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3)

# 12. 겨울비에 차갑게 젖은 신문지의 색

나는 빠리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학교로 돌아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삶으로 충만했던 피는 차갑게 식고, 그렇게 뜨겁게 온몸을 달궜던 심장 역시 냉

기를 품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순간 풀려버린 심장의 속박은, 깊은 상흔을 남긴 채 아

릿하게 저려왔다. 

그렇게 굴레 같은 세상 속에서 끝없이 헤맬 것 같은 느낌은,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비로

소 끝이 났다. 우에하라 미사, 그녀가 내 방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미사.”

“…….”

나는 그 어색한 공기 속에 그녀의 이름을 무력하게 속삭였다. 그의 앞에서 그 이름을 말

한 것을 떠올리며. 그 말을 내뱉은 똑같이 움직이던 근육은, 이미 내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리 쉬운 것을 나는 왜 그때 말하지 못했을까. 미쉘, 미쉘이라고. 하지만 뒤늦

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자신이 미쉘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어있는 내 얼굴을 보고 짐짓 놀란 표정이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

다. 미사는 가방에서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밴 보라색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라벤더 향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수건과, 그것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을 붙잡았

다.

“……네가 이겼어, 미사 우에하라.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었으니까,”

“그게 무슨…”

“안게 해줘.”

“…….”

“사랑해. 예전부터 사랑해왔던 것 같아, 미……”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내 목을 부여잡고 입술을 겹쳐왔다. 그녀는 나의 고백을 

그렇게 그녀의 작은 입술로 삼켜버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입 안으로 가능한 한 깊숙이 파

묻었다. 그녀의 안으로 들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

고, 나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허리를 깊숙이 움직였다. 그녀와의 키

스, 그리고 섹스. 나는 그날 그녀와 어떤 식으로 한 건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단지 

내 안의 어떤 것이 깊은 상념 속으로 무겁게 침잠하는 기억뿐. 한동안 이 무거움이 견딜 

수 없도록 나를 짓눌렀다. 한참 뒤에서야 그 무거움의 이유를 알았지만, 그땐 이미 모든 것

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짐승이 되었다. 언젠가 미쉘에게 말했던, 그 짐승이 되었다. 조금

도 즐겁지 않은 섹스였다.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정신없이 헐떡

이다 그대로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으며 쓰러졌다. 더러운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거짓으

로 흠뻑 젖은 육욕의 악취. 그 냄새가 뇌 세포를 찌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

것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주변의 모든 것은 변해 있었다. 소중했던 친구는 신기루처럼 어제

의 만월에 녹아 사라졌고, 내가 밤새 사랑한다고 울부짖었던 그녀는 지친 듯 내게 작은 몸

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모래를 씹은 것처럼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만이 머릿속을 맴돌며 버석거렸다. 

나는 철두철미한 아버지의 조교에 따라 ‘올곧은’ 삶을 지표로 삼아왔다. 나의 어린 시절 

동안에도 그다지 큰 충격이랄 게 없었고 부모님 간의 관계도 비교적 원만하셨다.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크지 않았다. 탈선을 한 기억도 없다. 물론 나는 아버지와 잦은 의견충돌을 

겪으며 자라왔다. 그 결과로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민감한 정도일 뿐이다. 사실은 내 안엔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사상이 뿌리 깊게 박

혀 있기도 하니까. 그것과 어긋난 좌절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의 자랑이자 터부인 복종심

을 발휘하면 그만이었다. 여자를 제대로 사귀어 본 적도 없었지만 언제나 여자에 대한 성

적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남자를 보며 성욕을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지금까지의 내 모든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내가 동성을 사랑하게 될 만한 그 어떤 계기도 찾

아볼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남자에게, 그것도 친한 친구에게 키스와 페팅만으로 흥분해버

리다니. 게다가 잠시라도 그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니 이건 뭔가 잘못된 거

다. 잘못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충동질이었다.

그날은, 내가 달콤한 사과주와 그의 피아노 연주에 취해 버려서 그랬을 것이다. 나를 향

한 애절한 고백이 담겨있던 피아노 연주에. 그리고 귓불에서 시끄럽게 울리며 사고를 마비

시켰던 빌어먹을 심장 소리 때문에. 나는 그렇게 그 사건을 치부하고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면 나는 그로 말미암아 벌어진 지금 이 상태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귓가에 또렷하게 새겨진 그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젠 됐어, 이걸로 끝이

야. 난, 미쉘이 아니야. 아듀……. 그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모든 것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도 명쾌하게 끝나 있었다.

