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3)

# 11. 거짓으로 둥그렇게 휘감긴 미친 달빛의 색

나는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그가 알려준 대로 쪽지에 적힌 주소로 정신없이 달렸다. 빠

리의 밤거리는 잠깐 내린 초겨울의 보슬비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구름이 갠 하늘에 푸른빛

을 띠며 휘영청 뜬 둥근 보름달. 비에 젖은 거리는 그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였다. 출발할 

때만 해도 술을 마셔서 악간 몽롱했던 나는 정신없이 빠리 시내를 달리고 나니 땀만 조금 

날 뿐 정신은 오히려 맑아진 것 같았다. 나는 주소에 적힌 거리를 찾아 들어갔다.

“허억- 허억-……여긴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펼쳐진 거리의 끝에서 미쉘의 집을 발

견할 수 있었다. 그 집은 정원도 작은 편이었고 앞서 지나쳤던 졸부의 집 같은 분위기도 아

니었지만 집 자체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시리도록 하얀 벽 위에 밤하늘 같은 감색 지붕이 

덮인, 직선의 기하학적 매력을 담은 아르데코풍의 단정한 3층 저택이었다. 저택의 한쪽엔 

원통형의 공간이 붙어있었는데 그곳은 모두 네모나게 이지러진 유리창만으로 이루어져 있

었다. 미쉘이 상당히 잘 사는 축에 속할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해왔지만 막상 그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훌륭한 집 앞에 서자 어색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평소에 함께 지낼 땐 

그런 부르주아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괴리감은 더 큰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내 상황이 머뭇거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재빨리 초인종을 눌렀다.

“지노?”

벨을 누르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왔다. 한참 애타게 기다렸을 그 

목소리에 목구멍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미안함을 대신하기 위해 일부러 나는 발랄한 목

소리로 대답했다.

“응, 나야, 늦어서 미안!”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현관은 열려 있으니까 그냥 들어와.”

“…….”

멍청한 장진호! 그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왔다. 나는 이렇게 마음 졸이며 기

다리고 있었을 미쉘을 떠올리며 그사이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스스로를 격하게 책망했다. 

그렇게 나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그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칠흑 같은 어둠과 끝없는 정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굶주린 고래의 뱃속처

럼 캄캄하고 사늘한 공간이었다.

“미, 미쉘?”

나는 마치 어두침침하고 낯선 공간에 홀로 던져진 것 같아서 어린아이처럼 미쉘의 이름

을 불러보았다. 방황하며 이리저리 돌아보다 문득 푸른빛이 쏟아지는 방안에 앉아있는 익

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방은 집 밖에서 보았던 

유리로만 이루어진 원기둥모양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 전체를 감돌고 있는 푸른빛은 넓은 

창밖으로 비치는 투명한 보름달이 상앗빛의 그랜드 피아노 위에 반사되어 나타난 것이었

다. 1층부터 3층까지 벽면 전체가 넓게 트여있는 창엔 아까 내렸던 빗물이 달빛에 반사되

어 빛나고 있었다. 미쉘은 그 모든 달빛과 물방울의 반짝이는 별빛이 쏟아지는 것을 받으

며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달빛에 역광이 져서인지 그의 모습은 창백한 신기루와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

어갔다. 다가갈수록 그곳에 앉아있는 미쉘은 가까워졌지만 어째선지 점점 그가 낯설게 느

껴졌다.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자신이 앉아있는 피아노 의자의 왼쪽을 손으로 툭툭 쳤다. 여기 앉으라는 의미. 나는 그 몸

짓에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부유하듯 몸을 움직여 거기에 앉았다. 

내가 피아노 색과 같은 긴 상아색 의자에 앉자 그는 카트에 준비되어 있던 칼바도스를 꺼

냈다. 

“와인이나 샴페인으로 할까 하다가 네가 칼바도스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전에 생일도 제

대로 못 챙겨 준 것 같아서 네가 태어난 해에 빚은 노르망디 산 칼바도스를 준비했어.”

“…….”

