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3)

# 05. 피아노 위로 우울하게 비치는 천연의 색

팀이 결성된 지 며칠이 지났고, 교수님과의 면담 날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우리가 만

들 작품의 스토리라던가, 기법 등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간 만나면서 지

속적으로 각자의 아이디어를 내고 발전도 시켜나가 보았지만 마땅하게 마음에 쏙 드는 것

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 역시 딱히 적절한 스토리도 생각나질 않아 그저 다른 친구들의 아이디어를 듣고만 있

었다. 개인과제 발표사건의 파장이 컸는지 그 이후론 수업시간 때에도 더더욱 조심스러웠

다. 그저 전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간단히 느낌을 덧붙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

도록 진척이 없자 쟈끄가 애가 타는지 한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다른 아이디어는 없어? 아무리 우리가 서로 의논해가면서 스토리를 변형시켜나

간다고 해도 기본 뼈대는 누구 하나의 것으로 시작해야 하잖아. 하지만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렇다 할 게 없었어.”

“그거야 팀장인 네가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었기 때문 아니야?”

“지금 네 스토리에 혹평을 놨다고 이러는 거야, 끌로드? 네 스토리는 지나치게 추상적이

라 우리가 손을 대기엔 위험성도 컸어. 자칫하면 이해도 못시키고 스토리도 애매한 게 되

어버린다고. 우린 과제를 하는 거지, 독립영화제 출품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구.”

“내 것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 의견도 다 꼬투리 잡았잖아. 그래도 적어도 네 ‘쟈끄와 콩나

무(잭과 콩나무)’패러디만큼 끔찍한 것도 없었어, 쟈끄.”

“뭐야? 콩을 먹은 쟈끄의 페니스가 끝없이 커져서 사람들이 타고 올라가고, 사람들 덕분

에 그 사실을 알고 하늘에 사는 여자 거인이 쟈끄의 페니스에 반해서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게 뭐가 어때서?”

“그건 네 변태 같은 망상일 뿐이잖아. 상상만으로도 토가 쏠린다.”

“이게 정말!”

“야, 지금이 싸울 때야? 스토리부터 정하자구, 스토리부터! 기존에 있던 것 중 골라서 발

전시켜볼 거야, 아님 좀 더 이야기를 해볼 거야?”

쟈끄와 끌로드가 서로의 작품을 꼬집으며 목소리가 커지자 조제뜨는 더 이상 못 참겠다

는 듯 소리 질렀다. 

“저, 이건 어때?”

그 공백 사이로 미사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어떤 쪽지를 펼치더니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 구겨진 쪽지에서 비치는 글씨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처음엔 알지 못했

다. 다들 미사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당혹스

러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마치자 주변에선 왜 지금까지 그런 스토

리를 꺼내지 않고 있었느냐고 말하며 스토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함께 살을 덧붙여 갔

다. 나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저, 미사.”

“왜?”

“그 이야기……네가 생각해 낸 거야?”

“그건 왜 묻는 거야?”

“저……그러니까,”

“……맞아, 이거 지노의 스토리야. 처음 강의를 들을 때, 네가 문에다 쪽지를 떨어뜨렸더

라고.”

“뭐, 그럼 이게 지노의 아이디어였어? 왜 지금까지 지노가 직접 이야기 하지 않은 거야?”

“그게…… 그 스토리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거라 종이에 휘갈겨 쓰고 잃어버렸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어.”

조제뜨의 질문에 나는 겸연쩍게 대답했다. 나는 정말 그 스토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이다. 미사가 말을 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 이야기를 보고 나서 이번 수업의 프로젝트로 썼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네가 우리 팀에 들어와 직접 이야기 해주길 바랐었고. 그런데 아

무리 기다려도 먼저 얘길 꺼내지 않아서 내가 먼저 이야기 한 거야.”

“오오, 그럼 미사는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지노를 우리 팀으로 끌어들인 거구나. 난 

또 개인적으로……”

“쟈끄, 한 번만 더 입 잘못 놀리면 네가 1학년 스토리텔링 수업 때 겪었던 사건을 누설해

버릴 거야.”

“으악, 미사! 제발 그것만은……!”

