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 바닷물로 알알이 빚어진 석류 열매의 색
늦잠을 자서인지 해는 이미 거의 중천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 식사가 놓
인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신선한 야채샐러드와 바게트, 진하지 않은 치즈와 우유. 간단
한 식탁 차림이었지만 접시 안에 가지런히 담긴 음식들에선 미쉘의 정성이 그대로 전해졌
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칸느라니, 게다가 이 집은…”
“이집은 내가 어린 시절 자란 곳이야. 아주 어릴 때……. 이곳에서 어머니와 둘이서 살았
거든.”
“그렇구나. 그럼 가족들은 지금 다들 빠리에서 너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바다마녀와 결혼해 박명하시고, 어머니는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되
셨지.”
“…….”
그건 누가 보아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연상시켰지만 나는 어째선지 더 이상
캐물어선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쉘이 나갈 준비 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2층에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린 액자
속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미쉘과 그의 어머니 사진 같았다. 그는 지금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때 역시 눈에 띄는 외모의 예쁜 소년이었고, 어머니는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
미쉘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미쉘과 같이 금빛 물결을 연상시키는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
운 여자였다. 하지만 어딘가 생기가 없어보였다.
『에바 베넥스Eva Beineix』. 망자(亡者)의 이름은 누구의 것이나 그 육신과 함께 생명
의 빛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도 밀려오는 허무감은 막을 수
가 없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였던 것 같다. 사진 속엔 그녀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이 꽤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진들 중 그 어디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바위에 붙은 조개처럼 계단 벽에 불규칙 적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많은 액자
속엔 아름다운 미쉘과 그녀, 단지 그 둘만이 오롯이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마치 세상엔 둘
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칸느 중심가로 나가기 위해 차를 탔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국적인 야자나무와 희
고 고운 결의 모래사장, 그리고 너무나 파란 바다. 미쉘의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경치를 구
경하면서 나는 칸느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유럽 부호들이 가장 많이
별장을 지어 놓는다는 칸느답게 그저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할 뿐인데도 예쁘고 훌륭
한 저택이 가득했다.
미쉘은 유럽의 여름 바캉스지역 중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니스와 비교해볼 때 칸느는
더 작고 조용하며 부유층의 별장이 많아 고급스러운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쉘의
집과 부유층의 별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 하얀 집은 흰모래와 바다 외엔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그것이 무척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바캉스기간이 훌쩍 지나버린 10월 하순이어선지, 휴양 도시 칸느의 번화가엔 생각보다 사
람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칸느의 작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쉘이 가져온 카메라로
사진도 찍었다. 이곳은 칸느영화제로도 유명한 곳이었기에, 어떤 곳의 바닥엔 수많은 영화
배우와 감독들의 손바닥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
들의 손바닥을 찾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타일에 정신이 팔린 나를, 미쉘이 갑자기 뒤에서
붙잡았다. 뒤돌아보자 그는 말없이 내 반대편 손도 조용히 잡아 쥐었다. 내 양손을 자신의
손바닥 사이에 모은 채 그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듯 속삭였다.
“……언젠간 이 거리에 네 손바닥도 당당하게 찍혀있기를.”
“…….”
그는 내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입술을 갖다 대고 가벼운 비쥬를 했다. 그리곤 내 손을 자
신의 양손에 쥔 채로 몸을 숙여 아직 손바닥이 찍히지 않는 주인 없는 빈 바닥에 갖다 댔
다. 마치 지금 내 손바닥을 이 위에 새기는 것처럼, 자신의 손을 겹친 채 내 손을 바닥 위
에 꾸욱 눌렀다.
“여기가 네 자리야. 확실히 기억해서 정말 찍으러 와야 돼, 꼭.”
그는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뢰가 담긴 그 눈빛은 처연한 푸른빛을 띠며 빛
났다. 그 빛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슬펐다.
*
“……말도 안 돼……!”
“…….”
“어릴 때 여기서 살았다면서, 수영을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사람은 절대 못하는 게 한가지씩은 있는 법이야.”
우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별장 앞의 흰 모래사장 앞에서 우
리 둘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어릴 적에 살았다는 녀석이 수영을 못한다니 믿
을 수 없었다.
“……그럼 평소에 이곳에 오면 뭐 하는 거야, 대체?”
“그냥…… 바다구경, 여름엔 선탠.”
“우와, 재미없어.”
