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꺼져가는 백열등 아래에서 터져 나온 비명의 색
금요일 저녁이었다. 지하철은 주말의 유희거리를 위해 나온 사람들로 들떠있었고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홀로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두 번째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는 것은.
나는 언제나 늦었다. 그날 그와의 약속시간에도, 그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닫는 것도 항상 시
간에 뒤떨어져 그것을 붙잡기 위해 달려야 했다.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이 격렬한
감정에 책임질 자신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하지만 이것 역시 두 번째였다. 프랑스로 유학
오게 된 것 이후 아버지나 주변의 눈에 신경 쓰지 않고 뚜렷한 신념으로 저지르는 두 번째
의지.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그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에 대해 여전히 불안감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
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더 이상 멍청한 고정관념 때문에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
다.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뿌리박혔던 금제는 나는 물론 주변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
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금기. 그 사실은 이 순간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에
확실한 구실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두
다리는 너무도 절실하게 그 남자에게 향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젠 두 번 다시 멍청하게 뒤
쫓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더욱 속도를 냈다. 그는 지난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고, 그 자리에서 언제나 그렇듯 따뜻하게 반겨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미쉘의 집 앞에 걸음을 멈추었을 땐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하얀 울
타리 너머의 집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불이 꺼져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건 누가 보아도 느낄 수 있는 버려진 집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오롯
이 담은 둥근 유리창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응당 있어야 할 상아색 그랜드피아노가 보
이지 않았다. 커튼 역시 을씨년스럽게 뜯어져 한쪽에 휘감겨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저를 눌러보고 문에 달린 손잡이를 앞뒤로 움직여보았지만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미쉘은 떠났다. 그 집을.
마음이 초조해졌다. 예상치 못한 남자의 부재와 버려진 집에 심장이 불안하게 헐떡였다.
나는 다급해진 마음에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그리고 빠르게 수화기를 들어 주
머니에 있는 동전들을 있는 대로 쑤셔 넣은 뒤 그의 휴대폰 번호를 누를 때에도 나는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버튼을 헛눌렀다. 하지만 겨우 전부 다 누르고 수신음이 가기 얼마 되지
않아 그 시도마저도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의 녹음된 목소리는 존재하
지 않는 번호라고 알리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며 그의 전화번호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눌러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기숙사로 되돌아 걸어왔다. 한발 한발 발을 뗄 때마다 진창을 걷는 것
처럼 발걸음이 무겁게 질컥였다. 미쉘은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 않는 것일까. 너무 늦어 버
린 것일까.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평범한 대학생
미쉘 미라쥬가 아닌 촉망받는 뮤지션이니까. 그래서 나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생활들
을 정리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그러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를 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부수적인 이유라면 나는 다시 그를 찾으러 갈 용기를 가져도
되는 것이다. 내심 불안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지만 적어도 최악은 아니었다. 늦었으면 그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위로 속에서 그를 만나야겠다는 결심
이 더욱 강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어떻게…?
지친 정신으로 쓰러지고 나서 다음날 느지막한 아침에 눈을 떴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컴
퓨터를 켜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것을 쪽지에 받아 적고 나서야 안심
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주머니에 잘 접어 넣고 밀린 과제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쉘과 미사의 일로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던 과제들은 밀린 사채처럼 나를 압박
했다. 아직 상황적으론 정리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적어도 마음만큼은 명쾌했다. 그동
안 나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주변사람들에게 본의 아닌 죄를 저지른 것에 너무도 고통스러
웠다. 하지만 모든 감정을 깨끗이 받아들이고 인정한 지금만큼은 무척이나 홀가분했다. 나
는 언젠가 곧 다시 만나게 될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내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아르토 교수에게 퇴짜를 받았던 리포트도 마음을 가다듬고 전부 다시 고쳐나갔다. 그렇게
식사도 거르고 늦은 저녁까지 꼬박 과제에만 매달린 결과 나는 겨우 당장 해결해야 할 과
제 두어 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완전히 몰두 되어 그려댄 몇 십장의 과제용 드로잉
을 파일에 담아 넣고 나서야 겨우 경직되었던 목을 젖힐 수 있었다. 뇌수 안에서 뇌의 똬리
가 힘없이 풀어져 버리는 것 같이 어지러웠지만 나는 그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것들을 끝
내고 나면 하려고 했던 일이 나를 기대감에 젖게 했기 때문이다.
