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 어깨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의 색
“지노~ 우리들 왔어!”
“야아, 오랜만이야, 롤리타! 까트린느도 오랜만!”
영상제 날이었다. 미쉘은 약속대로 롤리타와 까트린느에게 이야기 했고, 그녀들은 정말
시간을 내어 내가 만든 작품을 보러 왔다. 내가 반가움에 그녀들과 가볍게 비쥬를 마치자
까트린느는 생긋 웃으며 팔목에 걸고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내게 내어보였다.
“후후- 만날 밤새고 일만해서 얼굴은 까칠하지만 영화제라서 그런지 표정만은 생기발랄
하구나! 자, 여기 축하선물이야!”
“고마워- 엇, 이건-!”
“예전에 루아르행이 취소되었을 때 네가 롤리타의 연어샌드위치를 무척이나 아쉬워했더
라고 미쉘이 말해줘서 준비했어. 양이 충분하니까 네 친구들과 나눠 먹어.”
“정말 고마워, 롤리타. 나 감격했어.”
“이정도가지고 뭘.”
그녀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기뻐하는 내 모습에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띠었다.
“…그런데 미쉘은?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나는 설마 하는 불안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 녀석. 학교에서 오늘 실기시험 보는 날 인가봐. 좀 늦는다던데.”
“그래……? 1시간만 있으면 애니메이션 영상제 시작할 텐데.”
“모르겠다, 그 녀석도 빨리 오고 싶은데 실기 때문에 어떻게 빠질 수가 없었나봐.”
그녀는 양손을 내보이며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그 때 롤리타가 옆에서 셔츠 소매를 잡아
당기며 녹아버릴 것 같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노- 우리 보러 와줬으니까 그동안 나 아이스크림이나 사줘어-”
“그래- 얼마든지. 같이 가자.”
“꼬맙? 꼬맙쑴미다아~ 맞지?”
“오오, 제법인 걸? 아직도 잊지 않았네.”
“헤헤, 꼬맙쑴미다아~”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전에 가르쳐 줬던 한국말을 곧잘 따라하는 롤리타는 누
나같이 느껴지는 까트린느와는 달리 여동생처럼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사실 어른스럽
고 지성미 넘치는 까트린느와 소녀 같은 롤리타가 커플이라는 게 처음엔 너무도 어색하다
고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둘이서 팔짱끼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행
복한 웃음이 지어진다. 두 사람의 행복이 내게도 온전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
람과 걷는 다면 저런 기분일까. 그런 생각으로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면서.
나는 그녀들과 함께 교내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자신의 얼 그레이와 함께 롤리타의 아
이스크림을 받아드는 까트린느의 손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매번 느끼는 건데 까트린느는 네일아트에 관심이 많나봐? 손톱위에 섬세한 네일
아트가 자주 바뀌더라.”
내 말에, 롤리타가 끼어들어 자신 있게 말했다.
“아아, 이거? 내가 해주는 거야. 예쁘지?”
“정말? 롤리타에게 이런 취미도 있었구나.”
“취미가 아니라, 내 직업인데?”
“정말? 네 직업이 네일 아티스트야? 정말 잘 어울리는걸.”
까트린느가 덧붙였다.
“음, 롤리타가 대학교 다니다가 만날 나랑 놀러 다니느라 1학년 진급에서 떨어지고, 그 때
부터 네일아트 전문학원에 다녔을 거야.”
“벌써 5년째니- 이젠 베테랑이라구! 후후.”
나는 그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생활 존중을 위해 아직 그녀들의 나이도
알 수 없었고, 롤리타가 10대 후반정도까지로 보였으므로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5년
째 네일 아티스트를 했다는 말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까트린느가 더 나이 많지 않아?”
“무슨 소리야- 내가 2살이나 더 많이 먹었는데?”
나는 속으로 경악을 내질렀다. 아무리 봐도 까트린느는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많아 보
였고, 그런 까트린느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롤리타 역시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의
미했기 때문이다. 내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그들은 웃으며 롤리타라는 이름 역시 그 때문
에 붙여진 애칭이라고 했다. 롤리타의 본명은 알렉산드리아인데, 워낙 얼굴과 어울리지 않
아 다들 그냥 롤리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확실히 강한 인상의 이름이라 롤리타와는 어울
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상영제가 시작되었다. 참가한 인원수도 많지 않았고, 분량도 3분 내외의 짧은 분량이기
에 네 번째로 상영되는 우리의 작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차례가 왔다. 까트린느는 눈살
을 잔뜩 찌푸리며 난감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귀에 대고 한참이나 있다가 겨우 떼었다.
