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과거로부터 온 발자국의 색
얼마 뒤 미쉘 오르로제 씨가 레몬색 엔틱카를 타고 아를 역 앞으로 마중 나왔다. 급히 온
건지 의사 가운을 그대로 걸친 채였다.
“늦어서 미안. 점심시간 맞춰서 빠져나오느라.”
“…….”
미쉘 씨는 오늘 일요일 담당근무라고 했다. 갑작스런 나의 연락에 마중 나온 그는 조금 당
황한 것 같아 보였다.
“오기 하루 전에라도 미리 연락 좀 해주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진 없고. 어쨌든 잘 왔어. 일단은 내 집에 데려다 줄 테니 먼저 가
서 쉬고 있도록 해. 나는 5시쯤에나 퇴근 할 것 같거든.”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범하고 아담한 1층 주택이었다. 그는 내게 작은 방 하나를 내어
주고 그곳에 짐을 풀도록 했다.
“손님용으로 쓰이는 방인데 보통은 거의 쥴리앙이 왔을 때 쓰고 있어.”
“…….”
미쉘 씨는 내게 요깃거리를 챙겨준 뒤 곧바로 병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거실에 멍하
니 서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로 축 처진 몸을 쓰러뜨렸다. 어쩌다 여
기까지 와버린 걸까. 충동적으로, 하지만 이젠 분명히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녀석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 녀석에게 한 번도 묘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
다는 말, 그 지독한 거짓말들에 대해 나는 아직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를 찾아갔을 때에
도 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말한다 한들 소용없는 짓일까? 소용없어도 상관없
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었다.
녀석을 더 깊이,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내 진심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었다. 나는 짙푸른 색의 침대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을 깊이 들이켰다. 마음의 빈 곳
을 채워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거기엔 미미하게 쥴리앙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 그리
운 냄새는 그동안 거짓말과 부정에 중독되어 있던 폐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어젯밤 나는 호숫가에 뜬 그믐달을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릴 뻔했었다. 깨어있는 정신이
위화감을 느끼고 다급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코에 닿는 보드라운 후각은 또렷하
게 어젯밤 감각을 일깨웠다. 달빛을 보며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쥴리앙의 머리카락이었
다. 그 아련한 달빛과 쥴리앙의 금발이 너무도 닮았다고 느꼈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망각하려 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도 참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긴장이 풀린 건지 나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뜬 건 미쉘 씨가 돌아와 나를
흔들어 깨울 때였다. 생각보다 오래 잔건지 벌써 여섯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저녁식
사로 간단하게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억지로 전부 집어삼켰
다. 마음이 초조했다. 우리 두 사람은 식사 중에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사랑
을 거절당한 남자와 그 상대의 양아버지 겸 이복형. 그 이상한 관계로 재회한 식탁 앞에서
가볍게 주고받을만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묘한 신경전은 거실 소파에서 함께 커피를 마실 때부터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
는 진갈색 액체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은 의외였어.”
“……뭐가요?”
“네가 날 찾아오겠다고 연락한 거 말야.”
“……제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솔직히 예상 밖이었어. 명함을 받았을 때 네 표정은 마치 가다가 쓰레기통에 구겨 던져
버릴 것처럼 보였거든.”
“…….”
“뭐, 일단은 내 바람을 전하고 싶어서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거였지만, 사실 기대는
안 하고 있었어. …뭐, 어쨌든 그 불길한 예상이 틀려서 다행이구나.”
그는 확실히 겉보기엔 느긋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반응을 상
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 역시 남자의 직업병이 아닐까 생각해본
다. 환자가 아닌 상대에겐 무척 부담스러운 직업병. 미쉘 씨는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푹신
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괜찮다면 먼저 이야기해주지 않겠어? 그동안에 있었던 너와 쥴리앙의 이야기. 사실 녀석
이 쓴 편지엔 상황에 대해서 거의 나와 있지 않거든. 정확한 전후 사정이 아니더라도 우선
은 네가 느낀 대로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어.”
“……그러죠.”
나는 그의 말에 따라 쥴리앙과 있었던 일들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단
순한 일지에 불과할 뿐, 내가 지니고 있던 감정들은 철저히 배재된 것이었다. 나는 아직 다
른 사람에게 내 감정의 모든 것들을 토해낼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그가 쥴리앙과 가장 가
까운 사이이고 타인의 심정을 이해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몽마르
트르에서 그를 만났던 순간부터 쥴리앙을 찾아갔다가 차디찬 냉대에 상처받고 도망쳤다
는 이야기까지 간결하게 끝마쳤다. 성의없는 설명에도 미쉘 씨는 상당히 진지하게 듣고
난 뒤 조금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다.
“……그래서, 뒤늦게 마음을 깨닫고 갔을 땐 녀석이 그렇게 평소엔 담지도 않을 독설을
퍼부었다고?”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마음을 차갑게 굳히며 떠올린 기억들이었지만 여전
히 아프다. 그 고통은 더해지면 더해질 뿐 전혀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
게도, 나는 이런 고통을 가진 나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자랑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지?”
“……네.”
“그래서 녀석이 그때 그런 건가…….”
“…….”
“쥴리앙이 네겐 이전에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단 말이지?”
“……처음부터 쥴리앙은 저를 정말 소중히 대해줬어요. 항상 순수하고 착하고, 저를 감동
시킬 줄 아는 친구였죠. ……그래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가 제게 심한 말을 한다는 건 이
전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음…, 정말 그랬다면 확실히 녀석의 이중적인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겠구나.”
“…….”
“하지만 지노, 사실 그 모습 둘 다 쥴리앙의 본 모습이야. …아니, 좀 더 정확히 하자면 네
가 봐왔던 모습이 원래의 모습에 가깝겠지만.”
“……무슨 의미죠?”
미쉘 씨는 조금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내게 얼마만큼 깊이 있게 진실을 보여줘야 할지 재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났던 쥴리앙의 기사 읽어봤어? 본래 벤자민이라는 걸 밝힌 기사 말이
야.”
“네.”
“그럼 그 녀석의 어머니가 내 아버지와 불륜관계였던 여자였다는 것도 알겠구나.”
