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꽃이 내뱉는 체념 섞인 한숨의 색
다시 정신이 든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연한 그린 톤으로 배색 된 낯선
방에 누워있었다. 잠시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뇌 세포 하나하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두통은 다시 몸을 침대 위로 쓰러지게 했다. 어지러
운 머리를 쥐어 싸매고 어젯밤 일을 되짚어보았다.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술김에 앙투
안 녀석이랑 키스했었다. 그때 내 어깨 위에서 울던 미쉘이 떠올라서 구토감을 느꼈고, 정
신을 잃어가는 순간에 미쉘의 환상을 보았다. 그는 술에 취한 날 붙잡아 주었다. 예전처
럼. 아니, 붙잡은 건 내 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기억은
그리운 환상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눈을 뜬 게 바로 이곳. 혹시 앙투안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 건 아닐까 싶어서 주변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직접 사는 공간
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깔끔하다 못해 사람 사는 흔적이 느껴지지가 않았
다. 차라리 별 두세 개 정도의 호텔 정도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대체 어
떻게 된 일인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욕실 문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보들보들한 목욕 가운을 걸친 채 문턱에 서 있었다.
“깨어났구나.”
그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을 건넸다. 짐짓 앙투안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의외의 상
황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처음 본 남자.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예의를 갖추고 묻기로 했다.
“실례지만 누구……!”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나는 순간적으로 굳었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후다닥 기어들
어갔다. 몸에 휘감긴 이불을 걷어내자 브리프만 달랑 남겨진 채 나체가 훤히 드러났기 때
문이다. 기분 나쁜 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다, 당신 누구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나는 마이크 이상으로 앰프에서 웅웅대는 것과 비슷한 울림이 머리에서 가득 번져가는 것
을 견디며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남자는 내 반응을 이미 예상한 것 같은 차분한 목
소리로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봐.”
이미 뻔히 드러난 상황에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남자의 태도에 나는 더욱 화가 치밀었
다.
“지금 이게 진정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대체 무슨…!”
“지노.”
“!”
“네 이름이 지노 맞지?”
“…….”
“역시 맞았군.”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고 놀란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어떻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우선 샤워부터 하고 나와. 목욕 가운은 안에 있으니까 그걸
입도록 하고. 네 옷은 어제 내 것과 같이 세탁 맡겼는데 아직 안 왔거든.”
“…….”
나는 궁금한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일단 잠자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를 대하는 남
자의 태도가 불순해 보이지도 않았고 내가 예상했던 그런 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전후사정
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깨어난 침대 옆에 나란히 놓인 또 다른 침대의 흐트러진 시
트는 분명 그가 사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남자가 내 이름까지 알다니.
사실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누군가’를 닮은 남자의 얼굴은 어쩐지 상황을 수긍
할만한 답을 내줄 것 같다는 믿음을 주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그는 룸서
비스를 시켰는지 준비된 아침식사를 권했다.
“옷을 벗긴 건 어제 네가 의식을 잃으면서 구토를 한 바가지 해대서 옷이 모두 더럽혀져
서야. 곧 세탁물을 가지고 온다고 했으니 식사 하고 갈아입도록 해.”
“……아니, 그것보다도…….”
“음?”
“당신은 어떻게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거죠…?”
샤워를 하면서 마지막에 구토를 했던 것 같은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렸기 때문에 남자의
해명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한 것은 어떻게 처음 보는 남자가 내 이름을 알
고 있냐는 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그건 나부터 묻고 싶은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네?”
“어제 날 미쉘이라고 부르며 붙잡고 떨어지질 않았잖아.”
“그럼……당신 이름이 진짜 미쉘……?”
“그래.”
자신이 미쉘이라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확실히 나의 미쉘과 닮아있었다. 체구도 비슷했
고, 흔치 않은 백금발도, 이목구비도 미묘하게 그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확실히 미쉘은 아
니었다. 중후한 느낌의 얼굴 선은 훨씬 나이도 많아 보였고, 그의 짙푸른 눈동자와는 달리
그린토파즈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그저 미쉘의 얼굴을 닮은 동명이인에 불
과했다.