어젯밤, 어떻게 하면 우연하게라도 미쉘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던 나는 눈
을 뜨자마자 한 가지 방법을 불현듯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 번뜩이는 생각이란 다름 아
닌…인터넷에서 음반사 주소를 찾아내어 그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랬다. 모
든 과제를 집중해서 빠르게 끝낼 수 있게 만든 그 기대감이란 건 사실 맹목적이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그 하나뿐인 실낱같은 가능성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뮈즈에선 이번에 기획사 일까지 연계해 소수의 실력 있는 뮤지션들
을 키워나간다는 명목 하에 사업을 추진시켜나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미쉘은 그런 뮈즈
의 사업계획에 속하는 케이스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이곳에 시간 날 때마다 앉아있으면 어
떻게든 마주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시간만 나면 뻔질나
게 음반사 뮈즈의 건물 앞에 찾아갔다. 평일이라면 수업을 마치고 과제까지 하고 나면 남
는 시간이라야 늦은 저녁 두어 시간뿐이었지만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그 건물 앞
벤치를 지켰다.
그렇게 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오늘도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샤
워를 하고, 깨끗하게 면도를 하던 중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벌써부터 언제 끝
날지 모르는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었다. 슬슬 허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뭐 하러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거울에 한쪽 팔을 기댄 채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랜
만에 자세하게 뜯어보는 내 모습이었다. 한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앓았던 탓에 몸은
아직 전부 회복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미미하게나마 생기는 남아있었다. 그 생기는 다
름 아닌 내가 품고 있는 기대감과 용기가 준 것이었다. 내 마음을 인정한 뒤 나는 차츰 다
시 이전의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겉보기에만 멀쩡해 보이는 유학생활이 아닌, 처음 왔
을 때처럼 수업도 열심히 듣고 발표나 과제 준비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건 모두 미쉘을 다
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에서 발생한 삶의 의지였다.
나는 예전부터 누구에겐가 마음을 주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
주었다가 그것에 휘둘려서 내 일에 지장을 준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여
자친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미쉘에게 마음이 휘둘리는 것은 즐겁
다. 물론 한 번 갈등에 빠지면 끝도 없이 내 생활을 망쳐놓지만 사실 그것조차 왠지 모르
게 즐기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 나는 거울 속에선 오른쪽에 새겨진 귀걸이를 새삼스럽게
건드려보았다. 그가 내 육체에 남긴 상흔. 그렇게 생각하니 그것이 몹시도 사랑스럽게 느
껴졌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향해 멋쩍게 한 번 웃어 보였다. 어쩌면 그 녀석도 날 애타
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젠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나는 최대한 보기 좋은 모양새로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빠리의 겨울은 구름이 거의 항
상 끼어있고 비도 예고 없이 내렸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공기만은 건조했다. 나는 한층 고
양된 마음으로 맑은 공기를 깊이 폐부로 빨아들였다. 대로를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가 옆에 섰다. 남자의 품에 안긴 아이는 한두 살쯤 되어
보였고, 아버지를 닮아 연갈색의 보드라운 머리칼과 커다란 파란 눈을 가진 천사 같은 모
습이었다. 티 없이 맑은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이가 나
를 보더니 간지럽게 까르르 웃어대며 제 아비의 품에 안기자 아이를 안고 있던 남자도 나
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왠지 그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뮈즈」라고 파란 네온사인으로 쓰인 높다란 건물 앞에서 나는 언제나 그렇듯 망설이는
발걸음으로 머뭇거렸다. 몇 번이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까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서 그를 찾는다고 해서 그곳 사람들이 쉽사리 그를 만나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역
시 방법은 하나였다. 그가 나오거나,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나
는 언제나 그렇듯 건물 주변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를 찾아 털썩 앉았다. 아까도 마음의 준
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무작정 기다리자니 또다시 허무감이 밀려왔다. 피곤함이 몸을 짓
누르기 시작했다. 요 며칠 계속 낮에는 열심히 학교 공부에 충실하고 밤에는 추운 거리에
서 나앉아 있으니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은은한 한기를 담고 있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눈이 감겨왔다. 잠겨가는 의식 속에서 예전에 그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
다. 앞으로 내가 널 다시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젠 됐어. 이걸로 끝이야. 끝……?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 마지막 말을 곱씹고 있던 중 건물 앞 도로에서 울리는 차의 경적
소리 때문이었다. 왠지 모를 익숙함에 눈을 뜨게 한 경적소리는 까만 엔틱카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역시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그 차는 다름 아닌 미쉘의 것이었다.