“너희들의 의견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지노의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어. 너희들

은 어때?”

미사의 말에 조제뜨가 말했다.

“분량도 조금만 조절하면 괜찮을 것 같고, 이해하기도 쉽고. 난 내러티브가 있는 게 좋거

든. 단순해 보이지만 깊이 있는 내용이라 마음에 들어. 나는 좋아.”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끌로드는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 다듬으면 꽤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아.”

며칠 동안 스토리 정하는 일로 언제나 티격태격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것치고 내 이야기

로 쉽게 결정이 나자 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정말 이걸로 하는 거야? 괜찮겠어?”

라고 되물었다. 내가 그날 썼던 스토리가 작품으로 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생각으로 그 스토리를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쟈끄는 나의 혼란스런 표정과는 상관없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신이 난 듯 외쳤다.

“자, 그럼 이걸로 하는 거지? 그럼 스토리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볼까?”

*

수업을 전부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내가 쓴 스토리가 정

말 이번 과제작품으로 쓰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하루 종일 꿈속에 사는 것만 같았다. 분

명 자전거를 타고 있었지만 마치 구름을 타고 위를 유유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지노-!”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뜻밖에도 미쉘이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얀 클래식스쿠터를 타고서. 나는 놀라서 그대로 자전거를 멈추었다.

“엇, 미쉘? 웬일이야? 여기까지.” 

“……아, 전화하는 걸 깜빡했네. 주말이라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할까 해서.” 

“이건……베스파 맞지! 네 거야? 끝내준다!”

“음주운전엔 차보다 스쿠터가 더 나을 것 같아서. 바람맞으며 드라이브하기도 좋고.”

“으으 얼른 타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 나 한국에 있을 때도 친한 친구가 오토바이 마

니아라서 자주 탔었거든. 내가 직접 몰아 봐도 돼?”

“……탈 줄 알아?”

“아니. 그래도 네가 뒤에서 지도해주면 금방 배울 거 같은데. 사실 뭐 어려운 건 아니잖

아.”

“……지금은 좀 어두워져가니까 위험해서 안 될 것 같은데. 정 몰아보고 싶으면 나중에 

시간 내서 따로 연습해보자. 안될까?” 

  미쉘은 말없이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낮이 긴 빠리에서 해

가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뭔가 지금 타

게 해줄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안 될 거야 없지. 나중에 꼭 가져와야 돼?”

“알았어. 어쨌든 일단 같이 술 마시러 가주면 내 뒤에 태워서 데려가고 돌아갈 때에도 집

까지 모셔다 줄게. 어때? 시간 괜찮아?”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오늘 술 한 잔 하고 싶었거든. 곧 준비해서 나올 테니 조금만 기

다려.”

샹젤리제거리에서 그를 우연치 않게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의 일은 아마 영원히 물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와 나 사이에서 그 이상한 복장이라던

가,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은 행동에 대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금제언어가 되어 있었기 때

문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그만 두자.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전거를 세워두

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간단히 지갑과 열쇠만 주머니에 넣고 관리실에 외박신청을 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미쉘은 기숙사 앞에서 베스파에 앉은 채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

다.

“미안, 조금 늦었지? 자정 넘기고 올지도 몰라서 절차 밟고 오느라.”

“괜찮아. 자, 여기 헬멧.”

“Merci(고마워), 자 그럼 한 번 타볼까?”

나는 그의 허리춤을 잡고 뒤에 올라탔다. 미쉘은 기분이 좋은지 “꽉 잡아, 스쿠터사상 최

단신기록을 경신해주겠어!”라고 외쳤고, 나는 “달려라, 미쉐르!”하며 맞장구쳤다. 때때로 

튀어나오는 미쉘의 어린애 같은 모습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했다. 그래서 나도 그가 나로 

인해 즐거웠으면 하고 바랐다. 오늘 있었던 스토리건 때문인지, 갑작스런 미쉘과 베스파

의 등장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웃음이 계속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우리는 바람을 헤치며 스쿠터를 타고, 「르 블뤼 샤Le bleu chat」라는 재즈 바에 도착했

다. 홀은 비교적 넓었고, 내부는 검은색과 파란색으로 모던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 역시 

미쉘의 단골가게인지, 미쉘은 스필만이라는 유태인계 마스터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스필만.”