“아, 혹시.”
순간 남자는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내 말을 가로막았다.
“쥴리앙이 알려준 건가? 내 이름을.”
“!”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름에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아…, 표정을 보니 아닌가 보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면 지금 많이 놀랐겠구나.”
“당신은 대체……”
“나는 쥴리앙의 아버지야.”
“…….”
“…….”
“……네?”
남자의 말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겨우 상황을 설명할 마음이 생겼나 보다 싶었는데 뒤
늦게 하는 남자의 해명라고 하는 소리가 미쉘의 아버지라니, 이 남자가? 신문에서 그의 아
버지는 몇 년 전에 죽었다고 했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보더라도 그렇다. 아무리 뜯
어봐도 삼십대 초중반 정도나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아버지라는 건 믿지 못하는 쪽이 더 이
성적이었다. 하지만 미쉘이라는 남자의 표정을 보면 농담인 것 같진 않았다. 너무도 혼란
스러워서 뭐라고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하핫,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물론 법적으로 그렇다는 거니까. 혈연관계로 따지면
나는 쥴리앙의 이복형이고 얼마 전부터 양아버지라는 이름도 겸하게 됐지.”
“…….”
그에게 이복형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친부인 것보다야 훨씬
더 이해시킬만한 설명이었다. 싱글거리는 남자를 보며 나는 그가 나를 일부러 놀라게 하려
고 그렇게 진실을 거꾸로 뒤집어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보다 짓궂은 사람이
었다.
“네 이야기는 쥴리앙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어. 우연치 않게 얼굴도 알게 돼서 어제 네가
누구인지 알아본 거고.”
“그래서 절 이리로 데려온 건가요?”
“그래.”
“그럼 제 일행은……”
“일행이라니? 주변 사람들은 혼자 왔다고 하던데.”
“…….”
“…일행이 있었나?”
“…아, 아뇨. 제가 착각했나보네요.”
그때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 내가 앙투안과 함께 온 걸 봤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내가 혼자 왔다고 말한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대충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망상을 멋대로 부풀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지. 어째서 나를 보고 어째서 미쉘이라고 부른 거지?”
“…아, …그러니까 그게…….”
“괜찮으니 말해봐.”
“…….”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쥴리앙이 처음 만날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 가명을 써온 것에 대해
남자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설마 쥴리앙이 한동안 불렸던 이름이 미쉘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남자가 먼저 정답을 말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계셨어요? 미, 아니……쥴리앙이 다른 이름으로 불려온 것을.”
“음, 뭐 일단. 한동안 주변 사람들한테 가명을 썼던 건 알고 있었어. 그 이름이 뭔지는 몰
랐지만.”
“…쥴리앙과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흐음, 사실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2년 전까지만 해도 줄곧 같
이 지냈거든. 지금이야 내가 지방으로 일자리를 옮겨서 자주 못 보지만 요즘은 보통 편지
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어. 전화를 하라고 해도 녀석이 워낙 말로는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데 미숙해서.”
“…….”
“그 녀석, 죽어도 그 이름은 말 안 하려고 하더니만 내 이름과 같아서였군. 귀여운 녀석.”
미쉘 오르로제 씨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바게트 조각으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웃어 보
였다. 그의 웃는 모습은 쥴리앙을 연상시켜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을 느
꼈다. 나는 마치 중독된 것처럼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온기 어린 얼
굴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커피를 들이켜며 나를 한 번 흘
끗 쳐다보는 눈과 마주치자, 나는 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잽싸게 고개를 조아렸
다.
