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3)

# 10. 어른아이에게 남겨진 성장통의 색

우리가 만든 작품, 「이름이 많은 아이」는 관객들의 인기투표를 통해 뽑은 관객상을 받았

다. 물론 그랑프리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사실 내게 있어서 

관객상은 그 무엇보다도 값진 상이었다. 이전에 셀린느 쥐나뻬 교수의 폭언이후 한동안 나

는 내 꿈에 대한 자괴감에 빠졌었다. 물론 미쉘 덕분에 쉽게 회복할 수 있었지만 줄곧 마

음 한구석에 응어리진 채 남겨져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그대로 전해

줄 수 있는 애니메이터, 그게 내가 지금껏 원해왔던 꿈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그랬기에 이

번에 받은 관객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나 스스로를 독려하는 데에 도움을 준 상이었다.

영상제를 마치고 우리 팀은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다. 그간 함께 동고동

락하며 만들어낸 작품을 무사히 끝낸 것에도 의의가 있었지만, 우리를 더욱 기쁘게 했던 

건 역시 수상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맥주와 보드카를 끝도 없이 들이키며 그간 겪었

던 스트레스와 피로를 한 번에 날려버렸다. 다들 기분이 좋은지 곧 노엘바캉스가 다가오

니 그 전에 모임을 또 한 번 갖자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나 역시 제법 느슨한 태도로 동료

들 틈바구니에서 이야기에 맞장구치고, 웃고 떠들어댔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물론 기분이 마냥 좋았을 리는 없었다. 내가 작업했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얼마 지나

지 않아 나타난 미쉘의 모습은 여전히 내 망막에 깊이 새겨져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 이후

론 그의 뜨거운 눈물이 배었던 한쪽 어깨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문제로 친구들의 분위기를 깰 순 없었다. 나는 때때로 스스로가 어색하다고 의식할 정도

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건배를 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술이 약한 편인데 이상하게도 평균 

주량을 훌쩍 넘어선 상태에서도 내 정신은 별빛처럼 또렷했다. 그 이유는 아마 미쉘을 감

싸안아준 이후부터, 줄곧 내 가슴속에 그의 촉기어린 푸른 눈동자의 잔상이 남아있어서일 

것이다.

자정쯤 되어서 나는 모임을 빠져나왔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한참 무르익어갈 무렵이었

다. 사실 나는 여전히 제법 온전한 정신 상태로 계속 즐길 수도 있었으나 곧 자리에서 일어

나야만 했다. 미사가 인사불성이 되어버려 같은 기숙사에 사는 내가 그녀를 데려다줘야 했

기 때문이다. 그날 미사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맥주에 보드카까지 섞은 것을 연거푸 들

이켰다. 그렇게 만취한 상태에서 발랄한 태도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더니 얼마 안가 결국

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나는 남은 친구들에게 곧 돌아올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며 신

신당부를 한 뒤 미사를 들춰 업고 나갔다. 그 뒤에서 ‘아마 못 돌아올걸.’이라며 쟈끄와 끌

로드가 낄낄댔지만 나는 그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언제나 들어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방은 낯설고 부담스럽다. 내겐 나이 터울 

많은 형 하나만 있고 여자형제는 없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미사의 방

은 영상제 때문인지 이전보단 조금 정리가 덜 된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내 방에 비하면 이 

정도는 확실히 양반에 속했다. 나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녀가 무거운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꽤 긴 거리를 업고 온 터라 힘이 빠진 탓에 나는 옆에 앉아 잠깐 쉬

기로 했다. 그렇게 앉아있다 무심코 의식을 잃고 잠들어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침

대그녀의 피부는 시트에 그려진 튤립처럼 붉게 물든 채 열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문득 

또다시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좋아해, 나의 작은 나르시스.’라고 수줍게 속삭이던 

입술. 나는 사실 술자리에 있을 때에도 한동안은 그녀가 내게 속삭였던 말 때문에 어색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미사는 전혀 그런 내색 없이 뒷풀이를 깔