그는 내게 작은 술잔을 건네주고 그것을 따라주었다. 술잔엔 금빛 액체가 넘실거리며 채

워졌다. 

“네 행복을 위해.”

“…고마워.”

미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잔을 내 잔에 마주쳤다. 크리스털 잔은 짤캉, 하고 차가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술에선 향긋한 사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것을 들이키자 내부에

서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무언가가 온 신경을 아릿하게 뚫고 지나가는 쾌감이 느껴졌다. 정

신없이 달려오는 바람에 여전히 진정하지 못하고 있던 심장은 그 꿀 빛 액체가 들어가는 

순간 봄바람처럼 잦아들었다. 그 역시 한 모금으로 목을 가볍게 축이더니 곧 앞에 놓여있

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갖다 올렸다.

“이것도 늦었지만 생일기념.” 

미쉘은 가벼운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곡을 재즈풍으로 변주한 것이었다. 그의 손에서 빚어지는 멜로디는 고요히 맴돌

던 공기의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생일 축하곡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그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멜로디가, 그의 손가락에 의해선 너무나 매

력적인 곡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그의 하얗고 유연한 손에 따라 움직이는 멜로디에 심취해

버렸다. 문득 예전에 애니메이션 팀워크 강의 초반에 개인과제 일로 속상해있을 때의 일

이 떠올랐다. 그땐 말없이 센느강으로 데려가 기타를 연주해 주었지. 프랑스에 온 뒤로부

터 내 모든 감정은 미쉘이란 프랑스인과 공유했다. 그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곁에 있으면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것이 지금껏 받아본 적 없

는 타인의 다정함이라는 것을 자각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흥건히 젖어오는 것 같

았다.

생일 축하곡 변주를 마치고 그는 곧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곡은 내가 아는 곡

이었다. 이 곡 역시 변주를 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연출해냈다. 나는 흥이 난 듯 

멜로디를 허밍으로 따라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기분 좋은 듯 콧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건반 위에서 손을 떼고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 곡의 제목을 알아?”

“물론이지. 내가 좋아하는 곡 중 하나거든. 패티 오스틴Patti Austin의 「Say you love 

me」, 맞지?” 

“그래. 예전에 너랑 같이 스필만의 가게에 갔을 때 두 번째로 연주했던 곡인데, 알고 있었

어?” 

“…몰랐어.” 

그러고 보니 미쉘이 방금 이 곡을 연주할 때 어쩐지 예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술김에 잠이 들며 제목을 떠올리지 못했던 곡이 바로 이 곡 이었나 보다.

“네가 그때 말했었잖아. 네게 들려주고 싶은 곡을 쳐달라고. ……그게 이 곡이었어.”

“…….”

왜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을 나는 어색

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곡의 제목 때문이었고 두 번째

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을 마주쳐오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도 애잔하게 빛났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 눈을 보고 있으면 또다시 불안감이 뱃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미쉘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움찔거리는 입술 사이로 불규칙하게 들이 내쉬는 소

모적인 공기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은 몇 번

이나 망설이다 집어넣었던 그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그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 미안. 그러고 보니 아직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 줬구나.”

“뭐…? 아직 더 남은 거야?”

내가 놀란 눈으로 물어오자 미쉘은 싱긋 웃으며 피아노 위에 놓여있었던 붉은빛의 작은 

보석 상자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받아들고 그를 한 번 슬쩍 보았다. 

그의 열어보라는 눈치에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스 뚜껑에 손을 가져갔다. 그 안엔 오팔로 

된 백금 귀걸이 한 짝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여섯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별사탕모양의 독특

한 귀걸이였다. 오팔 특유의 무지갯빛은 마치 신기루처럼 불규칙하게 배열된 채 반짝이고 

있었다. 어찌보면 눈의 결정 같이 보이기도 했다.

“네가 전에 말했었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서로의 탄생석으로 귀걸이 한 짝씩 

끼고 싶다고.”

“…….” 