낯선 남자와 함께 오묘한 분위기의 아침식사를 하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인생이
란 건 참으로 얄궂다고. 나는 단지 이곳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무사히 학업을 끝낼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빠리에서 유학생활로 들어서
는 길목에서부터 시작됐다. 우연히 마주친 몽마르트르의 화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
다. 나는 그 녀석의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녀석에게 사로잡혀버렸으니까. 난 녀석이 내 친
구라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감정이었다. 그는 날 사랑한
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갑작스런 고백에 진심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뒤늦게 겨우
내 마음을 깨달았을 땐 정반대로 그쪽에서 나를 잔인하게 밀어냈다. 상처받은 마음에 될
대로 되라는 듯 술을 마시고 속 안에 모든 것들을 긁어 토해냈다. 그렇게 매일 밤거리를 헤
매다 보니 어쩌다 게이 바까지 가게 됐다. 사실 게이 바이든 아니든 술을 마신다는 건 매한
가지란 생각에 굳이 자리를 피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부딪히게 된 남자가 왜 하
필이면 그의 형이란 말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자꾸 커져만 가
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모든 상황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바라서 벌어진 일이 아니
다. 지독하다. 인생이란 건 정말 지독하고 고약하다.
“그런데 어제 어째서 게이 바에 있었던 거지? 쥴리앙은 널 이성애자로 알고 있는 것 같던
데.”
“…….”
남자의 말에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려졌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는 내가 이성애자라
는 것까지 아는 상황에서 나와 게이 바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설마 그것도 알고 있을까?
그가 날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만약 그렇다면 이 남자는 게이 바에 있던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두려워졌다.
“…뭐,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
난처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널 만나게 되면 묻고 싶었던 이야기가 따로 있었는데, 대답해주겠어?”
“……뭔데요?”
“혹시 최근 쥴리앙이 변한 게 너 때문인가?”
“…….”
“예전의 녀석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중 앞에 나선다는 거, 꿈도 못 꿀 일이거든. 특히 자기
가 만든 음악으로 말이야.”
“…….”
“대체 너와 미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답을 채근하는 목소리엔 나와 그 일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 변
화란 것이 긍정적인 방향이든, 그 반대이든 내가 원인제공을 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기분
이 불쾌해졌다. 마치 쥴리앙이 그렇게 변한 것에 대해 내게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고 말하
는 것 같아서.
“……그게 왜 저와 관련되어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짚이는 데가 있어서 그래.”
“…….”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전혀 모르는 남자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나, 나와 쥴리앙의 관
계에 대해 묻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없든 간
에 내가 그 사람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었기에 침묵으로 대답을 일관했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그가 언론에 자신의 존재를 밝힌 후로도 계속 만나고 있나?”
내 시선에서 견제와 의심의 인상을 받았는지 남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참
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겉보기엔 내게 답을 강요하지 않고 있지만 여러 가지
로 말을 바꿔가면서 결국은 앞선 질문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대답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
다. 나는 남자의 대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요.”
“……아, 혹시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
입가에 띤 엷은 미소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단념의 의사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
소는 동시에 암묵적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어
쨌든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내가 호텔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한동안 단절되었
다.
세탁된 옷이 오자 나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이러저러해도 어쨌든 어
젯밤 이 사람에게 신세를 진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조금 많은 금액의 세탁비용을 내밀었
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받기를 거부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을 내
밀었다.
“이거, 내 명함이야.”
미쉘 오르로제라고 쓰여 있는 명함 앞엔 독뛰에흐docteur라는 호칭이 붙여져 있었다. 명
함은 그가 아를이라는 지방의 종합병원 정신과에 소속된 의사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왠
지 이 남자의 독특한 대화 방식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나를 찾아오는 비용으로 쓰면 안 될까? 지금이야 서로 정신
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쥴리앙에게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부터 널 만나게 되면 네
게 듣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내가 쥴리앙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도 남아있고…….
내가 일하는 곳이 조금 멀어서 오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꼭 와줬으면 좋겠다.
되도록 빨리.”
“…….”