“……미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 착각한 것이 아닌지 그것을 다시 한 번 눈을 깊게 삼킨
뒤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수트에 짧은 갈색머리를 한 남
자였다. 그 남자는 자연스럽게 미쉘의 차처럼 보이는 보조석 쪽 문을 열다가 순간 멈칫했
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째선지 그 남자가 안경 너머로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곧 차를 타고 그대로 출발해버렸다. 나는 잠시 넋
을 놓고 있다 그대로 달려가는 그 차 쪽으로 달려갔다. 익숙한 번호판의 번호, 그리고 운전
석 쪽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익숙한 금발머리.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불규
칙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뒤에 오고 있는 택시를 다급하게 잡아탔다. 운전기사에게
앞에 가는 검은 엔틱카를 뒤쫓아달라고 외쳤다. 자동차 시트를 붙잡고 있는 손이 견딜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미쉘이다. 운전하고 있던 사람은 분명 미쉘이었다.
미쉘과 정체 모를 남자가 탄 자동차는 대로를 빠져나와 한적한 주택가에 세워져 있었다.
택시를 그 차 뒤에 세우게 한 뒤 돈을 대충 지불하고 내렸다. 미쉘의 차는 비어 있었다. 조
급해진 마음으로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다가 두 인영이 차 앞에 세워진 건물 계단을 올라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둘 중 뒤따라가는 큰 인영은 분명 미쉘의 모습이었다. 나는 빠
른 걸음으로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붙잡고 두세 계단씩
넘겨 밟으면서 생각했다. 붙잡아야 한다. 붙잡을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이젠
더 이상 놓치지 않을 테니. 심장은 며칠 전 그의 집으로 달려갈 때처럼 고양되어 있었다.
확신 없는 길고 긴 기다림 끝에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제 모든 것
을 완벽하게 이전처럼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4층으로 향하는 계단
으로 오르던 차에 나는 기획사 건물에서부터 좇아온 두 남자와 마주치게 됐다. 아까 그들
이 계단을 올라갈 때에도 이상하게도 나를 의식하는 것 같던 그 의문의 남자는 열쇠를 열
고 문손잡이를 돌리려 하고 있었고, 미쉘은 그 뒤에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 미쉘!”
“…….”
내가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 뒷모습이 움찔하며 경직되었다. 나는 그제야 안
심을 하며 남아있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
었다.
“미쉘, 나야. 지…”
나는 반가움에 재빨리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얼른 다정한 미소를 마주하고 싶어 그의
몸을 나를 향해 돌리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멈
춰버렸다. 다시 마주한지 1개월도 채 되지 않았는데 미쉘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
선도 예전보다 훨씬 날카로웠지만 무엇보다 그 차디찬 눈동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날
카로움에 베일 것 같이 내게 꽂히는 그 눈동자는 이전에 내가 알던 미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원망이나 분노 따위가 섞인 것이 아니었다. 완벽한 무관심. 그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철저하게 중립적인 무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나는 숨이 멎어버린 것
처럼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재회의 기쁨에 만연했던 웃음이 한순간에 지워져 버렸다.
나는 그가 나를 다시 보게 되면 조금은 반겨줄 거라 생각해왔었다. 적어도 갑작스런 등장
에 놀란 표정이라도 지어 보일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낯선 태
도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혼란스러웠다.
“……미…쉘…….”