그래, 지나고 보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친구를 잃은 상실감에 조금 고통스

럽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모르던 나 같지 않은 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분으

로 더 이상 그를 만난다면……나는 자신이 없었다. 무엇이 자신 없는지는, 알 수 없다.

미쉘, 너는 처음부터 내게 알 수 없는 존재였어. 미라쥬Mirage, 너의 이름 그대로 너는 그

런 한순간의 유혹하는 신기루일 뿐이야. 그래, 너를 잊어야 그것의 실체를 똑바로 볼 수 있

겠지.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제 그러니 불장난은 그만. 내가 먼저 타버릴지

도 모르는 위험한 불장난……. 나는 이제 자연스럽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면 되는 거

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똑바르게 살아가면 그만인 거다.

“깼네?”

그녀가 피곤한 눈꺼풀 사이로 익숙한 검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간질거리는 웃음을 지었

다. 잠이 덜 깨 부스스한 그녀는 꽤 귀여워 보였다. 나는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좀 먹을래?”

“아니, 그냥 이대로 좀 더 누워있고 싶어…….”

그녀는 내 가슴에 팔을 두르며 고양이새끼처럼 품에 파고들었다. 나는 내 안에 쏙 들어오

는 그녀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귀는 언제 뚫었어? 이전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

그녀가 뒤척이다가 문득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곰실곰실한 손가락으로 장

난스럽게 나의 귓불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이 보석……오팔 맞지? 모양이 무척 예쁘네. 눈의 결정처럼 반짝거려. 근데 왜 왼쪽에만 

뚫은 거야? 오른쪽에 뚫어서 게이로 오해받는 것보단 낫지만~”

“…….”

귓불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은 장난스럽게 내 볼을 꼬집으며 흔들었다. 나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키곤 입을 열었다.

“……네 탄생석은 뭐야?”

“2월, 자수정이야.”

“……그럼 돌아오는 생일에 자수정 귀걸이를 선물할 테니까 그날 네가 이 귀걸이 옆에 자

수정을 박아줘. 그리고 각자 탄생석 하나씩 귀에 달고 있는 거야. 어때?”

함께 몸을 섞은 첫날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건 스스로가 단단해지기 위해서였다. 더 이

상 이해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얽매이지 않아서. 앞으로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랬기

에 나는 하루빨리 그의 흔적을 지우고 누군가를 새로 박아 넣어야만 했다. 이미 구멍 나버

린 상흔은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

“왜……, 싫어?”

그녀는 내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눈을 마주보고 있

자 문득 그녀의 눈동자가 행복한 잠에서 깬 것처럼 일그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에 미

쳤다. 그녀는 이내 다시 고개를 숙여 내 가슴에 묻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하게 흘렀다. 그녀의 떨리는 숨결은 곧 내 가슴 위를 따뜻하고 축축하게 덥혀왔다. 

미사는 왜 대답을 망설이는 걸까.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사랑한다 말해주고, 

키스하고, 몸을 섞었다. 하지만 어째서 미사의 표정이 저렇게 슬픈지 알 수 없었다. 그 이

유가 궁금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면해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뒤 내 심장에 

깊게 입술을 묻은 상태로 입술을 열었다.

“꼭……, 돌아오는 내 생일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한 번 굳건하게 되뇌며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렇게 될 거야.”

“그래……꼭.”

그녀의 속삭임은 사라질 듯 희미하게 내 심장 위에 머물렀다. 나는 그녀를 한없이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때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마치 갓 태어난 새끼의 것처럼 무척이나 약하

고 가녀리게 느껴졌기 때문에. 

*

추적추적한 겨울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창밖의 거리는 온통 쓸쓸한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빠리의 겨울은 어제오늘 할 것 없이 여전히 우울한 색을 띠고 있지만 내 책

상 위의 달력은 이미 새것으로 바뀌어있었다. 새 해, 그리고 앞으로 또 계속 채워나가야 

할 날들을 밑에 묻어둔 새 달력. 미사가 선물한 것이었다.