나는 호텔을 나왔다. 아무런 대답도 남기지 않고. 길을 걸으면서 종이를 받아든 손을 주머
니에 집어넣고 온몸이 떨리도록 불끈 쥐었다. 구겨진 종이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손가
락 마디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사실 나에 대한 부담스러운 호기심만 제외하면 미쉘 오르로
제 씨는 좋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비단 쥴리앙과 닮아서만이 아니었다. 배려 깊은 태도나
어른의 여유로운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신의를 느끼게끔 했다. 사실 얼마 전부터
한 가지 궁금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쥴리앙이 어째서 그런 극과 극의 두 얼굴을 가
지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게 진짜 그의 모습인지. 그리고 내게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변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쉘 오르로제 씨는 분명 이 궁금증을 명쾌하게 해결해줄 것이
다. 하지만 나는 그를 찾아가진 않을 것이다. 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세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녀석에 대해 온전
히 이해해버리면 나는 냉혹한 현실을 무시하고 또다시 그 고약한 착각에 매달려버릴지도
모르니까. 그 추잡한 집착은 나를 또다시 그 앞에 뻔뻔하게 나서게 할지도 모른다. 쥴리앙
을 다시 찾아가면, 녀석은 또 어떤 말들로 나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릴까. 두려운 건 그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미쉘 오르로제 씨를 찾아가지 않는 이유였다. 그건 나 스스로에 대
한 최소한의 자기방어이자 마지막 이성이었다.
나는 그 이후 더 이상 술을 마시러 밤길을 헤매지 않았다. 자신을 쥴리앙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소개한 남자, 미쉘 오르로제 씨를 만난 뒤 나는 깨달았다. 술 따위로 감정을 잊
으려는 행위가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를. 쥴리앙과 비슷한 얼굴이 웃는 얼굴을 본 뒤 얻
은 건 가슴속에 또렷하게 박히는 현실의 고통. 그리고 쥴리앙에 대한 병 같은 집착과 미련
뿐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시체처럼 침대에 몸을 묻었다. 이
젠 정말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쥴리앙과 관련된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애써 다른 일을 찾는 노력조차 지겨워졌다. 차가운 침대 시트 사이로 나는 때때로 꿈을 꾸
었다. 그것은 언제나 그날에 대한 기억의 번복이다.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시선, 나를 비웃
으며 다른 남자에게 입을 맞추던 냉소를 걸친 입술, 독을 품은 말들. 그것들은 내 머릿속에
서 반복될수록 점점 더 생생하고 잔인하게 내 심장을 가르고 그 안에 몇 번이나 되새겨졌
다. 하지만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다행이라고 여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
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자신의 살을 뜯어 먹는 소모적인 행
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건 시간이
주는 망각에 기대어 고통이 무뎌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
야, 조금만 견디면 나아질 거야. 그런 무력한 말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주어진 이 고통을 즐기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음 한 편에선 이 괴로움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다
른 한편에선 나는 이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쥴리앙을 잃는 것만큼이
나 그를 좋아했다는 이 감정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건 지금껏 단 한 번
도 겪어보지 못한,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나를 죽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쥴리앙에 대한 감정을 잃고 싶지 않다. 이런 모순된 마음 따위. 나를 조금씩 죽여 가는 마
음 따위. 나는 이대로 놔두어야 하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
아를. 미쉘 오르로제 씨가 일한다는 그 남부의 작은 도시의 이름은 우연치 않은 곳에서 다
시 언급되었다. 어머니께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였다.
[너 아직 아를에 사시는 작은 외할머니께 한 번도 연락 안 드렸지? 내가 프랑스에 가자마
자 연락드리라고 전부터 말했었잖아.]
“……그냥 좀 바빠서요.”
[어휴, 안 그래도 할머니께서 얼마 전에 전화하시면서 얼마나 속상해 하셨는지 알아? 몇
년 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에도 네가 프랑스에서 유학 생각하고 있다니까 오면 꼭 놀러 오
라고 하셨잖아. 크리스마스 전에 연락드리고 찾아가서 함께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니?]
“…….”
[너 2월 중에 또 한 번 일주일간 무슨 연휴 때문에 학교 쉰다고 했었지? 언제였더라?]
“다음 주 부터에요. 스키방학이에요.”
[아무튼 그 나라는 별 희한한 방학도 다 있구나. 아무튼 내 전화 끊으면 바로 가르쳐준 전
화번호로 연락해서 찾아가겠다고 말씀드려. 그동안 연락 못 드린 것도 사과드리고.]
“……알았어요.”
[숙부랑 숙모한테도 안부 전하고. 알았지?]
“네,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엄마. 전화세 많이 나오겠어요.”
[어머, 얘 좀 봐. 평소에 먼저 연락도 거의 안 하면서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구니? 전화해도
잘 받지도 않으니까 오랜만에 해서 그러는 거잖아.]
