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 그리움에 메말라가는 유자껍질의 색
아침부터 먹구름이 땅으로 뚝뚝 떨어질 것만 같더니 드디어 빗물이 하나 둘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굵어지는 빗물에 자전거 페달을 재촉하여 밟았다. 금요일 수업이 모두 끝
나고 팀워크 수업의 과제 설정과 스토리보드 작성을 위해 쟈끄네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
다. 모두 수업이 끝나고 모이기로 했는데 막상 도착하자 쟈끄 외엔 아무도 없었다. 쟈끄는
미사는 아직 오지 않았고, 조제뜨와 끌로드는 먹을 것을 사러 나갔다고 했다. 나는 비에 젖
은 옷을 가볍게 털어내며 곧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먼지 낀 창밖에선 빗물
이 연신 창을 퉁퉁 쳐대고 있었다. 그 소리에 마음이 쓰여 나는 자꾸 비오는 창에 시선을
두었다.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냐?”
쟈끄가 문득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내게 물었다. 평소엔 언제나 농담만 일삼던 쟈
끄가 갑자기 허를 찔러오자 나는 순간 움찔했다.
“어…?”
“이번 주 내내 이상한 거 같아서. 어딘가 정신을 빼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뭐 상의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도움이 될 지도 모르니까.”
그의 말에 잠시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얼마 후 나는 무표정한 얼굴
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자끄.”
“그래, 뭔데?”
“…생각지도 못한 동성 친구가 갑자기 키스…를 해오면 어떨 거 같아?”
“……뭐?”
내 말에 일은 안하고 요상한 캐릭터를 그리고 있던 쟈끄의 손이 일순 멈춰버렸다. 그는 커
다란 입을 쩍 벌린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난감한 표정으
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친구……게이냐?”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감이란 게 있잖아.”
“…몰라, 난 그런 거 잘.”
여기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당당하게 성향을 밝힐 수 있는 곳이지만 내가 살아온 한국
은 그런 것에 무척이나 차단된 사회였다. 까뜨린느와 롤리타 때도 그랬고 프랑스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그런 감을 쉽게 느낄 리 없었다.
“설사 게이나 양성애자라고 치더라도 보통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접근하지, 아닌 사람
을 함부로 건드리진 않아.”
“…….”
맞는 말이었다. 내가 알기로도 프랑스 사람들은 성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의사를 무척
이나 존중한다. 때문에 가장 활발한 성생활을 하면서도 강간율은 극도로 낮은 나라이기도
했다.
“글쎄, 그 녀석이 게이라면 네가 동양인이라서 그런 식으로 몰아붙였는지도 몰라. 어떤
애들은 동양인들이 거절 잘 못하는 걸 알고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밀어붙이기도 하거든.”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그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에게 정신없이 달려들어 키스하다 혀가 깨물린 미쉘은, 오
히려 나보다 당황하고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마치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처
럼 말이다. 쟈끄의 말처럼 내가 만만해 보여서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반응이
었다. 나는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 강매로 샀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그것이 정말
이 혼돈을 해결해줄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키스하고 나서 뭐라고 그러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버렸어.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오질 않아.”
그날 미쉘이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 그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나는 미쉘이 어
떻게든 해명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줄곧 침묵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나는 마치 한조각의 유자껍질이라도 되어버린 기분이었
다. 그 기억을 되풀이 할 때마다 미쉘의 체향에 숨 막히고, 마음의 표면은 울퉁불퉁 껄끄럽
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메말라가며 빛바래지는 유자껍질 같은 일주일이었다.
키스라니. 미쉘이 나에게 키스를 하다니. 나의 사고마저 삼켜버렸던 그 키스. 나는 그날
미쉘이 간 뒤에도 까마득한 혼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
우 쓰러져 잠이 들었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늦은 오후였다. 다시 깨던 순간엔 그
일이 마치 한바탕의 지독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대로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깨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저릿했던 손목은 그 정신의 도피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손가
락 자국이 그대로 남은 멍 자국은, 그렇게 지워지기 전까지 사나흘 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순간을 회상시켰다. 격하게 부딪혀오는 숨결과 손목을 붙잡은 악력, 내 위에 올라탔던
그의 체중이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때 저항하던 내 몸의 떨림 조차.
차라리 그가 가했던 행동을 술주정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럼 대놓고 가볍게 화라도
낼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당시의 미쉘은 나를 안고 올 때만해도 무척이나 멀쩡한 상태였
다. 잠깐이긴 했지만 미묘한 망설임마저 어렴풋이 느껴졌다. 확실히 그건 술주정이 아니었
다. 의도적인 것이다. 대체 왜…, 왜 나에게……?