벤자민의 마지막 곡, 라망뜨는 마지막 피아노 선율과 함께 희미하게 끝을 맺었다. 이게 마

지막이다. 벤자민의 음악을 듣는 건. 나는 그런 생각으로 시디플레이어에서 그것을 꺼냈

다. 벤자민의 음악 한곡 한곡엔 마치 사진처럼 어떤 남자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벤자민의 

음악만으로도 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듣지 않으려는 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

로 아름답던 미소, 부서지는 파도처럼 시원하던 웃음소리, 이질적이라 느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자아를 비추고 있던 심해의 눈동자, 내 곁에 언제나 당연한 것처

럼 맴돌던 체향과 온기, 안정감을 주던 커다란 손, 닿는 곳마다 불꽃이 일던 입술……. 그

에 대한 기억엔 어느 샌가 벤자민의 음악이 녹록히 배어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은 흐르는 선혈처럼 새빨간 거짓이었다.

사람들 속에 껴있어도 사막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타국

에서의 유학생활. 프랑스에서의 외로운 삶이 소중하게 여기는 동성 친구에게 묘한 감정을 

심게 한 것이라고, 오늘도 나는 수백 번 수천 번을 머릿속에서 그렇게 되새긴다. 나를 지키

기 위해. 하지만 지키고 있는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나는 그 껍데기라도 지

켜야 했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벤자민 시디를 보며 내 속에 남겨진 미쉘을 떼어낸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 통증을 잊으려 애써 미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언제나 밝

고, 상냥하니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줄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와 나는 그날 이후 본격적으로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다. 우리는 막 첫사랑을 시작

한 소년소녀처럼 풋풋했다. 설렘과 배려, 애정 어린 말장난, 진하지 않은 스킨십.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오히려 거북할 정도였다. 우리는 그 뒤로도 몇 번의 관계를 더 맺었다. 정신

없이 서로의 몸을 탐하고 난 뒤엔 언제나 풋풋하게 서로를 보듬고 있는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아침이면 언제나 내 귓가에 사랑한다 속삭였다. 사랑해, 지노. 너도 

날 사랑한다 말해줘. 그녀가 그렇게 채근하면 나는 그 이끌림에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나

도 사랑해, 미사. 그 말을 내뱉으며 나는 스스로가 마치 녹음기가 된 것 같다 느낀다. 그래

도 그거면 충분했다. 그녀를 만족시키기에는. 미사는 언제나 그 대답을 들으며 다시 기분 

좋게 내 품에 파고들었으니까. 내뱉을수록 알 수 없는 말, 사랑한다.

문득 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미사였다.

“지노, 나야. 준비 다 됐어?”

“아, 그래. 지금 나갈게.”

잭 : 내 이름이 어니스트였다고 계속 말했잖아요, 그웬돌린? 누가 봐도 어니스트요. 당연

히 어니스트란말이오.

브레크넬 부인 : 그래, 네가 늘상 어니스트로 불렸던 게 이제야 기억나. 내가 그 이름을 싫

어하는 특별한 이유를 알겠어.

그웬돌린 : 어니스트, 나의 어니스트! 어니스트 말고 다른 이름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

요.

잭 : 그웬돌린, 남자에게 있어 진실만을 말해왔던 인생 전부가 갑작스레 밝혀지는 건 끔찍

한 일이오. 날 용서해 주겠소?

그웬돌린 : 당신이 어니스트하게 바뀐다면 용서할게요.

잭 : 내 사랑!

프레데렉 : 라티티아!

라티티아 : 프레데렉, 드디어!

엘저논 : 세실리, 드디어!

잭 : 그웬돌린, 드디어!

브레크넬 부인 : 조카여, 사소한 것에 너무 집착하는군요.

잭 : 그 반대입니다, 숙모님.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직함Being Earnest의 중요성을 깨

달았어요.

그녀의 일본인 친구가 영어클럽활동으로 출연한다기에 따라가게 된 연극의 제목은「정직

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고전희극이었다. 

