 몰두하고 있는 건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절정은 어떻게 보

면 정사(情事)의 오르가즘처럼 아찔하게 온몸의 감각을 극에 올리는 것처럼 짜릿했고, 사

나운 맹수들이 서로의 목덜미를 물고 사정없이 도리질 치는 것처럼 잔혹하면서도 탐미적

이었다.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격렬하게 원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흐릿하게나마 쥐고 있었던 희망은 그들이 내뿜는 선율 속에 녹아 버렸다. 나는 

저 남자에게서 쥴리앙을 빼앗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절대적으로 자리 잡았다. 저렇게 서로에

게 도움이 되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게 너무도 질투가 났다. 나 같은 건, 

이안이란 남자에 의해 벌써 지워졌으리라는 패배감이 밀려왔다. 조금이나마 희망을 남겨

두려 노력했던 내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초라한 껍데기만 남은 채로 그 자리에 버티고 앉

아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라망뜨를 듣는 기분은 정말이지 지옥의 기저로 추락하는 것과 비

슷했다.

그렇게 예정되었던 모든 곡이 끝났다.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기립박수에 쥴리앙은 커튼콜

을 받아 다시 한 번 무대에 나타났다. 그는 깊숙이 인사를 하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 곡은 어떤 한 사람을 위해 처음 관객들 앞에서 연주했던 미발표곡입니다. 사실 오늘 

그 사람을 초대하는 티켓을 보냈는데……그 빈자리를 보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요. 야속하

기도 하고,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 앙코르곡은 다른 걸로 할까 했는데, 

그 사람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 곡을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목은「르 미라쥬 Le Mirage」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자신의 피아노 앞으로 갔다. 어느덧 무대는 그의 상아색 피아

노 외의 모든 것은 치워진 채 흰 조명으로 그 모습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

로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곧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다시 그의 손가락에서 

빚어진 그 곡은, 그 어떤 곡보다도 절절하게 내 심장을 울리며 떠올리려 해도 언제나 뜬구

름 같기만 하던 그의 존재를 내 감각 하나하나에 각성시켰다. 나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위

로해 주었던, 나만을 위해 기타를 연주하고 피아노를 쳐 주던, 뜨거운 체온으로 나를 거세

게 품에 안던 그 손이 닿았던 곳을 떠올렸다. 그 기억이 스쳐지나간 내 몸 곳곳은 욱신거리

며 곧 모든 감각을 되살렸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던 벤자민이라는 익명의 뮤지션과 한 청

자로서 만난 곡이 아니라 미쉘, 쥴리앙이라는 하나의 인격체로 그를 받아들이고 듣게 된 

곡이라서 다른 곡과는 다른 특별함을 띤 것이리라. 

곡이 끝났다. 사람들은 곡이 끝나자 무대의 한 남자를 향해 폭발하듯 터지는 갈채를 보냈

다. 이전에 들어왔던 장중한 오케스트라도 아니고 라망뜨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곡도 아

닌데,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광하고 있었다. 아마도 애틋하게 울려 퍼지던 쥴리앙의 

단독 연주가, 청자들의 마음에 신기루처럼 스며들어 심금을 울린 것 같았다. 심지어는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 까지 했다.

나 역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결코 그 곡이 아름답다고 느껴서나, 감동적이어서가 아니었

다. 그 연주가 쥴리앙이 내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

상 미쉘 미라쥬라는 허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너를 사랑했던 남자는 이제 아무렇지 않

게 너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추억할 수 있다는 것에 눈물이 나려고 했던 것이다. 쥴리앙은 

인사를 하고 잠시 들어갔다가 모든 연주자들과 함께 나와 인사를 하러 나왔다. 그는 자신

의 연인과 나란히 서로의 어깨를 두르고 무대 중앙에 서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제 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패배의식의 극단으

로 치미는 순간이었다. 이젠 정말 이 뿌리 깊은 빌어먹을 감정을 뽑아버려야 할 때라는 걸 

인식했다.

“지노, 지노,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야?”