나의 비위 틀어진 말투에도 미쉘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에 질세라 내가 그의 움직임
을 좇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관심 없다는 듯 커다란 야자수 아래에 비
치의자를 펴고 앉아 무심하게 음악전문잡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얄미워서 더
더욱 눈에 힘을 주어 도끼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혼자 들어가서 놀아. 난 여기에서 잡지나 읽고 있을 테니까.”
“…….”
나는 흘러나오는 조소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미친놈처럼 혼자 물장
구 치고 놀면 퍽이나 재미있겠다…?
“싫어-! 지노! 이거 놓으라니까-!”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서 놀자니까? 나 이래봬도 초등학교 때 수영대회까지 나갔었어
~! 걱정하지 말고 같이 들어가자~”
나는 견디다 못해 미쉘의 팔 한쪽을 부여잡고 바닷가로 끌어내기 시작했고, 미쉘은 당황
한 듯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미쉘의 모습은 완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그
것과 흡사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그를 내 쪽으로 당겼지만 역시 힘에서
는 그 차이가 역력했다. 나보다 머리 한 개만큼은 크고 몸도 좋은 녀석이 다리에 힘을 준
채 딱 버티고 서있으니 도무지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바다에 들어가기 싫다는 거야? 아까 사진 보니까 어릴 때 엄마랑 둘이 이 바닷
가에서 놀고 있는 사진도 있던데!”
나는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 지도록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당기며 외쳤다.
“무……물이 무섭단 말이야!”
“으앗!”
그는 그렇게 소리 지르곤 더욱 힘을 주어 결국 내가 쥐고 있던 팔을 뺐다. 나는 반동에 고
무공처럼 튕겨져 나가, 흰모래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나는 엉덩이의 통증보단 방금
들은 말에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설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것은 정말 예
상치 못한 말이었다. 물이……무섭다고……?
저렇게 뭐든 잘할 것 같은 녀석이 고작 물이 무서워 바닷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니. 어째
서? 미쉘은 내가 모래 바닥에 쓰러진 채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짐짓 놀랐는지 당황
한 눈빛으로 내 앞으로 급히 몸을 숙였다.
“지노, 괜찮아? 어디 다친 거야?”
“……미쉘…….”
“……뭐, 뭐야.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난 안……”
“……놓지 않을 테니까,”
나의 진심어린 눈에 미쉘은 피하려는 얼굴을 돌렸다. 나는 그의 볼에 손을 뻗어 마주보게
한 뒤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널 이렇게 꼭 붙잡고 들어갈 테니까 같이 들어가자. 아까 바닷물에 잠깐 발을 담갔는데
10월 말인데도 물속이 정말 따뜻하고 기분 좋더라.”
“…….”
“나, 못미더워 보여도 정말 수영 잘해. 걱정하지 마. 절대 놓지 않을게. 깊이 들어가지도
않을게. 나……정말 미쉘이랑 함께 바닷물에서 놀면 행복할 것 같아.”
“…….”
“나를……믿지?”
나의 부탁에 결국 그는 못이기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달래어 함께 물가
로 다가갔다. 처음 물에 들어갈 때 미쉘은 정말 나와 그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꽉 껴안았고, 몸은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케헥- 미, 미쉘……! 잠깐, 목 조르지 마! 숨…막힌다구!”
내 숨넘어갈 듯한 절실한 요청에 미쉘은 목에 감은 팔을 살짝 풀었다. 하지만 나를 놓치
지 않으려는 듯 여전히 긴장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커다란 덩치가 내 몸에 기대고 몸
은 잔뜩 긴장한 채로 밀려오는 작은 파도에 겁먹은 모습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몸에 달라붙은 채, 바닷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힘겨운 첫 걸음마를 떼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밀려오는 바닷물이 그의 발
에 처음 닿는 순간, 그는 몸을 흠칫하고 떨며 뒷걸음질 쳤다.
“기다려봐.”
“…….”
바다를 향해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내 작은 발자국이 찍힌
곳에 그대로 자신의 커다란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바다가 밀려왔다. 이번엔 발목까
지 덮어 쓸고 지나갔다. 발가락 사이에 파도와 함께 밀려왔던 고운 흰 모래는 바닷물이 빠
져나가면서 함께 발가락 사이로 쓸려나가며 발가락을 간질였다. 미쉘은 다시 한 번 흠칫
떨었다. 하지만 이번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기분 좋지……?”