이 연극에서 남자 주인공은 핸드백에 버려져 부모도 모르는 채 부호에게 거둬들여져 자라

게 된다. 그의 이름은 잭이었지만 런던에선 사교계 사람들에게 스스로 어니스트라고 말하

고 다녔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어니스트라고 속인 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자신의 과거와 진실을 깨닫고 사랑도 얻게 된다는 게 이 연극의 줄거리였

다. 겉보기엔 생각 없이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오스카는 자신의 빛나는 재치로 

빅토리아시대에 체면과 거짓으로 점철된 귀족들의 태도를 은연중에 비꼬며 풍자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는 미사와 함께 친구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미사는 옆에

서 너무 재미있게 보았다며 깔깔거렸지만 나는 같이 웃어줄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부

터 내 마음은 줄곧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 연극은 여러 방면으로 내 안

의 터부를 들쑤시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부모 없는 소년, 여러 개의 이름으로 자신을 숨

기는 것, 거짓말, 그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 그리고 그 연극의 마지막 대사. ‘저는 태어나

서 처음으로 정직함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왜일까, 불현듯 며칠 전 읽은 오스카 와일드 어록에 적혀있던 글귀가 머릿속을 스쳤다. 

「When you really……」로 시작하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을 전부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어쩐지 피로감이 몰려와서 금세 그것을 그만두었다. 어째서인지 ‘기억해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노, 왜 그래?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우산을 들고 있는 내 팔에 매달린 채 걷고 있던 미사가 문득 내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비 냄새가 섞인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깊숙이 들어가자 나

는 뼛속까지 한기를 느꼈다. 내가 몸을 가늘게 떠는 것을 느꼈는지 미사는 「쎄 라 비C’

est la vie」에서 몸 좀 녹였다가 가자고 부추겼다. 쎄 라 비. 그곳은 미쉘과의 첫 추억이 

새겨진 장소였다. 하지만 나는 단골손님이 되어 종종 그녀와 같이 식사하러 오곤 했다. 일

부러 그곳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미사와의 추억으로 그와의 기억을 조

금씩 덮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웨이터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사실 자주 오는 터에 우

리는 즐겨 앉는 자리가 따로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자리. 하지만 그 웨이터는 

그날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손님들이 많아서 테이블이 이곳 밖에 남질 않았네요.”

그가 안내한 곳은 우연치 않게도 그곳은 그 프랑스 친구와 처음 만나서 함께 앉았던 자리

의 바로 옆이었다. 처음 만나던 날 앉았던 노천카페 옆, 유리창 안 테이블이었던 것이다. 

미사는 그 자리 앞에 선 내 복잡한 심정도 모르고 즐거운 듯 말했다.

“와, 우리가 자주 않던 곳은 아니지만 대체된 자리치곤 무척 좋은 자리네. 아까 나간 손님

들이 저기 앉던 사람들 인가 봐.” 

나는 그 자리에 차마 쉽게 앉지 못하고 그 앞에 선 채 망연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자

리는 겨울비 때문에 정리되어 텅 비어 있었다. 바닥이 비에 젖어있었기 때문일까. 그 빈자

리를 바라보자 내 가슴 한구석이 습기에 반응하는 관절처럼 욱신거렸다. 얼른 앉지 않고 

무얼 하느냐는 미사의 채근에 나는 시선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앉아 있는 동안에

도, 내 시선은 그 창밖의 쓸쓸한 빈자리에 자꾸 머무르려했다. 그 차갑게 식어버린 자리와

는 상반되게 미사는 따뜻한 실내에서 나와 마주앉아있다. 미쉘과 겹쳐지는 자리에서 해맑

게 웃고 있다.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카페 에스프레소. 나는 이곳에 

오면 언제나 그것을 찾았다. 어느 틈에 그 독약 같은 맛에 중독되어버렸나 보다. 미사의 취

향은 나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부드러운 카페오레Cafe au lait가 든 컵을 양손에 쥐고 후

후 불고 있었다. 솜사탕을 쥔 어린애처럼 기쁜 표정으로. 어째서일까. 그 모습을 보고 있으

니 가슴이 무겁다. 납덩이가 된 것처럼 무거워서, 그대로 땅 밑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팔찌의 구슬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부턴가 기분이 고민거리

가 생기거나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나는 팔찌에 손을 가져가 그것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던 머플러는 왜 안 하고 다녀?”

“아…….”