“……에바 베넥스…….”
“그래, 에바 베넥스. 쥴리앙은 10살이 되기 이전까진 줄곧 그녀와 단둘이 살았었어.”
“알아요. 그 이야긴 쥴리앙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뭐? 쥴리앙에게 직접…?”
“칸느에 갔을 때 이야기해줬어요. 어릴 때 거기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칸느에 갔다고?”
미쉘 씨는 내 말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 칸느에서의 붉은 기억들을 마치 수십 년 전에 찍
은 액자 속 사진처럼 아련하게 더듬어보고 있던 나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몸을 움
츠렸다. 내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는 답답한 듯 재차 답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봐. 너 지금 칸느에 있는 녀석의 집에 갔다고 했어?”
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에 긍정하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탁자 위에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리곤 뭐가 잘못됐는지 혼란스런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자꾸만 쓸어
넘겼다. 나는 그가 어째서 그렇게 당황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아니야……. 조금 놀라서 그래. 녀석이 그 집에 갔다는 게…….”
“…….”
“사실 쥴리앙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빠리로 올라온 뒤론 그곳을 간 적이 없어.”
“……네……? 하지만 쥴리앙은 제게 평소에도 그곳에 와서 바다구경을 한다고……”
“대충 둘러댄 거겠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안 온 곳인데 그런 곳에 널 데리
고 간 이유를 설명하려면 난처할 테니까.”
“…….”
“녀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 집이랑 관련된 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했
어. 그의 어머니가 쥴리앙의 이름으로 남겨놓은 집이지만 그동안은 줄곧 내가 마을 주민에
게 부탁해서 관리해왔던 것뿐이야. ……그런데 널 거기까지 데려 갔다는 건…….”
“…….”
“어쩌다가 칸느까지 가게 된 거지?”
“그냥……전에 키스 사건 이후 틀어지고 나서 그가 제게 용서를 빌러 와서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 거냐고 물었어요. 그냥 전 바람 쐬러 어디로든 데려가 주면 좋겠다고 해서……그
날 밤 어디로 가는지 말도 안 해주고 데려온 곳이 칸느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필 그곳을 간 이유가……대체 무슨 생각으로…….”
“…….”
그는 여전히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쥴리앙이 칸느에 갔을 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니? 예를 들면 그 집 앞에 바다라든
가……”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요. 그때 쥴리앙이 물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고 하길래 제가
같이 들어가자고 했었어요. 처음엔 싫다고 했지만 절대로 놓지 않을 테니 날 믿고 함께 들
어가자고 해서…….”
“정말이야? 너, 정말 쥴리앙을 물속으로 들어가게 했단 말이야? 게다가 그 칸느 집의 앞
바다에……?”
미쉘 씨는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의 눈은 아까 칸느에 갔었다
고 할 때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놀라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청록색 눈동자를 넋 놓
고 바라보다가 답하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에 뒤늦게 대답했다.
“…네.”
“말도 안 돼…….”
“…왜 그러시죠?”
“실은…… 나도 녀석을 돌보면서 공포증을 없애기 위해 한때 집중적으로 치료한 적이 있
었거든. 덕분에 이젠 물을 보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사라졌지만……완치하지 못
한 건 칸느의 집에 가는 것과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였어. 다독여도 보고 강요도 해봤지
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었지.”
“…….”
“그걸 쥴리앙이 전부 자의로 극복 해내다니……. 너로 인해서…….”
미쉘 씨가 내뱉은 문장들은 전부 끝맺음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무거운 공기 속을 유
유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그래, 그랬구나. 쥴리앙은 정말 진심으로 널 받아들였던 거였어.”
“…….”
이윽고 조금 공백을 두고 다시 말을 꺼냈을 때의 음성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일말의 의심 없이 확고한 믿음으로 들어찬 음성이었다.
“그 정도면 모든 걸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무슨,”
“지금부터 말해줄게. 쥴리앙의 성격이나 행동이 왜 그렇게 자기모순적이고 불안정하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녀석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과 그 속에서 어떻게 성장해왔는지에
대해서. ……그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겠구나.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미쉘 씨는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생각
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에바 베넥스가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밀애관계가 드
러난 건 그녀가 한참 피아니스트로서 주목을 받을 때였어. 한때엔 거의 매일 이다시피 그
들과 관련된 가십거리가 쏟아져 나왔지. 잘나가는 미모의 피아니스트와 대형 음반사 사장
간의 스캔들은 파파라치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먹음직스런 기삿거리였을 테니까.
……헤어지게 된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관계를 끝내자고 한 건 아버지 쪽이었대. 내
가 알기론 아버지는 그녀 때문에 내 어머니와 이혼 얘기도 오갔던 것 같은데……왜 그렇
게 갑자기 틀어지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그 이후 에바 베넥스는 한
동안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어. 해외로 나갔다, 실연의 충격에 못 이겨 자살했다 등 수많은
속설들이 난무했지만 제대로 된 건 없었어.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
로 밀려날 때쯤, 그녀의 진짜 행방이 드러났어. 얼마 전 칸느의 병원에서 남자 아이를 낳았
다는 기사였지. 그게 쥴리앙이었어.”
“…….”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이 있다는 소식은 내게 있어 충격보단 기쁨이었어. 사실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제를 가지고 싶었거든. 15년 가까이 쭉 외동아들로 자랐지만 그다지 부모
의 사랑도 받지 못했어. 아버지는 일 때문에 언제나 바쁘셨고, 어머니는… 어머니 역시 그
다지 나를 돌보는데 신경 쓰시질 않았으니까. 거의 보모의 손에 컸다고 봐야겠지. 나는 외
로웠어.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혼자 지내야 하는 게 싫었어. 그래서 항상 형제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아주 어렸을 땐 매일 밤 동생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
도였고.”
미쉘 씨는 어린 시절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는 듯 그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마음
에 차오르는 감정을 잠재우려는 듯 커피를 들이켜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말보로 레드, 그리고 화려한 문양의 지포라이터.
“담배 피니?”
“아뇨.”
“그럼 미안한데 한 개비만 피면 안 될까? 최근 들어 쭉 금연 중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굳은
결심을 포기하고 싶어지네. 앞으로의 이야기도 계속 하려면 말이야.”