“오, 미쉘. 정말 깜빡 잊어버릴 뻔 했어. 뭐하다 그렇게 안 나타난 거야?”

“그냥 여러 가지로 바빴어요. 아, 이쪽은 제 친구인 지노 장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나는 스필만이라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스필만은 나를 놀라움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

더니 곧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옥수수 알처럼 단정한 이를 허옇게 드러내어 웃으면서 내 

손을 마주잡았다.

“나야말로 반가워요. 미쉘이 친구를 데려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기념으로 첫 잔은 

내가 사지. 뭘 주문하겠어?”

“칼바도스 있나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바도스를 외쳤다. 소설 「개선문」에서 라비크가 즐겨마시던 

바로 그 사과주를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칼바도스……! 이 동양인 친구, 보기보다 늙은이 같군. 그런 걸 찾다니 말이야. 마침 괜

찮은 물건을 구해 왔는데 잘 됐네. 칸느의 듀딩라비크인데 연대가 오래 된 거거든. 탁월한 

선택이야.”

우리는 스필만 씨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따라주는 칼바도스를 홀짝홀짝 마시며 그간

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에 무척이나 우울해서 네가 센느강에서 노래불러주며 위로해준 날이 있잖아. 사실 그

날 그룹별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수업에서 교수님께 호되게 혼이 나서 그랬던 거였

어.”

“…그랬어?”

“응, 그런데 오늘 그 수업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래, 이젠 좀 괜찮아졌어?”

“우리 팀에서 내가 짠 각본으로 작업하게 되었어.”

“…그게 정말이야? 굉장한데!”

미쉘은 내 말을 듣더니 마치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며 건배를 청했다. 나는 기분 좋

게 잔을 들어 부딪치며 쑥스럽게 웃었다. 

“아마 12월 달 노엘 바캉스 전에 영상제를 열어서 일반인에게도 공개하는 자리가 생길 

것 같아.”

“멋진걸. 내가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네 작품을 보러 갈게. 아니지. 나만 갈 게 아

니라 까트린느와 롤리타에게도 말해서 함께 보러가야겠다.”

“말이라도 고마워.”

“진짜야. 꼭 갈게. 그런데 네가 쓴 각본은 어떤 스토리인데?”

“……그냥, 나중에 와서 직접 봐.”

“후후,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걸.”

나는 그에게 ‘네 덕분에 생각난 아이디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사실을 알고 

내 이야기를 보게 된다면, 그가 조금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가 쓴 주인공 소년은 어딘가 모르게 미쉘과 닮아있었고 미쉘의 입장에선 나에게 그렇게 보

이는 것이 좋을 리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나는 그저 그의 부서지는 웃음

에 마주 웃고 함께 술을 비우면 그만이었다.

공기에 번지는 재즈는 감미로웠고 낮고 조용한 그의 목소리 또한 참 듣기 좋았다. 오랜만

에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아님 스필만 씨의 말대로 정말 좋은 술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처

음 마셔본 칼바도스는 40도를 웃도는 술임에도 그다지 주량이 많지 않은 나조차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잘 넘어갔다. 약간 기분 좋게 취할 때 쯤 나는 조금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미쉘. 너 나랑 같이 개선문 갔을 때 기억나?”

“그럼, 기억나고말고.”

“너 나랑 그때 같이 개선문 주변 골목을 걸어 다녔던 것도 기억나?”

“……기억나.”

“나… 그때 되게 이상한 기분 들었었다. 뭐랄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있던 공간이 현실 

같지 않았어. 마치… 우리 단둘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지. 굳이 표현하자면, …

엄마 자궁 안 같았다고나할까. ……그건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어.”

“…….”

“우리는 단둘이 그곳에 있었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말이야. 손을 잡고, 하나가 된 것

처럼. 함께 의지하며 골목 밖으로, 빛을 향해 걸어 나갔지……. 미쉘,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그리고……, 그리고 빛으로 가득한 골목 밖으로 나오자 세상의 빛은 그 좁은 골목길 사

이로 보였던 빛과는 다른 것으로 퇴색되어버렸지. 그리고 너와 나는 서로 손을 놓아버렸

어.”