끔하게 즐겼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묻어갔으면 하는 바

람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미사가 싫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매력적인 여자다. 외모는 물론 성격도 도발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상냥했다. 그녀와 단 둘이 작업하고 있을 때 작년에 이 학교에 처음 들어

와 지내면서 겪었던 해프닝을 들으면서 나는 같은 동양인으로서 상당한 동류의식을 느꼈

다. 그것은 정말 서양인들은 알지 못할 동양인들 간의 미묘한 친근감이었다. 게다가 그녀

는 평소에 밥을 챙겨먹는다거나 빨래를 하는 일까지도 일일이 친누나처럼 다정하게 보살

펴 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무척 편하고 좋았다. 게다가 이번에 팀워크수업에서 무리 없

이 그녀가 속한 팀에 합류가 된 것도, 내 스토리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도 따

지고 보면 전부 그녀 덕분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

다. 고마움. 단지 그것뿐일 것이다.

사춘기 소녀 같은 짧은 머리카락의 끝이 발간 그녀의 볼을 타고 도드라진 입술 새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나와 닮은 검은 머리카락에 나도 모르게 향

수를 느껴 그것을 조심스럽게 한 번 쓸어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어있었다. 나는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일으켰

던 몸은 갑자기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중심을 잃고 침대로 풀썩 앉았다. 당황스러

운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시선 역시 갑자기 달려든 미사의 얼굴에 의해 매워지고 말았

다. 그녀는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뜨거운 입술을 겹쳐 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밀어낼 생

각으로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하지만 그 작은 어깨가 너무 가냘프게 느껴져 그것을 강하

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녀는 점점 막무가내로 나를 침범해왔다. 그녀는 거칠게 자신의 블

라우스를 벗어 제쳤고 곧 그 안에선 브라에 꼭 채워진 가슴이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곡선모

양으로 드러났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그녀가 나의 손을 그

녀의 가슴에 얹기 전까진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갑자기 손끝에 닿은 물컹하고 뜨거운 

것에 놀라 나는 그녀를 그대로 힘을 주어 밀어냈다. 그 힘에 미사는 저항 없이 그대로 침

대 위로 쓰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옷깃을 여미며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 몸에서 떨어져간 그녀의 몸은 공격적으로 파고들던 아까의 행동과는 달리 더 이상 달려

들지 않았다. 미사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그녀의 눈

은 술에 취한 눈이 아니었다.

“지노, 어째서…, 날 거부 하는 거야?”

“…거부라니, 그게 무슨…”

“계속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내 감정을 무시하지 마! 내게 그렇게 끝까지 창피를 

줘야겠어?”

“…….”

나는 그때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사는 그런 방어적인 내 태도를 비웃듯 분명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좋아해.”

“…….”

“사실 처음부터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네 쪽지를 읽은 순간부터.”

“…….”

“그 이야기를 본 순간, 나는 네가 무척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 작가는 자신이 살

아온 인생이나 생각을 허구된 이야기로 꾸며내니까. 그렇기 때문에 난 알고 있었어. 네가 

아무리 겉으론 아닌 척 해도 말이야. 네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이 나를 끌어당기

고 있었단 말이야.”

“미사….”

“좋아해, 지노. 나는 네 외로움을 감싸 주고 싶어. …나르시스를 사랑한 소녀처럼.” 

“…….”

그녀는 격양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그 한마디는 왠지 내 얼굴을 뜨겁게 달아

오르게 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녀는 다시 채근하듯 말을 이었다.

“외롭잖아. 누군가가 널 사랑해주길 원하잖아.”

“…….”

“그런데 왜 나는 거부하는 거야?”

“…그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야?”

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 안의 감정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치 무의식을 뾰족한 

바늘로 자극당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땐 그 이유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나

는 그 촉발된 감정을 억누르며 예정되어 있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내가 싫어?”

“……아니.”

“그렇다면 지노, 나에게 기회를 줘. 넌 날 좋아하게 될 거야. 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

어. 네가 외롭지 않게 해줄게. 그리고 만약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땐 널 

기쁘게 놓아줄게…….”