나는 주변에서 익숙히 봐온 그 담배 곽을 묘한 심정으로 응시하다 그러세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쉘 씨는 고맙다고 말하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 불빛이 아스라이 반
짝이며 타들어가며 곧 버석거리는 재로 변해버렸다. 그 붉은 불티를 빨아들인 입술은 청회
색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쥴리앙은 내게 있어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동생이었어. 비록 어머니가 다르지만 그
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녀석은 태어난 순간부터 내게 사랑받기 충분한 존재였으니까. 나
는 내게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녀석을 만나고 싶었어. 하지만 좀처럼 만
나볼 기회는 없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난 중학생이었고, 아버지에게 당신과 이미 헤어진
여자의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진 막연하게
녀석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이렇게 답답해할 바에야 직접 찾아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버지의 수첩을 뒤져보았지. 혹
시나 했는데 정말 아버지는 칸느의 집 주소를 적어뒀더군.
며칠 뒤 나는 그 칸느의 집 주소로 직접 찾아갔어. 그때 처음으로 쥴리앙을 만나게 됐지.
녀석이 여섯 살 때쯤이었을 거야. 쥴리앙은 집 앞의 바닷가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었어.
그를 처음 보는 거였지만 그 어린 소년이 내 동생이라는 건 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지. 내
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녀석은 인기척을 느끼곤 획 돌아보았어. 나는 마주본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친근한 미소를 지었어. 생김새가 내 어릴 적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있었거든.
하지만 쥴리앙의 표정은 정반대였어.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이었지. 조금만 더 다가가면 금
방이라도 달아날 것만 같았지. 나는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어. 무서워하지
마. 나는 네 형이야. 녀석은 형이라는 말에 꽤 놀란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도망치려는 기색
은 보이지 않았어. 나는 자연스럽게 그 곁으로 가 앉았어.
쥴리앙은 여전히 내가 낯선 것인지 애써 날 무시하고 바다만 바라보았어. 내가 혼자 앉아
서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녀석은 대답이 없었지. 그래서 나도 일단은 녀석에게 시
간을 주기로 했어. 갑자기 나타난 형이라는 건 어린 소년에게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
는 거였으니까. 나는 녀석이 듣든 말든 내 이야기를 해줬어.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
라고, 비록 어머니가 다르지만 내게 동생이 생겨서 정말 기쁘다고. 녀석은 물론 여전히 말
이 없었지. 망아지처럼 뛰어놀 나이에 어린애답지 않은 우울한 표정으로 바닷가 앞에 앉
아 있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하지만 처음이라 그런가보다 싶어 앞으로 자주 찾아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 쪽에서 여자의 흐느낌과 물건이 깨지는 들려왔
어. 내가 깜짝 놀라 그 집과 쥴리앙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녀석은 이미 익숙해진 듯 조용
히 말했어. ‘오늘 아빠가 와서 그래.’라고. 그때까진 몰랐는데 사실 아버지는 에바 베넥스
와 헤어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곳을 찾아왔던 거야. ……하지만 아버지의 출입이 쥴리
앙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미쉘 씨는 거의 다 타버린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이 빨아들인 뒤 그것을 비벼 껐다. 누에고
치의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풀어지던 담배 연기는 그것으로 생명을 다했다. 커피는 이미 차
갑게 식어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 번에 모두 들이키곤 몸을 이완시키듯 다시 소파에 몸을
뉘였다.
“쥴리앙은 내게 말했어. 엄마는 아버지가 찾아온 날엔 언제나 저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불안해 보였지. 어머니는 평소엔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만 해
줬대. 네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라고, 지금도 자신과 쥴리앙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찾아오면 그때마다 평소와는 반대로 행동하더라는 거야. 에바는 남
자만 보면 병적으로 화를 냈어. 아버지가 쥴리앙에게 손만 뻗으려 치면 곧바로 아이를 가
로채곤 당신은 우리 앞에 나타날 자격조차 없다고, 어설픈 책임감으로 찾아오는 거라면 앞
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더군. 그 어린 나이에 그 말을 제
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쥴리앙은 그녀가 했던 말 자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
었어. 어쨌든 에바는 아버지가 가버리고 나면 하루종일 그렇게 흐느끼거나 방에 틀어박혀
서 나오질 않는다고 했어.”
“…….”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쥴리앙은 태어나서 거의 10여 년 동안 자신의 어머니와 단둘
이 살았어. 가정부가 있긴 했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 올 정도에 그마저도 여자의 히스테리
로 인해 수시로 바뀌었으니 그에 대한 존재감은 배재해도 좋을 거야. 쥴리앙은 학교 다닐
나이에도 학교에 다니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직접 교육을 받았어. 덕분에 또래 친구를 사
귈 기회도 없었지. 사실 그녀는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나거나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쥴리
앙이 혼자 놀 때에도 언제나 그 집 앞의 바닷가에서만 놀게 했다고 하더라고. 그 모자는 주
변 이웃들과도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지. 그 집이 워낙 주택가에서 외진 곳에 떨어져서인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아마도 예전에 파파라치나 소문 같은 것에 하도 치여 지내
다보니 거기에선 애초에 관계를 깊게 가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 어쨌든 그런 타인과
고립된 육아방식은 쥴리앙의 기본적인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야. 쥴리앙에게
있어 어머니의 행동과 말은 세상의 전부이자 학습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그 여자는 점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였고……쥴리앙이 그렇게 된
건 아마도 어릴 때 보았던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모순적인 태도가 지속적으로 혼란을 줬
기 때문일 거야.”
“그럼 평소에 얌전히 있다가도 누가 건드리면 무섭게 변한다는 게……”
“내 생각은 그래. 녀석의 무의식엔 어린 시절에 봤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무척 강하게 자
리 잡아서 그것에 자꾸 강화를 받아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
“…….”