“…연락이 안 돼?”
“으응. 전화도 안 받고, 실기시험도 아마 지금쯤이면 벌써 끝났을 텐데.”
“어떡해~ 조금만 있으면 지노네 그룹이 만든 작품이 시작할 시간인데!”
“이러다 이 녀석만 놓치는 거 아냐? 사실 미쉘이 제일 오늘을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괜찮아. 나중에 따로 보여주지, 뭐.”
“무슨 소리야- 그래도 의미가 다르잖아. 의미가!”
“됐어, 사정이 있나보지. 자, 얼른 들어가자. 우리까지 놓치면 안 되잖아.”
나는 아쉬운 기색 없이 그녀들을 상영관 안으로 데려다 주었다. 사실 아쉬워 할 필요가 없
었다. 미쉘도 자신의 생활이 있는 거고, 나 때문에 그런 것들을 포기할 이유도 없었다. 나
는 그렇게 애써 합리화 시키며 우리 팀이 있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다급한 눈동자의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
L’enfant, Qui a beaucoup de nom [이름이 많은 아이]
한 소년이 있었다. 그에겐 태어나면 누구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두 가지가 주어지지 않
았다. 부모, 그리고 이름. 소년은 자신이 무엇이라고 불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소년은 이름이 많았다. 새벽에 우유배달을 하러 다닐 때엔 블랑쉬 앵포Blanch
Info(하얀 소식)라 불리었고, 저녁에 거리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할 땐 트리스뜨 하모니카
Triste harmonica(슬픈 하모니카)라고 불리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그
의 이름은 그때마다 달랐다. 소년은 하나뿐인 진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에겐 진짜 이름 따윈 없었다. 소년은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우유배달을 하고 오던 길에 창가에 예쁘게 피어있는 수선화에 물
을 주고 있는 예쁜 소녀를 보게 되었다. 소녀는 수선화에게 달콤하게 말을 건넸다.
“나의 작은 수선화야, 안녕? 오늘도 너는 참 예쁘고 향기롭구나.”
소년은 그녀에게 사랑받고 있는 수선화가 부러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나르시스Narcisse(수선화)라 지어줬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
게 자신이 지은 이름을 밝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계속 다양한 이름
으로 불리며 자신을 숨겨왔다.
어느 날 소년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을 때, 사람들 사이로 예전에 봤던 소녀가 자신을 보
러 와 있었음을 발견했다. 소년은 더욱 힘이 나서 열심히 불었다. 사람들은 “슬픈 하모니
카야, 오늘 따라 연주가 멋지구나!”하며 같이 호응을 해주었다. 소년이 잠시 연주를 쉬는
동안,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소녀는 가지 않고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의 이름이 정말 ‘슬픈 하모니카’니? 너의 진짜 이름은 없나보구나?”
그녀는 소년에게 약간 화난 목소리로 새침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에겐 이름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나르시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두렵기에.
소녀는 떠났고, 그 뒤로 다신 소년의 연주를 들으러 오지 않았다. 소년은 갈등했다.
“나의 작은 수선화야, 안녕? 오늘도 너는 정말 외롭구나…….”
그는 스스로를 불러본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그래, 진짜 내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제부터 나는 나르시스야.
마리 아주머니가 ‘블랑쉬 앵포’라고 계속 부르더라도, 삐에르 아저씨가 ‘트리스뜨 하모니
카’라고 계속 부르더라도.”
다음날 아침, 마리 아주머니가 우유배달 오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블랑쉬 앵포야,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왔구나.”
“마리 아주머니, 제 이름은 나르시스예요.”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소년은 아주머니의 반응이 겁이 났다. 하
지만 그녀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어머, 지금까지 몰랐구나. 네가 네 이름을 말해주지 않아서 내 멋대로 지금까지 ‘블랑쉬
앵포’라고 불렀단다. 미안하구나, 나르시스. 예쁜 이름을 가졌구나.”
소년은 기분이 묘했다. 저녁에 만난 삐에르 아저씨가 소년에게 말했다.
“여, 트리스뜨 하모니카야, 오늘은 왠지 하모니카 소리가 슬프지가 않구나? 무슨 좋은 일
이라도 있는 게냐?”
