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3)

# 13. 거짓말에 빛바랜 초상화의 색

며칠 뒤, 노엘바캉스가 끝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날 겨울비를 너무 오래 맞

은 탓인지 그 이후 감기로 심하게 앓았다. 그 열은 내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이성을 유

린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열에 녹아내려 가는 정신에 수업을 들을만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나는 억지로라도 학교에 갔다. 종강을 하려면 아직 두 달 정도 남은 데

다, 무력하게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워있으면 그날의 기억이 남은 기력마저 빼앗

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아픈 기색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

다. 이렇게 위태롭기 그지없는 정신 상태에서 누가 위로라도 해준다면 그대로 무너져 버릴

지도 모르니. 하지만 몸 상태는 악화되어만 같다. 얼마 전부턴 위가 쓰리기 시작하더니 식

사를 해도 몸에서 받아주질 않고 모두 토해냈다. 결국 난 수업 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미쉘이 있었다. 그가 깨져 금이 간 거울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

친 모습은 미쉘이 아닌, 나였다. 나는 가슴을 열어젖힌 채 붉은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

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심장이 있는 부분의 거울 조각을 쥐더니 한 손에 깨뜨려 버렸다. 

그의 손에선 붉은 피가 끓는 듯 솟아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베인 손에서 나온 피인

지, 거울 속 내 심장에서 나온 피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쓰이는 것은 이제 그의 심장과 

나의 심장 모두가 비어 버렸다는 것이다. 미쉘과 거울 속의 나는 그 유리의 잔해와 그것과 

함께 뒤섞인 혈액을 미친 듯이 집어삼켰다. 굶주린 짐승 같은 눈을 하고. 그것이 그 꿈의 

마지막이었다.

눈을 떴다. 쏟아지는 햇살에 나는 가녀린 나비의 날개 짓처럼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처

음 눈에 들어온 것은 창백하고 낯선 천장이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두렵다기보다는, 그

런 감각조차 잃어버려서 무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내가 왜 누워있는

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는 시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힘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고풍스런 건물들이 시선에 닿자 나

는 그제야 이곳이 프랑스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불현듯 지난 3개월간의 기억이 파노라마

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3개월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추억은 이미 몇 년은 흘러

버린 것 같이 노랗게 바랜 빛을 띠며 아득하게 느껴졌다. 먼 도피 끝에 나는 이렇게 또다

시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발버둥 쳐도 나는 이 현실 속으로 다시 돌

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이 

빈 껍데기는 심장을 빼앗아간 현실에서 다시 연속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하얀 천장이 푸르스름하게 보일 때까지 응시하다 의식이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의식을 놓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마치 남의 몸을 뒤집어

쓴 것처럼 말을 듣질 않았다. 뭘까, 이 상황은. 난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프랑스에 오

기 전까지 나는 오직 내 꿈만 생각하면 됐었다. 주변에 휘둘릴 틈도 없었고, 온전히 내 꿈

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스스로 극복해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잘 해왔다. 정말, 

정말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자기 컨트롤도 잘 해왔고, 힘들고 지칠 때에도 스스로 독려하

며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뭘까.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들이 모두 부질없이 

느껴진다. 수업 중에 겪은 사건 때문에 꿈에 대해 중간에 위기감도 느꼈지만 결국은 수상

까지 하면서 만족스런 결과를 얻어냈다. 나를 사랑해주는 연인도 생겼다. 그런데 난 지금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이 지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가슴을 억

누르는 죄책감과 상실감은 그날 이후 나를 계속 괴롭혔다. 쥴리앙 오르로제. 그 이름이 순

간적으로 머리에서 불려졌다. 아득한 고통에 또다시 의식이 흐려지려던 차에 문에서 인기

척이 들려왔다.

“아, 정신이 드셨군요. 지노 장 씨.”

“…….”

한 명의 여자 간호사와 함께 들어온 것은 키가 훤칠한 의사였다. 그는 깔끔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내 앞에서 파일을 뒤적이더니 청진기를 귀에 꽂았다.

“잠깐 상태를 진찰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간단한 검진 몇 가지를 끝내자마자 젊은 의사는 내 상태에 대한 질책을 쏟아내기 시작했

다. 