“이복동생과 그렇게 처음 만난 날, 녀석에게 이름을 물어도 끝까지 말해주지 않다가 헤어
질 때쯤에서야 겨우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더군. 쥴리앙 베넥스라고. 나는 쥴리앙에게 웃
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어. 네가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아이라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만
나러 왔을 텐데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자주 찾아올 테니 절대 엄마에게 나를 만났
다는 건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그 이후로 가끔씩 쥴리앙을 찾으
러 갔어. 마음이야 자주 가고 싶었지만 워낙 빠리에서 떨어진 곳인데다가 찾아가는 것 자
체가 늘 조심스러웠거든. 잘못했다가 에바 베넥스에게 들키면 나조차도 쥴리앙과의 만남
을 막을지도 몰랐으니까. 쥴리앙은 처음엔 나를 봐도 별 반응이 없다가 시간이 차츰 흐르
고 나니까 나를 제법 따르기 시작했어. 다음엔 언제 올 거냐면서 안 가면 안 되냐고 붙잡기
도 했었지. 쥴리앙의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 사람들을 기피하는 엄마 앞에선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녀석은 사람이 그리웠던 거야. 엄마 외의 타인과 소통하고, 부대끼고 싶
은 욕구가 그에게도 분명 있었겠지. 아무리 엄마가 세상의 전부라고 느끼더라도 사람의 본
능은 어쩔 수 없나 봐…….”
미쉘 씨는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 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잠시 멈춘 쥴리앙의 과거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들었던 쥴리앙의 어린 시절을 곱씹어 보았다. 치유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까. 그의 미소가 그렇게 애달파 보였던 이유가. 미쉘 씨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는 아직 더 많이 남은 것 같은데도 내 마음은 벌써부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파리한 담배연기 사이로 다시 이어졌다.
“……어쩌면 그때 쥴리앙은 나를 아버지의 대체물로 생각했을지도 몰라. 평소에 그는 엄
마를 자꾸 아프게 하는 아버지가 싫다고 했어. 하지만 한편으론 아버지와 좀 더 가까워지
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아 보였지. ……사실 쥴리앙은 어릴 때 자라면서 아버지는 많이
봐왔지만 에바 베넥스와 함께 사는 동안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손길을 느껴보지 못하고
자랐어. 남자가 쥴리앙을 만져보려 하면 여자는 남자가 해충이라도 옮을 것처럼 화를 내
며 결코 손을 못 대게 했거든. 그때 여자에게 온전하게 남은 건 쥴리앙 하나뿐이었으니까.
설혹 아이가 남자에게 정을 붙이게 되면 쥴리앙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던
걸 거야. ……그래서 녀석이 내게 쉽게 마음을 열어준 걸지도 몰라. 나에게서 비춰지는 아
버지의 그림자를 조금이라도 좇고 싶었던 거겠지. 어쨌든 그렇게 쥴리앙과 몰래 만나온
지 3년쯤 되었을 때였을 거야. 에바 베넥스가 죽은 건.”
“…….”
“다행히 여자의 일기장엔 아버지가 쥴리앙의 친부라는 것을 밝힌 글이 있었기 때문에 아
버지는 쥴리앙을 문제없이 데려올 수 있었어. 내 어머니께선 당연히 녀석을 집안에 들이
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강경한 뜻을 꺾을 수는 없었지. 어쨌든 녀석은 한 달
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 집에 있다 나가 살게 됐는데, ……그간 일어난 일들을 들어보
면 말도 못할 정도야. 처음엔 자꾸 가출을 시도했대. 겨우 9살인 주제에 틈만 나면 집을 도
망쳐 나와서 나중엔 아버지가 자신의 서재에 아이 잠자리까지 마련해놓고 지켜보기로 했
대. 그러니까 이젠 책상에 있는 커터나 값비싼 도자기를 깬 파편으로 자해를 하더니……
위험한 물건을 전부 치워두고 나니 나중엔 식사하는 것마저 거부하고……. 엄마만을 바라
보고 살았던 쥴리앙에게 있어 그 죽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충격적인 일이었겠지.”
나는 문득 쥴리앙이 팔등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의 팔을 자세히 보면 오래전에 새겨
진 것 같은 상흔이 화석처럼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저 어릴 때 사고로
긁힌 상처 정도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어쩌면 녀석에게 깊이 빠지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
해온 건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상처들을. 나는 비겁한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뭐, 사실 쥴리앙은 빠리에 오기 전부터 이미 정상이 아니긴 했지. 어머니가 그렇
게……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나 봐. 내는 소리라곤 그저 자신의 행동
을 저지당했을 때 내는 울부짖음 정도였어. 녀석의 계속되는 이상행동이 너무 심하다 싶
어 병원에 데려갔더니 의사는 어머니의 죽음과 갑작스런 환경변화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
이는 거라고 했어. 병원에 다닌다 해도 일단 가정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신경 써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처방을 내렸대. 학교도 문제였어. 안 그래도 상태가 불안정한데
이전까진 학교도 다니지 않은데다 사회성 자체가 결핍되어 있던 녀석이 갑자기 집단생활
에 적응할 수 있을 리 없었지. 어머니의 주장대로 기숙학교에 보내는 건 더더욱 무리였고.
아버지는 가정교사나 보모를 두려 했지만 소용없었어. 녀석이 워낙 낯을 가려서 언제나
집 어딘가에 숨어서 나오질 않았으니까. 결국 어린 쥴리앙에게 필요한 건 녀석에게 지속적
인 애정을 가지고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난 그동안 잠시 인도를 여행 중이었는데 우연히 집에 전화했다가 쥴리앙이 오게 된 걸 알
게 됐어. 녀석의 불안정한 상태를 듣고 너무도 걱정돼서 일정을 조금 당겨서 집으로 돌아
왔어. 죽은 여자에게서 이어받은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에 그 역시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어. 아버지는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간단히 설명하시며 한숨을 쉬
셨어. 녀석이 계속 고집을 부리며 밥도 안 먹고 책상 아래에 처박혀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다는 거야. 뭐가 불만이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는 내가 한 번 쥴리앙을 달
래보겠다고 말하고 음식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어. 아니나 다를까 쥴리앙은 아버지의 책상
밑에 꼬옥 처박혀 있더군. 내 인기척에 고개를 빼꼼히 들길래 나는 웃으면서 잘 지냈어?