“혹여나 연락해도 무시하고 그냥 만나지 말아버려. 그런 녀석한테 틈을 보였다간 무슨 일
을 당할지 모르니까.”
쟈끄는 그렇게 못을 박으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가면 같은 얼굴로
반사적으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적인 것이라면, 쟈끄의 말대로 미쉘이 정말
게이란 말인가? 그럼 그동안 나를 그런 식으로 노려왔던 건가? 하지만……
“……지만 보고 싶은 건 어떡하지…….”
“뭐?”
“…….”
나는 그 말을 입술에서 혼자 주억거리다 그대로 삼켜버렸다. 모르겠다. 그가 왜 나에게 키
스를 했는지, 어째서 충격 받은 얼굴로 도망쳤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솔직
히 아무것도 모르겠다.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도망치던 미쉘의 마지막 모습은 그 어
떤 기억보다도 강렬하게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었다. 그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 너무도
확연하게 남아있는 탓에 내 마음은 이미 그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객
관성을 상실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딱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이런 식으로 그 녀석과
관계를 끊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쉘이란 존재는 내게 있어서 이미 은밀한 곳에 새겨
진 문신 같은 존재였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고 그렇게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깊이 자
리 잡혀 있는 문신 같은 존재.
미쉘이 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 하나 때문에 그를 잃
고 싶지 않다. 이런 지리멸렬한 상념들만이 내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명확한 감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작업의 초기단계였기에 우리는 아홉시도 채 되지 않아 모임을 끝냈다. 쟈끄의 스튜
디오 밖으로 나와 보니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한 쪽에
잡은 채로 잠시 차양 밑에서 머뭇거렸다. 그냥 맞고 가기에는 제법 굵은 비였다. 돌아가서
쟈끄에게 여분의 우산이라도 빌려야 하나 싶어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였다. 마침 미사가 우
산을 펴들고 나오고 있었다.
“우산 없지? 그럼 같이 가자. 날 태워 주면 뒤에서 우산을 씌워줄게.”
“…그럴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사는 내가 올라타기도 전에 자전거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
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도 곧 안장 위에 올라탔다.
“지노, 오늘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신작 영화 개봉했다더라. 얼마 전에 칸 영화제에서 개
막작으로 쓰였을 때에도 평이 아주 좋았대.”
“그래?”
뒤에서 한 손은 내 허리를 두르고 다른 한손으로는 우산을 가까스로 들고 있던 그녀가 나
긋나긋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나는 빗물로 미끄러워진 거리 위에서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아가며 자전거를 몰았다. 내가 무심하게 대답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나랑 같이 그 영화 심야로 보러 안 갈래? 실은 친구에게 받아둔 심야 티켓이 있
는데 같이 보러 갈 사람이 없거든.”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 적당한 공백을 두고 나서 입술
을 떼었다.
“…뭐, 나라도 괜찮다면. 좋아, 같이 보러 가자.”
“정말?”
“정말.”
“그럼……집에 도착해서 적당히 시간 맞춰서 준비된 쪽에서 먼저 연락하자. 알았지?”
“응.”
그녀는 만족스런 대답을 얻었다는 듯 가녀린 웃음을 새어내면서 다시 우산을 고쳐 잡았
다. 그녀의 데이트신청이 특별히 기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 고민은 줄일 수 있
을 것 같았다. 비오는 날 혼자 집에 남겨져 있는 것보다야 쓸데없는 생각은 덜 할 테니. 게
다가 오늘은 정말이지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날이니까. 그래서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의 제
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뿐이었다.
자전거를 보관소에 넣어두고 기숙사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미사는 이미 약속 준비로 먼
저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반나절 내내 관리실에 앉아 과자부스러기와 함께 축구와 저
질 프로그램만 돌려보는 일이 전부인 관리인 알랭이 관리실 창을 통해 나를 보고는 재빨
리 불러 세웠다.
“이봐, 자네가 지노 장 맞지?”
“…그런데요.”
“누군가가 자네에게 뭔가를 전해달라고 두고 갔는데…어디 보자…….”
알랭은 칠이 벗겨진 철제 서랍을 거칠게 열고 굼뜬 동작으로 뒤적거렸다. 그 느린 동작이
무척이나 감질 난다고 생각할 때 즈음, 그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하나 집어 이름
을 확인하곤 내게 건네주었다. 납작하고 네모진 것이 초록색 종이로 포장된 것이었다.