“…….”
[……진호야,]
“말씀하세요.”
[요즘 무슨 안 좋은 일 있니? 목소리에 영 힘이 없는 거 같다?]
“……별일 없는데요. 아마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봐요.”
[…….]
“걱정 마세요, 엄마. 저도 이제 어른이라고요.”
[자식이 백발이 성성해져도 부모는 그저 물가에 보낸 어린애처럼 보인단다. 넌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최소한 네 자식이 생기기 전까지는 엄마 마음 이해 못 할 거
야.]
“……알았어요. 엄마 말대로 항상 조심할 테니 엄마도 건강하세요.”
[그래, 호호. 내가 우리 진호 사랑하는 거 알지?]
“네, 저도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프랑스 아를에 계신 작은 외할머니는 70년대에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셨다. 장남인 나의
외할아버지와는 상당한 나이터울을 두고 태어난 막둥이셨는데 독일로 떠나시게 된 것도
돈 때문이라기보단 워낙에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할머
니께서 근무하던 대학병원에서 독일로 유학 온 프랑스인 의대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결혼한 뒤에도 몇 년간 부모님께 서양인과 결
혼했다는 사실을 숨기셨다고 한다.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폐쇄된 사회였기 때문에 서양인
과 피를 섞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할
머니는 이제 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의 가족들에게 남편과 자식을 보이기로 결
심하셨다. 서양남자와 갈색머리의 자식을 안고 집에 찾아갔을 땐 정말 말 그대로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마을의 유지였던 증조부께선 평소에도 얼마나 보수적이셨는지 수
치심에 못 이겨 그 아이를 동네 저수지에 던져버리려고까지 하셨다고 한다. 나의 외할아버
지가 겨우 뜯어말리셔서 끔찍한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지만, 결국 그 부부는 부모에게 제
대로 된 결혼 허락도 받지 못하고 쫓기듯 한국을 빠져나와야 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결국 그들은 한국의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증조부가 간암말기의 진
단을 받으신 뒤 병세가 심해지던 중 할머니가족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제야 힘
겹게 뻗은 손으로 어린 손자를 쓰다듬어보시곤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셨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이었다고 한다.
아를로 떠나기 이틀 전, 나는 까트린느에게 연락했다. 영상제때 샌드위치와 함께 전해줬
던 피크닉바구니를 아직 돌려주지 못해서였다. 다음날, 우리는 예전에 처음 마주쳤던 샹젤
리제 근처의 찻집에서 다시 만났다.
“맙소사……, 대체 뭐야, 그 말도 안 되는 얼굴은.”
영상제 이후 처음 재회하는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멋쩍은 듯 웃
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나는 오늘 기숙사에서 나오기 전 거울을 보고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삼켜야 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최근 며칠 간 거의 먹지 않은 탓에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볼품없이 말라있었고, 그 사이로 움푹 들어간 눈은 바람이라도 새어 들어
갈 것처럼 휑뎅그렁해져 있었다. 나는 메마른 입술로 그녀의 볼에 비쥬를 하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까트린느.”
“…….”
“자, 여기. 바구니 돌려주는 거 늦어서 미안해. 늦었지만 샌드위치, 정말 맛있게 먹었어.
고마워.”
내가 내민 피크닉 바구니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내 변해버린 얼굴에 놀란 눈을 하
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괜찮아?”
“응, 덕분에.”
“……지금 내 덕분에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욕이라는 거, 알아?”
“하하……, 그런가.”
나는 그녀의 말에 부서지는 웃음을 지었다. 머쓱해서 일부러 웃은 것이었는데 까트린느
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지냈냐는 까트린느의 말에 나는 그저 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다고 말했
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이젠 거짓말이 습관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가
장 끔찍했던 날들을 뻔뻔한 거짓말로 대신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
는 중이다. 그녀는 올 크리스마스 때 롤리타와 그리스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여행 중
롤리타와 트러블이 생겨서 여행 도중에 돌아올 뻔한 일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
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녀의 불만스런 표정까지 질투가 났다. 사랑하니까 싸울 일도 생기
는 거겠지. 서로 사랑하니까.