미쉘 씨는 내 어깨를 감싸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애써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기계처럼 몇 번이나 고갯짓을 했다. 나는 한참이나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

만 남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는 나를 가장 탐미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뿌리친 

것이다. 이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

서. 우연히 갖게 된 그와의 특별한 추억에 감사하며, 이젠 더 이상 그 허상에 기대하지 않

고 기존의 평범했던 삶을 연장해가야 할 때였다. 나는 그의 실물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마지

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다리

에 힘이 풀려서 두어 번 자리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미쉘 씨는 단번에 내 몸에 

팔을 두르고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젖은 이마를 닦아주며 다급하게 말했다.

“일단 좀 복도의 벤치로라도 나가자. 상태가 안 좋아.”

미쉘은 나를 부축한 채로 그대로 가까운 출구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마지막 미련이라도 

남은 것처럼 커튼이 내려오는 무대를 바라보려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내 눈은 무대 위의 쥴리앙의 눈과 정확히 마주쳐

버렸다. 공연 내내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등지고 외면했던 눈동자

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묻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

를 향한 그의 시선은, 그를 향한 나의 시선은, 자줏빛 커튼이 시야를 모두 덮어버릴 때까

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렇게 서로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심장이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장을 뜯긴 초식동물의 죽은 피처럼.

영혼은 두 개지만 생각은 하나이며, 심장은 두개지만 하나로 고동치네.

-E.F.J. 뭉크-벨링하우젠E.F.J. Munch Bellinghousen-

20. 심장이 전하는 언어의 색

연주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례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미쉘 씨에게 기대어 출구 쪽에 붙어있는 간이의자에 앉아있었다. 망연자실

하게 풀어진 얼굴은 눈도 끔뻑하지 않았다. 까트린느와 롤리타가 공연장에서 나와 우리 쪽

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예상치 못한 모습에 두 사람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

지만, 미쉘 씨는 말없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녀

들은 미쉘 씨의 신호에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

나 돌아보다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차츰 빠져나가자 우리의 공간은 외부세계로부터 차단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로

비는 여전히 사람들의 소리로 웅성거렸고, 우리가 앉아있는 복도엔 스태프들만이 몇 번 왔

다 갔다 할 뿐 아무도 없었다. 열어젖혀진 공연장의 출입구에선 공연의 열기가 여전히 생

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당신도…봤나요…?”

“…….”

“쥴리앙이…, 쥴리앙이 절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그 눈으로 분명히 날…….”

“그래, 나도 알아….”

“날 보더니…그 표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렸어요. 마치 이곳에 없어야 할 사람이 있

는 걸 본 것처럼……. 미쉘, 저, 저는……!”

“진정해, 지노. 진정해…….”

나는 반쯤 미쳐버린 상태였다. 내 머릿속엔 여전히 커튼이 닫히기 직전의 녀석의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녀석은 어째서 나를 보며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그 표정의 의미

를 알 수 없었다. 왜 네가 여기 있느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미

쉘 씨의 옷깃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자 가슴에 안겨 있는 

게 꼴불견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지금 이 순간 신경 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적

어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차분한 온기와 고른 흉부의 오르내림은 어깨를 다독이는 손과 함

께 일말의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몸엔 희미한 스킨냄새가 배어있었다. 미쉘 씨가 말

했다.

“…지금은 너무 흥분한 것 같다. 일단은 기숙사에 바래다줄 테니 돌아가서 푹 자도록 해. 

다음 일은 내일 생각하고. 원한다면 나중에라도 그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나는 그의 품에서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만이라도 스스로에게 도망

치는 것을 허락하자. 딱 오늘 하루만. 만약 지금 그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지 나조차도 예상

할 수 없으니까.

풀려버린 다리 때문에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그곳을 벗어나왔다. 아까 겪은 일에 대한 

생각으로 지끈지끈 울려오는 두통을 애써 참아가며 가늘게 뜬 눈으로 빠리의 야경을 망연

하게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공기는 머릿속까지 파고들며 그 순간의 충격을 더욱 선명하게 

되새기는 것 같았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나를 곧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그 수천가지 감정이 섞인 듯

한 눈동자는, 뭐가 그렇게도 내게 많이 묻고 싶었던 걸까. 오히려 묻고 싶은 게 많은 건 나

인데. 오히려 그런…, 그런 시선을 던져야 하는 건 나인데……. 아니, 어쩌면 사실은 나 또

한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거의 다다를 무렵 미쉘 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 한숨을 쉬며 바라보다

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무거운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

[미쉘!]