“도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틀 동안이나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쓰러지기 

며칠 전에 비까지 맞으셨다면서요? 아프면 푹 쉬어야지, 게다가 아무리 스트레스가 쌓이

는 일이 있으셨어도 조금씩이라도 식사를 하셨어야죠.”

“…….”

말 안 듣는 어린애를 나무라는 것 같은 젊은 의사의 태도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

다’라고 말할 뻔했다. 

“독감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스트레스성 위염까지 겹쳐 기력이 많이 소진되

셨습니다. 오늘은 병원에서 푹 쉬시고 상태를 체크해보고 내일이나 모레쯤 퇴원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셔서도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당분간은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집

중하세요. 식사는 위에 부담 주지 않는 것으로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요.”

“……네. 고맙습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일에 무언가를 휘갈겨 적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

다.

“참, 이제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는 움직여도 되니 식사 후 208호실에 한 번 가보세요. 장 

씨를 간호하시던 분이 어젯밤에 입원했다고 하던데.”

“네……?”

나는 의사의 뜬금없는 발언에 멍청한 목소리로 그것을 되물었다. 

“딱히 어디가 아파서라기보단 그녀 역시 과로 때문에 그렇답니다.”

내 물음에 옆에 있던 간호사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라면……”

간호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클립보드에 끼워진 리스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마드모아젤 우에하라…맞죠? 당신의 연인.”

“……미사가…입원을 했다고요…?”

“장 씨가 쓰러지고 나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드셨나 봐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

나는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사가 아프다니, 도대

체 왜? 그녀는 내가 알아온 누구보다 생의 활기가 넘치는 여자였다. 그것이 그녀가 아름다

워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입원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두 시간 뒤의 식사시간까지 태평하게 기다릴 순 없었

다. 오랫동안 자력을 잃었던 몸뚱이는 마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무기력했다. 나는 몸을 링

거 받침대에 애써 의지하며 208호 병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앞에 들어온 여자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부자연스

런 숨을 컥 하고 들이켰다. 여자는 가녀린 몸을 겨우 침대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 시선은 그녀의 눈은 짙은 사념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얀 살결은 부서지는 햇빛에 더

욱 창백하게 도드라져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미사와 같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사가 아니

었다. 

“……미사…?”

“…….”

나는 그 이질감에 조금 망설이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공허

한 눈동자를 붙잡기 위해서. 병실에서 감도는 음울한 공기에 내 목소리가 울리자 그녀는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 땅 밑으로 꺼져버릴 것 같던 눈동자는 나를 인지하고 내가 

알던 표정으로 엷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아는 미사가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미사가 말했다.

“왜 온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오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한 건가…?”

“…….”

그녀는 내 말에 다시 힘없이 피식하고 웃었다. 쓰디쓴 자조였다. 그 웃음에 한없이 빨려

갈 것만 같아 나는 다시 그녀를 채근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이렇게……”

아파 보이는 거야. 내가 아파서? 아니면……. 걱정스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쏟아지고 있었

지만 나는 그것을 입에 담아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목구멍을 억눌렀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들을 못다 이은 무력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올려다보며 미사가 말

했다. 여전히 자조 어린 얼굴이었다.

“그 표정, 정말 걱정해주는 것 같네.”

“걱정해주는 것 같은 게 아니라 걱정하고 있어!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진심을 자꾸 부정 당하는 것이 억울했다. 그녀가 걱정스러워서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찾아온 내 정성도 모르고 그녀를 속이고 있는 것 마냥 비꼬는 게 화가 났다. 하지

만 제법 노기가 서린 목소리였음에도 미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

다.

“지노, ……나를 좋아하니…?”

“…….”

그녀는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로 나를 당황케 만들었다. 연인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정해

진 대답을 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답이 나와야 자연스럽다고 여겨질 제

한된 시간을 어색한 침묵 속에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면 위험하잖아, 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를 사랑해?”

“…사랑해.”

“…….” 

“널 사랑해, 미사. 당연하잖아. 넌 내 하나뿐인 여자 친…”

“당연하지 않잖아……!”

“…….”