“…….”

“근데… 근데 말이야. 그게 꼭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였던 내 일부가, 내 반쪽이 찢겨져 나

가는 기분이었어. 어때…. 이상하지?”

“그래……. 정말 이상한 기분이야. 그건…….”

미쉘은 내 말 끝을 멍청한 표정으로 자꾸 반복했다. 기억을 되짚고 있는 건 나인데, 미쉘

의 눈은 나보다 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속눈썹이 짙게 내려앉아있었다.

“그래…, 역시 이상해……. 그땐 잘 몰랐는데… 나중에 그 느낌을 되새겨보니까 꼭 잃어

버린 형제 같았어. 우린 전생에 둘도 없이 우애 깊은 형제였고… 아님 서로 너무나 사랑하

던 연인사이였다든지……. 이렇게 다시 만난 게 아닐까 상상까지 했었다니까. 웃기지?”

“…….”

“미쉘.”

“……아, 미안. 뭐라고 했어?”

“……뭐야, 나는 나름대로 부끄러운 기억을 고백하고 있는 건데 듣는 척만 하고…, 아무

리 혼자 기분이었다지만 그거 정말 쑥스러운 기분이었단 말이야. 이야기 꺼내기 민망할 정

도로…….”

“…미안.”

“미안하면 대신…음…저기 저 피아노에서 피아노 좀 쳐볼래?”

“……뭐?”

내 짓궂은 요구에, 그의 눈동자는 망설이듯 가늘게 떨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는 아

무렇지 않은 듯 말을 덧붙였다.

“너 작곡과라며. 그럼 피아노도 칠 줄 알 거 아냐?”

“…….”

“한 번 해봐. 정신이 번쩍 깰 정도로 멋지게. 괜찮죠, 스필만?”

“……아, 그래. 어차피 정규 공연은 끝났으니 얼마든지 쳐도 좋아.”

스필만 씨는 처음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내 부탁을 허락해 주었다. 그의 허

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내가 대 한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내 부담스런 

표정에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신청곡 있어?”

“음…… 특별히 없는데. 아, 네가 작곡한 곡을 듣고 싶어.”

“……그건 안 돼.”

“왜 안 되는데?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단 말이야.”

“…….”

“그럼 너 치고 싶은 거 쳐. 아님 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자신 있는 곡이라던가. 딱히 생각

나는 것도 없고, 솔직히 그런 것까지 요구하면 미안하잖아?”

“말은 잘해요.”

“헤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랬다. 확실히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외면에 의한 것처럼 보였지만 후에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에게 끌리는 이유는 눈부시도록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닌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내면의 애달프고 처연한 어떤 것이 내 마음을 갈고리로 채어 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노랗게 빛나는 백열등 아래

의 그는 빛 속에 싸인 채 멈추어 있었고, 그 기다림에 나는 갈증을 느꼈다. 그가 얇은 적막

을 깨고 눈을 떴다. 

“이건……”

그 연주곡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멜로디가 들어본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한참이나 기억을 헤집어 봤지만 이전에 느껴왔던 그것과는 전혀 다

른 것이었다. 그건 마치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왔던 멜로디를 그대로 연주한 것 같았

다. 그 음악은 나와 닮은 것이었으며 이상하게도 벤자민의 음악과도 닮은 것이었다. 벤자

민의 음악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이었는데 가슴에선 벤자민의 음악을 들었을 때와 같은 반

응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진 질투. 나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에 대한 패배 의식도 덧붙여졌다.