미사는 침대에서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리

곤 자신의 당돌한 입술로 나를 회유하려는 듯 눈을 감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얄망스런 유혹으로부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줘. 지금은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

그녀는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걸쳤던 팔을 풀어버렸다. 그 후 그녀는 어색한 분

위기를 수습하려했는지 내게 차를 권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

다. 그 발걸음은 곧바로 내 방으로 옮겨졌다. 도무지 친구들이 있는 술집으로 돌아갈 기분

이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느낀 그 가슴속에 꽉 들어찬 감정이 내 심장을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혔다.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침대로 쓰러져버렸다. 하나하나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울 만

큼 순식간에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져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미사를 떠올렸다. 그녀

가 매력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싫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거절하는 거지? 미

사는 좋은 여자잖아. 예쁘고, 친절하고, 날 이해해주고.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그녀를 받

아들이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아니, 부족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 이미 어떤 것이 내 마

음속에 가득 들어차고 앉아 그녀를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불안과 혐오, 금기와 자기부

정으로 꽁꽁 싸매진 정체불명의 감정. 그 위험하고도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

서, 나는 미사의 실망한 눈동자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고백과 갑작스런 행

동에 아무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머리가 어

지러웠다. 지친 몸은 침대에 파묻혀 그대로 먹혀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노곤한 몸과는 달리, 나는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미사의 일을 잊으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미쉘의 일이 뒤이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는 나에

게 안겨 한참이나 흐느끼며 울었었다. 모두 상영이 끝난 뒤 사람들이 상영관에서 하나 둘

씩 나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겨우 내게서 팔을 거두곤 돌아가 버렸다. ‘늦어서 미안.’ 이란 

그 한마디 말만을 남긴 채. 눈물에 젖은 미쉘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혀 몇 번이나 그 뒷모

습에 손을 뻗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이름이 많은 아이」는 자신이 지은 이름을 숨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

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소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런 나르시

스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미쉘은 어떨까. 나르시스의 이야기가 미쉘과 닮아있다는 까트린

느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칸느에서 미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쉘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그를 모르겠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나

는 미쉘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숨 막힐 정도로 안타까운 눈물 속에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먼저 말하기 전엔 내가 

아무리 물어보아도 그는 이야기 해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감겨가는 눈 사이로 벽에 붙어있는 미쉘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만난 날 그렸

던 그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미쉘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졌다. 미쉘이 보고 싶었다. 나를 위로해주는 따뜻한 손이 그리웠다. 하지만 미쉘이 보

고 싶은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그것’이 함께 상존하고 있었다. ‘불안’이었다.

*

영상제 후 곧 노엘바캉스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빠리 시민들은 대부분 자

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가족 개념에 있어서는 우리도 놀랄 만큼 보수적인 것이 프랑스

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주변 나라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러면 

그 사이 빠리는 또다시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의 차지가 된다. 그래서 이 도시는 

언제나 잠들지 않는다. 다만, 나와 같은 이중인은 이방인과 현지인의 틈바구니에서 이 고

립감이 새삼스러울 필요가 없을 뿐이다.

팀워크 수업에 함께 참여했던 우리 팀원들은 크리스마스 파티삼아 다시 한 번 모이기로 

했다. 지난번에 뒷풀이에서 잠깐 나왔던 이야기를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리옹으

로, 스위스로,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 역시 곧 빠리를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크리

스마스보다 며칠 앞당겨 약속을 잡았다. 그날이 바로 오늘, 12월 20일이었다. 영상제가 끝

난 지 며칠이 지난 상태였지만 그날 이후론 줄곧 미쉘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하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서로간의 미묘한 방치상태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그 균형을 잃었다. 미쉘에게 연

락이 온 것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오늘 저녁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 저기… 미쉘, 미안한데……, 조금 늦게 가도 될까? 같이 애니메이션 작업 했던 친구

들과 선약이 있거든.”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는 미쉘의 말은 무척이나 반가

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 시간 뒤에 나가기로 한 약속은 그것을 좌절시킬 위험을 띠고 

있었다. 내가 미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미쉘은 잠시 긴장되는 공백을 두고 되물었

다.