늦게나마 대답한 것을 보상하려는 듯 시멘트처럼 덧발라지는 말들은 그녀의 음산한 읊조

림에 잘려나갔다. 늦은 대답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들은 하나같이 짜증스럽고 거추장스러

웠다. 

“이제 제발 좀 솔직해져 봐. 차라리 대놓고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겉으론 날 좋

아하는 척, 착한 척하면서 내 마음을 멋대로 휘두르는 거 정말 짜증나. 알아? 너 같은 

거…!”

“…….”

“…난 정말 널 외롭지 않게 해줄 자신이 있었어. 내 쪽에서 계속 진심을 보이면 네 단단하

게 굳어진 마음도 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랑은 사랑에 대한 보상이라고, 누군

가가 말한 것을 믿고 싶었으니까.”

“…….”

“……하지만 넌 끝까지 내 마음을 외면했어.” 

힘없이 마지막 말을 흐렸다. 그녀의 갑작스런 말과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슬픔이 배인 그 목소리가 애처롭다고 느낄 때 그녀의 연약했던 표정

이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넌 이기적이야. 오직 네 감정이나 네 일만이 우선이고 남에게 상처받거나 휘둘리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이기적인 겁쟁이라고.”

분노어린 목소리는 그렇게 나를 힐난했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를 죽일 듯 쏘아보던 여자의 눈동자가 나를 보더니 또다시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으로 내 표정을 짐작해야만 했다.

“…대체 누구야…? 그 사람……. 이런 널 아무렇지 않게 망가뜨릴 수 있는…….”

……그 사람?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눈동자는 사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전부터 네 마음이 누군가에게 조금

씩 흔들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어. ……좋아하니까, 정말 좋아하니까 뺏

기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네 진심을 깨닫기 전에 어떻게든 곁에 묶어두려고 노력했지.”

“…….” 

“…언젠가 사랑한다 말해줬을 때, 내겐 그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어. …그래서 그랬어. 모

르는 척, 행복한 척 속아 넘어가주고 싶었어. 나를 사랑한단 말이 거짓인 걸 알면서도.” 

나를 망가뜨린 사람. 그것에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한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

가 그것을 그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왜…, 왜 난 안 되는 거야? 널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줬는

데……그것만으론 사랑받을 이유가 부족해?”

“…….”

“다 똑같아……너도…그 사람도…….”

미사는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보듬었던 가녀린 어

깨가 슬픔에 절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작은 그녀의 작은 몸은 내 앞에서 스러져가고 있

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었다. 얼마 전에 내 앞에 무참하게 무너지던 어떤 남

자의 모습과. 또다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목구멍 위로 올라와 구토해버릴 것만 같았

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날 사랑하는 사람을 저렇게 괴롭히는 걸까. 잘 해주려고 한 건

데. 잘하고 싶었는데.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뱃속에서 토기(吐氣)가 치밀었

다. 꿈틀대며 기어 올라오는 그것을 애써 눌러 삼키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

금은 눈물에 지친 목소리였다.

“왜 아팠니?”

“…….”

“독감에 스트레스성 위염.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병명에 왜 그렇게 쓰러질 정도로 아

팠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아팠을까. 왜? 

“벤자민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

“……!”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감기 때문만은 아닌데, 분명 다른 사람 때문일 것 같은

데…. 왜 너랑 관계없는 뮤지션 사건 이후로 그대로 무너진 건지.”

“…….”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 몸의 어딘가가 거친 흉기로 찔린 것 같은 느낌을 아무

렇지 않은 표정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에. 

“하긴, 이젠 알 필요도 없는 건가.”

그녀는 그것을 더 이상은 쓸모없는 관심이라 여겼는지 스스로 질문을 덮어버렸다.

“…후후, 어쨌든 이거 하난 묻고 정말 묻고 싶다. 어때? 너는. 네 진심을 깨닫고 나랑 비슷

한 입장이 되어보니까. …아프지?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서 미칠 것 같지? 하지만 아직 멀

었어. 너 역시 나만큼 상처받아야 돼. 네 진심을 보인 그 여자에게. 내가 너로부터 받은 상

처만큼…아니, 그 곱절로.”

사랑과 애정만을 담아왔던 예쁜 입술은 이젠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

다. 그 모습은 즐거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한없이 슬퍼 보였다.