소년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저씨, 저는 트리스뜨 하모니카가 아니에요. 제 이름은 나르시스예요.”
“어, 그랬냐? 왜 여태껏 네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게냐. 나는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냥 ‘트리스뜨 하모니카’라고 지금까지 불렀잖니, 나르시스.”
그 후, 소년에겐 더 이상 많은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안녕, 나르시스.”
“오랜만에 보는구나, 나르시스.”
“요즘 하모니카 소리가 굉장히 경쾌해졌구나, 나르시스.”
모두가 불러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은 자신의 수선화에게 물을 주고 있
는 소녀를 찾아갔다. 그녀를 본 순간 다시 두려움을 느꼈지만,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새 이름
을 고백했다.
“나에게도 이름이 있어. 내 이름은 나르시스야.”
그러자 그녀가 방긋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가와 그의 양 볼에 살짝 꽃잎 같은
비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워, 나의 작은 나르시스.”
나르시스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연출 - 쟈끄 윌토르
각본 - 지노 장
음향 - 조제뜨 사뇰
편집 - 미사 우에하라, 끌로드 르뵈프
드로잉 & 그래픽 - 쟈끄 윌토르, 미사 우에하라, 끌로드 르뵈프, 조제뜨 사뇰, 지노 장
*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고, 이윽고 관객들의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가 뒤를 이었다. 나는 그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너무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내 속엔 다양한 감정들
이 겹쳐졌으며, 주변과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 인생이 그 안에 전부 담
겨있는 기분이었다. 상영관 내에서 많은 사람들의 박수가 들려오자 그간 고생했던 나날들
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감흥에 젖어 박수치는 관객들을 보면서 나는 그간의 시름이 단번에 눈 녹듯 녹아버리는 것
을 느꼈다. 묘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후두부까지 올라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희열이었
다.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와 고통. 모두와 함께 노력한 값진 시간들. 그리고 결국 그 노력
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깊이 다가가 울리게 한 순간의 환희. 나는 그렇게 묘한 느낌에 휩
싸여 정신이 아득해있었다.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아마 성적 오르가즘보다도
흥분되는 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해, 나의 작은 나르시스.”
그 말로 알 수 없는 격정에 젖어있을 때였다. 갑자기 귓가에선 조심스런 숨결과 고백이 느
껴졌다.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한참이나 멍하게 있다 목에 기름칠을 하지 않은 것처
럼 끼긱거리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당당하게 나를 마주 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자리엔 나에게 처음 같이 팀이 되자고 했을 때와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미사가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진지하게 마주하는 그녀
의 표정은 그런 의심을 이내 거두게 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행동에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얼마나 그
순간이 지속되었을까, 갑자기 나를 찾는 쟈끄의 목소리에 나는 의식을 차렸다. 셀린느 쥐
나뻬 교수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급한 듯 자세를 취하며 그녀와의 멈춰버린
공기를 빠져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쟈끄가 마치 신의 전령을 전하는 천사처럼 느껴졌다.
“지노, 네가 이 이야기를 썼다고 했었지?”
“…네.”
쥐나뻬 교수는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관객들이 자네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고 만들었나?”
“…제가 연출을 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함께 참여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이해시키기 위
해 서로 의논하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
“지노 장, 아직도 내가 밉나?”
“……네?”
“계속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잖아. 수업시간에도 내가 질문을 하면 언제나 주눅 들
어 있었고.”
나는 내심 뜨끔했으나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이 싫다거나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 잘못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일부러 그러셨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자네 말이 내 화를 돋운 건 사실이야. 수용자에 대한 배려, 가장 중요한 과정을
빠뜨리고 스토리를 진행시켜 나갔다는 건 제작자로서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동의하나?”
“네. 당시엔 저를 무척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호통 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
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지노,”
“네?”
“괜찮은 작품이었어.”
쥐나뻬 교수는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나를 부르고,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전부
터 내가 이 이야기를 썼다는 것을 알아왔었다. 하지만 이전에 함께 평가받는 자리에서나
의견을 들을 때 그녀가 그때의 이야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괜찮은 작품이었
다.’ 별 말 아니긴 했지만 그녀의 말은 그 어떤 찬사보다도 나를 벅차게 했다. 지나가다 우
연히 들은 쟈끄는 ‘쥐나뻬 교수가 저 정도 말을 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그녀의 칭찬이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팀
모두에게 준 것이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이야기는 쟈끄와 조제뜨, 끌로드와 미사 덕분에 더
욱 의미와 빛을 발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 더욱 뜻 깊고 소중했다.