어린왕자처럼 금빛 밀밭을 연상시키는 머리칼과 심해를 담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너

무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렇다. 미쉘은 아름다웠다. 언제든 아름다운 사람이었

지만 피아노 앞에서의 미쉘은 특히나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나려고까지 했

다. 나로선 도저히 가질 수 없는……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천연의 광채였기에. 하

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상해.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이런 기분. 나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거침없이 타오르면서도 한쪽에선 끝없이 침잠하고 있는 감정의 딜레마. 그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에 애가 타 잘못하면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를 향해 ‘위험

하다’고 외쳤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얄궂게도 실수를 기대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연주는 흔들림은커녕 사람들의 마음

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가 빨아들여 머금은 것엔 당연하다는 듯 내 것도 자리하고 

있었다. 미쉘이 연주를 마치자 갈채가 쏟아졌다. 그 폭풍 같은 환호 속에 앙코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까지 심취되어 앙코르를 외쳤다. 미쉘은 일어섰던 의자에서 다시 앉았

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더니 이내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건 아는 곡이다. 내가 좋아하는 곡. 나는 그 제목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잠겨드는 의식 

속에 그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 경쾌하고 기분 좋은 멜로디가 그의 손가락에서 빚어져 

공기에 퍼졌다. 그 소리는 실내의 알코올냄새에 녹아내리며 내 마음속에 자리한 어떤 본능

을 각성시켰다. 술에 취했는지, 그의 음악에 취했는지 나는 언제부턴가 정신을 잃고 그대

로 잠이 들어버렸다.

“…노, 지노.”

“으응…….”

온몸이 천근만근 늘어지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자꾸 흔들었다. 짜증이 섞인 신음을 내

며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미쉘이었다.

“뭐야, 너. 연주하라고 시켜놓고 잠들어 버리다니.”

미쉘이 다소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내 등을 어루만지는 손은 무척이

나 다정했다.

“미안,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좀 힘이 드네…. 더워…….”

“…….”

나는 테이블에 올리고 있는 그의 손을 쥐어 이마에 갖다 댔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온기

가 가득했던 멜로디를 빚어냈던 그 차가운 손은 나의 열병처럼 끓어오르는 마음속의 그 무

언가를 안심시켰다. 내가 그의 손에 열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더운 숨을 내뱉자 등을 쓸

어내리고 있던 미쉘의 반대쪽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 반응에 나는 그의 손을 떼며 희미하

게 웃어 보였다.

“돌아가자…….”

미쉘은 주량이 상당한지 나와 비슷하게 마셨음에도 베스파를 안전하게 몰았고, 난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채 따뜻한 등에 기대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빠리의 야경은 금빛으

로 물들어 넘실거렸다. 그 찬란한 금빛을 보면서도 미쉘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술기운

에 또다시 잠겨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

리고 내 앞에 있는 진짜 황금빛 머리칼을 바라보며 그의 귓가에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곡……처음 듣는 데. 누구지?”

“…….”

미쉘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

고 있었다. 그 어색한 공기는 미쉘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제목은?”

“……미라쥬Mirage.”

미쉘은 가까스로 대답을 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어째선지 후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네가 들은 것은 모두 신기루다. 오늘 네가 본 것은 모두 신기루야. 그러니까 잊어. 

전부 다 잊어버려.”

“…….”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주문 같은 그의 말에, 나는 그대로 그 기묘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 봉인시켰다. 언젠가 중

요한 것을 알 수 있을 거란 기대감과 함께. 그리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을 지키

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심장소리가 무척이나 다정하다

고 느끼면서.

“…지노, 일어나봐. ……다 도착했어.”

“……으음…….”

나는 결국 어느 샌가 또 잠이 들어 있었나보다. 언제인지 모르게 우리는 익숙한 건물 앞

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무거운 몸을 이끌며 베스파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까 마셨던 알코올이 완전히 몸속에 녹아버렸는지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스

쿠터에서 일어나 발을 내딛다가 그대로 힘이 풀려 쓰러지려고 하던 순간, 미쉘이 재빨리 

일어나 나를 붙잡았다.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하하, 몸이 왜 이러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미쉘은 어쩔 수 없다

는 듯 그대로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갑작스럽게 붕 뜬 몸에 나는 미력하나마 남은 의식으

로 저항했다. 아무리 술기운이라도 같은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안기는 건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야, 지금 뭐 하는…!”

“가만히 있어. 어차피 걷지도 못하면서.” 

“…….”