“한국에선 오팔이 10월 탄생석이라고 들었어. 오팔은 10퍼센트에서 13퍼센트 정도 수분

을 머금고 있어야 해서 자주 물에 담가줘야 한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놔두어도 깨져버리

는 섬세한 보석이야.”

“…듣고 보니 왠지 슬픈 보석이네.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어야 한다니.”

“…….”

“…그런데 왜 하나야?”

문득 의아해져서 묻자 미쉘은 조금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다른 하나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에게 내가 직접 전해 주고 싶

어서.”

“…….”

어째서…?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잇달아 나왔지만 나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지금…해보고 싶어.”

“뭐……? 하지만 넌…”

“네가 직접, 뚫어줄래?”

“…….” 

나는 그가 그 오팔 귀걸이를 내 귀에 박아주길 바랐다. 미쉘이라면 나를 상처 입혀도 좋

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 귀걸이를 보는 순간 미쉘이 

뚫어줘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이 들었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나의 요구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 부탁을 철회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쉘은 흔들리지 

않는 내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깊게 눈을 감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왔다. 미쉘은 펜치로 귀걸이의 끝

을 어슷하게 잘라내고 그것을 소독약이 담긴 위스키 잔에 집어넣었다. 귀걸이는 투명한 액

체 안에서 이름 없는 작은 별처럼 반짝이며 기포를 머금었다. 그 처연한 빛에 마음이 쓰여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동안, 미쉘은 담담한 손동작으로 솜에 소독약을 묻혔다. 달빛에 

창백한 색을 띠며 젖어가는 솜은 얼마 전 내 옷깃에 젖었던 눈물을 떠올리게 했다. 미쉘이 

약간 긴장한 손동작으로 내 안경을 벗겨내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

다.

“…왼쪽에 해줘. 뇌와 몸은 각각 반대로 연결되어 반응하니까. 우뇌는 이성보단 감성과 

주로 관련되어 있잖아. 나는 내 감성을 차지한 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거든.” 

“…….”

오른쪽에 하면 게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일까 하다 그만두기로 했

다. 어쩌면 미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으니까. 미쉘은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

이지 않았다. 그 어색한 시간의 공백에 나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미

쉘의 얼굴 뒤에선 보름달이 유난히도 커다랗게 빛나고 있었다. 정염(情炎)을 가득 품은 보

름달빛은 그의 머리카락을 새하얗게 비추고 있었고 그림자 진 표정 또한 미묘하게 실체를 

뒤틀어 놓았다. 그래서일까. 그 알 수 없는 표정 속에 감춰진 두 개의 푸른 시선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마치 내 머릿속을 꿰뚫어보려는 듯…아니, 마치 내 안에 살아있는 세포들

을 하나하나 핥아내는 것 같은 시선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세포를 핥아내

고 이성을 마비시켜가는 그 푸른 눈빛은 마주치는 내 두 눈동자보다 더 깊은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안경을 벗고 있었음에도 생경하고 또렷하게 느껴지는 그 시선에 나는 왠

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버리자 곧 미쉘의 손이 

내 왼쪽 턱 선을 쓸어내리며 턱 끝을 쥐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을 텐데 차가운 공기 속

에 닿은 그의 온기에 나는 몸을 움찔하며 반응했다. 미쉘은 다른 한 손으로 위스키 잔에 넣

어졌던 귀걸이를 빼냈다. 쥐고 있던 내 턱을 슬쩍 손가락으로 가볍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이끌었다. 손가락의 이끌림에 목 근육이 뻣뻣하게 땅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만난 날 내게 물었지. 왜 내 그림엔 서명이나 날짜가 없느냐고. 혹시 이름이 없

는 건 아니냐고. 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그때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눈물이 났는

지도 몰라. 네가 만든 애니메이션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

미쉘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꺼내듯이 자연스럽고 담담했다. 그는 

내 왼쪽 귀에 얼굴을 기울인 채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스치며 도톰하게 자리 잡은 귓불을 

쥐었다. 그 손가락과 옅게 전해오는 숨결, 그리고 얼굴에서 향긋하게 번져오는 체향에 어

쩐지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았다.