미쉘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목 뒤에서 얕게 내뱉어지는 긴장된 입김이, 그리고 내
머리에 닿는 그의 머리칼의 촉감이 그가 작게 끄덕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 때 그는 분
명 웃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갓난아기가 꿈을 꾸며 배냇짓을 할 때처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하늘과 바다가 빨갛고 노란 물감에 젖은 채 타오르고
있을 때쯤이 되자, 그는 내 몸을 붙잡지 않고도 혼자 허벅지까지 오는 바닷가에 설 수 있
게 되었다. 여전히 긴장된 듯이 굳은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스스로를
굉장히 대견해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지
만 그의 웃음은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이제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나중에 이르러선 내
게 먼저 물을 튀겨 보내서 서로 물싸움을 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물
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해가고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점점 깊어가는 태양의 주홍빛 물감에, 투명하고 붉게 빛나던 그의 머리칼, 물장난 칠 때마
다 껍질에서 알알이 터져 나오는 듯한 석류 알처럼 부서지는 따뜻한 물방울, 어머니의 양
수 같이 안온한 소금기 섞인 바다의 냄새, 그리고 어린아이보다 순진한 그의 웃음, 웃음,
웃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세상에
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새겨나가고 있었다. 함께.
*
바다가 노을의 붉은 빛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을 무렵, 나는 옷을 갈아입고 미쉘이 가져
다 놓았던 비치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쉘은 생각에 잠긴 듯 혼자 바닷가 앞
에 앉아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붉은 석양이 마지막으로 비춰주는 그
의 역광으로 비친 뒷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기특해 보였다. 아까 전에
나를 꼭 부여잡고 바닷물에 들어갔던 녀석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이전보단 물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증을 조금은 떨쳐버린 것 같아서 기뻤다.
입에선 어느새 부턴가 무의식적으로 입에 익은 멜로디가 끊이질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
다. 미쉘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양이 다 저물기 전이었다. 서서도 한참이나 붉
게 젖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더니, 이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다리에 자신의 머리를 뉘이고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에 약
간 당황했지만 그를 매몰차게 밀어내진 못했다.
“……방금 부른 멜로디, 다시 불러봐.”
미쉘은 피곤한 듯 입술을 거의 떼지 않고 말했다.
“아……이거?”
나는 그 멜로디를 다시 불렀다.
“그거……어쩐지 느낌이 묘해.”
“……그래?”
“응. 슬퍼.”
“……슬픈 노래인가? 이 노랜 아마 대한민국 전 국민의 가슴에 깊이 심어져 있는 노래일
거야. 어릴 때 부모님들이 자장가로 많이 들려주거든.”
“한국 자장가야?”
“뭐, 그런 거지.”
“무슨 내용인데?”
“음…… 섬에 사는 아이 이야기인데, 그 아인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아래서 혼자 살고 있
어. 그런데 먹고 살기가 너무 빠듯해서 어머니는 아이를 누구에게 맡기지도 못하고 집에
두고 갯벌에 굴을 캐러가야 하지. 아기는 집에 혼자 남아 엄마를 기다리다 바다의 파도소
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고, 엄마는 아이가 잠든 줄도 모르고 갈매기 울음소리에 마음이
쓰여서 굴을 바구니에 다 채우지 못한 채 집으로 달려온다는 이야기야.”
“……진짜 슬프다. 그런 걸 들으면서 잠이 온대?”
미쉘이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되물었다.
“으음……. 뭐, 어린 아이들은 가사의 내용을 따지지 않고 들으니까. 나도 방금 얘기 하면
서 정말 슬픈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어. 평소엔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하고 불렀는데. 이상
하지?”
“…….”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려다보니 여전히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잠이 들
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톱만큼 남은 저물어가는 붉은 빛을 바라보며
그대로 앉아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밀려오는 노곤함에 저물어가는 태양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이 감
기려하고 있었을 때였다.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미쉘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담담한 목소
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죽였어.”
“……뭐?”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결에서 눈이 번뜩 뜨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의 말에 귀를 기
울였다.
“어렸을 때, 유일하게 나와 놀아주던 친구가 한명 있었어. 그 친구와 즐겨 했던 놀이중 하
나는 누가 더 멀리까지 헤엄치나 시합하는 거였어. 더 멀리 갔다가 못 돌아올 것 같다고 생
각하는 사람이 먼저 포기하겠다고 말을 하면 지는 게임이었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만 그 친구는 그 시합을 좋아했으니까. 왜냐면 항상 내가 녀석에게 졌거든. 나는 어릴 때
체력도 약했고 겁도 많았으니까. 난 그 녀석을 잃고 싶지 않아서,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그 녀석과 자주 시합을 했어. 어머니에게 들키면 호되게 혼이 났기 때문에 항상 몰래몰래
해야 했지.