우리의 대화는 주문한 홍차가 나오면서 잠시 멎어졌다. 까트린느는 흑장미무늬의 네일아
트가 그려진 손으로 컵을 쥐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저……지노, 미쉘……아니 쥴리앙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있니?”
“…….”
그녀의 질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가 무관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
정은 내 대답에 놀란 듯했지만 그것은 미묘하게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녀석,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그래, 자신이 쥴리앙이라
는 것을 밝힌 것까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어째서 나나 롤리타는 물론, 네게까지 연락
을 끊어버린 거지?”
“…….”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알고 있어?”
“……나도 모르겠어.”
나는 부드럽고 연한 홍차를 삼키면서도 입안이 쓰디쓰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설명한들 무엇이 바뀔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조차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애
써 그녀에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내게도, 그녀에게도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
를 바라보는 까트린느의 슬픈 눈은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웃음소리를 입술 밖으로 터뜨리며 말했다.
“……후후, 웃기지도 않지? 그 녀석, 정말 괘씸해. 정말 이름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
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 주는 게 아니었어.”
“……무슨 말이야?”
“미쉘 미라쥬, 그 이름은 바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지어준 거거든.”
“네가 그 이름을 지어줬다고……?”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말해줄게. 미쉘이 어떻게 미쉘 미라쥬
란 가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를. 내가 미쉘의 이름을 지어주게 된 건 그를 처음 만난 날
이루어졌던 대화 때문이었어. 그와 처음 만난 건 내가 너와 만나기 딱 2년 전쯤이었지. 나
는 그때 몽마르트르의 작은 갤러리에서 일하고 있었어. 그래서 출퇴근하면서 테르트르 광
장을 자주 지나갔었는데 사실 그때 처음 미쉘을 보게 됐어. 대부분의 화가들이 자신의 그
림들을 챙기고 돌아갈 이 시간에, 처음 보는 화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는 게 눈에
밟혔던 거야. 나는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급한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다가갔어. 이젤
에 있는 그림들은 하나같이 검은 칠흑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원색이 거칠게 채색되
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화폭에서 나는 그린 사람의 섬세한 자아가 그대로 느껴졌어. 큐레
이터로 일하면서 여러 그림을 봐왔지만 그 녀석의 그림은 정말 독특한 인상이었지. 게다
가 자신의 사인도 적혀있지 않은 그림을 세워두고 혼자 앉아있는 사람이라니, 보통의 화
가 같지도 않은 몽마르트르 화가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어. 나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말을 거니까 그가 겨우 힘겹게 고개를 들었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위험해
보인다는 거였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 초점 없는 공허한 눈
은……그 녀석 눈 말이야, 보고 있으면 가끔씩 마음 한구석이 아프게 할 정도로 슬퍼 보여.
그때 처음 봤을 때에도 그랬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실 보통의 나라면 그냥 지
나쳤을 거야. 다른 사람한테 깊이 관여하는 건 별로 내 취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쩐
지 그럴 수가 없었어. 그대로 두고 가면 그가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거든. 그래서 나는 같이 있을 구실을 만들어 두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어. 그
러자 미쉘이 이렇게 말하더라. 오늘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그림을 그려달라며 손님용 의자에 마주앉았어. 어떻게든 도와
주고 싶었으니까. 내 예상 밖의 행동에도 녀석은 별 반응이 없었어.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
이며 말했어. 괴로운 일을 되새기는 일은 자신만 아플 뿐이라고. 자꾸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말이야. 사실 그 이외에 해줄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 그런데 토닥이
던 어깨가 들썩이는 것 같아서 괜찮냐고 물으니까 흐느낌을 억누르며 내게 말하더라. 오늘
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날인데 자신은 가지 않았다고……아니, 갈 수 없었다고.”
“…….”