“…….”

그 격앙된 목소리는 분명 쥴리앙이었다. 얼마나 크게 소릴 지른 건지 내 귀까지 들려왔

다. 내가 놀란 눈으로 바르르 떨면서 미쉘 씨를 바라보자 그는 내게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

으로 손을 내저으며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쥴리앙, 미안한데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겠다. 다음에 서로 진정이 되면…, 개수작이라

니,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일단 진정하고 내가 다시 연락 줄 테니까 나중에 

보자.”

미쉘 씨는 그대로 휴대폰을 닫고 전원을 꺼버렸다. 우리 사이엔 어색한 공기 속에 침묵만

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빨간 신호등에 차를 멈추고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너와 예전에 얘기했을 때, 네가 쥴리앙과 만날 의사가 있는 것 같아서 쥴리앙과 

연주회 끝나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었어. 쥴리앙도 너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걸 모르고 

받아들인 약속이었지. 공연이 끝나면 내가 먼저 쥴리앙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너와 만

나게 할 생각이었는데 뭔가 일이 크게 뒤틀려버린 것 같구나. 미리 말하면 녀석이 공연 전

에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였는데.”

“…….”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영겁 같은 침묵이 흘렀고, 어느덧 

차는 기숙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차가 멈춰서도 내가 아무 반응 없이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자 미쉘 씨는 어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아?”

“미쉘…….”

“그래, 말해봐.”

“지금…, 쥴리앙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뭐?”

“지금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사크레 쾨르 사원 앞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내 안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라고. 모든 것은 이미 확연하게 그 실체

를 드러냈다. 쥴리앙은 나 없이도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오직 나뿐일 것이다. 그 잔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또 도망쳐봤

자 내게 남는 것은 그 지긋지긋한 미련뿐이었다. 오늘 나는 그걸 전부 잊기 위해서 왔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건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었

다. 또다시 도망친다는 건 비겁한 짓이다. 당장은 마음이 편할지 몰라도 남는 것은 미련과 

후회뿐일 것이다. 쥴리앙에 대한 집착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 지저분한 감정의 부산물과 함

께 이대로 또다시 차가운 방에 남겨진다면, 나는 또다시 불안과 두려움, 의심, 도피, 분열

의 혼돈에 휩싸일 것이다. 한 걸음 조차 내딛기 두려운 칠흑 같은 어둠의 공포에서 혼자 남

겨져버리면, 어쩌면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극에 달한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노도(怒濤)의 끝에 매달려있는 조각배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아무리 무

력한 파도 앞이라 할지라도, 저항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노

를 놓지 않고 배를 저어가며 끝까지 발버둥 쳐봐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추잡하면서

도 아름다운 이유가 아니던가.

“……그래, 알았다.”

미쉘 씨는 내 확고부동한 의지가 담긴 말에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휴대폰을 켰다. 그는 조

용히 쥴리앙에게 내가 지금 만나고 싶어하니 원한다면 몽마르트르 쪽으로 오라는 말을 전

했다. 다시 움직이는 차 안에서 눈을 감은 나는 미사의 꿈을 꾸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말했다. 너 같은 거 사랑하다 죽어버리라고. 깊이 새겨진 그 주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미쉘 씨는 성당 앞의 계단이 시작되는 부근에 세워주었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가 시동

을 끄는 것을 보곤 조용히 창문을 두드렸다.

“먼저 가세요.”

“하지만…”

“지하철도 있고, 좀 걷고 싶기도 하니까요.”

“…….”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알았다며 다시 시동을 켰다. 나는 창가에 손을 얹은 채 

그에게 말했다.

“미쉘,”

“…왜?”

“고마워요.”

“…….”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난 좋은 사람이 아냐.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지.”