“전해주고 간 청년이 받고나서 되도록 빨리 열어보라고 했어.”
“…….”
그 말에 나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관리실 창 앞에 서서 그것을 뜯어보았다. 테이프 하
나조차 상처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그 안엔 몇 달 전 딱 한 번 보았던 벤자민의
시디가 들어있었다. 초록빛 포장지 사이에 드러난 뜻밖의 내용물에 당황해서 나는 그 상태
로 몇 번이나 눈을 끔뻑거렸다. 이미 절판 된데다 중고시장에서도 구하기 힘든 벤자민의
시디가 어째서 나에게……? 설마 하며 눈을 재확인했지만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빨
아들이는 듯한 눈동자의 푸른 점. 진짜 벤자민의 시디였다.
그러나 벤자민 시디보다 한층 더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그 시디 자켓 위엔 한눈에 들어
올 만큼 강렬한 글씨체의 사인이었다. 쥴리앙 오르로제Julien Orrosee라고 쓰인 그 서명
은, 그 위에 손을 얹기만 해도 찔릴 것 같이 날카롭고 빠른 서체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
“저…,”
알랭에게 대체 누가 보낸 것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그는 이미 관리실 창을 닫은 채 다시 보
고 있던 축구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반쯤 싸여있던 포장지를
벗겨냈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작게 접힌 쪽지가 툭하고 떨어졌다. 점점 커져만 가는 의구
심은 그 쪽지를 줍는 행위조차 더디게 만들었다.
「학교 앞 ○○카페에서, 올 때까지 기다릴게. -Michel-」
Michel, 의외의 선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쉘이었다. 잘 접어진 쪽지 안엔 그 간결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어색한 상태로 일주일동안 나를 방치시켰던 미쉘은 그렇게 다시 나
를 찾았다.
*
나는 그길로 곧장 쪽지에 적힌 작은 카페로 향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그를
찾기 위해 빠르게 작은 공간 속에 시선을 더듬었다. 내가 찾던 남자는 가장 후미진 곳에 앉
아 깍지를 낀 채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깊게 들이쉰 뒤 담담한 발걸
음으로 그 앞에 섰다.
“……!”
내 인기척에 그는 마치 경련을 일으키듯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얼굴은 어쩐
지 조금 여윈 것 같았다.
“…나와 줘서 고마워.”
어쩐지 안도의 한숨이 섞인 듯한 그 첫마디는 소잡한 카페의 분위기 속에 그대로 무겁게
잠겨버렸다.
“…….”
“…….”
잠시 짧은 인사 뒤에 아무 말이 없던 중에 서버가 왔다. 나는 무덤덤하게 카페 한 잔을 주
문하곤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금요일 밤의 카페는 음악과 사람 목소리가 섞여 흥겨운 분
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즐거운 공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미동 없이 마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내 앞에 놓인 커피의 더운 김이 가라앉을 때 즈음, 나는 결심한
듯 먼저 말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저…’라는 첫마디가 무섭게 그의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
“……뭐?”
“미안, 미안해. 정말 그날 일은 미안했다.”
“……저…잠깐,”
“때려서 마음이 풀린다면 망설이지 말고 패버려. 용서해줄 때까지 맞을게. 그리고 앞으
로 이런 일 절대 멋대로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잠깐만, 미쉘. 멈춰보라고!”
“…….”
흥분한 듯 말이 점점 빨라지는 미쉘을 진정시키려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제야 기계
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던 입술은 순간 멈췄고, 쭉 아래로 시선을 내렸던 미쉘의 유리알 같
은 파란 눈동자는 나의 검은 눈동자와 공중에서 부딪혔다. 가볍게 흘러내린 백금발 사이
로 비치는 그 순수하고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 보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묘한 감정을 촉발
시킨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시선을 돌린 채 그의 단단한 어깨에서 손을 뗐다.
“……미안.”
“…….”
그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사과할 이유가 없는데, 습관이 된 듯 또 빠흐동pardon(미안)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는다. 나는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앞에 놓여있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카페인으로 뇌를 차갑게 각성시키고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 입
을 열었다.
“…이거부터 묻고 싶어.”
“…….”
“너…, 게이…였어?”
“…맞아.”
그는 의외로 순순히 그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게
이였다니, 그럼……
“그럼 지금껏 내게 친절하게 대한 것도…,”
“그런 건 절대 아니야!”
“…….”
“넌…넌 내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
특별한 사람,
“그럼…대체 내게 왜 그런 거야?”
“……그건,”
“말해봐. 왜…, 왜 그런 건데? 그리고 왜 그렇게 저질러 버리곤 말도 없이 도망쳐버린 거
지?”