“……사실은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다고, 하지만 동시에 그를 증오 했다고 말했어. 자신
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분노의 눈빛만을 보여 왔는데, 그의 다정한 손길에 따뜻한 말 한마
디 전하지 못했다며……그렇게 끝끝내 진심을 내어놓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자신
을 학대하듯 언성을 높였지. 결국 그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참고 참았던 눈물을 손가락 사이
로 끊임없이 흘려보냈어. 나는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
해줬어. 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알고 계셨을 거라고. 이런 당신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었을
거라고. 만약 모르셨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하늘에서 이렇게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
을 거라고……. 그리고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있으니 분명 편안 곳으로 가셨을
테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말했어. 그 말을 모두 듣더니 그제야 미쉘이 조심스럽게 나와
눈을 마주보았어. 그러고선 마치 소년처럼 부끄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닦으며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지. 그때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참 뒤에 생각해보니 그
건 “고마워요”라는 말이었어.
잠시 동안 우린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미쉘은 멎어가지만 조금씩 삐져나오는
눈물을 수시로 옷소매로 훔치며 애꿎은 자신의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 나는 그
에게 무언가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손수건을 건네주며 물었어. 어째서 당신의 그림엔 이름
이 쓰여 있지 않느냐고. 그는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이름을 잃어 버
렸습니다. 오래전부터……. 저는 여전히 내 이름을 모르겠어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난 지금도 그때 목소리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어. 그 말이 내게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와 닿았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
어. 그 눈은, 마치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묻는 것 같았지. 순간, 나는 그를 보며 어쩐지 모
성애를 느꼈어. 미운 오리새끼처럼 보였달까.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어. 그렇다
면 내가 대신 지어줘도 괜찮겠냐고. 이름이 없다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거나 마
찬가지니까. 그리고 그건 무척 슬픈 일이라고.”
“……그 이름이……”
“그래, 그 이름이 미라쥬였어. 미쉘 미라쥬. 그에게 혹시 좋아하는 이름이 있냐고 물으니
까 한참을 고민하더니 미쉘이라고 말하더라고. 난 거기에 성을 붙여준 것뿐이야. 미라쥬라
고. 그때 그의 모습과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지. 미쉘은 내가 붙여준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웃어 보였어. 그때 입가에 번진 미소는……아름다웠어. 그래, 마치 반짝이는 초승달 같아
서 무척이나 아름다웠어…….”
“…….”
까트린느는 말을 마치며 바람에 스러질 것 같은 슬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고인(故
人)의 과거를 회상하듯 그녀는 자신이 처음 만난 미쉘 미라쥬를 경건하게 기억해냈다. 나
는 실제 그때의 미쉘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녀가 말하는 모습이 어땠을지 알 것만 같
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까트린느가 알고 있는 미쉘은 내가 알고 있는 미쉘과 무척 흡사했
으니까. 그것이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슬퍼졌다. 그렇게 여리고 섬세한 영혼을 가진
녀석이 내게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던 현실이 되새겨져서. 그녀는 차를 마시며 잠시 생각
에 잠기는 듯싶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린 절친한 친구가 되었어. ……사실 절친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진 모
르겠다, 지금 이 상황까지 와서는.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그를 온전하게 보듬어 주는 데
에 한계가 있었다는 거야. 미쉘은 스스로 내가 적당한 선 이상을 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는 새 이름을 얻고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 큰 충격이었는지 마음의 안정
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어. 이리저리 아무 남자하고나 몸을 섞고, ……잠깐이긴 했지만 아
마 마약도 조금 했을 거야.”
“마…, …그게 정말이야?”
“응, 하지만 마리화나 정도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을 거야. 어쨌든 내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대학에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 뭔가에 집중할 것이
생기면 나아질까 싶어서. 그랬더니 그걸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더라. 전공이 작곡이라고 하
길래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변한 건 별로 없었어. ……지금 와서 생각하건
대, 아마 대학에 간 것도 방황의 일종이 아니었나 싶어. 무미한 프리섹스와 동급 정도의.”
“…….”
“그런데, 최근 들어서 나는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진짜 미소를 보기 시작했어. 그게 언
제부터인지 알아? 지노, 너를 알고 나서부터야.”
“…….”