하고 말했지. 그러자 긴장됐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내 품으로 쪼르
르 달려와 안겼어. 녀석은 내 허리를 꼬옥 붙잡은 채로 한참이나 울다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녀석이 내게 한 말은……
‘나, 피아노치고 싶어’였어.”
“…….”
“나는 조금 놀랐어. 녀석이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워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
서 뜬금없이 왜 피아노를 찾나 싶었지. 하지만 일단은 태연하게 대처해야 했어. 나는 이 집
엔 피아노가 없으니 우선 밥부터 먹고 나면 나중에 어떻게든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해주겠
다고 했어. 하지만 쥴리앙은 막무가내였어. 계속 ‘피아노치고 싶어’라는 말만 반복했지. 나
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가서 말씀드렸어. 내 말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열
쇠를 하나 내어주셨어. 에바가 빠리에서 활동할 때 지냈던 집 열쇠라면서. 거기에 피아노
가 남아있을 거라고 하셨어.”
“그 집이 혹시……샹젤리제 구역 근처에 있는 집을 말씀하는 건가요? 하얀 그랜드 피아노
가 있는.”
“맞아, 그 집이야. 쥴리앙이 거기에도 이미 데리고 갔었구나.”
“……네.”
“혹시 거기서 너랑 무슨 일 있었니? 최근 녀석이 그 집을 놔두고 새집으로 이사했다는 말
을 듣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됐거든. 원래 쥴리앙은 그 집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
어서…….”
“…….”
그 공간, 그 공기는 쥴리앙과의 관계를 단숨에 비틀어버린 곳이었다. 그곳에서의 순수한
눈물, 미친 듯이 뛰어대던 심장박동, 그것에 강화되어 타오르던 욕망, ……그리고 거짓말.
확연하게 떠오른 그날의 모든 구성물들은 거친 사포가 되어 심장을 문지르는 것만 같았
다. 나는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쥴리앙도 설마 그 기억들이 괴로워서 그 집을 나
간 건 아닐까 하는 유치한 기대감이. 나는 아픈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그렇게 당하고도 여
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쉘 씨는 내 미묘한 표정
을 보고는 지레 상황을 짐작한 듯 미안하다며 다시 자기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때 나는 쥴리앙에게 이렇게 말했어. 식사를 하고 나면 곧바로 피아노가 있
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물어 확인하
고 나서야 음식에 손을 댔어. 얼마나 배고픔을 참은 건지 정말 거지아이처럼 허겁지겁 먹
었지. 식사를 마치고 우리 둘은 아버지가 일러주신 대로 주소를 찾아 그 집을 찾아갔어. 그
런데 그 집에 있는 좋은 그랜드피아노 앞에 서서도 녀석이 또 주저하는거야. 이상하다 싶
어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도 말없이 내 눈치만 보더라고. 내가 자기 연주를 듣는 게 싫으니
비켜달라는 거였지. 나는 곧 무언의 의미를 알아차리곤 잠시 나가있겠다고 말하고 방을 나
갔어.
그리고 문밖에서 녀석의 연주를 들었을 땐 정말이지……충격이었어. 아홉 살이 치는 거라
곤 상상하기조차 힘든 연주였지. 처음 듣는 연주곡이었는데 그냥 듣기엔 불규칙하고 신경
질적인 멜로디였지만 계속 듣고 있으니까 이상하게도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어. 마치 자
신의 정신에 새겨진 상처를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는 것 같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은 정말 정신없이 쳐댔어. 마치 자기 안의 혼돈과 불안을 연주로 비
워내는 것 같았지.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녀석의 연주는 한층 부드러워졌어.
마치 본래의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달까. 그 마지막 곡에선……쥴리앙 그 자
체를 느꼈어. 애타게, 절실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어. 나는 그 연주가 너무도 안타까
워서 결국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어. 녀석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됐지만
다행히 쥴리앙은 내가 들어오는 걸 막지 않았어. 어쩌면 연주에 심취해서 못 알아 챈 건지
도 모르겠지만, 연주를 끝내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에도 그걸 더 이상 피하지 않았어. 얼
마나 운건지 볼엔 눈물이 흐른 자국이 깊게 묻어있었지. 하지만 표정은 슬퍼 보이지가 않
았어. 내가 물었지. 방금 연주한 곡, 정말 좋은데 제목이 뭐냐고. 그랬더니 녀석이 조금 머
뭇거리다가 없어, 라고 말했어. 그래서 내가 ‘없어? 모르는 게 아니라?’하고 다시 물었더
니 쥴리앙은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대답했어. ‘내가 만든 곡인데……이름 같은 건 없어.’”
“…….”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깜짝 놀랐던지. 나중에 사정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
었지. 그의 재능을 일찍 알아본 어머니가 피아노뿐만 꾸준히 작곡공부도 꾸준히 시켰던 거
였어. 어쨌든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아서 나는 녀석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어. 하지만
쥴리앙은 곧바로 ‘거기 안가’하며 받아치더라고. 그리고 녀석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이렇게 말했어. ‘여기서 살아’, ‘여기서 미쉘이랑 살 거야’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선 뭐
에라도 홀린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래, 그러자’라고 대답했어.
……어떻게 보면 우습지. 겨우 대학생인 주제에 어린애를 데리고 살면서 녀석의 정신에
깃든 상처를 직접 치유하려고 했으니 말이야. 나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그러고 싶
었어. 만약 그때 쥴리앙이 같이 살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내 쪽에서 어떻게든 그렇
게 했을 거야. 이제 녀석이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을 테니까. 나는 그 역할을 충실
히 해주고 싶었어. 난 집으로 가자마자 곧장 아버지께 말씀드렸어. 내가 그 집에서 녀석을
맡아 기르겠다고. 아버지는 쥴리앙이 나를 따르는 것을 조금 의아하게 여기셨지만 결정을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아버지 역시 그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으셨을
테니까 말이야.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와 쥴리앙은 내가 2년 전에 아를로 일자리를 옮기
기 전까지 8년 정도 함께 살았어. 내가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나선 좀 더 깊이 있게 치료해
나갔지. 사실 어떻게 보면 녀석을 맡아 돌보게 된 게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저, 미쉘 씨는 원래부터 이쪽 일을 해온 건가요?”