“…….”
미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이쪽 성향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때때로 취하는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에……조금 혼란스러웠지. …아니, 어쩌면 착각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
만…….”
“…….”
“변명은 하지 않을게. 정말…미안하다. 억지로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려서……”
그는 마지막 ‘미안해’라는 말을 입술사이에서 꾸물거리며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니까…날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
그렇게 연신 저자세로 나오는 그의 앞에서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솔직
히 미쉘이 정말 게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거부감이 든다거나 하
는 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미쉘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에게 지
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앞으론 이런 일 다시는 없는 거야?”
“……응.”
“예전처럼, 그렇게 좋은 친구로 지내는 거지?”
“그래. 예전처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
내가 당돌하게 되묻자 미쉘은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천천히 떨리는 입술
사이로 목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하면 믿어줄 건데?”
그 순진한 입술에 답하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착하고도 도발적이었다.
“…날 어디로든 데려가줄래?”
“……뭐?”
“그동안 줄곧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든. 이번 주말동안 어디로든 데려가줘. 바람이라도 쐬
고 오면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 같아.”
“…….”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떠나고 싶다는 것도, 그렇게 해주면 용서해주겠다는 것도. 어찌됐
건 상황적으로 나는 그때의 일을 우발적이고 단편적인,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마음속에
정리 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생생한 감촉과 감정의 잔류에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 질척한 기억을 잊어버릴 계기를 만들고 싶
었던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모두 없었던 일처럼 깨끗하게 비워 내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내 제안이 갑작스러웠는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 망설이는 듯 가늘게 떨려왔다. 하
지만 미쉘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너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그곳’에 가는 건.”
*
조금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기 위한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함께 카페 밖을 나왔을 땐 이미
비가 그쳐있었다. 미쉘은 내가 기숙사에서 짐을 챙기는 사이에 잠시 집에 잠시 들렀다가
기숙사 앞으로 마중 나오기로 했다. 나는 기숙사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깊이 숨을 들이
켰다. 뭔가 한고비를 적당히 넘어가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일주일 내내 내 신경을 놓지 않
았던 미쉘과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결말지어질 줄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곧 몸을 바삐 움직이며 이틀간 사용할 간단
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짐을 모두 가방에 챙겨 넣은 뒤 이틀간 외박신청을 하러 1층 관리실로 갔다.
“엇, 지노!”
외박신청을 마치고 나오는데 반갑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았다. 미사였다. 그녀는 어
딜 나가려는 듯 핑크빛 원피스로 한껏 멋을 내어 차려입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연신 상글
상글 웃어 보였다.
“네 방에 가보니까 없어서 혹시나 했더니 벌써 내려와 있었구나? 준비 다했어? 근데 무
슨 짐이 그렇게 많아? 영화 보고 그냥 카페에나 들렀다 올 건데.”
“……아,”
나는 그제야 아까 무심결에 했던 미사와의 약속을 떠올라 속으로 ‘아차’하고 탄식했다. 하
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나 갑자기 급한 약속이 생겨서 오늘 보기로 한 영화 보
러 같이 못 갈 것 같은데……”
“……뭐?”
내 궁색한 변명에 그녀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예쁜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정말 많이 놀랐는지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가면처럼 굳어져 버렸다. 나는 그게
너무도 미안해서 그녀의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꼬옥 잡은 채 말했다.
“정말 미안해. 이대로 미룰 수 없는 약속이라…….”
“…….”
“우리 다음 주 중엔 꼭 보자. 그땐 대신 내가 데이트 비용을 전부 지불할게. 식사도 먹고
싶은 거 뭐든 다 사줄게, 응?”
나는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되는대로 말을 지어 뱉으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미
사의 인형 같은 표정은 여전히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게 중요한 약속이면, 됐어. 잘 가.”
“미사, 미…”
그녀는 결국 미안하다고 말을 듣기도 전에 체념한 것 같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지만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위로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난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걸 다시 번복할 용기
도 없었으니까.
밖으로 나와 보니 미쉘은 이미 기숙사 앞에 차를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나는 간단한 짐을
들고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근심서린 한숨을 내뱉는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까 문 앞에서 만난 여자앤 누구야? 예쁘던데. 한국인?”
“아… 미사 우에하라라고, 일본인이야. 이번 영상제 준비 나와 같이 하게 된 친구지.”
“……많이 친한 가봐…? 자주……던데.”
“뭐?”
“…아니, 그냥…….”