……그런데, 어느 날은 그 녀석이 다른 친구들에게 나더러 아빠도 없는 자식이라고 소문
내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래, 그것까진 괜찮았어. 하지만 그 녀석이 내 어머니더
러 창녀라고 말 하는 것을 직접 들었을 땐……. 내겐 그 녀석만이 유일한 친구였는데, 진
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화가 났어. 배신감과 분노를 가눌 수가 없었지. 그래
서 녀석에게 시합을 제의했어. 이번엔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헤엄쳤어. 열심히 헤엄쳐서, 녀석보다 멀리, 아니 그녀석이 지금까지 나갔던 거리보다
훨씬 멀리 나가서 녀석에게 복수하자. 하고 생각했거든.
……너무 집중해서였는지 나는 그녀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포기 하겠다’는 말
도 못 듣고 그저 앞만 보고 헤엄쳤어. ……한참이 지나서야 육지는 저 멀리 떨어져있고 넓
은 바다 한가운데에 나 혼자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 때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피로감
은……말 그대로 그 자체가 공포였어. 나는… 그 순간 힘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도와달라
고 소리쳤지…….”
“…….”
미쉘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너무나 괴로워보였다. 한참이나 말이 없
다가 진정된 목소리로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하자 당황한 친구는 바로 우리 집에 계신 어머니를 불렀어. 우리
집이 가장 가까웠거든. 놀란 어머니는 친구에게 다른 사람을 불러오라고 말하고는 바다로
뛰어드셨어. 어머니는 수영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 어린 나보다도 못하셨지. 그런
데…… 내가 있는 곳까지 헤엄쳐 오셔서…… 정신을 잃어가는 나를 등에 업고 육지로 다
시 헤엄치셨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힘에 부쳐 같은 곳을 부질없이 맴돌고
있었어. 동네 청년이 와서야 나와 어머니는 육지로 끌어올려졌지. 어머니의 등 위에 올라
탔던 나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
“……어머니는…이전부터 이미 천식을 심하게 앓고 있던 상태였어. 그런데…… 나 같은
걸 살리겠다고, …자신의 능력엔 맞지도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의 이야기에 감정의 여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격정을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뱉어내야
만 했다. 미쉘은 언제부턴가 눈을 뜬 채로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
다. 하늘도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곳.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미쉘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그런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치 이전에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서 이제 흘릴 눈물이 남지 않은 사람처럼.
그것이 더욱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생각으로……나는 그 이후 물을 지독하게 무서워하게 됐어. 앞
으로 물엔 절대 들어가지 말자. 들어갔다가 또다시 내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지 말자, 하고.”
“…….”
“물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내 안에 있던 자기혐오가 어느 정도 바닷물에 씻겨간 것 같
은 느낌이 들었어.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죽을 때까지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을
거야.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한 것도……네가 처음이야.”
“……말 해줘서 고마워…….”
미쉘은 나를 흘끗 올려다보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내 모
습은 아마 굉장히 우스웠을 것이다. 내 눈에선 눈물을 잔뜩 흐르고 있었지만 입은 그와 같
이 웃고 있었으니까.
“하아.”
석양은 이미 저물었고, 저 멀리서 등대 하나가 아른한 불빛을 내며 어부들의 태양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울음을 멈추고 차가워지기 시작한 공기를 깊게 들이쉬다, 이
내 격정적으로 내뱉었다. 그 한 번의 숨이 내 안에 기생하고 있던 더러운 찌꺼기를 걸러주
는 것 같았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왠지 속이 후련했다. 미쉘은 여전히 눈을 뜬
채로 내 다리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나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내
가 감정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자 미쉘이 말했다.
“지노.”
“왜?”
“행복하다…….”
“…….”
“지금 이순간이, 꼭 내가 꿈꾸던 유토피아 같아. 이대로……그냥 잠들고 싶어. 지노, 나에
게 자장가를 불러줄래?”
“자장가…?”
“응. 아까 그 멜로디의 자장가. 한국어로 된 가사랑 같이.”
“……좋아.”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섬 그늘을 달려옵니다
평소 부를 때완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해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자장
가를 다 부르고 그를 내려다보니 그는 어느새 정말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엄마를 기다리
다 잠이 든 섬집아기처럼.
어째서일까, 잠든 그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금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다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그의 곧은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잘 자, 나의 어
린 아이, 미쉘.
-나는 나 자신이 완벽한 객체라고 생각해 왔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