“아니, 사실 난 고등학생 때까진 미대에 갈 생각이었어. 화가이신 내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미술을 공부했거든.”
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 집안 곳곳엔 추상적인
문양의 유화작품들이 제법 걸려있었다.
“……이쪽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한 건 고등학교 막바지에 이르러서 내 인생에 큰 전환점
을 겪고 나서부터야. …뭐, 이건 쥴리앙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이고. 몽마르트르에서 쥴리앙
을 처음 만났다고 했지? 그 녀석이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건 내가 공
부와 함께 꾸준히 심리 치료를 겸해서 그림을 지도해서야. 녀석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
아했지만,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음악 쪽에 더 흥미를 보였어.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음감
이나 작곡, 연주 실력에 있어서의 재능은 정말 천부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쥴리
앙이 중학생이던 무렵에 제안을 했지. 개인 교습이나 음악계통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건
어떻겠냐고.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무언가에 얽매이는 게 싫었나 봐. 쥴리앙은 일말의 고
민도 없이 그런 것엔 관심 없다고 말을 잘랐어.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지. 그것보단 음향기
기와 악기, 프로그래밍용 컴퓨터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 기억으로는 아마 그게 처
음이었을 거야. 직접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래서 나는 그 부
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어. 장비를 사들이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건 알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녀석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손까지 벌렸지. 가봤을지 모르겠는데
그 집 3층 전체가 녀석이 혼자 쓰는 작업실이야. 거기에 있는 장치들과 악기들은 전부 그
때 들여온 거지. 아무튼 그때 전부 설치된 작업실을 처음 보는 녀석의 표정이란……. 이
런, 이야기하다 보니 방향이 이상한 데로 흘렀구나. 얘기를 하다 보니 자꾸 이런저런 생각
이 나서. 재미없지?”
“…아뇨.”
“그래. 조금만 더 하면 이제 내가 해줄 이야기는 거의 다 끝나가. 아무튼 그렇게 녀석과
단둘이 지내면서 이런저런 치유를 해가는 과정에서 녀석의 불안했던 정신 상태는 비교적
많이 호전되었어.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극단적으로 타인을 피하
는 행동은 거의 사라졌어. 어쩌면 거리의 화가로 나가게 되면서 그게 빠르게 회복된 건지
도 몰라. 처음에 나는 쥴리앙이 좀 더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혔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가 작
곡한 음악으로 거리에 나가 연주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었어. 하지만 녀석은 그것만
은 절대 못하겠다며 진저리를 쳤어. 그래서 대신 가끔씩 취미로 그린 그림 몇 개를 들고나
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행세를 잠시 하게 된 거야. 쥴리앙은 그걸 생
각보다 좋아하는 것 같았어. 공부에도 제법 흥미를 가졌지. 나는 쥴리앙의 공부를 보조적
으로 도와주면서 원할 때 언제든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바깔로레아Baccalauleats를 준비
시켰어. 녀석은 제법 머리도 좋고 집중력도 뛰어나서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빨리 시
험에 합격해뒀지.
……그렇게 녀석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던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급작스럽게 교
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아버지의 소식을 내게 전해 들었을 때 쥴리앙의 표정
은……후회하는 것처럼 보였어. 겉으론 계속 아버지에게 증오를 보였지만 진심은 속으로
감추고 있었으니까.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녀석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
지 않았어. ……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쥴리앙이더라도 별로 오고 싶지
않았을 거야. 장례식엔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이니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오르로제 가
(家)는 사실 서유럽에선 제법 이름난 집안이야. 그래서인지 우리 집 사람들이 좀 유별나
게 특권의식이 있어. 본래 귀족집안인데다가 각자 한몫씩 하고 있어선지 지나치게 형식을
따지고 보수적인데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향도 강하지. 사실 아버지는 당신이 당당하게
에바와 불륜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때부터 이미 이 집안사람들의 눈밖에 나있었어. 많은 친
척들이 집안 망신이라며 비난을 가했지. ……그렇게 없애고 싶어하는 오점의 부산물인 쥴
리앙을 그들이 장례식장이라고 해서 고운 시선으로 봐줄 리 없겠지.”
미쉘 씨의 표정은 사뭇 어두워져 있었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미쉘 씨 역시 집안사람들의
눈밖에 나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껏 쥴리앙에 대해 이야기해온 그의 모습은 자신
의 행동에 대해 조금도 후회가 없어 보였다. 그건 그가 그동안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쥴리앙을 지켜주면서 얻은 역경과 용기로 이루어진 단단함이었다.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를로 전근을 가게 되었어. 쥴
리앙도 따라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에게 빠리에 남으라고 했어. 이제 슬슬
나에게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날 때라며 이번 기회를 통해 한 번 자립하는 연습을 해보라
고 말했지. 그렇게 녀석과 떨어져 지내면서 간간이 전화도 하고 보통은 편지를 주고받고
지냈어.
솔직히 나는 줄곧 쥴리앙을 빠리에 혼자 남겨두고 지내는 동안 많이 불안했어. 쥴리앙은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뿐이지 온전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게 아니었거든. 물론 편지엔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그렇게 믿음이 가진 않았어. 내용 자체에서부터
벌써 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쓴 게 드러나 있어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정말 예리하시군요’하고 말할 뻔했다. 나는 지난 2년간 쥴리앙이 어떤 생활
을 해왔는지 까트린느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쭉 이야기를 들려주던 미쉘 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손에 쥐고 있는 지포
라이터만 만지작거리고 있길래 나는 여태껏 풀리지 않았던 의문 하나를 묻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뭐든 물어봐.”
“전에 만나서 말씀하실 때 법적으로 당신이 쥴리앙의 양아버지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신문기사에선 당신의 어머니가 쥴리앙의 양어머니라고…….”
“아, 그거. 그 기사는 잘못된 거야. 실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맞는 얘기지. 쥴리앙이 내
호적 밑으로 들어오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
“…….”