[……그래? 그럼 몇 시까지 올 수 있어?]

“음…… 적어도 10시까진 갈게. 괜찮겠어?”

[좋아, 기다릴 테니 꼭 와줘.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멀쩡한 정신으로. 할 말이 있으니

까.]

“…알았어, 어쨌든 미안해.”

[무슨 말씀을. 아, 참. 내 주소모르지? 받아 적어.]

나는 그의 주소를 하나하나 주의 깊게 받아 적고 전화를 끊었다. 미쉘을 만난다. 나는 그

의 집주소를 받아 적은 쪽지를 그대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나는 내 상태가 심상

치 않음을 발견했다. 미쉘을 만나는 것이 기쁜 걸까. 기분 좋은 듯이 말아 올려진 내 입 꼬

리, 언제부턴가 두근두근 뛰고 있는 내 심장, 그리고 머릿속을 잔뜩 메운 미쉘의 다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반응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

으며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친구를 만날 기대감치고는 조금 지나친 것 아

냐? 확실히.

그 웃음은 곧 미묘하게 변해가는 두근거림으로 이내 스러졌다. 아까 그가 ‘할 말이 있다’

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영상제 때 그가 눈물을 보였던 것과 관련되

어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역시 내 가슴속 심장박동을 한층 고조

시키기 시작했다.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줄곧 내재되어왔던 불안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불규칙한 심장의 잇단 움직임 역시 결국은 뒤이어 걸려온 전화 한통화로 잦

아들었다. 한국에서 부모님께 걸려온 전화였다. 언제나 그래왔듯 연락을 취해오시는 건 어

머니였다. 어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더니 이내 조심스런 태도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너와 이야기를 좀 하시고 싶대.]

내가 그것에 대해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곧 아버지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

다.

[나다.]

“……네, 아버지.”

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그래왔듯 그 예의바름 속엔 언제나 경계

가 깔려 있다.

[그래, 거기선 지낼 만하냐?]

“뭐, 그럭저럭 이요.”

[내가 이전에도 누누이 말해 왔다만 서양 놈들과 섞여 지내면서 배워야 할 게 있고 네가 

한국인으로서 지켜야 할 게 있다. 가서 신난다고 무분별하게 그 녀석들 문화를 받아들이

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특히나 프랑스는 그 상것들 중에서도 아주 성문화가 

문란하다지?]

“…….”

[해볼 거 다 해보겠다고 괜한 호기는 부리지 말라는 거야. 잘못하다 실수로 튀기 손자라

도 안길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네 성격상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귓등으로 듣진 

말아라.] 

“…….”

[어쨌든 일단 공부하러 간 거니 딴 데 한눈팔지 말고 제때 졸업하도록 해. 졸업한다 해도 

그다지 안정된 생활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공부이긴 하다만, 어쨌든 네가 원한다고 작정

하고 떠난 거니 최선을 다해라. 빨리 돌아와서 네가 버려두고 간 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할 것 아니냐.]

“…….”

[무슨 말인지 알겠냐? 군대 말이다.]

“알고 있어요.”

[알면 됐다. 어쨌든 열심히는 하더라도 몸은 상하게 하지 말거라. 내가 무슨 말 하고 싶

은 건지 알겠지?]

“네.”

프랑스로 온 뒤 처음 가진 아버지와의 통화는 그런 식으로 끝이 났다. 한국에서도 구토가 

밀려올 정도로 골백번 되풀이되어온 식상한 대화의 단편.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떠난 

지 3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나의 아버지는 한국 유학연구 쪽으론 제법 저명하신 교수시다. 교수란 직업은 본래 자신

이 주장하는 바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 반대의 것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직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자신이 가진 직업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점을 모르는 교수 아버지에

게 예외란 단어는 없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아집적인 사고는 어렸을 적부터 나를 한 순간도 자유롭게 놓아주질 않았

다. 아버지는 지금껏 자식이 당신의 가치관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것을 용서치 않으셨