“난 이런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이미 널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에 너에게 몇 번

이나 농락당하는 것을 묵인해왔으니까. ……하지만, 이젠 이것도 끝이야.”

“…….”

“헤어지자고는 하지 않을게. 처음부터 시작한 것도, 끝내는 것도 나 혼자뿐이니까.”

모든 것의 종식을 알리는 그녀의 말은 마지막 깔끔한 한마디로 끝을 맺었다.

“잘 가.”

미사는 이별의 단어를 개운하게 내뱉고는 그대로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

의 태도에 나는 한동안 그대로 멈춰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뚜렷

했다. 이대로 갈 순 없다. 지금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물러서면 안 되었다. 

“…미사.”

“…….”

“…난 널 농락한 적이 없어. 정말이야. 난 그저 여자와 처음 사귀는 거라 서툴러서 조금 

실수했을 진 몰라. 하지만 난 정말 나는 애인으로서 네게 최선을 다했어.”

“…넌 이 상황에서도 무의미한 자기변명을 하고 싶니?”

“…….”

무의미한 자기변명. 그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거침없이 내 의표를 공격했다. 하지

만 여기서 그녀의 말을 인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건 내가 예상해왔던 ‘자연스럽게 주

어진 삶’을 거스르는 행위니까. 그래서 추잡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했다.

“변명이 아니야. 미사, 이러지 마. 난 너만을 바라봐왔단 말이야. 난 너 외에 누군가를 좋

아한다거나 한 적이…”

“그만둬.”

“…….”

“정말 저질의 끝을 보여주는구나, 너. 아님, 남은 정마저 떨어지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니?” 

그녀는 나를 경멸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녀가 틀렸다고 말해야만 

했다. 여기서 이것마저 놓쳐버리면 나는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무슨 말을 그렇게…!”

“미쉘,”

“……!”

나는 다급해진 마음에 최후의 항변을 할 작정으로 격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이름에 나의 질척한 말들은 그대로 잠겨버렸다. 그녀가 어떻게 그 이름

을 안단 말인가. 나는 말해준 적이 없다. 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녀

는 어떻게 그 이름을 알며 어째서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부르는 것인가. 어지러웠다. 머리에

서 피가 한순간에 남김없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미사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내 얼굴

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내 몸을 요구할 때 넌 언제나 술에 만취해 있었어. 첫날부터 그랬어. 너는 나와 몸을 섞

을 때마다 넌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지. …미안해…미사, 용서해줘…미쉘, 미사, 미

쉘, 미쉘, 미쉘, 미쉘……!”

“…….”

“너 같은 거, 사랑하다 죽어버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내게 사랑한다 말해준 또 한 사람

에게 증오만을 남겨두고.

*

다음 날, 나는 퇴원을 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나의 주치의는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 하

루 더 쉬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아졌다고 고집을 부렸다. 무미건조한 하얀 빛이 쏟아지는 

병실, 코를 찌르는 나프탈렌 냄새의 건조한 병원 침대 시트 위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

다. 그것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내 자아를 침대 속으로 파묻어버릴 것만 같았다. 짐을 챙

겨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미사의 병실에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떠난 뒤

였다.

그 뒤로 며칠이 흘렀다. 오늘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 나도 아무렇지 않

게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학교에 가고, 수

업을 받고 집에 돌아오면 과제를 한다. 표면적으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전혀 즐

겁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차가운 목각인형에 불과했다.

그녀와 함께 듣는 수업은 두어 개정도였다. 그날 이후 미사는 나를 완벽하게 투명인간으

로 취급했다. 오늘도 역시 그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짐을 챙겨 강의실 밖으로 나

가버렸다. 그 모습은 마주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수치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렇

다고 그것을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의지도 잃어

버렸다. 그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관통하고 지나가는 주변 상황에 대한 방관자일 뿐이었

다. 살기가 싫어졌다.

“지노, 대체 무슨 일이야?”

망연하게 자리에 앉아있던 중 쟈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천천히 고개

를 올려다본 그의 얼굴엔 의아함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조제뜨한테 들었어. 얼마 전에 미사랑 헤어졌다는 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뭐

야? 저 미사의 태도는. 마치 네가 죽을죄라도 진 것 마냥 널 인간취급도 안 하잖아.”