미쉘 씨의 설명에도 의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자 그는 말을 덧붙여나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되기 전이었을 거야, 녀석이 갑자기 아를로 찾아온
건.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쥴리앙은 어느 날 밤 그렇게 뜬금없이 나
타났어. 그리고 오자마자 부탁이 있다며 꼭 들어주라고 했어. 나는 녀석의 표정을 보며 뭔
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해줄 수 있는 거면 어떤 것이든 들어
주겠다며 말하라고 했어. 그때 쥴리앙이 부탁한 게…, 자신을 내 양자로 삼아달라는 거였
어.”
“…….”
“나는 일단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어. 나야 앞으로도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테니 크
게 문제 될 게 없었으니까. 게다가 어떻게 보면 쥴리앙과 나 사이는 친부모자식 사이보다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에 사실 그 부탁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급하게 절차를
밟으려고 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지.
그런데 다음날이던가, 쥴리앙이 잠깐 나간 사이에 녀석의 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테이
블 위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편지 하나를 발견했어. 나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건 알지만 혹
시 이번 일과 관련이 된 게 아닐까 싶어 그걸 꺼내 보았어. 그 편지는 아주 예전에 에바 베
넥스가 아버지에게 쓴 거였어. 아마도 쥴리앙이 아버지 서재에 있을 때 가져온 건 가봐. 편
지의 내용은……쥴리앙이 태어나기 전에 둘 사이에서 가진 아이에 대한 거였어. 에바는 낳
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아이를 원치 않아 지우게 된 아이의 이야기. 그녀의 편지는 낙태를
한 그날 써 보낸 것 같아.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겠지만 가여운 아이에게 이름이라
도 지어주기로 했다며 아버지에게 그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했어. 그 이름이……벤자민이
었어.”
“……그 이름은,”
“그래. 쥴리앙이 이름을 밝히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가명이지. 그리고 지금은 쥴리앙의 진
짜 이름이기도 해.”
“진짜 이름이라니요……?”
“며칠 뒤 내 어머니 쪽에서 내 쪽으로 호적을 옮기러 갔을 때 개명 신청까지 했거든. ‘쥴리
앙 벤자민 오르로제’로. 뭐 그냥 평소엔 쥴리앙 오르로제로 불리겠지만, 녀석에겐 나름대
로의 의미가 있어서 그 이름을 넣은 거겠지.”
“…….”
벤자민. 단순히 쥴리앙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에 그런 과거가 담겨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에바 베넥스와 빅토르 오르로제 사이에서 처음 생
긴 아이, 벤자민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생명을 다 하고 말았다. 아이는 죽고 나서야 이
름을 얻게 됐다. 쥴리앙이 어떤 생각으로 자기 이름 대신 그 이름으로 음반을 낸 건지 문
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자기 형의 것이었을 그 이름을 실제 자기 이름에 넣은
것에 대한 의미도.
“녀석은 어쩌면 다시 태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자신의 존재를 밝히면서 이제 정말 세
상과 함께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한 거니까.”
그렇게 쥴리앙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기분은, 무척 무거웠다. 쥴리앙이 가지
고 있는 상처의 골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동안 어렴풋이 가져왔던 의문들이 미쉘 씨의 이
야기들로 하나하나 풀어져 나가고 있었지만, 어리고 이기적인 내가 과연 쥴리앙에 대한 애
정만으로 그 아픈 과거를 온전하게 보듬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가 나를 다시
허락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우선 고민 밖의 문제였다.
“…저어,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미쉘 씨는……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전부 제게 해주시는 거죠? 절 여기에 부른 이유
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넌 내가 널 부른 이유도 모르면서 왜 이곳에 온 거지?”
“…….”
남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남자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쥴리앙
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녀석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그에게
다시 찾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는 알면서도 일부러 내 입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게끔
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줄곧 그것을 직접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
만 남자는 이번엔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너, 쥴리앙 이전엔 남자에게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지. 그것 때문에 많이 혼란
스러웠다면 쥴리앙에게 거절당했으니 이젠 쉽게 그런 고민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으니 다
행 아닌가? 하지만 어째서 너는 나를 찾아온 거지?”
“…….”
남자의 채근에 나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내가 혼란스러
웠을 때 줄곧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한동안 답이 나오지 않았던 질문. 그러나 나
는 이제 그 답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정
도로 용기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또 습관적으로 팔찌의 구슬 두 개
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쥴리앙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어서요.”
“…….”
“예전처럼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를, 쥴리앙을 좋아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으니까
요…….”
내 위험한 진심을 그렇게 미쉘 씨에게 털어놓았을 때의 기분은 무척 미묘했다. 앙투안에
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부끄럽고, 두려웠으며, 자랑
스러웠다. 그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의 혼합 속에 나는 가까스로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미쉘 씨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랍장을 열며 내
질문에 대해 답했다.
“최근 녀석이 보낸 편지들은 대부분이 ‘지노 장’과 관련된 이야기였어. 지난 1년 반 동안
주고받은 편지에 비해 녀석의 편지들은 무척 솔직하고 진지했지. 난 그걸 보면서 쥴리앙
이 그 ‘지노’라는 사람으로 인해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
래서 이렇게 만나서 한 번쯤 네게서 쥴리앙의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네게 쥴리앙의 이야
기를 해주고 싶었어.”
“…….”
미쉘 씨는 서랍장 쪽으로 돌아서서 무언가를 챙겨오더니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편지봉
투 하나와 연습장 같은 스프링 노트였다. 나는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쥴리앙에 대한 네 감정이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게 맞다면 받아줘.”
“…….”
나는 남자를 한 번 올려다보긴 했지만 막상 그 앞에서 물건들을 풀어보진 않았다. 그 안
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 내가 보이는 반응을 남자가 모두 알아챌 것만 같아서였다.
“빠리로는 언제 떠나니?”
“내일 아침에요.”
“뭐…, 그렇게 빨리? 조금 더 있다 가지 않고.”
“……모레 다시 수업을 시작하거든요.”