“…….”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나는 나 혼자만의 문제 때문에 쥴리앙을 버린 거나 마찬가

지야. 난 그런 녀석이야. 내 뜻을 위해서 남들이 희생된다 해도 돌보고 별로 신경쓰고 싶

지 않거든. ……어쨌든 갈게. 부디 넌 쥴리앙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면서 차를 몰았다. 나는 그곳에 멈춰선 채 차가 사라진 아득한 도

로의 끝을 바라보았다. 쥴리앙을 만나기 전, 올랐던 사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다시 밟으면

서 나는 그날을 추억했다. 이 성당 근처의 테르트르 광장에서 나는 그와 처음 만났다. 독특

한 그림들 사이로 몸을 움츠리고 있던 남자.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어린 청

년. 쥴리앙을 이해하고 나선 특별할 것 없이 생각해왔던 그 순간의 첫 만남마저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망대가 설치된 곳 옆에 서서 빠리라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가

로등을 따라 금빛 찬란한 불빛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켜가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내 마음을 고백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무슨 고민을 한다 해서 변하는 것이 있

을까. 변하는 것은 없다. 기대하는 것도 없다. 쥴리앙은 나 없이도 이제 행복할 수 있다. 그

의 재능 많은 연인과 함께. 이젠 그에 대한 내 감정만 마무리 지으면 모든 것을 온전히 과

거로 돌려버릴 수 있다. 누구 앞에서건 아무렇지 않게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

의 과거로. ……하지만 부디 그 감정의 정리가 너무 아프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모

르게 손목의 또 팔찌에 손을 가져가본다.

수많은 생각들의 범람으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 곁으로 다가오는 익숙한 

발걸음소리에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모든 상념과 궤변은 그대로 밀밭의 바람소리처럼 고

요하게 잦아들었다. ‘그 소리에 멈칫하다 돌아본다’라고 적힌 시나리오를 읽은 배우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역시 예정되어있었다는 듯,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슬픈 심해와 닮은, 너무나 그리웠던 푸른 눈동자, 너무나 

그리웠던 얼굴, 너무나 그리웠던 체향, 너무나 그리웠던……영혼. 이 사람이다. 내겐 역시 

이 사람 뿐이다. 그 순간엔 이런 생각들만이 머릿속에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자리 잡고 있

었다. 무슨 뻔한 로맨스영화의 한 장면 같군.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식 웃

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Bonsoir, Julien.”

그건 너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처음으로 서로 피하지 않고 맞닿은 순간의 언어. 네게 네 

진짜 이름을 처음으로 부른,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인사. 진정한 너를 향한 내 감정

의 가슴 떨리는 첫 고백.

주) Bonsoir : 봉스와. 저녁인사.

*

“……Bonsoir, Julien.”

“…….”

나의 뜻밖의 인사에 쥴리앙은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의 눈동자는 경미하게 흔들리

고 있었다. 나와 같이. 우리는 그렇게 약 2미터라는 어색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잠시 침묵 

속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몇 초 안되는 시간조차 천겁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에

게 서둘러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내뱉

고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 담고 있기조차 괴로운 이 말을 얼른 토해내고 싶

었다.

“저기, 나…!”

“미쉘을 어떻게 알지?”

내가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여는데, 그가 먼저 입술을 가늘게 비틀며 말했다. 나는 갑작스

런 뜬금없는 질문에 한껏 품었던 공기를 그대로 허무하게 내뱉어버렸다.

“…….”

“말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네게 말하고 싶은 게……”

“대답해. 내 형, 미쉘과는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

그의 눈은 이미 시퍼렇게 얼어붙은 채 날이 서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따위는 애초부

터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미쉘과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하게 이 자리에서 읊어대

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경멸스런 시선에 눈을 피하며 고개 돌린 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 친구야.”

“하, 친구! 그래, 친구였군. 정말 명쾌한 답변이야!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그래, 너는 네 

친구들과 하나같이 몸을 섞나보지?”

쥴리앙의 반응은 사실 전혀 생각해오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뒤틀린 언어에 

나는 잠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미사인가 뭔가 하는 그 일본 계집애도, 네가 예전에 말하던 그 잘난 친구가 아니었던가? 

근데 왜 나중엔 내 앞에서 사랑을 운운하며 정조를 지키려고 한 건데? 이젠 자기를 좋아하

던 옛 친구의 형까지 가로채서 친구랍시고 뒤를 대주는 건가?”

“……잠깐, 우리 이러지 말자. 나 알아. 미쉘 씨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예전부터…상처받

으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고. 그러니까 진심을 말해봐. 내가 어쩌길 바라서 이러

는 거야?”