“…….” 

그래, 사실 비단 쟈끄뿐만이 아니라 함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렴풋이나마 우

리 사이의 이상기류를 눈치 챘을 것이다. 잠시뿐이지만 사귀는 동안 미사는 언제나 내 옆

자리에 앉아 사근사근하게 굴어왔는데 입원 뒤 미사의 태도는 180도 바뀌어 있었으니까. 

나는 쟈끄에게 웃으며 말했다.

“쟈끄, 내일 시간 있어?”

“……뭐?”

“주말이잖아. 우리 같이 어디로 놀러 갈까? 아, 도르세이 미술관에서 이번에 마르크 샤갈 

특별전 한다는데 거긴 어때? 너 샤갈 좋아하잖아.”

“…….”

“아님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갈래? 뭐 요즘 재미있는 영화 있…”

“지노,”

“…….”

“과제는 다 했어? 저번에 보니까 미학 수업 리포트도 엉망으로 제출했다고 아르토 교수한

테 혼났다며. 너 병원 갔다 온 이후 계속 수업에 집중 못했잖아. 오늘만 해도 쥐나뻬 교수

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몇 번이나 눈치 주던데.”

쟈끄의 표정은 화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제

야 만들어진 억지웃음을 힘없이 풀어버렸다. 그가 다시 다그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신 차려. 미사 때문인지, 요즘 무슨 다른 일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든 이런 식으로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쟈끄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먼저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보

고만 있을 뿐이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변명도 진실을 왜

곡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조용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어쩐지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은 짙게 깔린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의 가로수에 걸린 채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겨울이었다. 예전에 사진 

속에서 보던 따뜻하게 감싸는 기운이 감도는 느낌보단 눈물이 나올 정도로 황량하고 쓸쓸

한 느낌이다, 빠리라는 도시의 겨울은. 어쩐지 한국의 매서운 추위와 말라붙은 건조함이 

그리워지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닌데 비 냄새가 섞인 바람에 마음

은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하고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 젖은 바람소리는 어째선지 어떤 한 사

람의 목소리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목구멍이 얼얼하게 아파왔다. 조금만 방심

하면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오후수업까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지친 몸을 질질 끌어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쟈끄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불규칙한 모양으로 떠들어댔다. 

과제는 다 했어? 정신 차려, 계속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잖아. 미학 수업 리포트도 엉망. 

빠리에 오고 나서부터일까. 내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사람의 습관이란 건 무섭다. 내 곁을 맴돌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자 나는 무의

식적으로 또다시 나를 위로해줄 누군가를 원했던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만해도 혼자서 

있는 걸 즐기던 내가 이렇게 누구라도 곁에 두고 싶어 하다니. 대학 친구들이 본다면 비웃

음이라도 칠 일이었다.

하지만 쟈끄는 이렇게 방황하는 나를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동안 나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목적지 없는 끝없는 도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당장 마주치는 걸 

피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어리석은 도피를 택한다. 단지 그 순간에 받을 상처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잃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미사와 헤어지던 날, 그녀의 입에서 ‘미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

는 그 이름을 듣고서 그녀로부터 지우고 싶었던 현실에 다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

날, 나는 미쉘에게서 느낀 욕정을 뚜렷하게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

었다. 부정해야 했고 도망쳐야만 했다. 기존의 자아를 위협하던 감정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 도망의 결과는 이별을 고하는 미쉘의 ‘Adieu’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내가 원하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또다시 도망쳐야 

했다. 내가 그것을 되돌리는 데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잊어

버리자고 생각했다. 그를 만난 것도, 그와 보낸 시간도, 그와 헤어진 것도. 잊지 않으면 그 

혼란스런 감정의 포화상태에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 막다른 도피 끝에 나는 미

사에게 향했다. 그러나 잘 해보려고 노력했던 그녀와의 관계 역시 지저분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다른 사람의 진심을 농락했기 때문에. ……그

리고 내 심장은 여전히 그 남자의 이름 앞에서 뜨겁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이토록 나를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내 사랑을 원하던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때 어

쩐지 미사가 ‘이기적인 겁쟁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나를 사랑한다

고 말하는 사람들을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울게 만들고 나에

게조차 뼈저린 고통을 안겨주었다. 