다. 그래서 자아를 성립해 나가던 시절, 내 생각과 가치관은 아버지라는 사람으로부터 수

도 없이 부정당해왔고, 그럴 때마다 나는 뼈아픈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

면서도 그의 그림자가 내 무의식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안에서 그 일부

를 발견할 때면 난 여지없이 스스로를 경멸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의 억압적인 

태도로부터 반항하지 못한다. 그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 저항하는 것조

차 포기하게 만든다는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학습된 복

종심을 보여 왔다. 아직 나 스스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타산

적인 복종심 역시 나를 그 앞에서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꺾을 수 없는 의지로 유학을 

떠나온 것만이 유일하게 그 복종심을 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의지였다.

신체적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아물지만 언어폭력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상처를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아버지는 모르시는 것 같다. 그의 뜻을 처음으로 

반하고 애니메이션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에도, 아버지는 지식인답게 정진정명 세치 

혀로 나를 옭아맸다. ‘너는 안 돼’ 라고. 내가 이 단순명료한 말 한마디에서 벗어나기까지

는 교통사고로 부러진 다리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줄곧 내가 힘들 때마다 또렷하게 되살아나 몇 번이고 자아를 난도질하고 있

다.

*

늦은 저녁 나는 친구들과 모이기로 한 술집으로 향했다. 사실 여유 있게 나갈 준비를 했음

에도 약속시간엔 가까스로 도착했다. 머릿속을 겉돌고 있는 예상치 못한 두 통의 전화 때

문에 진한 커피 한 잔으로 그것을 삼켜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크리스

마스트리와 반짝이는 장식들로 휘감긴 술집으로 친구들은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서버가 술과 안주를 주문받고 나가자 미사는 문득 내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받아, 얼마 전에 지나가다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크리스마스 선물 겸.”

“……아,”

자신 있게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선물이라는 말에 나

보단 친구들이 더욱 흥분한 듯 얼른 열어보라고 재촉했다. 그 기세에 나는 차마 어쩌질 못

하고 어색한 손놀림으로 포장지를 풀었다. 구찌 로고가 연속적으로 배열되어있는 잿빛 머

플러가 들어있었다.

“…저…고맙긴 한데 나는 선물 같은 거 준비를 못해서 받아도 될 지…….”

“뭐, 나도 준비하고 산 것도 아니고 선물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그냥 받아줘.”

그날 술에 취한 미사를 데려가고 돌아오지 않은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미사와 나는 이미 

사귀는 사이로 단정지어져버렸다. 나는 친구들이 그렇게 놀려댈 때마다 미사가 아니라고 

부정해주길 바랐지만 미사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딱 잘라 우

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잘못했다간 그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우리의 사이는 ‘시간을 달라’는 내 말에 의해 친구사이도 아니고 연

인 사이도 아닌 미지근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와 나, 둘 다 확실히 선을 긋고 있었지

만 감정적으로는 확실히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나는 그녀가 준 머플러를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빨리 그녀와의 미묘한 

관계를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 이성을 차리고 그때의 일을 돌이켜 봤을 때 나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육감적인 유혹을 느꼈음에도 조금의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 워낙에 여자경

험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겹쳐오는 미사의 입술에서 확실히 난 그때 당혹스러움 뿐, 

그 어떤 흥분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미쉘과의 키스가 더 날 흥분

시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심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쨌든 지금껏 생각해 보

았을 때 미사는 내게 욕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친근한 사람이었다. 친구로서 그녀에게 애

정을 가진 것이지, 여자로서 그녀에게 애정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어쨌든 이런 미적지근한 기간이 길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체

하면 할수록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좋지 않은 것이었다.

“지노~ 애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으면 당장에 준비는 못 했더라도 답례를 해야지

~!”

이런 상념에 잠겨있을 때에도 쟈끄는 계속 미사와 나를 연인으로 묶는 것에 재미가 들렸

는지 놀려댔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미사를 바라보았지만 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어째선지 암묵적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해주길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단둘이 있을 때 선물을 건네지 않고 친구들 앞에

서 선물을 준 것이 그녀의 계산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나는 대충 현재의 분위기에 맞춰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볼에 살짝 비쥬를 했다. 쟈끄는 “야~ 

너무 약하다! 최소한 찐한 키스 정도는 해줘야지~”라며 야유를 보냈지만 나는 그 이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미사도 더 이상 뭘 어떻게 하길 바라진 않는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고, 나는 그제야 찜찜한 분위기에서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노, 오늘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네? 속이 안 좋아?”