“상처? 하핫, 웃기지 마. 너 따위가 뭐라고 나한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

“날 불쌍한 들개 취급하듯 지껄이는 입 닥치고 듣기나 해. 어쩌길 바라냐 물었지? ……그

래, 따지고 보면 예전엔 나도 네 친구 아니었나? 응? 말해봐, 그렇지? 옆에 있어줘서 고맙

다며? 내가 없었으면 심심했을 거라며? 네 심심풀이 상대라도 되어줬으니 그럼 나한테도 

빚을 진 게 있잖아, 근데 그때 왜 나는 거부했던 건데?”

“그게 아니라고 했잖아!”

“뭐가 아니야! 그렇게 미쉘의 애인 자리를 꿰차 앉아 무대 위에 내 모습을 계속 비웃고 앉

아있었으면서!”

“미쉘과 난 그런 사이가……!”

“그래, 재미있었나? 내가 그렇게 버둥거리는 것이? 이렇게 네 손바닥에서 놀아나면서 재

미를 줬으면 어디, 나도 한 번 그 잘난 친구 덕 좀 보자구!”

“……!”

쥴리앙은 갑자기 팔을 낚아채 단숨에 나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내가 그의 행동에 당황

해서 몸부림을 쳤으나 그의 커다란 손이 강하게 내 얼굴을 부여잡고 폭력 같은 입맞춤을 

했다. 그 차갑고 아릿한 입술에 몸서리를 쳤다. 나는 남자를 강하게 밀쳐내며 소리쳤다.

“……이것 놔!”

나는 있는 힘껏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나간 주먹은 그의 얼굴에 정통

으로 맞았고, 그의 몸은 비틀거리며 내 몸에서 떨어졌다. 쥴리앙은 입술 끝에 선혈을 머금

은 채 가격당한 턱을 매만져보더니, 곧 나를 향해 격노로 번득이는 눈동자를 치켜떴다. 보

기만 해도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은 눈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 안엔 짙은 슬픔이 깔려있었

다. 그는 찌릿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묻어나는 붉은 피를 확인하고는 이내 숨을 

거칠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너 따위가…, 너 따위… 이 더러운 남창 같은……!”

“……뭐?”

“남창이라고! 남자에게 몸을 파는 더러운 자식!”

“…….”

“…….”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해서 내가 들은 말을 되물었지만 쥴리앙은 눈 하나 깜빡

이지 않고 그 말을 내게 반복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쥴리앙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구나. 자기 감정표현에 서툴러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거라는 미쉘 씨의 말은, 단지 그

의 추측일 뿐이었다. 그는 그때 진심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껏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렇게 도피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지독히도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로 날 초대했을 때 그냥 응대했

어야 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녀석과 친구로 돌아간다는 건 이젠 내가 견디지 못할 

테니까. 쥴리앙은 내 표정을 보더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동안 흐른 침묵 속에선 언덕

에 부는 바람만이 소름끼치도록 스산하게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형

편없는 대화는 끝났다. 늦은 시간까지 언덕을 거닐던 시민들은 동양인, 아랍인, 구분할 것

도 없이 웃기지도 않는 게이들의 치정싸움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오

늘 밤 무분별하게 좆질 하는 남창으로 낙인찍혀 멍청한 녀석들의 전화 수다거리나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말이 너무도 충격이었는지 머릿속엔 온통 ‘남창’이라

는 단어로 가득 차 있었다. 수치심으로 이가 떨려왔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

을 상실하고 그대로 남자를 스쳐지나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욱신거리는 다리는 움직

일 때마다 어색함에 삐그덕거렸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욱 빠르게 발을 재촉했다. 나는 망설

임도 없이 뒤돌아 걷던 걸음을 갑자기 멈춰 섰다. 이대론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몸을 홱 돌렸다. 남자는 땅에 뿌리박힌 듯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한국말로 욕지거리라도 한가득 퍼부어야겠다는 생각

에 이렇게 소리쳤다.

“야, 이 나쁜 자식아! 너 정말 핵폐기물보다 못한 1급 저질이라는 거 알아? 내가 왜 너 같

은 것 때문에 그토록 가슴아파했는지 진짜 나 스스로가 이해가 안 간다! 너 같은 건 우주

에 갖다 버려도 처리 불가능한 쓰레기야! 넌 나보다도 이기적인 놈이라구, 알아?