쥐나뻬 교수와의 대화를 되짚어보다 이내 방금 전 미사와의 일이 떠올랐다. 이제 겨우 상
영을 마친 것뿐인데 어쩐지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어지러웠다. 대기실 소파에 몸
을 파묻고 있는데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끌로드가 나를 불렀다. 손님이 왔다며 나가보
라는 것이었다. 대기실 밖 복도로 나가보니 까트린느와 롤리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까트린느, 롤리타, 갑자기 여기까지 웬일이야? 아직 다른 작품 안 끝났을 텐데.”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둘은 프랑스인 특유의 흥분상태를 보이며 고양
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다른 작품이 중요해? 지노, 정말 최고였어! 정말 네가 만든 작품 맞아? 지노의 능력
은 예상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분명 수상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일걸? 호응도 지금
까지 제일 좋았다고!”
“지노~ 끝에 각본 부분에서 네 이름이 나와서 굉장히 놀랐어~! 정말 기대 이상이야! 너
무 감동적인 이야기였어~!”
그녀들은 마치 자기가 만든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은 것처럼 서로 기뻐해주었다. 그 모습
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소식 없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리 잡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녀들의 격려에 마주 웃어주어야만 했다.
“아아- 미쉘도 이걸 봤어야 했는데. 딱 그 녀석 이야기 같아서 놀랐다니까.”
“……뭐?”
갑자기 까트린느의 입에서 미쉘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목구멍
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느끼고 있는 공허감은 바
로 그녀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영상제 상영을 마친 것을 기뻐해줄 미쉘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미쉘 덕분에 생각난 아이디어였다. 그와 만나 처음 나눈 벤자민과 관련된 대
화에서 얻은 스토리였다. 그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작품을 보았다면 어떤 반
응을 보여줬을까. 그런데 그 이야기가 미쉘의 이야기와 같다는 것이 나는 한편으로 의아했
다. 까트린느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 처음 만났을 때 말야-”
“…잠깐,”
“어?”
까트린느의 이야기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나는 그대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저기서 걸
어오는 남자만이 오직 내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기 때문에. 오직 세상에 나만 존재하듯, 나
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오는 낯익은 인영.
“……미쉘?”
“…….”
미쉘 미라쥬였다. 미쉘, 그가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
서, 얼굴을 눈물범벅으로 만든 처연한 푸른 눈동자를 빛내면서. 느릿한 걸음으로 내 앞에
다다르자 그 커다란 팔이 내 몸을 꽈악 껴안았다.
“미, 미쉘? 무슨 일이야? 언제 왔어?”
“…….”
그 안타까운 눈물에 당황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팔로 감싸주었다. 그렇게 눈
물짓는 미쉘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칸느에서조차 눈물짓지 않았던 그가 흘리는 눈물
은 내 가슴속 어딘가를 속절없이 허물어버렸다. 그는 내게 안긴 채로 한참을 작게 흐느껴
울었다. 내 왼쪽 어깨가 그의 눈물로 뜨겁게 젖고 있었다. 억눌린 흐느낌이 밴 눈물은 끝없
이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와 어깨에 뜨겁고 축축한 느낌을 남겼다. 그가 격양으로 뱉어낸 액
체는 내 가슴속에 녹아들어 데는 것 같은 아픔을 번지게 했다.
“…지…노…지노…….”
“…….”
그 흐느낌 사이론 내 이름이 몇 번이나 섞여 나왔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의 등만 토닥여 주었다. 너무나 아파하는 미쉘의 모습은 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아픔도, 울고 있는 미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
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죄어왔다.
“쉬… 울지 마, 미쉘.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나는 내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억누르며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나보다
덩치가 큰 녀석을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것이 이상해보일지 모르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밖
에 해줄 수 없었다. 그때 미쉘은 정말 어린아이였으니까. 그는 내 어깨에서 고개를 들지 않
은 채 울어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나, 나도… 나르시스처럼……하면, …외롭지 않을까…….”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름이 많은 아이」를 보았나보다. 문득 까트린느의 얘기를
들어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떤 외로움을 안고서 내가 쓴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
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으니까.
-나에게 새로운 심장이 생겼다. 너라는 피로 거칠게 약동하는 심장. 하지만 그땐 미처 깨
닫지 못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