“……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안을 비집고 들어왔지. 그리고 순식간에 내 안에서 

번져가며 변화를 일으켰지. 칸느에서도 네 덕분에 나는 부정하고 있던 나의 일부를 되찾

을 수 있었어. 너는 그렇게 하나하나, 나 스스로가 추하다고 생각해온 내 안에 숨겨진 소중

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각성시켜 줬어.”

말을 마치자 미쉘의 다른 한 손에 쥐어졌던 귀걸이 끝이 내 귓불 위에 차끔하게 올라섰

다. 순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듯. 조각같이 떨어져 

나간 시간 속에서 나는 그에 의해 새겨질 상흔의 순간을 기다렸다. 

“…이야기 속에서 행복해진 나르시스를 보면서 생각했어. 사람들에게 전부 다 밝혀버리

면, 나도 나르시스처럼 더 이상 외롭지 않을까. ……내가 용기를 내어 고백하면,”

투둑-

“흣…!”

“…어쩌면 그 소녀도 날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진 않을까…….” 

미쉘의 마지막 말은 가는 숨결과 함께 왼쪽 귓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시간이 살라 먹

은 틈으로 살 뚫는 소리가 왼쪽 귓가에 맺혔다. 나는 쾌락이 동반된 고통에 짧은 신음을 삼

켰다. 그 고통은 뇌 속까지 파고들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정신세계와 체계를 뒤섞어버리

는 것 같았다. 그 폭풍 같은 변화는 눈물로 여물었다. 나는 그 격정을 뜨거운 숨으로 뱉어

내었다. 그 흐릿한 시야로 미쉘과 눈이 마주쳤다. 낯설게 빛나는 그 눈동자 속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내가 비쳐지고 있었다. 미쉘은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

쳐내며 말했다. 

“…어떨 것 같아…?”

“…….”

미쉘은 간신히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꾹 다물린 입술은 망설임으로 미

미하게 떨렸다. 그 불안한 입술선은 어쩐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

주보는 얼굴의 거리는 무척이나 미묘했다. 그의 목마른 입술은 내 입술 앞에서 머뭇거렸

다. 그 입술 새에선 나와 같은 더운 숨결이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뱉은 

숨을 마셨고 그는 내가 내뱉은 숨을 삼켰다. 그 아찔한 더운 숨의 뒤엉킴 사이엔 아까 마셨

던 칼바도스의 사과 향이 머무르고 있었다. 사과향, 숨결, 갈망의 눈동자. 심장은 흉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시끄럽게 울려댄다.

미쉘은 천천히 그 민감한 거리를 조심스럽게 좁혀온다. 그리고 닿을락말락한 지점에서 그

는 다시 주춤한다.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허락을 구하려는 듯이. 그의 눈동자가 내 모습을 

완연히 비출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이성은 이미 빠르게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내게 상처를 새긴 남자에 의해. 다만,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는 것은 상처 입

은 귓불의 뜨거운 열기와 그 틈에서 약동하는 심장의 맥박뿐이었다. 

심장. 제멋대로 뛰는 가증스런 심장 때문이다. 다가오는 얼굴을 피하지 않은 건. 눈앞의 

남자는 천천히 스러지듯 눈을 감는다. 메마른 버들강아지 같은 긴 속눈썹에 의해 심해의 

눈동자가 감춰지는 것을 보며 아쉽다고 느꼈을 때, 따뜻한 무언가가 물기 어린 소리를 내

며 입술을 한번 베어 물듯이 닿았다 떨어진다. 그 야살스런 소리가 뚜렷한 마침표를 찍기 

전에, 두 개의 살점은 다시 부딪쳤다. 머뭇거리며 부드럽게 시작했던 입맞춤은 어느덧 짐

승처럼 거친 숨을 내뱉으며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새어나오는 서로의 

숨결만으로도 뜨거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키스. 다르다. 미사와 했을 때와도, 처음 이 살점