내 말에 미쉘 씨는 아쉬운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아침에 아비뇽 역까지 태워다 줄 테니 오늘은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
미쉘 씨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참이나 홀
로 거실에 앉아 그가 쥐어준 봉투와 노트를 번갈아도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맡에 앉았다. 조금 망설이는 손으로 천천히 봉투부터 열어보았다. 거
기엔 두 달 뒤에 있을 쥴리앙의 연주회 티켓 한 장이 들어있었다. 티켓은 약간 거친 질감
의 흰 종이 위에 은은하게 오색 빛이 나는 비닐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되어 붙여져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오팔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엔 벤자민의 시디커버에 있었
던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봉
투에 함께 넣어져 있던 쪽지를 펴 보았다. 그것은 미쉘 씨가 내게 남긴 것이었다. -괜찮다
면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나는 조금 고양된 마음으로 그가 편지봉투
와 함께 건네주었던 연습장을 펴보았다. 거기엔, 내가 있었다. 수많은 각도와 표정으로 그
려진 내 얼굴이 연습장 한 권에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모두 웃고 있거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그림들은 스케치에 불과했지만 전부 그린 날짜도 적혀있었고, 사인도 적
혀 있었다. J.O.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쥴리앙이 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지 궁금했다. 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은 그때 퍼부은 독설도 전부 사실은
날 사랑해서 그런 거였다면? 나는 또다시 그렇게 헛된 바람만을 부여잡으려 하는 것을 자
각하곤 단숨에 그 기대를 묻어버렸다. 그래, 일단은 묻어두자. 녀석을 만나서 내 진심과 녀
석의 진심을 들을 때까지. 나는 그의 손이 훑고 지나갔을 종이를 애틋하게 만져보았다.
미쉘 씨가 내게 주고 간 선물 때문에 나는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었다. 문득 연주회 건이 떠
오르며 정말 가도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쥴리앙을 다시 만나겠다는 다짐은 했지만
사실 그 방법조차 막연했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식
으로 재회할 기회가 생기니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다 머리가 너
무 시끄러워져서 나는 그대로 이어폰을 끼고 mp3플레이어음악을 재생한 채로 잠이 들었
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잠이 들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기억나
지는 않는다. 다만 오늘 아침 눈을 뜨는 동시에 든 생각은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미쉘 씨의 차를 타고 아비뇽 역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나와 남자
는 줄곧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저녁 함께 식사를 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침
묵이었다. 무척 배려있고 친밀한 침묵처럼 느껴졌다.
“연주회, 올 거지?”
“…….”
막 기차에 올라타려고 뒤돌아 걸어가던 중 미쉘 씨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주문이
라도 걸린 것처럼 그대로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굳어져 있는 내 뒷모
습을 향해 말했다.
“지노, 네가 녀석의 말에 많이 상처받았을 거란 건 이해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쥴리
앙은 그렇게 너에 대한 마음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야. 그에게 있어 너는 아
무런 혈연 없이 처음으로 진심을 내어준 사람이거든.”
“…….”
“그 독설이 실은 진심을 왜곡하기 위한 거짓된 행동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사실은 쥴리앙
도 아직 널…”
“저, 갈 거예요.”
“…….”
나는 미쉘 씨를 향해 반듯하게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진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도망쳐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미쉘 씨는 내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다행이라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남자의 자조적
인 웃음을 바라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나는 지금껏 쥴리앙의 웃는 모습에서 언제
나 어두운 그늘을 보아왔었다. 그건 마치 비에 젖어 떨어지는 벚나무 꽃잎을 보는 것 같았
다. 아름답게 흩날리는 꽃잎에 정신이 팔렸다가 잘못해서 물웅덩이를 밟게 되었을 때, 그
고인 물에도 역시 낙화들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 그래서 항상 마음이 아프고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졌었다.
난 그것이 쥴리앙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고독과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
게도 그 그림자는 그와 닮은 이복형의 웃음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쥴리앙의 그것보단 훨
씬 희미해서 처음엔 잘 몰랐지만 미쉘 씨의 웃음에도 분명 비슷한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쥴리앙이야 그렇다 치지만 미쉘 씨는 달랐다. 그는 완벽해 보이는
남자였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제어하고 있어서 언제나 관조적이고 여유로운 태도를 가지
고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정신과 의사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인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가슴 한구석에 씻기지 않는 감정을 안
고 있구나, 하는.
쥴리앙과 닮은 미소를 짓는 미쉘 씨를 보면서 나는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언젠간 쥴리앙
의 얼굴에 구김살 한 점 없는 예쁜 웃음을 봤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
겠지만 미쉘 씨가 가진 마음의 상처도 언젠가는 곱게 아물어 더 이상 그런 웃음을 짓지 않
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두 형제 모두를 향해 애달프게 웃어보였다.
“미쉘,”
“……?”
“고마워요, 당신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
“빠리에서, 뵐게요.”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기차에 재빨리 올라탔다. 과제를 생각하면 어제 탔어야 할 기차
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과제의 무거움 따윈 털어내고 싶었다. 몸이 노곤했다. 어젯밤
깊이 잠을 자지 못한 탓인 것 같다. 이어폰에선 어제부터 반복재생상태로 두고 잠이 들었
던 노래가 끊어질 듯 이어져 나왔다. 나는 그 음악 한 자락에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예
전에 센느강에서 듣고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플레이어에 저장시켜두고 힘들 때마다 가끔씩
들었던 그 노래. 어쩌면 나는 이 노래로부터 해답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리고 이 세상의 상처 받은 사람들은
이것이 해답이 될 것이다. 내버려둬라.
만약 그들이 헤어지더라도 여전히 그들이 만날 기회는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해답이 될 것이다. 순리를 따르라.
……그리고 구름 낀 밤에도, 여전히 희망은 남아있다.
희망은 계속될 것이다. 순리를 따르라.
난 음악의 소리에 깨어나고,
어머니 메리는 내게 다가와 현명한 말을 한다.
순리를 따르라……
주) 바깔로레아 : 프랑스의 대입 수능시험. 자연계, 인문계, 예술계로
시험 자체가 각각 다르며 합격/불합격으로 구분된다. 이 시험에선 철학과 관련한 논술시
험도 치르게 되는데 시험에 나오는 지문의 수준이 상당해서 시험 날 언저리엔 많은 프랑
스 국민들이 그 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 전에도, 우리 후에도 이런 사랑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 때, 그때가 바로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