조제뜨가 말했다.

“아……. 실은 10시쯤에 다른 친구와 만나기로 했거든.”

“……그렇게 늦게?”

미사는 새삼 놀랍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어쩐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오늘 선약이 있다고 했더니, 그럼 밤늦게라도 오라고 했

거든.”

“그 시간에 만날 정도니 꽤나 친한 친구인가 보네.”

끌로드가 말했다.

“프랑스에 처음 와서 우연히 사귀게 된 친구니까. 나한테는……굉장히 소중한 녀석이지.”

굉장히 소중한 녀석. 지금의 나는 그에 대해 그런 문구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뱉

을 때의 목소리는 어쩐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미사에도 그에 대해 말

했던 것 같은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느낌에 기억의 행방을 좇고 있는데 뜬금없이 쟈끄가 

혀가 풀린 발음으로 소리쳤다.

“오오~ 지노! 제발 그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순진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대놓고 바람피우

지 말아줘! 저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악녀 미사의 눈이 무섭지 않은 거야?”

“…쟈끄, ‘그’라니까? 남자라구, 바보야.”

“뭐! 그럼 너, 설마 날……! 안 돼, 지노! 나도 널 사랑하지만 우리에겐 미사라는 악마가 

우릴 갈라놓고 있잖아!”

“……그만 해라. 재미없다.”

“쟤 왜 저러냐? 분위기 썰렁해지게. 벌써 취했나.”

“저놈은 원래 취하지 않고도 저런 말을 지껄이는 놈이잖아. 신경 끄자고.”

쟈끄의 웃기지도 않은 원맨쇼에 우리는 혀를 차며 그것을 대놓고 무시해버렸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쟈끄표 불굴의 썰렁 쇼맨십’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친구들과 그간 있었던 일들을 즐겁게 이야기하며 그간 못다 한 회포를 풀었고, 시간

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조용하게 흘러갔다. 초반엔 미쉘과의 약속 때문에 시간을 맞추

기 위해 긴장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시간을 확인하는 것

조차 잊고 그들과 빚어진 흥겨움에 젖어있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의 상투적이고 가벼

운 대화는 언제나 그렇듯 그 순간만큼은 내부의 상처를 잊게 해주니까. 그렇게 확실히 시

간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을 때 조제뜨가 문득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 근데 지노, 너 아까 몇 시에 약속 있다고 했었지? 지금 좀 늦은 시간 아냐?”

“음~ 10시인데, 가만히 있자……지금 시각……이, ……10시 58분? 으아악! 어째서 지금 

얘기하는 거야! 한 시간이나 늦어버렸잖아! 저, 미안하지만 나 먼저 갈게!”

나는 그렇게 허둥지둥 자리를 뛰쳐나왔다. 엄청난 자책감이 엄습하며 발걸음을 재촉했

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그에게 가야겠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었다. 그저 빠

리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을 박차며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의미 없는 농담

과 대화 때문에 녀석을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다니. 이제 겨우 미쉘이 내게 무언가를 말해

주려고 하는데, 조심스럽게 날 그의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아아, 미쉘, 미쉘. 나는 안타까운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외치며 미친 듯이 달렸다. 이내 버

거운 운동량에 숨이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부족한 산소량을 감당하고 있는 폐는 아프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것은 왼쪽 가슴에 자리 잡고 불규칙하게 뛰고 있는 심장, 그것이었다.

오, 불꽃같은 사랑이여! 

단 한 번의 긴 키스로, 그는 내 입술에서 내 영혼 전부를 빨아들였네. 

태양 빛이 아침 이슬을 가차 없이 앗아가듯.

- 알프레드 테니슨 Alfred Lord Tennyson-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