나는 결국 그에게 그대로 몸을 맡겼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의 내 상태로는 정말 혼자의 

힘으로 3층까지 올라간다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의식조차 희미한 상태였기에 잠시 저항

을 한 것도 술주정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그가 나를 데리고 올라가는 사이에

도 나는 몇 번씩이나 정신을 차렸다가 잃는 것을 반복했다. 미쉘은 열쇠를 찾으려는 듯 내 

주머니 쪽을 더듬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엉덩이 쪽에 손을 짚었다. 그 느낌에 눈을 떴을 때 

그의 성대가 어찌나 긴장되게 오르내리던지 나는 무의식중에도 그것이 신경 쓰였다. 뒷주

머니에 지갑과 함께 열쇠가 꽂혀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한쪽 어깨로 날 들춰 엎었다. 

그리곤 뒷주머니에서 열쇠를 빼내어 겨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미쉘은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감싼 채 침대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곤 떨리

는 손으로 내 안경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나는 얼굴 위를 무겁게 덮고 있던 물건이 사라

지자 그 해방감에 눈을 한 번 꿈틀거렸다. 이젠 침대 위에 안정되게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려놓을 때 밀착되었던 그의 몸은 여전히 내 위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언젠간 알아

서 가겠지 싶어서 그대로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 때문인

지 그 밀착된 몸 사이에선 슬몃하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만이 잠식하고 있는 

공간 속에 짐승 같은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는 것이 아득히 들려왔다. 나는 그런 위기감에

도 무감각해져 만사가 다 귀찮은 듯 몸을 늘어뜨린 채 뒤척였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눈

을 반쯤 뜬 채 갈증에 말라버린 입술을 말아 혀로 적시는 순간이었다.

“……!”

두 개의 맹수 같은 푸른 섬광이 번뜩 빛을 내면서 내 입술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벌어졌

던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을 내뿜는 혀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치열을 훑고, 혀를 뽑아버릴 

듯 거칠게 빨며 입술을 삼켰다. 나는 처음엔 너무도 뜬금없어 그대로 있다가 갑작스럽고 

낯선 느낌에 술기운이 순간 확 달아나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든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밀어내려고 힘을 썼지만, 무력한 저항은 그의 단단한 악력에 그대로 저지되고 말았다. 두 

다리 역시 그의 무릎으로 내리 눌러져 그대로 버둥거릴 뿐이었다. 내가 그의 지배욕을 자

극 한 것인지 그는 더욱더 갈구하듯이 내 입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타액인지 나의 

타액인지 모를 것이 턱을 타고 내려오자 그의 혀가 아깝다는 듯 핥아 올렸다. 한참동안 농

밀한 입맞춤은 계속 되었고, 탐욕에 젖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저항 섞인 신음은 듣기 

민망할 정도로 색스러워서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읏!”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나는 결국 그의 혀를 콱 깨물어버렸다. 심

한 건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한 것이기에 분명 꽤나 아팠을 것이다. 입안에 남겨진 누구

의 것인지 모를 타액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끝도 없이 나를 그대로 삼켜버릴 

것만 같던 그의 입술은 그제야 나의 거부를 자각한 듯 순간적으로 떨어져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와 마주한 눈은 혼돈에 휩싸여 아득했다. 내 손목을 쥔 손바닥에

선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뜨겁고, 격정적이었다. 나는 처음엔 

그가 동작을 멈춘 것을 틈타 강하게 저항할 생각이었으나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

는 그에 의해 여전히 손을 결박당한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

르겠으나 눈에선 눈물이 그렁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미쉘의 눈은 내 눈에서 눈물을 발견하

곤 더욱 크게 떠졌다. 달빛에 투명하게 비치던 새파란 눈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미쉘은 자기혐오와 비난이 섞인 눈

으로 천천히 뒤로 내 몸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어린애 같은 눈동자는 

몇 번이나 나와 허공을 불안하게 번갈아 더듬으며 계속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얼마나 힘

을 주었는지 그가 놓은 손목에서 아릿한 감촉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쉘은 그대로 뒤돌아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우정은 질그릇과 같아서 금이 가도 되돌릴 수 있지만,

사랑은 거울과 같아 일단 깨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조시 빌링즈 Josh Bil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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