그래, 나 원래 아는 것도 없고 이해력도 느려!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 느리지만 이젠 확실

히 알고 있다고! 널…, 널 사랑한다는 걸 말이야! 사랑 한다고! 너 때문에 여기, 여기 이 심

장이! 너무너무 아파서…, 아파서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너무나 답답해서,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온 건데… 꼭 이렇게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어야 했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모두 망쳐버렸어! 너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 있는 

앞에서 한국인 이미지 상하게 하는 쪽팔리는 욕지거리나 하고, 결국은… 결국은 네가 듣지

도 못하는 등신 같은 고백만 하게 됐잖아…… 이 나쁜 놈, 바보…멍청이 같은……”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던 욕설들은 어느덧 흐느낌 섞인 눈물로 덮여버렸다. 나는 이대로 조

금만 더 있으면 그 녀석이 보는 앞에서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대로 뒤돌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힘이 풀려버린 다리와 눈물로 엉성하게 가려진 시야 때문에 나는 

내려가다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그렇게 연속된 계단의 끝까지 거의 다 다다랐을 무

렵 나는 뒤에서 희미하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

자 멀리서 쥴리앙이 내가 아직 시야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노!”

“……!”

나는 나를 좇아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보곤, 황급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이 순

간적으로 머릿속을 지배해서인지도 모른다. 다만 붙잡혀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노, 잠깐! 멈추라고!”

뒤에서 애타게 붙잡는 목소리는 내 다리의 움직임을 더욱 재촉했다. 뒤를 돌아보자, 그는 

이미 계단을 다 내려와 평지를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조여 오는 공포에 몸서리를 치

며 더딘 발을 촉박하게 움직였다. 나는 좁은 골목들이 나오자, 재빨리 그 속에 들어가 달렸

고, 그 골목이 끝나면, 또 다른 방향으로 꺾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이나 어지럽게 미로 같은 골목을 파헤치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 몸

을 숨겼다. 그리고 건물에 기댄 채 부족한 산소를 거칠게 폐부로 집어삼키며 숨을 골랐다. 

나는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귀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후미진 동네의 주변은 조용했고, 간

혹 지나가는 차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

는 마음에 고개를 빼쭉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번뜩이는 도둑

고양이들만이 쓰레기통 곁에서 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대충 따돌린 것 같았다. 그제

야 마음이 놓인 듯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미

친 듯이 빠리의 거리를 헤집으며 뛰어다녔더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늘한 바람에 눈물은 따끔따끔하게 볼에 말라붙었고, 여전히 숨은 가누어지

질 않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그렇게 몇 번이나 말해놓고선, 나를 붙잡는 그에게서 도망치

고 말았다. 처음 만난 날, 또 만날 수 있겠냐며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한 이후 나를 다시 붙

잡은 쥴리앙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혹독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

난 상황에서, 나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게 또 붙잡혔다가는……나는 또 한동안 

남자의 신기루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 허상에 또 헛된 기대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

젠 끝내야 했다.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또다시 알 수 없는 궁금증이 고개 들

기 시작한다. 왜……쥴리앙은 내게 키스를 하려 한 것일까. 단순히 나를 놀리려고 했던 것

일까. 그는 왜 날 보자마자 미쉘 씨와의 관계에 대해 캐물었던 것일까. 그리고 친구라는 말

에, 어째서 그는 그렇게 조소를 터뜨리며 나를 도발했을까. 분명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기

는 했지만 내가 그 말을 하기 전만 해도 그는 평정의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두려움과 불

안에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젠 그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내게 그토록 관심

을 둘 필요도, 만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왜……? 질문은 궤변처럼 겉돌기 시작한

다. 나를 에워싼 채 조심스레 쌓아올렸던 돌담은 가랑비에 젖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에선 미사의 목소리가 망령처럼 울리고 있다. 너 같은 거 사랑하다 죽어버

려. 사랑하다 죽어버려.