미쉘이 알아들을 수 없게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리기에 다시 되묻자,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특별히 친한 건 아니고……. 실은 오늘 널 만나기 전에 같이 영화 보러 가기로 약
속했었거든. 그런데 내가 깜빡하고 얘길 먼저 못해서 걔가 나갈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에
서 약속을 바람맞히게 되어버렸어.”
“그래…?”
“…휴, 내가 잘못한 거긴 하지만 확실히 이래서 여자는 힘들어. 친구일 뿐인데도 약속어
긴 것 때문에 괜히 더 몸을 사리게 되잖아.”
“…….”
지친 듯 탄식을 내뱉는 내 모습을 미쉘은 곁눈질로 슬쩍 보고는 이내 입 모양을 일자로 굳
게 다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갈 곳은 정했어?”
“…음.”
“어딘데?”
“가보면 알아.”
“…뭐야, 치사하게 알려주지도 않겠다는 거야?”
“글쎄, 가보면 안다니까. 오래 걸릴 테니 피곤하면 자. 내일 이른 아침에나 도착할 테니
까.”
“뭐어-? 그렇게나 오래 걸려? 대체 어딘데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 거야?”
“재촉하지 마, 나도 널 놀라게 해줄 수 있게 좀 해달라구.”
“체엣.”
나는 결국 그에게서 도착지를 알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구겨진 빨랫감처럼 의자에 몸을 묻
었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창밖의 가로등의 잔상을 무심하게 세어가다 그대로 눈을 감았
다. 머뭇거림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내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쩐지 갈 곳을 잃
고 허공에 무력한 몸을 던지는 것처럼 쓸쓸하다고 여기면서.
*
살갗을 간질이는 햇살에 눈을 뜨자 크림색 스트라이프무늬의 벽지를 바른 천정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렇게 누운 채로 낯선 천정의 이유를 한참이나 생각하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잠에서 깬 곳은 크림색의 아르누보스타일로 꾸며진 낯선 방이었다. 가구
와 침대, 창틀마저도 비슷한 패턴의 넝쿨무늬로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창밖의 흰 발코니
엔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고 진주 빛 커튼은 미풍에 흔들리며 파란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엔……
“……세상에, 바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을 내뱉고는 창 쪽으로 달려갔다. 창에 손을 댄 채 잠시 밖을 응시하
다 이내 거침없이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러자 에메랄드빛 바다와 새하얀 모래가
내 시력을 앗아갈 정도로 밝게 빛나며 눈앞에 펼쳐졌다.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눈
이 부실 정도로 희고 고와 보이는 모래 위로 새파랗게 뻗어 하늘과 맞닿은 바다.
나는 한동안 하염없이 쭉 뻗어있는 하늘과 바다 사이를 넋을 놓은 채 바라보다가 문득 다
시 기억을 되돌렸다. 어제 미쉘를 만나 화해하고 함께 여행을 온 것 까진 기억이 난다. 하
지만 이곳은 어디일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지중해 연안에 세워진 호텔이나 콘도
인가 생각했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손뜨개로 짠 듯한 가구 덮개라든지 그 위에 놓인
오밀조밀한 액자들은 사람이 살던 냄새를 가득 배고 있었다.
Until I do I'm hoping you will
know what I mean.
I love you…….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당신이 알길 바라면서
그때까지 계속 말할 거예요,
사랑해요…….
테라스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비틀즈의 Michelle이란 노래의 멜로디를 부르고 있었
다. 내가 예전에 미쉘에게 불러주었던 그 노래. 나는 자연스럽게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정원 한 쪽에서 아르누보풍의 하얀 철제식탁 위에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
는 미쉘이 보였다. 즐거운 듯 흥얼거리며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전에 봐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임에도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편안해 보이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 셔츠 소매를 걷은 채 분주히 식탁을 차리고 있는 미쉘의 모습은, 어쩐지 너무나 그 주변
과 꼭 어울리고 익숙해 보였다. 안 그래도 완전 별세상에 떨어져 어쩔 줄 모르고 있던 나
는 미쉘을 찾고는 이내 안심하며 그를 불렀다.
“미쉘!”
미쉘은 부르고 있던 노래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장난기 어린
소년의 부서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손을 흔들며 외쳤다.
“Bonjour, 지노! 칸느에 온 걸 환영해!”
주) 봉쥬르. 낮 인사.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의 다리에 눕고 싶어.
내 몸을 덮고 있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이불,
나를 이 땅으로 짓누르는 중력,
대지의 냄새,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만이,
이 세상에 있는 전부라고 느껴질 테니까.
그 순간이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