미쉘. 그의 이름은 내 영혼에 터부였고, 금기이자 방어기제였다. 그 이름만 떠올리면 내 

죽어있던 심장은 거친 격정을 일으킨다. 그 이름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생동하기 시작한

다. 개선문 근처 골목골목에서 느낀 미묘한 감정, 센느강에서 날 위로해주던 기타연주와 

노래, 칸느의 바닷물에 녹은 주홍빛 애정, 영상제 때 내 품 안에 안겨 녹아내렸던 뜨거운 

눈물, 그가 남긴 살을 뚫는 고통과 짐승같이 푸르게 타오르던 그날 밤 달빛에 뒤섞인 욕

정, 그리고 피아노 옆에 웅크린 소년의 울음, 그리고 이별……. 그 생동하는 기억들은 나 

스스로가 만든 상처에 시리도록 파고들었다. 이별 끝에 다시 나타난 미쉘 벤자민, 쥴리앙 

오르로제…….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어렴풋이 그가 벤자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벤자민의 음악과 미쉘의 연주는 확실히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었으니까. 똑같은 진

동으로 내 가슴을 울리게 했으니까. 사실 얼마 전 전광판에서 벤자민의 소식을 듣고 거리

로 뛰쳐나갔을 때에도, 나는 아득한 불안감 속에 ‘설마’하는 마음을 발견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외면하게 만들었던 것은 우연성에 대한 불신, 그리고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모를 특별한 감정을 갖게 한 친구였다. 우정이라 부르기엔 미묘

함이 서린 애정. 그런 친구가 이전부터 짝사랑해온 음악을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숨겨왔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미쉘은 어떤 생각으로 

이제 와서 자신의 존재를 밝혔을까. 어째서?

나는 눈을 떴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내 초상화가 보였다. 처음 만난 날 미쉘이 내

게 그려준 그림. 그것을 처음 마주했을 땐 나와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낯설다. 저 그림 속 나에 비하면 나는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초상화 속 아름다운 내 얼굴

이 내게 말했다.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지 마. 너도 그를 좋아하는 거야. 

“……그래, 나는…나 장진호는……미쉘을 좋아해. 미쉘을……벤자민을……쥴리앙을……

그 사람을 좋아해.”

언젠가 말하고 싶었던 그 한마디를 나는 지금에 와서야 겨우 내뱉는다. 우스웠다. 눈물이 

날 정도로 우스웠다. 이리도 단순한 진심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그렇게 감

싸 안아왔던 터부가 부질없이 느껴졌다. 미쉘, 미안해. 이렇게 스스로를 부정하기 위해 나

는 너에게 수도 없이 못할 짓을 해왔어. 그래. 이젠 인정할게. 그날, 네 말대로 나 역시 너

를 뜨겁게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문에 미사에게도 몹쓸 짓을 해왔다는 것을. 내 감정

을 수없이 죽이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자학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네 음악에, 

네 영혼에 나는 오래전부터 이끌려왔다는 것을. 숨겨왔던 감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못다 

한 말들은 격정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목구멍에 맺힌 채 뜨겁게 타올랐다. 그 열

기에, 눈물에, 내 입은 웃고 있었다. 입가는 터질 듯한 해방감으로 떨려왔다. 순간 이전에 

연극을 보고 돌아오면서 떠올리지 못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올

랐다. 그 말이 정신에 녹아들자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심장의 격동

은 내 몸을 자리에서 일으켜 그대로 어디론가 거침없이 내달리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뛰쳐

나온 것이었지만 사실은 나오는 순간부터 목적지를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던 그곳. 내 다리는, 내 머리는, 내 심장은, 그곳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차오르는 

숨 속에서 나는 오스카의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고 있었다.

「When you really want love, you will find it waiting for you.」

그대가 진정 사랑을 원할 때, 그대를 기다리는 사랑을 발견하리라.

사랑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논리와 같이 유용하지 못하다. 

그 어떤 것도 증명해 내지 못하고, 

언제나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말하고 있으며, 

진실이 아닌 사실을 믿도록 하기에.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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