과 맞부딪쳤을 때와도 다르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떨림이었다. 일순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곳에서부터 욕망이 거품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선 또다시 ‘그것’이 지각된다. 불안. 사라졌다 생

각하면 또다시 뱃속에서 꿈틀대며 그 존재를 알리는 지독한 불안. 그것이 이성을 잃은 심

장을 아프게 조여 왔다. 그 통증이 커질수록 나는 더더욱 절실하게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

겨보았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미쉘의 흔적이 남은 귓불만이 불규칙한 맥박과 함

께 타들어가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 빼고는. 미쉘은 나의 불안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점차 내 입 안으로 깊이 파고들뿐이었다. 그는 내 목을 압박해오던 머플러가 

거치적댔는지 이내 그것을 강하게 당겨 던져버렸다. 제멋대로 던져진 잿빛 머플러는 점점 

가속도를 붙여 매끄럽게 피아노 건반 위를 훑으며 떨어졌다. 탐욕스런 뱀처럼 스르륵 하

는 소리가 바닥으로 추락하자, 나는 그것에 도발되어 무의식적으로 한쪽 다리를 피아노 의

자 바깥쪽으로 넘겼다. 그러자 그의 단단한 팔이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나의 허리를 

감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 힘에 안정감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그러쥐고 있던 

슬몃한 이성마저 던져버렸다. 꿈틀대던 불안감조차 자의적으로 묻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

은 빠르게 타들어가는 욕정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 지모를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아쉬운 듯 입술을 떼었고 그의 입술은 

이내 아래로 미끄러져 나의 도드라진 목젖을 간질이듯 핥아 올렸다.

“흐읏…!”

나는 그것에 몸을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목덜

미란 곳이 이렇게 민감한 곳이었던가. 하지만 미쉘은 내 나약한 저항에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 쇄골에 얼굴을 묻은 채 격한 숨을 삼켜가며 나를 천천히 피아노 의자 위

에 눕혔다. 그의 섬세하고 짜릿한 자극에 나 역시 뜨거운 신음을 참으며 내 목에 얼굴을 묻

고 있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미쉘은 빠른 손놀림으로 내 더플코트를 젖혀내고 그 안

의 하얀 셔츠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내 목덜미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단추

가 풀릴 때마다 열리는 내 몸에 성스러운 의식을 하는 것처럼 뜨거운 입술을 맞추었다. 어

느새 옷이 다 풀리고 나의 가슴은 남자 앞에 모두 드러났다. 몸은 뜨거운 열기에 창백한 달

빛에도 미색의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잠시 내 몸을 감상하듯 내려다보더니 곧 정신

없이 내 상체에 입술을 묻었다. 나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야릇한 기분을 견딜 수 없어 신

음 섞인 더운 숨을 힘겹게 뱉어냈다. 

“잠…하앗…!”

그의 부드러운 입술과 그사이에 비집고 나온 혀가 나의 유두를 살짝 빨아올리자 나도 모

르게 허리가 들썩였다. 나의 솔직한 반응에 그는 고개를 들고 위험할 정도로 자극적인 미

소를 지어 보였다. 

“…예뻐….”

“….”

“…지노는 정말 예뻐…….”

그렇게 말하는 미쉘의 푸른 눈동자는 어느덧 짙은 욕정을 한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아마 

이때엔 나도 이런 눈동자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타인에 대한 갈구와 욕망

의 나락. 나는 욕망에 미친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몸을 온전히 가눌 수 없었다. 나는 그

저 슬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색색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고 눈 또한 반쯤 풀려있었다. 

유혹하는 듯한 그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미쉘은 그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숙여 

다시 내 입술을 깊게 삼켰다. 나는 그의 키스를 깊게 받아들이면서 그의 단단한 등을 부여

잡았다.

왼쪽에 귀를 뚫리면서 그동안 막아왔던 격렬한 감성이 뚫려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때 내 

안에선 이전엔 존재감마저 없었던 욕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오로

지 충실한 몸의 욕구에만 열중해있었고, 날 그렇게 만든 남자에게만 열중해 있었다. 내 몸

은 그 남자의 용광로 같은 육체에게 물들어 반응하고 있었고, 그 몸이 나에게 주는 쾌락에

만 젖어 있었다. 그 순간엔 아무것도 없었다. 빛도, 어둠도,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후회

도, 과거도, 미래도, 나 자신과, 그에 대한 구분조차.