나도 모르게 몸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를 부여잡은 왼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리자 나는 당혹스러움에 재빨리 손을 뗐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얼굴
은 가면 같은 얼굴로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서 총을 맞아 쓰
러져도 눈 깜빡하지 않을 것만 같은 냉정한 시선이었다.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 견딜 수 없
어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는 사람이야, 쥴리앙? 누군데 너를 미쉘이라고 부르는 거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글쎄.”
“……!”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를 가르며 내뱉어진 그의 목소리는 무감각함이 지독하게 묻어나왔
다. 그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여전히 감정 없는 눈동자. 나는 그
토록 그리웠던 남자의 눈을 마주하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글쎄, 글쎄라고? 어떻
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아무리 내가 그때 잘못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그
렇게 정말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 따위를 보려고 널 그
토록 기다린 게 아니란 말이야. 나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가
쁜 숨 사이로 차오르는 먹먹함에 눈물이 찔끔 새어나오려고 했다. 입술은 아랫입술을 깊
게 깨문 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한 눈물이나 머금고 있는 스
스로에게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말해. 제발 멍청하게 굴지 마. 차라리 화를 내. 뭐든지 간
에 말하란 말이야. 다시 만나려고 그렇게 기다려 왔잖아. 하지만 무엇을? 나는 미쉘을 만
나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은 나도 너를 좋아해왔다고, 이제야 뒤늦게 깨달
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눈동자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 미쉘은 이미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미쉘이 아니야. 쥴리앙 오르로제.
내가 모르는 낯선 이름을 가진 그의 본모습.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보
아왔던 미쉘의 모습은 그 어떤 것보다도 진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미쉘, …나,”
“-아, 이제야 생각났어. 이 멍청하게 생긴 동양인.”
“…….”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석고처럼 굳어있던 얼굴은 이내 끔찍하게 비틀리며 내 말을
삼켜버렸다. 남자는 조소를 걸친 입으로 그와 어울리는 말들을 유창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그동안 몸조심하고 잘 지냈나? 여기까지 어떻게 따라 온 거지? 설마, 더러운 게이새끼
가 네게 성추행한 것에 대해 지금 와서 정신적인 피해보상이라도 청구하러 온 거야?”
“……뭐……?”
“하긴. 이젠 나도 남들 이목도 있겠다, 협박해서 뜯어내려고 한다면 나도 말릴 수가 없겠
군. 좋아, 불쌍한 유학생에게 적선한다 치고 원하는 대로 주지. 얼마를 원하지?”
나는 그의 입에서 나열되는 예상치도 못한 말들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내 귀에 들린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남자는 결코 저런 말을 하지 못한다. 내게 상처 입
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는 나보다 성숙한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소년처럼 여리
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러지 마. 너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왜 이렇게 이제
와서 내게 잔혹하게 구는 거지? 그대로 숨이 멎어버린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그 지
독한 말을 내뱉은 입을 바라보았다. 멈추길 바랐지만 그 입술은 또다시 음습한 독기를 품
었다.
“얼마건 간에 우리끼리 조용히 해결하자구. 일을 크게 내봤자 네게도 좋을 일은 없을 거
아냐? 너까지 그 더러운 호모라는 딱지가 붙을지도 모르는데, 안 그래? …조만간 변호사
를 보내지. 피해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그날 일을 주섬주섬 떠올리는 건 나 또한 역겨우니
까.”
“…….”
내 눈에선 의식할 틈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물 따위를 흘리는 건 비
참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하악 하고 숨이 격하게 삼켜졌다. 남자는 그
런 내 모습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 번 스윽 내리깔아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나와 마
주하는 것조차 싫은 것처럼 몸을 돌렸다. 미쉘의 곁에 있던 남자도 안경을 고쳐 끼며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눈물에 젖은 목소리
로 외쳤다.
“자, 잠깐만……!”
“…….”
내가 다급하게 좇아가 어린아이처럼 그의 옷깃을 붙잡자 그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분명한 경멸이 새겨진 눈이었다. 그리고 그 경멸 속에서 미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감
정의 흔들림.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미쉘……. 너, 너……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말을 뱉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저렇게까지 말하는 남자 앞에서 과거에 감정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고 부질
없는 짓인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비슷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심하고 말
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 또한 그렇게 어리석게 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끝
까지 비굴하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를 원하는 내 마음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절실했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어둠 속에서 짙은 냉소를 머금은 입술을 다시 한 번 비틀
어 보였다. 그리곤 내 우문(愚問)에 답을 해주겠다는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문에 반
쯤 들어가 있던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채어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 안에 파묻었다.