그녀의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까트린느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야. 사실 처음 볼 땐 너와 미쉘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너 역시 미
쉘 못지않게 불안전하고 위태롭게 보였거든. …사실 내가 널 많이 봐온 건 아니라서 오해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난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되었어. 자
신의 삶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전혀 없던 미쉘이 점차 너로 인해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할
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 미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노, 너만이 그를 붙잡고 보듬을 수
있을 거라는 어떤 근거 없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어. 어쩌면 둘의 불완전한 모습을 서로 보
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
“그 아인 너에게만 마음을 열고, 너에게만 길들여지길 원했던 것 같아.”
나는 까트린느와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
릴 때쯤 내 발길은 어느덧 센느강의 강가에 닿아 있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살을 에며 옷 속
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오히려 코트의 여밈을 풀어버렸다. 마음이 한없이 갑갑하고 눅눅했
다. 헤어지던 순간, 그녀는 내게 말했다. 미쉘은 널 진심으로 좋아했어. 넌 미쉘을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어째서 주변에선 애써 잊어가려는
나를 들쑤시는 건지. 미쉘이 변한 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도 왜 자꾸 내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건지. 미쉘이 진심으로 날 좋아했더라는 까트린느의 말은 내게 기
쁨보단 슬픔을, 희망보단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건 이미 퇴색되어가는 과거형에 불과하
니까.
그래, 미쉘은 사라졌다. 그의 이름대로, 신기루처럼. 하지만 나는 이 허상을 좇아 계속 사
막의 끝을 걷고 있다. 태양이 작열해도 칼날 같은 밤바람이 휘몰아쳐도 걷고 있었다. 왜 나
는 멈추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미쉘의 망령에서 헤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걸까. 알고 있다. 이대로 걸어서 사막의 끝까지 닿는 순간, 그 순간이 곧 자멸을 의미한다
는 것을.
나는 바람 속에 흔들리는 걸음을 벤치 앞에서 멈추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쉘이 나를 위
로해 주기 위해서 왔던 그 자리였다. 눈앞에 펼쳐진 금빛으로 빛나는 센느강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칸느에서 바닷바람에 흩날리던 그의 백금발, 단정하게 감긴 눈을 감싸
고 있는 금빛 속눈썹이 하나하나 눈앞에서 그려질 듯 아련하게 떠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
게 또다시 세세하게 연상되는 망령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랜만에 술이라도 마시
러 갈까 했다가 이내 생각을 멈추어 버렸다. 어느새 내 머릿속에선 얼음에 차갑게 녹아있
는 황금빛 액체를 생각하면서 그의 성, *오르로제Orrosee를 떠올려 버린 것이다. 까트린
느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인 너에게만 마음을 열고, 너에게만 길들여지길 원했던 것 같
아.
까트린느의 말은 틀렸다. 길들여진 건 그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나 역시 그를 떠올리
게 하는 별것 아닌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빠리의 금빛 야
경을 보면서도, 거리에 세워진 베스파를 보면서도, 단순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연상
되는 그 무엇에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사물들은 이제 모두 독 묻은 가시가 되어 내
심장을 찌르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을 뽑아낼 용기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젠 끝내야
한다. 생산성 없고 무의미한 자해의 반복을.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나는 미쉘의 연주를 들었을 때 그가 내게 남겼던 주문이었다. 익숙하다 생각했던 그 말은
생 텍 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나왔던 대사였다. 어린왕자,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느꼈던
이미지였다. 어째선지 눈물이 났다. 그때 그 말이 어린왕자에서 나왔던 대사라는 걸 알았
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너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퇴색되어버린 후회였
다. 나는 새어나오는 눈물을 센느강의 강바람에 흘려보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가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어. 너는……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어…….”
네가 길들인 꽃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그 책임, 이젠 나도 놓을 거야…….”
주) 쥴리앙의 성 ‘Orrosee’의 오르Or는 ‘황금’을, 로제rosee는 ‘이슬’을 의미한다.
삶은 그림자와 함께 우리를 속인다.
기쁨을 달라고 하면 고통이나 절망을 기차에 함께 실어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들의 무정하고 둔한 심장을
우리가 한번쯤 열정적으로 숭배하고 미친 듯이 키스했던,
금빛 찬란한 머리칼 속에서 발견한다.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