미쉘은 자신이 새긴, 단정하게 박혀있는 오팔 귀걸이를 핥으면서 손을 가슴 아래로 미끄

러뜨렸다. 그의 손은 스치는 곳마다 내 몸을 뜨겁게 산화시키며 이미 반쯤 흥분해있는 나

의 중심부의 바지 위를 끝으로 행로를 마쳤다. 한 번도 남의 손에 내준 적 없던 그곳은 그

의 손놀림에 당연하다는 듯 반응하기 시작했고, 그 쾌감은 등골을 타고 아릿하게 밀려 올

라왔다. 나는 그 끓어오르는 전율에 눈시울을 적시며 몸을 비틀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귓바퀴를 맴돌던 뜨거운 입술이 잊고 있던 불안을 각성시킨 것은.

“역시 너도 나를 원하고 있었던 거야…….”

“……!”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줘…….”

그 목소리는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넘겨 들어왔던 것들을 무의식 위로 떠올렸다. 동성애

에 대한 이유 없는 절대적인 혐오. 올곧게 자라온 나는 절대로 그런 성향이 없다, 있어서

도 안 된다는 세뇌와 터부. 빈틈없는 윤리의식. 어릴 적부터 자리잡아온 내 안의 아버지는 

그 욕정의 순간을 부정하며 내 목을 강하게 조여들었다. 그 옭아매는 악력에 옅게 숨이 멎

어가자 남자의 목소리가 나를 비웃었다. 그것 봐. 너는 안 된다니까. 너는 안 돼. 

“이것 놔!”

불안. 그 질척대는 두려움이 욕망에 사로잡혀있던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지금까지 느껴

온 미쉘에 대한 모든 감정과 욕정은 그것에 한순간에 부정 당해버렸다. 나는 저항하는 목

소리로 그의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겐 이러지 않겠다고 했잖아, 친구로 지내기로 했잖아!” 

“…지노…, 갑자기…왜 그래……?”

“나까지 동성애자로 전락시킬 셈이야? 네가 말한 우정은 이런 식으로 몸을 뒤섞는 거였

어?”

나는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든 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쳐야 했다. 미쉘은 내 병

적인 행동에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의 가느다란 떨림은 어쩌면 앞

으로의 미래를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떨림은 곧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를 

따뜻하게 보듬던 그 입술은 내 저항을 믿지 않았다. 

“……우정이 아니잖아.”

“…….”

“너야말로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우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내 키스를 피하지 

않고, 네 몸을 만지도록 허락한 거지?”

“……!” 

미쉘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너무도 단단해서, 그대로 부딪히면 내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

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위기감으로 몰아넣었다. 확고한 믿음이 서린 목소리 앞에서 나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도 날 좋아하는 거야.”

“…아, 아냐!”

아니야, 아니야, 더 이상 말하지 마. 나는 널……!

“좋아하니까 원하는 거라고. 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워서 자꾸 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

고, 몸을 섞고 싶…”

“난 여자 친구가 있어!”

나는 눈물이 맺힌 눈을 질끈 감으며 그 말을 토해냈다. 일순 엄습한 침묵이 모든 것을 차

갑게 갈라버렸다. 그 침묵 속엔 미쉘의 불신도 미미하게 섞여 있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

다는 표정. 그래서 나는 그 진실 된 얼굴 앞에 추한 거짓말들을 덧붙여야만 했다.

“너도 전에 봤잖아. 미사 우에하라라는 여자애.”

“……그 앤 친구라고 했잖…”

“지금은 연인사이야. 알겠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

나를 지키고 싶어서 시작한 충동적인 거짓말이었다. 지키고 싶어서. 내가 그동안 섬세하

게 지켜온 균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난 널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어. 널 보면서 사랑스럽다고,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난 너처럼 동성애자가 아니니까, 난 평범하게 여자를 좋아하니까!”