그 때문일까.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그를 만나면 반드시 하겠다

던 사랑의 고백도, 쥴리앙의 공연을 보고나면 접겠다던 마음도, 마지막으로 나를 붙잡은 

것을 뿌리친 것도. 모두 나 혼자 제멋대로 헝클어뜨리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서, 이젠 미

약하게 남아있던 의지마저 전부 다 공황으로 헤집어진 무질서상태가 되어버렸다. 죽어버

릴까. 나 따위, 그냥 이대로 죽어버릴까. 정말 나는 뭐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것 같

다. 마치 잘못을 수습하려 손을 뻗으면 또다시 컵을 엎어버리는 어린애 같다. 다른 일에 이

렇게 실수를 번복하지도 않으면서, 그에 대한 마음 하나도 제대로 다잡지 못하고 스스로

를 망가뜨리고 있구나. 나, 정말 이대로…

“……!”

누군가가 무릎 위에 힘없이 뻗쳐진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둥글게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

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타인의 손에 움찔하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

지만, 그 손의 감촉과 크기, 온기로부터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단단히 붙잡

은 손의 주인을 예상하고 붙잡힌 손에 간신이 쥐고 있는 안경을 그대로 떨어뜨려버렸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잡힌 팔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부정맥을 일으켜 거칠게 격동하는 파장이 몸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

처럼.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마주앉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처박고 있는 얼굴을 

부드럽게 쥐어 올렸다. 나는 그 손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쥴리앙은 마른침을 삼키며 

차오르는 숨을 고르면서도,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붉은 가로등이 반쯤 

비치고 있는 얼굴은 마치 피카소의 그림처럼 이중적으로 보였다. 

그는 흐르는 침묵 속에 천천히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 선을 몇 번 어루만지더니, 이내 눈

을 감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은 그가 남기고 간 오팔 귀걸이에 스치고, 콧날로 볼

을 쓸고 내려와 떨어지는 눈물에 스쳤다. 식어버린 볼에 그 뜨거운 입술이 닿자 나는 데인 

것처럼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생경한 열기가 몸에 닿는 순간, 허공을 떠돌던 의식이 현실

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나운 짐승처럼 내 몸과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쥴리앙

과는 동떨어진 모습에, 나는 마치 악마의 꾐에 빠진 것 같은 위화감을 느끼고 그를 밀쳐내

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는 밀쳐 내려던 내 손을 굳게 붙잡았다. 그 더운 손에 놀라 고개를 

들더니 아무 말 없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댔다. 

“…….”

“…….”

쿵. 쿵. 쿵. 쿵. 나는 그렇게 맞닿은 손바닥에서 그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심장처럼 

거칠게 고동치는 남자의 심장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반대쪽 손을 뻗어 천천히 

내 가슴에 얹었다. 쥴리앙 또한 손바닥에서 나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곧 그의 푸른 눈동자

가 웃어 보였다. 행복한 눈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보고 싶었던, 순수한 기쁨만을 담고 있

는 웃음이었다.

그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로 상처주고, 말로 상처받았다. 타인의 진심을 

자신의 편견과 오해, 의심으로 가리게 하는 말 따윈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길들여진 심장의 격렬한 고동, 그것이면 충분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나는 그

대로 눈을 감았다. 이 순간 내뱉어진 눈물이 내 마지막 정념(情念)의 눈물이기를 바라며.

잠시 후 나는 쥴리앙의 손에 이끌려 그의 차에 탔다. 차 안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진한 키

스에 나 역시 정신없이 몰두하다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갔다가는 정말 위험한 수

준이었다. 쥴리앙은 더 이상 덤비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어

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구태여 묻지 않았다. 지금은 이 달뜬 두 개의 

숨결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차를 타고 한참 뒤에서야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자각했다. 팔찌. 쓸데없는 미신 때문

에 차마 벗지 못했던, 빨간색과 파란색 구슬이 맞닿아 있던 가죽 팔찌는 어디에 떨어뜨린 

건지 손목에서 사라져있었다. 나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게 습관이 되

어버렸는지, 그것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왼쪽 손목은 그대로 헐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

다. 방금 벌어진 사건과 동시에 사라진 팔찌 때문에 마음이 쓰여 불안해하고 있을 때였다. 

쥴리앙은 어느새 작은 차고에 차를 세웠다. 나는 이전까지 팔찌에 정신이 팔려 이곳이 어

디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차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우리 사이

의 갈등이 처음 빚어지기 시작했던 곳. 그곳은 쥴리앙의 집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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