남자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잠시 밀치는가 싶더니 이내 혀를 깊이 받아들였다. 내 동공
은 급속히 축소하며 현실을 감춰버리고 싶어했다. 흐릿하게 들썽이는 백열등 아래에선,
두 남자가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는 소리만이 꿈틀거렸다. 나는 두 눈을 감아버릴 의지조
차 잃어버린 채 미련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만 생동하던 심장은 그의 행동
에 무참하게 밟히고, 갈기갈기 찢겨졌다. 난자당한 심장은 피범벅이 되어 그대로 온몸을
밀랍처럼 굳혀버렸다. 내가 그렇게 굳은 몸으로 서 있자 그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왜 도망치지 않지? 집 안에 들어와서 몸이 뒤엉키는 것도 봐야겠나…?”
“…….”
그의 얼굴은 날카롭게 부수어진 파편들로 끔찍하게 재구성된 것 같았다. 그 모양은 소름
이 끼칠 정도로 잔인하게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든 보기 괴로운 그 이중적인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대로 쓰러져버리면 나는 내 앞에 존재하는 남자의 비웃
음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니까. 터져버린 심장의 혈액으로 몸이 결박된 상태에서, 내가 온
전히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은 눈물뿐이었다. 눈물. 피가 식어버린 차가운 뺨에 흘러내리며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던 눈물은 결국 아래로 하염없이 추락해버렸다. 그것이 바닥에 찢
어지는 굉음을 내며 깨져버리는 순간, 나는 그대로 응고되었던 몸을 깨어 부수고 뒤돌아
미친 듯이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나는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그가 나를 받아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잊지 못해서 다른 사람 따윈 사귀지도 못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미쉘에게 있어
서 오직 나만이, 자신만의 음악세계에 갇혀 있던 그의 외로운 영혼을 깨워주는 존재일거
라 자만해왔었다.
나는 벌을 받은 것이다. 옹졸한 이기심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농락한 죄. 그 대가는
내가 가했던 것보다 더욱 참혹하게 날이 선 채 내게로 되돌아왔다. 하지만……하지만 미
쉘, 나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날 네가 ‘아듀Adieu’라는 말을 남겼을 때. 네가 살
던 집을 옮기고 휴대폰 번호도 바꿔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순간
순간의 예감을 지워버렸지만 사실은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더욱더 확연히 알고 있었
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과 감정은, 이미 고즈넉한 과거로도 남겨질 수 없다는 것을. 내
친구 미쉘 미라쥬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신에게 그렇게 모질
게 굴었던 상대방을 다시 받아준다는 건 어쩌면 사랑하게 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것도.
그걸 머릿속으론 짐작하고 있었는데……혹시나 네가 나를 다시 보면 마음이 변할까 하
는……그런 위험한 착각에 빠져버려서, 너를 이렇게 좇아 온 거야. 단 한 번이라도 다시 직
접 얼굴을 마주보고, 네 다정한 목소릴 듣고 싶어서, 또다시 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면
서 널 뒤쫓았던 거야. 알고 있었는데……머릿속으론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뻔히 알고
있었던 거였는데……그게 실제로 벌어졌을 뿐인데……. 어째서 내 눈에선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나는 눈물에 희뿌옇게 왜곡되어진 공허한 도시 속을 달리며 넝마조각 같은 육체를 그대
로 내던졌다. 문득 누군가가 미쳐버린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
다. 그 소리는 내 안에서만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던 비명과 너무도 흡사해서, 나는 그것
에 또다시 한 움큼 눈물을 쏟아냈다. 그 비명을 가슴에도 가둘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
이라니, 나는 나보다 더 큰 고통 받고 있을 그 누군가를 동정했다. 인생이란 나에게만 끔찍
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잔인한 위안과 함께.
그대가 내 키스를 잊었다면,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으리라.
-애저넌 찰스 스윈번 Algernon Charles Swinbur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