멈추려고 했다. 정말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으로 튀어나온 치졸한 거짓말들

은 내뱉어지는 순간부터 이성의 제어를 벗어났다. 그것들은 가파른 산을 구르는 눈덩이처

럼 비대해져 모든 것을 차갑게 뒤덮어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모든 것을 뒤덮어버린, 하

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또다시 예상치 못한 것으로부터 죄의식을 끌어냈다.

“……!”

눈물. 그러나 예전에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빛을 띤 눈물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투명

한 액체가 덧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

았다. 그것은 혀로 빚어진 폭력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가했던 것과 닮은 폭력. 나는 눈물

에 젖은 그 얼굴에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상처받은 얼굴을 볼 때면 

나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어 왔다. 보고 있는 내가 아파서, 어떻게든 감싸주고 싶

었으니까. 언제나.

“만지지 마!” 

미쉘은 내 손길을 소스라치게 뿌리치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으로 내 손길

을 거부한 몸은 꼭두각시처럼 무기력하게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쳐 그대로 유리창에 부딪

혔다. 그는 얼굴을 가린 채 튀어나오는 울음을 억눌러 깎아 삼키면서, 그대로 물에 젖은 휴

지처럼 유리창에 붙은 채 스르륵 구겨지듯 몸을 웅크렸다.

“…없어…, …전부 다 필요 없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나는 행복해질 

수 없어……나는 나쁜 아이니까, 그래서 모두 가버려. 나……나는 혼자야……혼자……

혼……”

“미……!”

미쉘의 절절한 혼잣말들은 무거운 공기 속에 내 가슴으로 차갑게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지만 그 말은 어떤 것에 속박된 것처럼 그대로 막혀버렸다. 창에 기대

어 몸을 움츠리고 있는 미쉘, 그는 내가 만든 애니메이션 속의 소년과 닮아 있었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르시스는 미쉘의 그림자이자 내 안의 어둠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나는 소녀처럼 그를 감싸줄 수 없

었으니까.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고백해온 그의 말들을 철저한 위선으로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으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붙잡지 못하는 나 자신이 경멸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

었다. 나는 자꾸만 들썩이며 갈등하는 입술을 결박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렇게 세뇌시켰

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할 것만 같던 소년의 흐느낌은 어느덧 침묵 속에 잦아들어갔다. 그

동안 나는 무력한 방관자로서 그대로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천천

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동작은 인간의 것 같지 않았다. 로봇, 혹은 꼭두각시. 시선이 공

중에서 맞부딪쳤다. 혼돈과 망각을 담은 두 시선이 충돌을 일으키자 소리 없는 파열음이 

머릿속을 메웠다. 나는 파열음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잘끈 감아버렸다. 그 시선은 뭘 의미

하는 걸까, 대체. 어쩌려는 거냐고. 곧 남자로부터 들려오는 목적을 가진 움직임소리에 나

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것을 내 앞에 힘없이 던졌다. 물체

가 바닥에 던져지며 구르는 소리는 메마른 소리를 내며 고막을 울렸다. 그것은 마치 주사

위처럼 보였다. 인생이란 게임 판에 남자가 던진 짓궂은 주사위. 그 주사위의 정체는 주인 

없는 오팔 귀걸이 한 짝이었다. 감정 없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그녀에게 줘버려.” 

“…….”

“앞으로 내가 널 다시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

“무슨……”

“이젠 됐어. 이걸로 끝이야.”

끝? 이걸로 끝이라고? 기다려,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어. 끝이란 건 거짓말이야.

“……자, 잠깐, 미쉘!”

“난, 미쉘이 아니야.”

“……!”

거짓말.

“……Adieu…….”

그렇게 그는 날카롭게 집안을 울리는 문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을 떠나버렸

다. 영원히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남기는 인사, 「아듀」를 남긴 채.

사랑은 언제나 자기를 기만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타인을 기만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로맨스라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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