그녀가 선물했던 잿빛 머플러. 나는 그것을 영원히 발이 닿지 않을 공간에 잊고 나와 버렸

다. 욕망을 충동질하며 피아노 건반 위로 미끄러졌던 그 머플러는 그렇게 그날의 기억 속

에 봉인되었다. 영원히. 그러고 보니 나는 그날 돌아오면서 아득한 상실감에 정신이 혼미

했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머플러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잃어버렸어.”

“성격상 어디다 물건을 흘리고 다니진 않을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거야? 아무

튼 정말, 그거 정말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마음먹고 산 거였는데. 섭섭해.”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에 나는 한 번 눈웃음을 짓고는 

입술에 카페를 가져갔다. 보기만 해도 인위적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역겨운 미소를 감추기 

위해. 최근 내 얼굴 근육은 언제나 내 진심과는 다른 모습을 지어내고 있었다. 유치한 트렌

드 드라마 주인공의 초보적인 연기와 닮은 표정들의 연속.

“어머, 지노!”

“응……?”

나는 설혹 그녀가 내 표정에서 거짓말을 읽은 것이 아닌가 해서 흠칫 떨며 미사를 바라보

았다. 그녀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처음 만난 그날, 미쉘이 똑같이 바라보던 그곳, 문화소식

을 알리는 전광판이었다. 

“벤자민 저사람, 네가 좋아하던 뮤지션 아니야?” 

그 전광판엔 무너지는 잿빛 하늘 사이로 주홍빛을 내며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름 없는 

뮤지션 벤자민, 음반 발매 1년 만에 정체를 드러내다.』 

“……!”

“지노? 갑자기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비 오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상하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

다. 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대체 왜? 난 뭘 걱정하고 있는 거지? 나는 가까운 노

점상에서 신문을 사들었다. 그것의 문화면 첫 페이지엔 커다랗게 벤자민에 대한 기사가 적

혀있었다.

-이름 없는 뮤지션 벤자민, 1년 만에 정체를 드러내다.-

지난 1년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음악계를 뒤흔들었던 벤자민Benjamin의 정체가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벤자민과의 계약음반사인 「뮈즈Muse」에서 어제 오후 3시경 벤

자민의 정체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벤자민의 본명은 쥴리앙 오르로제Julien Orrosee이다. 세간에서 그가 상당히 경험이 많

은 나이의 작곡가일거라고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현재 19세인 어린 청년이었다. 그는 현재 빠리 국립 음악 대학 작곡과에 휴학 중이라고 한

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밝혀진 그의 정체에 관한 것이다. 그의 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는 자신이 활동하는 음반사 뮈즈와 함께 프랑스 음반사의 쌍벽을 이루는 오르로제

Orrosee쪽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쥴리앙 오르로제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음반사 

오르로제의 전최고경영자 빅토르 오르로제Victor Orrosee와 불륜관계로 한 때 큰 이슈를 

낳았던 피아니스트 에바 베넥스Eva Bieneix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현재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베넥스를 대신해, 빅토르의 아내인 마리 오르로제Marie Orrosee의 양아들이

기도 하다.

1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이유와 그동안 자신을 숨겼던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그

는 “그 동안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이 두려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계기로 용기를 가지

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오르로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고 자신의 본격적인 활동 의지를 밝혔다. 올 4월 중순에 「*시떼 드 라 뮈지끄Cite de la 

Musique」에서 열릴 첫 연주회를 급히 준비 중이라는 것을 끝으로 기자회견을 짧게 마쳤

다. 한동안 음악계를 들쑤셨던 그가 앞으로 무대 앞에 나서서 어떤 음악을 선사할 지 기대

해본다. <문화부/도미닉 피농, 사진/가브리엘 콜레>

그 기사엔 ‘내 친구’ 미쉘이 줬던 벤자민 시디의 서명과, 낯선 얼굴을 가진 남자의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 순간 나의 사고는 그대로 정지되어 버렸다. 왼쪽 귀걸이에 남겨진 상흔이 끔찍한 비명

을 지르며 욱신거렸다. 미사가 데리러 올 때까지, 나는 그렇게 비가 눈물처럼 쏟아지던 빠

리의 거리에 홀로 서있었다.

주) 음악 도시라는 의미. 클래식, 재즈, 세계 각국의 음악 등을 들려주는 빠리에 있는 콘서

트 홀이다.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 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스탕달 Stend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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